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큰 손? 큰 손!
“자, 잘 쓰겠습니다.”
‘이건 2~3억이 아니잖아!’
거의 준신화급 무기를 처음 만난 나한테 던져 준다니… 돈이 얼마나 많은 거야?
갑자기 야스마녀 님의 머리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다. 첫인상은 기본 상식도 모르는 까칠녀였는데, 정체불명의 존경심까지 들 지경이다. 그리고 자동 반사로 허리가 꺾인다.
내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피식 웃는 야스마녀 님이다.
“동생이 하는 방송도 내일부터 들어줄게.”
“넵.”
큰손 of 큰손이다. 세스 님도 큰손이기는 하지만 얼마짜린지 견적도 나오지 않는 무기를 얻었다. 전설 등급이라는 것도 대단한데, 무려 10강 무기다. 제한 조건이 연공술 보유자라는 단서가 붙으니 아마 소모하는 게 오러 같은데, 마침 나에게는 카렌 씨에게 받은 푸른 바람 일족의 오러 연공술이 있었다.
“나도 서브로 가진 거 하나 줘야 할 거 같네요.”
그때 한겨뤼 님이 다가와 검은빛의 금속 토시를 내밀었다. 엉겁결에 받아 들었는데 이것도 엄청나다.
+3 [블랙 와이번 암가드] [전설 등급]
-블랙 와이번의 가죽으로 만들어졌다.
-방어도 500(+150)
-내구도 192/200
옵션
-마나 +500
-모든 저항 +10
-방패로 사용 가능
“하…….”
억 단위는 아니지만 거의 근접하는 방어구다.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니 피식 웃으며 한겨뤼 님이 말했다.
“방어가 너무 부족하더군요. 방어 면적이 너무 작아서 내가 쓰기에는 불편했는데, 케이 님이라면 잘 쓸 것 같네요.”
“아… 하하, 정말 잘 쓰겠습니다.”
“하하하, 야스마녀 님에 비해서는 좀 작죠?”
“아뇨. 절대 아닙니다.”
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것도 우승 수당으로 받기로 한 천만 원은 껌값으로 만들어 주는 보물이다. 조금 어안이 벙벙할 지경. 이름 있는 비제이나 유명한 여캠들이 회장에게 수백에서 수천만 원씩 후원 받는다지만 지금 내가 받은 건 수억이다.
‘부가세를 얼마나 내야 하나.’
세이온이 전 세계 온라인게임 시장을 독점하게 되면서 게임 후원 관련된 금액 제한법이 사라짐과 동시에 나타난 것이 무형의 재화에 대한 세법이었다. 게임 아이템이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니게 됨에 따라 작업장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탈세의 수단으로 변질되자 이를 막기 위해 전 세계적으로 게임 아이템에 대한 세법이 제정된 것이다. 이만한 금액의 아이템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모르니 나가서 형에게 물어봐야겠다.
그렇게 뜻하지 않은 세금 문제에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한겨뤼 님이 내게 물어왔다.
“그런데 케이 님.”
“예.”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그 소환수들은 왜 안 쓴 겁니까?”
“소환수요? 아, 구씨 삼형제 말씀이시군요. 걔들을 안 꺼낸 건 어차피 꺼내 봤자 그 궁수한테 한 번에 쓸려나갈 거라 안 썼습니다. 게다가 녀석들 꺼내려면 마나 소모가 큰 편이라서요.”
친위대 소환에 필요한 마나는 300이었다. 일반적인 게임 플레이를 할 때야 한번 소환하면 역소환되지 않는 이상 계속 데리고 다닐 수 있으니 상관없지만 투기장에서는 매번 새로 소환해 줘야 하는 게 문제였다. 물론 투기장에서는 죽더라도 재소환 쿨타임이 초기화되니 걱정 없었지만 말이다.
“아하…….”
“뭐, 한겨뤼 님께서 주신 암가드 덕분에 한동안 마나 걱정은 안 하겠네요.”
“하하하, 필요했던 거라니 다행이네요.”
수천만 원에 달하는 장비를 후원해 줬음에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깍듯하다. 씀씀이를 봐서는 한겨뤼 님도 보통 큰손이 아닌 것 같은데, 상류층은 같은 상류층이 아니면 사람 취급도 안 한다는 단순한 선입견인 것 같다.
그때 우리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야스마녀 님이 끼어들었다.
“음? 소환수? 그게 무슨 말이죠?”
“아, 제가 케이 님 방송을 좀 봤는데 싸울 때 소환수들이랑 같이 싸우더라고요. 엄청 잘 싸우기에 처음에는 소환사 쪽이구나 생각했거든요.”
“소환수?”
“예. 잘 싸우는 건 둘째치고 엄청 귀엽습니다.”
“귀여워요? 그럼 얼른 보여 줘 봐! 동생!”
야스마녀가 내게 얼른 소환수를 보여 달라고 채근했다. 뭐 어차피 시간도 많고 단체전 들어가면 마나나 생명력은 다시 채워지니 상관없겠지.
“예. 그럼 보여 드릴게요. 친위대 소환.”
슈욱~
“멍! 컹컹! 크앙!”
내 부름에 구씨 삼형제가 소환되었다. 진돗개를 닮아 깊은 쌍커풀에 매혹적인 속눈썹을 지닌 백구, 황구, 흑구가 짜자잔, 하고 모습을 드러내자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고 있던 야스마녀가 우다다 돌진해서 셋을 와락 끌어안았다.
“꺄악! 너무 귀여워!”
“컹! 컹컹! 크앙!”
야스마녀가 셋을 끌어안은 채 마구 비비적거리자 백구가 나를 쳐다보며 헬프를 바라는 간절한 눈빛을 연신 보냈지만… 난 눈을 질끈 감으며 외면했다.
‘미안하다. 큰손이시다.’
나중에 특식 원 없이 먹여 줄게. 육공양 좀 하거라.
“끼이잉… 끼잉…….”
그러지 마. 진짜 미안해지잖아.
* * *
“승리 수당은 이체로 보내 줄게. 자잘한 세금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말고.”
“고마워요. 형.”
“고맙긴… 오히려 내가 고맙다. 덕분에 난 죽이고 싶은 녀석한테 한 방 크게 먹이고 알짜배기 거래처도 하나 빼앗았으니까. 남는 장사야. 흐흐흐.”
무슨 상상을 하는지 음침하게 웃는 한겨뤼 님이다.
아무튼 대회는 우리 팀의 깔끔한 승리로 끝났다. 결승에 나온 팀은 내 예상대로 장비만 엄청나게 좋으신 분들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누나(야스마녀)와 형(한겨뤼) 버프를 받아 장비를 천상계로 업그레이드한 내 공격을 막아 내지 못했다. 전설급임이 분명한 방어구들이 무 잘리듯 썰리더라.
그리고 한겨뤼 님과는 형 동생을 하기로 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야스마녀 님은 36살이고, 한겨뤼 님은 34살이란다. 내가 20살이라고 하자 야스마녀 님이 뭔지 모를 위험한 눈빛으로 내 위아래를 훑는다. 뭐지.
<케이야. 야스마녀 님 조심해라. 너 찍은 것 같은데…….>
<조심이요? 그… 혹시… 야스마녀 님이 재벌가 3세로 호텔이나 건물 한가득 가지신 돌싱 누나는 아니죠?>
<어라? 야스마녀 님을 알아?>
<끙…….>
만약 이게 소설이라면 이런 상상력 부족 작가 같으니… 하고 욕할 것 같다.
<아뇨. 그냥 그럴 것 같아서요.>
<음, 원래는 이런 거 가르쳐 주면 안 되지만 내가 데려왔으니 말해 주는 거야. 야스마녀 님은 삼황그룹의 재벌3세야…….>
<헉…….>
“케이야. 내일부터 알지?”
“예. 예?”
“아잇! 단체전!”
“아, 네. 해야죠.”
“후후, 기대할게.”
뭘 기대한다는 건지… 누나의 위험한 눈빛이 다시 한번 나를 훑는다.
아무튼, 난 한동안 이 두 분과 단체전을 함께하기로 했다. 그동안 비즈니스용으로 적당히 키워 놓기만 했는데 오늘 나랑 같이 단체전을 해 보고는 너무 재미있다며 싫증날 때까지 같이하자고 제안 받은 것이다.
물론 이건 나한테도 전혀 나쁜 게 아니었다. 접대라면 접대인데 솔직히 말해 피지컬은 떨어지지만 돈지컬이 워낙 무지막지하셔서 웬만한 낚시꾼들도 딜찍누 해 버릴 분들이니까.
“그럼 내일 봬요.”
“앙~ 잘 가~”
“내일 보자.”
둘과 헤어진 난 곧장 게임에서 로그아웃을 했다. 캡슐에서 어기적거리며 기어 나와 멍한 머리를 두들기고 있자니 핸드폰 알람이 울린다.
띠링~
[xx은행 계좌로 20,000,000원 입금되었습니다.]
[승리 수당+상금 1/n 보낸다. 더 보냈다고 나중에 따지지 마.]
“아이고… 한겨뤼 형님. 감사합니다.”
보육원을 나오며 항상 최소한의 자존감은 갖추기로 다짐했지만 그런 내 허리를 공손하게 굽어지게 만드시니 돈은 참 위대한 것이다.
“킁, 아홉 시네.”
형과 광수라는 분이 원래 8시까지 오기로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시간을 오버해 버렸다. 거실로 나가니 혜미 누나와 상도 형 그리고 광수로 추측되는 상도 형보다 어깨 하나는 더 넓을 것 같은 헐크가 소파에 앉아 있다.
“이제 나왔군.”
거대한 그림자가 거실을 뒤덮었다. 천장의 LED등까지 가려 버리는 무지막지한 머리와 어깨다.
‘헐?’
솔직히 말해서 난 광수라는 형이 약간 마르고 소심한 힙합을 사랑하는 아싸의 기운이 펄펄 넘치는 그런 이미지로 생각했다. 고정관념이라면 고정관념이지만 흥신소에서 해커로 일하며 편집을 기똥차게 하니 딱 그 이미지 아닌가.
“게임 잘하더라. 나 이광수다.”
솥뚜껑만 한 손으로 악수를 청하는데 키보드나 마우스보다는 쇠파이프나 각목 같은 게 어울려 보인다. 헐… 악수를 했는데 내 손이 안 보여!
“나정현입니다.”
음, 오늘 유독 절로 공손하게 만드는 분들과 인연을 맺는 것 같다.
“근데 너 늦었다.”
“네. 일이 좀 있어서…….”
짜악!
“악!”
“밥 먹어 시꺄. 너 때문에 우리 다 굶었어.”
“예. 누나.”
혜미 누나의 등판 스매시도 나를 공손하게 만든다.
그런고로 오늘은 무척 얌전해지는 날이다.
* * *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소파에 둘러앉아 난 오늘 벌어들인 금액에 대해 간략하게 말해 줬다.
“얼마 벌었다고?”
“승리 수당으로 받은 건 이천만 원 정도고 장비 받은 건…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한 2~3억 될 거 같아.”
“…헉!”
“켁!”
“허헉…….”
상도 형이 심장을 부여잡고 소파에 쓰러졌다. 혜미 누나도 광수 형도 입을 떡 벌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 돈 자랑 같지만, 아니 쪼금 자랑이 섞였지만 여기 있는 셋은 내가 가장 믿어야 할 사람들이다. 광수 형은 처음 만난 사이지만 상도 형이랑 몇 년을 같이 일했고, 나를 제외하고는 가장 믿을 만하다고 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광수 형이 쓰러진 상도 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 보자. 형님. 우리 계산 좀 다시 해야 할 것 같은데? 막내 아직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맨날 돈 까먹는다고 하지 않았어?”
“어? 어어…….”
“근데 3억이라… 우리 흥신소 일 년 매출이 얼마지.”
“2억 정도지.”
“이것저것 다 빼면 순수입 1억… 근데 막내가 하루에 3억을 버네?”
“장비예요, 장비… 순수하게 돈으로 받은 건 이천 정도밖에 안 되고요”
“정도밖에…….”
“흠흠…….”
“어… 자괴감……. 이천 정도… 이천 벌려면 불륜 영상을 대체 몇 개를 편집해야 하는 거야.”
상도 형과 광수 형이 동시에 좌절 포즈를 취했다. 내가 생각해도 지금 내가 뱉은 말은 좀 오류가 있다. 장비에 비해 싸다고 한 것뿐이지, 이천이면 내가 뼈 빠지게 작업장 알바 하고 받은 돈의 2배다. 그때 둘과는 다르게 침착한 표정의 혜미 누나가 내게 물었다.
“일단 어떻게 그렇게 많이 벌었는지 히스토리를 좀 풀어 봐.”
“그게요. 음…….”
난 형들과 누나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그리고 내 이야기를 모두 들은 셋이 동시에 같은 단어를 내뱉었다.
“하…….”
“허…….”
“하하… 그러니까. 상류층들이 노는 대회에 초대받아서 몸에 몇십억 단위로 떡칠한 사람들을 죄다 썰어 버리고 예쁨을 받아 큰손을 획득했다? 준프로도 하나 껴 있는데?”
“대충 그렇죠?”
“괴물 놈이 복도 타고났네.”
“로또 사 와라.”
“어마무지한 큰손… 하… 시청자 만 단위 비제이도 한 명 모시기 어려운 왕큰손들을 둘이나…….”
“아참, 그 전에 한 분 더 계세요. 세스 님이라고…….”
“셋?”
“예.”
거실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두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데 뭔가 말 걸기가 무섭다.
난 그나마 가장 상태가 좋아 보이는 혜미 누나에게 넌지시 물었다.
“근데 누나, 그 칼 주신 누나가 삼황그룹 3세에… 나이는 36살 정도고, 돌싱이라고 하던데 혹시 생각나는 사람 있어요?”
“삼황그룹… 3세에… 돌싱? 돌싱… 히익!”
“왜 그리 놀래요?”
“5년 전에 할리우드 배우 버나드 힐이랑 결혼했다가 결혼한 지 1년도 안 되어 버나드 힐이 다른 여배우랑 바람나는 바람에 이혼한 삼황그룹 회장 손녀! 성혜나!”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상도 형이 혜미 누나에게 물었다.
“내 이상형이었거든.”
“왜?”
“이혼할 때 위자료로 3,000억 뜯어서…….”
“와…….”
“거기에 삼황그룹 3세라서 삼황그룹이 가진 호텔이랑 리조트는 다 그 돌싱녀 거야.”
“켁…….”
“정현아!”
“예?”
고개를 획 돌려 나를 바라보는 누나의 눈이 불타고 있다.
“너 36살 돌싱녀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