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보스 스킬 쓴다-33화 (33/154)

33. 천만 원짜리 의뢰

“더 없으신가요?”

물었지만 대답이 없다.

“음, 더 없으면 방 깹니다.”

-와…….

-워…….

-우리가 지금까지 본 게 뭡니까?

-개학살극이요.

-지금 몇 연승이심?

-29연승이요. 한 번 더 이기시면 플레티넘 졸업이십니다.

-레알 20레벨대의 악몽이시네.

-얼른! 25레벨대로 넘어가 버려라!

-대체 언제까지 휘젓고 다닐 거야!

“마스터만 찍고 마무리할게요.”

-와… 나 20레벨 구간 마스터 찍는데 2주는 걸린 것 같은데…….

-하… 30연승하면 하루 만에 마스터도 찍는구나.

-연승할 때마다 누적이기도 하고 20렙 투기장은 점수 구간이 짧잖아요.

-누가 그걸 모름. 난 케이 님 같은 괴물 만나면 의욕 떨어져서 게임 접을 듯…….

시청자들의 채팅이 악담인지 저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슬 피곤하다. 투기장 창에 보이는 아무나 하나 찍어 마침내 30연승을 하자 기분 좋은 메시지들이 주르륵 올라왔다.

[업적 투기장의 무법자 [희귀 등급]을 획득하셨습니다.]

-PVP 시 공격력 3% 상승

-PVP 시 방어력 3% 상승

[마스터 달성!]

-공격력 5% 상승

마스터 계급으로 오름과 동시에 투기장의 업적을 얻었다.

-30연승 축하드립니다.

-30연승 하셨으니 투기장의 무법자 업적 얻으셨겠네.

-흑흑… 내가 무법자 업적을 따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보게 될 줄이야.

30연승, 얼핏 보면 쉬울 것 같지만 이건 꽤나 얻기 어려운 업적이었다. 당연히 30번 싸우는 동안 단 한 번도 지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깔리는데 낚시꾼이라는 함정 카드들을 다 피한다고 해도 30번을 승리하는 동안 이빨을 숨긴 채 장난감을 기다리는 핵고래들도 피해야 한다는 소리니까.

-그것도 아무하고나 붙어서 딴 게 아니라 거의 다 낚시꾼들만 족쳐서 딴 거잖아요.

-그렇죠!

-50연승이 투기장의 제왕이죠? 100연승은 뭐예요?

-100연승은 투기장의 신이요.

-그럼 이대로 100연승각?

-ㅋㅋㅋㅋㅋ그건 좀 에바참치…….

-왜요? 케이 님이라면 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개인전 투기장 이용권 구매 불가 떴네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더 보고 싶은데…….

-고생하셨습니다.

-마스터 등급까지 초토화시키고 올라오셨네요. 즐찾 박았습니다.

-내일도 30연승 이어서 하시나요?

“내일은 모르겠네요. 그냥 기본으로 주는 것만 다 소모할 수도 있고요.”

투기장 이용권은 하루에 10장을 주는데 더 하려면 유료상점에서 구매해야 한다. 골드를 써서 20장을 구매했더니 구매 불가가 떴다.

-단체전은 안 하심? 단체전 무료 이용권은 있으실 거 아님.

“글쎄요. 랜덤 매칭이라 내키지 않네요.”

세이온의 투기장에는 단체전도 존재했는데, 3:3으로 팀으로 싸우는 것이었다. 보통은 랜덤매칭을 이용하지만 잘하는 사람들은 미리 팀을 짜고 단체전을 진행한다.

-왜 내키지 않으신데요?

“저한테 말리신 낚시꾼님들 제가 랜덤 돌린다고 하면 죄다 저격 올 텐데, 같은 팀으로 걸리면 골치 아프잖아요.”

-아하.

-아하아하.

-생각만 해도 지랄맞은 상황이겠네요.

세이온은 같은 편이라도 데미지가 다 들어가기에, 최악의 경우 1:5로 싸워야 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 단체전을 돌릴 이유는 없는 것이다.

따로 노리고 있는 업적도 있는데 그건 단 한 번의 패배도 허용되지 않으니까. 그렇게 내가 게임을 마무리하려 할 때였다.

[한겨뤼 님 10,000원 감사합니다.]

-케이 님. 지금 제가 단체전 중인데 한 명이 멘탈 터져서 나가 버렸거든요. 5전 3승 내기 판인데 두 번 졌습니다. 승리하게 도와주시면 500만 원 쏠게요!

“500만 원이요?”

오백만 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금액에 난 로그아웃을 누르려던 것을 멈췄다. 새로 유입된 시청자인지 후원 기록은 없지만 오백만 원이라는 말에 자꾸 눈이 간다.

아무리 세이온이 불러일으킨 게임 문화 덕분에 과거 법으로 제한되던 100만 원 제한이 사라진 건 사실이지만 오백만 원은 웬만한 초대형 비제이도 받기 힘든 금액이었다.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미션을 건 이들 중 거의 50%는 먹튀해 버렸기에 괜히 고생만 하는 거 아닐까 싶지만, 무려 만 원짜리 후원으로 말을 걸었는데 설마 먹튀할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먼저 확인할 게 있다.

“두 번은 왜 지신 건데요?”

-상대팀이 준프로를 용병으로 데려와서요. 동호회 사람들끼리 가볍게 즐기자고 대회 열었는데 준프로가 나타나서 죄다 학살하고 다니네요. 제가 열 받아서 한 명 탈주한 겸 나도 용병 데려오겠다고 하고 잠시 말미를 얻었는데, 케이 님이라면 저를 도와주실 수 있을 것 같아 부탁 드리는 겁니다.

-ㅋㅋㅋㅋㅋㅋ와 동호회에 준프로 ㅋㅋㅋㅋㅋ 양떼 사이에 늑대 한 마리 풀어 놓은 격이네.

-근데 대체 대회 상품이 뭐길래 승리 수당으로 500만 원 검?

내가 굳이 안 물어봐도 시청자들이 먼저 물어봐 줬다.

-상금이 삼천만 원이에요. 뭐, 사실 삼천만 원보다 자존심 문제지만…….

-예?

-어… 어?

-켁; 동호회 상금이 삼천만 원? 자존심? 금수저들임?

-금수저는 아니고 그냥 소소하게 즐기는 아저씨, 아줌마들입니다.

-아니, 상금 삼천만 원 걸어 놓고 하는 게 무슨…….

채팅창이 들썩거렸다. 뭐 그러든 말든 물을 건 물어야겠지.

“저 근데 한겨뤼 님.”

-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그 정도 규모면 굳이 제가 아니더라도 아프리카에 괜찮은 고수들 많을 텐데 하필 왜 저를 선택하셨죠?”

난 고작 오늘 투기장을 처음 시작한 사람이었다. 30연승으로 마스터 등급을 찍기는 했지만 단체전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초짜 중의 초짜다. 그런 나를 어딜 봐서? 왜?

-그게, 저도 그런 생각으로 아프리카에 왔는데…….

“왔는데요?”

-전에는 저레벨 컨텐츠 비제이 네다섯은 항상 보였는데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죄다 방송을 접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케이 님 때문이네.

-가을 추수하듯 죄다 멘탈 터뜨리면서 올라오셨으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음… 결국은 나 때문이었다. 브론즈에서부터 마스터까지 낚시꾼들만 골라서 죽이다 보니 죄다 방송을 일찍 닫아 버린 탓에 나만 남게 된 것이다. 난 한겨뤼 님에게 귓속말을 열었다.

-한겨뤼 님.

-아, 네.

-금액이 금액이니 만큼 토너먼트 같은데 지금 토너먼트 어디쯤이세요?

-지금 4강전 중입니다. 아… 물론 오백만 원이라는 승리 수당에 상금의 1/N도 포함되지만 모자라는 금액은 제가 사비로 드리겠습니다.

한두 푼이 아닐 텐데 간단히 사비로 충당해 준다는 걸 보면 꽤 큰손이다.

-음, 한마디로 4강만 이겨 드리면 된다는 거죠?

-네.

-결승은요?

-결승은… 이기면 좋겠지만 그건 일찌감치 포기했습니다.

-왜요?

-저쪽 결승에 올라온 팀이 큰 거 열 장씩 쓴 사람들이라 제 팀이 너무 밀려요.

-큰 거면 1억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한마디로 캐릭터와 장비에 10억 정도 쓴 사람이란 뜻이다. 그 정도 되면 탈 스펙이 되는데 아무리 컨트롤이 거지 같아도 캐릭빨 장비빨로 모조리 씹어 먹는다. 그런 사람이 세 명이라면… 흠…….

-할 만한데요?

-예?

-제가 결승까지 이겨 드릴 테니 천만 원 맞춰 주시죠.

-헉…….

* * *

“오늘 방송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에… 단체전도 방송해 주시지.

-우우우… 우리도 응원해 줄 수 있는데.

“저도 그러고 싶은데 한겨뤼 님이 방송은 힘들다고 하시네요.”

-그럼 어쩔 수 없죠.

-ㅠㅠㅠㅠ 나 아무래도 케이 님한테 중독된 듯

[샷다맨 님 10,000원 후원 감사합니다.]

-케이 님 방송 시청자 10명일 때부터 봐왔는데 저는 이렇게 크실 줄 알았어요.

“샷다맨 님 감사합니다.”

시청자들의 덕담을 들으며 방송을 종료한 난 곧장 한겨뤼 님의 초대를 받아 단체전을 치르는 로비로 이동했다.

“와 주셨네요.”

잠시 후 나타난 이들은 예상한 그대로 핵고래의 포스를 줄줄 흘리고 있다.

“제가 한겨뤼입니다.”

“예.”

나를 초대한 한겨뤼 님은 힐러였는데, 척 봐도 전설급으로 보이는 휘황찬란한 지팡이를 들고 있다.

“야스마녀라고 해요.”

딜러로 보이는 여자가 내게 악수를 청했다. 검은 오오라가 피어오르는 범상치 않은 검은색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레벨 20~25가 가지기에는 과도하게 화려한 것들이다. 그때 악수를 하며 내 위아래를 노골적으로 훑은 야스마녀가 인상을 찌푸린다.

“그런데 이 장비로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습니다.”

기분 나쁘기는 하지만 의뢰를 받은 입장에서 보자면 정당한 태클이다.

총잡이를 고용했는데 중화기가 난무하는 전장에 권총 한 자루 가지고 들어온 셈이니까.

그러나 난 진짜 자신 있다. 한겨뤼가 옆에서 거들고 나섰다.

“야스마녀 님. 이분 30연승에 마스터 등급 찍으신 분이에요. 실력은 제가 보장합니다.”

야스마녀는 한겨뤼 님의 말에 조금 놀랍다는 표정이 됐지만 그것뿐이었다.

“아니, 마스터인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그리고 그 30연승도 장비 고만고만한 사람들 상대로 찍은 걸 테고요. 이 사람을 어떻게 믿고 맡겨요.”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아니라 실력빨 장비빨 되는 낚시꾼 족쳐서 딴 건데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왠지 그런 식으로 나를 PR하자니 구차하기 이를 데 없다. 그리고 나 또한 간단하게 나를 증명할 수단이 있다.

“야스마녀 님.”

“네.”

“제 전적을 보시죠.”

같은 팀이 되면 상대에 대한 대략적인 투기장 승률을 볼 수 있다. 내 정보를 확인했는지 야스마녀와 한겨뤼의 눈이 커졌다.

“개인전 30전 30승? 100%? 한 번도 안 졌나요?”

“예. 저는 투기장을 시작하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안 졌습니다.”

“흠… 뭐 놀랍기는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죠? 한 번도 안 졌으니 그만큼 강하다는 건가요? 고작 이걸로?”

“하아…….”

야스마녀의 반응에 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승률을 보여 준 이유는 강하다는 것을 어필한 것이 아니었다. 세이온을 조금만 안다면 내 승률이 뜻하는 것을 금방 캐치해 낼 텐데 아무래도 야스마녀는 모르는 눈치다.

“뭐, 그럼 어쩔 수 없죠. 그렇게 못미더우시면 그만두겠습니다.”

굳이 그것을 구차하게 이해시키면서까지 이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빠지겠다고 선언하려 할 때였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놀라 있던 한겨뤼가 큰 목소리로 야스마녀에게 말했다.

“야스마녀 님! 지금 케이 님은 도전 중이라는 뜻입니다.”

“무슨 도전이요?”

“무패의 제왕 업적 말입니다.”

“무패의 제왕? 그게 뭔데요?”

전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끔뻑거리는 그녀에게 한겨뤼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무패의 제왕이 어떤 업적인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무패의 제왕은 한 캐릭터가 오로지 단 한 번만 도전할 수 있는 업적입니다. 지금까지 획득한 사람은 단 셋뿐이고, 그 획득 조건은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개인전 500연승 단체전 100연승을 달성해야 획득할 수 있어요. 만약에 단 한 번이라도 패배하면 무패의 제왕 업적은 얻을 수 없고요. 케이 님은 자신이 패배할 시 감수해야 할 기회 비용을 말하기 위해 전적을 언급한 겁니다. 맞죠? 케이 님.”

“쩝… 맞습니다.”

내가 노리는 무패의 제왕이라는 업적은 꽤 유명했다. 그 달성 조건이 워낙 극악함을 달리기에 획득한 이가 전 세계적으로 단 세 명뿐이었고 영국의 한 유저가 소셜미디어를 통한 홍보와 길드원들의 도움으로 무패의 제왕 업적을 따고 언론에 공개했을 때 며칠 시끌벅적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그 이후로 무패의 제왕 업적을 딴 사람이 고작 두 명뿐이었다는 것인데, 그 업적이 가진 효과가 워낙 좋아 누군가가 무패의 제왕 업적을 도전한다고 알려지면 유명세를 노리는 사람들이 개떼처럼 달라붙어 그것을 방해했다.

“죄송합니다. 케이 님.”

한겨뤼가 고개 숙여 내게 사과했다. 야스마녀는 사과까지는 아니지만 입을 다문 것을 보면 내가 이번 의뢰에 내건 것의 무게를 어느 정도 아는 눈치다.

“아닙니다. 제 장비가 부실한 건 사실이니까요. 그렇지만 이런 팀케미스트리는 아무리 저라도 질 수 있습니다.”

내가 팀 케미스트리를 꺼내자 한겨뤼와 야스마녀가 입을 다물었다. 하긴 자신들도 이런 어수선한 상태로는 이기기 힘들다는 것을 알겠지.

“그럼 어떻게 할까요?”

한겨뤼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한겨뤼 님. 꼭 이기셔야겠죠?”

“네.”

“야스마녀 님도요.”

“그래요. 이건 자존심이 걸린 일이니까요.”

무지에 대한 자존심도 좀 세워 보라고 진지하게 조언하고 싶지만 일단 그들의 마음가짐을 확인한 이상 결과는 나와 있다.

“그럼 이제부터 모든 오더는 제가 하겠습니다. 그리고 두 분은 어떤 명령이든 무조건 따라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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