28. 전직 퀘스트
“어머, 이건…….”
주방에 놓인 냄비 속 야채 스프를 본 카렌이 묵묵히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눈가에 작은 물기가 보이기는 하지만 곧 흐뭇하게 웃으며 그릇에 야채 스프를 듬뿍 떠서 식탁에 놓고는 자리에 앉았다.
“일찍 오실 줄 알았으면 좀 기다렸다가 같이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얘들이 제가 없으면 아무것도 먹지 않거든요.”
엄청 잘 먹던 거 같은데……. 가지고 있던 육포의 반이 사라졌다.
“엄마! 이거, 이거 오뿌아가 만들어 줬어.”
“그렇구나.”
“근데, 이상해. 오뿌아가 해 준 건데 전에 먹던 맛이 아냐.”
“그래? 그럼 엄마도 한번 먹어 볼까?”
그녀가 스프를 한 수저 떠서 입에 넣는다. 그러고는 오물오물하더니 빙그레 미소 지었다.
“엄마는 예전 그 맛인데?”
“웅, 그래?”
엄마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레나다. 아직 그녀의 머리로는 엄마가 하는 말의 깊이를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식사가 끝난 후 아이들이 나가자 난 카렌과 마주 앉았다.
“건강해 보이시네요.”
한눈에 봐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진 카렌이었다. 아니, 단순히 건강이 좋아진 것이 아닌 뭔가 내가 가늠할 수 없는 뭔가가 둘러진 느낌이다. 하긴 예전에 어떤 시청자에게 들었다. 카렌이 거인 추적자라는 위명을 가지고 있으며, 세이온 내에서 궁술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어쩌면 이것이 그녀 본연의 모습이리라.
“그이를 찾으려면 제가 강해져야 하니까요.”
“그이요?”
“아, 애들 아빠요. 케이 님께서 가져오신 대족장의 귀를 통해 혈주술로 애들 아빠가 살아 있다는 걸 알아냈거든요.”
“다행이군요. 그럼 곧 남편분을 찾으러 떠나시나요?”
내 물음에 카렌이 고개를 젓는다.
“그러고는 싶은데 지금 시에서 놀들이 와해되기 전 놀 대족장이 부족에서 쫓겨나 힘을 잃고 지하수로로 숨어든 이유와 놀 부족이 그 대족장을 찾아 지하수로로 숨어들어온 경로를 파헤치는 중이에요. 근본 원인을 알아야 놀들을 지하수로에서 모두 몰아낼 수 있으니 제가 움직일 수가 없죠.”
“토벌대로 인해 부족이 와해된 게 아니었나요?”
“토벌대가 놀 부족을 와해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저들 내부에서 어떤 사건이 터져 대족장이 축출당하고 그 대족장으로 인해 놀 부족이 분열되면서 발생한 틈 덕분이었어요. 아마 대족장이 힘을 잃지 않았다면 토벌대로는 부족했을 거예요.”
“그렇군요.”
뭔가 꽤나 복잡한 스토리가 있는 거 같다. 지하수로에서 시작된 퀘스트가 아직 끝나지 않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오늘 이곳에 찾아온 것은 놀 때문이 아닌 직업 때문이다.
다른 게임에서 직업을 얻는다는 건 유저가 캐릭터를 성장해 나갈 방향으로의 새로운 스킬을 얻는 단순한 절차일 뿐이지만 세이온의 직업은 다르다.
직업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이것이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한 기간 동안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
말 그대로 보유한 스킬을 바탕으로 직업을 얻는 것이다. 게임에 들어와서 좋은 스킬 가지고 몬스터나 잘 때려잡으면 그만 아니냐고 하겠지만 직업이라는 것은 곧 그 유저의 게임 내의 신분과 지위를 나타내는 척도이며 이 지위에 따라 그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사회적인 위상도 결정된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더럽게도 현실성을 추구해 직업이라는 것 자체를 얻기 힘들게 구현해 놨고, 어떤 이들은 레벨 30이 넘도록 직업을 얻지 못한다고도 알려졌다. 위튜브의 어떤 영상에서는 목표 직업을 기사로 했는데 20레벨에 퀘스트를 받아 종자로부터 시작해 기사가 되기까지 무려 40레벨까지 걸렸다고 하더라.
유저에게 최대한의 고생을 강요하는 세이온답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직업을 얻으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얻는 게 많으니까.
단순히 좋은 직업 스킬 문제가 아니다. 신분과 지위가 오르면 뭘 할 수 있겠는가?
바로 권력이 생긴다. 그리고 그 권력이라는 것은 남들과 차별되는 또 다른 힘이다.
‘안 되면 평범한 다른 유저들처럼 용병패나 따러 가야지.’
보통의 많은 유저가 택하는 방식은 용병이 되는 것이었다. 용병이 되어 레벨을 키우고 명성을 쌓으면서 좀 더 좋은 직업으로 갈아타는데, 무과금이나 소과금 유저들은 대부분 이 길을 택한다. 뭐, 나도 카렌에게 바로 직업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우호도를 직접 수치로 확인할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세이온에는 그런 게 없었다. AI에 우호도를 따지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 아닌가. 솔직히 말하면 지금 내가 하려는 행동은 거의 요행을 바라는 수준이었다. 카렌에게서 얻을 수 있는 직업인 ‘레인저’는 수색 정찰이나 매복, 선봉 공격, 색적, 기습 타격 등에 특화된 스킬을 가지며, 가벼운 방어구와 검, 활, 함정에 특화된 클래스였다.
그렇기 때문에 레인저 스트라이더인 카렌에게 레인저에 대해 알아보러 온 것이다. 내가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하고 말을 꺼내려던 찰나 카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케이 님 부탁드릴 것이 있어요.”
“예? 어떤…….”
“사실 지금 애들 아빠에 대한 개인적인 추적은 엄두를 못 내고 있는 형편이에요. 지하수로의 놀도 문제지만 근래 서쪽의 치나 제국 쪽으로부터 넘어오는 불온한 무리들이 있어 도시의 치안이 많이 불안해지고 있거든요. 그런 이유로 저 대신 아이 아빠를 추적해 줄 사람을 찾고 있는데 케이 님이 가장 적격이라고 생각돼요. 케이 님께서 그이의 추적을 맡아 주실 수 있을까요?”
띠링-
뜻밖의 의뢰……. 그러나 그에 대한 의뢰 내용이 메시지로 출력되자 난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전직 퀘스트- 테오 린드스턴의 추적]
-카렌이 자신의 남편 테오 린드스턴의 추적을 의뢰하였다.
-보상: 레인저 직업으로의 전직, 10,000exp, 100골드, 명예 점수 100점
“헛…….”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전직 퀘스트가 떴다.
“하겠습니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카렌이 품을 뒤적이더니 하나의 붉은 호박을 내밀었다.
“이걸 받아 주세요.”
붉은 호박 안쪽에는 작은 자침(磁針) 같은 게 들어 있었는데, 움직일 때마다 자침이 일정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제 남편을 쫓을 수 있는 혈주인데 이걸 통해 추적하시면 될 거예요.”
“알겠습니다.”
아무런 단서 없이 추적을 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붉은 호박을 챙겨 넣으니 카렌이 품에서 한 권의 스킬북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이건 뭔가요?”
“제가 가진 스킬 중 하나를 적어 놓은 것인데 추적하는 데 도움이 되실 거예요.”
뜬금없이 내미는 스킬북에 별 기대 없이 받아 들었지만, 그 스킬북을 확인한 순간 난 나도 모르게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푸른 바람 일족 오러 연공술[희귀 등급][1티어]
-능력치 오러 생성
-오러 공격 시 공격력 100% 증가
-즉사 판정 수치 10% 하락
-모든 피해의 20%를 오러 피해로 전환
무려 전설급보다 얻기 힘들다는 희귀 등급 오러 스킬이다.
오러 스킬은 희귀 등급이라도 전설 등급 일반 스킬과 비슷한 대우를 받는 스킬 종류였는데, 그만큼 위력이 뛰어나고 유틸리티가 높아 어느 포지션에서든 환영받는 스킬이었다.
“잘 쓰겠습니다.”
“남편을 부탁드려요.”
“저만 믿으세요!”
지옥에 있더라도 데려오겠습니다.
* * *
“우웅… 좀 더 놀다 가지.”
“하하, 다음에 또 올게. 카렌 님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내 다리를 붙잡고 칭얼거리는 레나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준 난 카렌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예.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레미도 잘 있어라.”
난 카렌의 옆에 의젓하게 서 있는 레미의 머리도 한번 쓰다듬어 줬다.
“네.”
모두와 작별 인사를 나눈 난 내성을 벗어나 항상 가던 귀환석 근처 카페로 향했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키고는 야외 의자에 앉은 난 카렌에게서 받은 오러 연공술이 적힌 스킬북을 꺼내 들었다.
“배우기 전에 상태창 한번 점검해 볼까?”
[캐릭터 상태창]
이름: 케이
레벨: 20
종족: 인간
직업: 무직
신분: 평민
명예: 230점
능력치
근력: 40 (+5)(+20)
민첩: 25 (+10)(+40)
지능: 25 (+15)(+30)
의지: 35 (+10)(+20)
생명력: 650/650
마나: 700/700
미분배 능력치: 20
저항
화염 저항: 22
빙결 저항: 22
감전 저항: 22
맹독 저항: 22
스킬
1. 스킬이터 [신화급] [2티어]
-진(眞) 광폭화 [2레벨]
-친위대 소환 [1레벨]
-진흙 방패 [1레벨]
2. 뱀파이어릭 오라 [전설급] [1티어]
-근력+10 의지+10
-오라 발동 후 공격 시 생명력 흡수
-30초간 공격력의 50%만큼 생명력으로 흡수하며 흡수당한 상대의 무기력 저주 [1레벨] 부여
-쿨타임 1분
-필요 마나 100
업적
1. 거대 황금쥐 헌터 [희귀 등급]
2. 놀 슬레이어 [희귀 등급]
3. 무결점 레이드 [고급 등급]
-민첩+5 의지+5
4. 정령 헌터 [고급 등급]
-지능 +10
“능력치 아끼기를 잘했네.”
4의 레벨을 올리면서 미분배 능력치를 모았다. 세이온의 장비는 20레벨을 분기점으로 하여 한 단계 뛰어난 성능을 보이는데, 대신 그에 따라 필수 능력치도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능력치 세이브가 필요하다는 공략집을 보고 모았던 것이다. 근데 이제 오러라는 새로운 능력치를 배울 수 있게 되었으니 여기에 전부 몰빵할 참이다.
[푸른 바람 일족 오러 연공술을 획득하였습니다.]
츠츠츳…….
스킬을 습득했다는 알림과 함께 아랫배에서 시작된 상쾌한 바람이 가슴으로 타고 올라와 양팔과 양다리로 뻗어 내려가 휘돌더니 다시금 모여 머리를 기분 좋게 감쌌다.
“좋은데?”
절로 미소가 그려진다. 신체 능력뿐 아니라 오감까지 한 단계 발전한 느낌이랄까? 아니, 이건 오감이 아니다. 마치 스파이더맨의 식스센스처럼 보지 않아도 주변이 느껴지는 것 같다.
“이게 기감이라는 건가?”
위튜브에서 본 기억이 있다. 오러 능력치를 가진 유저가 없는 유저와 차별화되는 이유 중 하나가 기감이라는 것인데, 주위의 마나와 관련된 정보들이 말 그대로 기를 느끼는 것처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응?”
그때였다. 내 곁으로 다가오는 적대적인 기운 하나를 느낀 것은…….
쿡-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허리춤을 찔러오는 날카로운 한 자루의 단검이 있다.
그리고 경멸의 망토 위를 지그시 누른 단검의 주인이 내게 속삭였다.
“빌어먹을 놈, 드디어 잡았다.”
“뭐냐?”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차가운 비아냥거림뿐이다.
“빵즈 새끼야, 넌 물을 권리 따위는 없어.”
처처척…….
로브를 둘러 입은 셋이 내 주위를 둘러쌌다.
“얌전히 따라와라. 당장 죽기 싫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