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날먹의 30연승!
저녁 식사를 마치고 캡슐에 들어가 눕는데 혜미 누나가 다가왔다.
“아이템 하나 보내 놨으니까 들어가면 우편 확인해 봐.”
“무슨 아이템이요?”
“너 주려고 엘더리치만 지겹게 레이드하고 다녔는데 그제 운 좋게 먹었어.”
“……?”
“설명하기 귀찮으니까 빨리 들어가. 보고서 너무 놀라지 말고.”
틱틱거리는 혜미 누나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일단 접속해서 우편함을 확인하면 알 일이다. 그렇게 세이온에 접속하자마자 확인한 우편함에서 나온 아이템은 누나의 말대로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황금색과 검은색이 이글거리는 배경의 팔찌…….
“MD템? 헛! 이건!”
MD템이라는 건 몬스터에게만 나오는 장비들을 통칭하는 단어였다.
세이온에는 몬스터에게만 얻을 수 있는 아이템들이 다수 존재했는데, 뽑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아이템과는 다르게 개성 있는 옵션들을 가지고 있어 매우 고가에 거래가 된다. 그러나 내가 진짜 놀란 것은 이 아이템이 워낙 희귀해서 경매장에도 잘 안 뜨는 그런 MD템이라는 것인데, 예전에 아이템을 검색하다가 이것 먹으면 참 좋겠다, 하고 군침 흘렸더랬다.
라이프드레인 팔찌 [희귀 등급]
-스킬 [피의 검]
-소유자의 생명력을 흡수하여 생명력의 2배만큼 증폭시켜 소유자의 공격력으로 전환시킨다.
-지속 시간 10초
-소모 생명력: 초당 10%
-쿨타임: 1분
“이걸? 누나가 직접 먹었다고?”
별다른 옵션 없이 고유 스킬 하나뿐인 팔찌다.
소모한 생명력의 2배에 달하는 공격력을 제공하는 10초짜리 피의 검이라는 버프를 제공하는데 내가 가진 뱀파이어릭 오라, 광폭화에 아주 잘 어울리는 액세서리다.
“고맙네.”
50레벨대 보스인 엘더리치가 아주 희귀하게 드랍하는 MD템인데 나 주려고 계속 레이드 한 모양이다. 기분 좋게 팔찌를 차고 투기장에 접속해 잠시 기다리니 7시가 되어 야스마녀 님과 한겨뤼 님이 들어왔다.
“오셨어요?”
“응. 아참 너 오늘 얼공 방송 했다며? 못 들어가서 미안하다.”
“하하, 아닙니다. 그런데 표정 보니까 좋은 일 있으신 거 같은데…….”
“티났나? 사실 어제 내기에서 이긴 덕분에 오늘 아주 재미있었거든.”
“아, 거래처 내기 하셨다고 했죠?”
“그래. 녀석 아마 지금 엄청나게 깨지고 있을 거다.”
뭐가 그리 좋은지 키득키득 웃는 한겨뤼 님이다.
“누나.”
“응. 케이야.”
나를 편하게 대하던 야스마녀가 오늘따라 좀 이상하다. 어제는 서슴없이 다가와 유혹하듯 눈을 맞추거나 스킨십을 했는데, 오늘은 마치 내숭을 한 겹 두른 느낌 같다.
“아까는 죄송했어요. 혹 제 마음대로 후원을 닫아서 기분 나쁘신 건 아니었죠?”
“아, 아냐.”
“다행이네요. 세스 님이랑 자존심 싸움이 되는 것 같아서 제가 막았어요. 이해하죠?”
“그럼 이해하지. 너무 신경 쓰지 마. 호호호.”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한겨뤼 님이 놀란 눈으로 야스마녀 님을 바라본다.
<케이야.>
<예. 형.>
<혹 오기 전에 무슨 일 있었니? 누님 왜 이러셔?>
<아, 그게…….>
야스마녀 님을 두고 귓속말을 하는 걸 들키면 그다지 기분 좋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난 조금 전 얼공 방송에서 있었던 일을 한겨뤼 님에게 간략하게 설명해 줬다.
<그렇게 된 거예요.>
<헐? 누나가?>
뭔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의 한겨뤼 님이다. 자존심 싸움이 돼서 천만 원 이천만 원 오른 게 그게 그렇게 이상한가?
<형. 일단 시작하죠. 우리끼리 귓속말하면 누나가 기분 상할 것 같은데…….>
<아, 그래.>
뭔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연신 누나와 나를 곁눈질하는 한겨뤼 님이다.
“자, 그럼 이제 단체전 시작하겠습니다. 두 분 준비되셨죠?”
“응.”
“그래.”
* * *
푸아악! 쫘악!
야스마녀 님의 단검이 춤을 춘다. 상대 탱커가 마치 발악하듯 방패를 들이밀지만 그녀의 단검은 뚫지 못해 연신 뒤로 밀렸다.
퍼어억!
“컥!”
그녀의 시원한 돌려차기에 탱커가 주르륵 미끄러져 벽에 처박힌다.
“이게 뭐야!”
힐러인 한겨뤼 님에게 지팡이로 두들겨 맞던 상대 팀 전사가 짜증 섞인 욕설을 내뱉지만 결과가 달라지진 않았다.
쩌억!
“뒤로 뒤로! 뭉쳐!”
상대팀을 지휘하는 힐러가 탱커와 전사에게 물러나라고 소리친다.
고작 힐러의 지팡이질에 전사가 밀리는 상황이지만 그 힐러의 지팡이가 고강화 전설템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깡뎀이 내 듀렌달과 맞먹더라. 상대 힐러를 중심으로 전사와 탱커가 뭉치더니 푸른 방어막이 만들어졌다.
“저것들 또 그러네!”
“방어막 뒤에서 계속 피 채우고 나오니까 끝나지가 않아.”
“저는 죄 없습니다. 20연승은 좀 강한 애들이랑 붙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내가 그랬나? 호호호.”
“그냥 어중이떠중이로 고르지. 끙…….”
“쳇쳇!”
단체전은 유료 상점을 이용하면 하루 최대 20번을 진행할 수 있었다. 19연승을 한 후 야스마녀 님이 좀 강한 애들이랑 붙기를 원하셨고, 난 점수와 장비가 높은 애들을 20연승 상대로 지목했다. 그런데 저것들 만만치 않다.
“확실히 숙련된 파티네요.”
탱커는 데미지를 나눠 받는 링크 스킬을 가지고 있고, 힐러는 상당히 고티어의 광역 회복 스킬을 사용한다. 유일한 딜러인 전사가 탱커와 힐러의 버프를 받아 싸우는데 더럽게 단단하고 더럽게 끈질기다. 지금도 뒤로 후퇴하더니 링크 스킬로 생명력을 주고받으며 회복하고 있다. 저걸 뚫으려면 아주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하겠네.
“흠, 그럼 이제 제가 나설 때네요.”
“아아, 어쩔 수 없네.”
“마무리 지어 줘.”
야스마녀 님과 한겨뤼 님이 고개를 끄덕인다.
“예! 그럼 시작합니다.”
+10 듀렌달이 등장할 시간이다.
* * *
승리!
-투기장 점수 +6
-진(眞) 광폭화가 [3레벨]이 되었습니다.
-진흙 방패가 [2레벨]이 되었습니다.
-뱀파이어릭 오라 [전설급]이 2티어로 상승했습니다.
투기장은 단순히 점수를 높여 업적을 얻거나 투기장 계급으로 능력치 보정만 받는 게 아니었다. 투기장은 몬스터를 사냥할 때보다 스킬의 숙련도가 빠르게 올라가는데, 내가 가진 스킬이터에 소속된 보스 스킬도 이 영향을 받는지 함께 상승을 했다.
투기장에서 나오자 야스마녀 님이 몸을 쭉 펴며 말했다.
“게임이 이렇게 재미있을지 몰랐네. 드디어 20연승이야.”
“저 빼고 두 분만 계셨어도 무난했을 거예요.”
“호호호, 그건 아닌 거 같은데? 너 빠져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저쪽 맥을 끊어 주고 있잖아. 우리가 재미있게 싸우라고 말이야. 정 안 되면 조금 전처럼 한 방에 처리해 버리고.”
“뭐, 부인하지는 못하겠지만 두 분이 워낙 잘 싸우기도 하니까요.”
“아부는…….”
“아부가 아니라 진짜 두 분 다 재능 있으세요.”
나름 실력 있는 이들과 많이 싸워 봤는데 둘은 장비빨을 제외하고서도 상당히 잘 싸우는 편이었다. 물론 어제 만났던 준프로만큼은 아니지만 이들이 게임을 자주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순간순간 대처가 능숙했다.
“뭐, 조금은 이해가 가긴 해. 난 아니지만 누님은 검도 고수에 태권도에 시스테마까지 거의 전문가 수준이니까. 웬만한 남자들은 뼈를 못 추리지.”
“와…….”
검도에 태권도에 시스테마라니… 조금 두려워진다.
내가 무섭다는 듯 슬쩍 야스마녀 님에게서 멀어지자 야스마녀 님이 한겨뤼 님을 향해 고개를 획 돌리는데, 보이지는 않지만 어깨를 움츠리며 시선을 외면하는 한겨뤼 님을 보면 아마 살벌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흠흠, 내가 구해 줘야겠네.
“저기, 그럼 단체전 이용권도 다 썼으니 오늘은 이만하죠.”
“아, 응… 고생했어. 케이야.”
“고생은요. 오늘 재미있었어요. 내일도 이 시간에 같이하는 거죠?”
“그렇지? 아참, 내일도 방송해?”
“방송이요?”
“응.”
눈을 반짝이며 물어보는 야스마녀 님. 그러나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방송은 일주일에 한두 시간만 할 예정이에요. 저는 남캠이 아니라 게임비제이니까요.”
“그렇구나.”
“자, 그럼 내일 보자구.”
“네.”
둘이 사라지고 혼자 남았다.
“후아…….”
이제 해야 할 것은 개인전이다. 쉽지 않은 등급인 마스터…….
개인전 마스터 등급이 되자 상대들이 달라졌다. 이전에는 대부분 그럭저럭 이길 수 있었다. 낚시꾼들만 조심하면 거의 그 등급에 어울리는 실력과 장비의 상대와 싸웠으니까. 그렇지만 상위 티어인 마스터 등급부터는 아이템이나 실력이 상당한 고수들이 포진해 있다고 들었다.
천상계 괴물들이 서식하는 그랜드마스터에 들어가기는 모자라고 마스터에는 차고 넘치는 고수들이 득실거리는 구간. 일종의 헬구간인 이곳에서 30연승을 해야 하는데, 까딱 실수하면 치명타를 연달아 맞고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난 날먹이 가능하지.”
단체전을 치르며 알아낸 사실 하나로 날먹 빌드를 고안했다.
혜미 누나가 준 팔찌 덕분에 고안한 날먹인데, 일종의 버그인지 아니면 누나가 준 팔찌의 피의 검 스킬이 원래 그런 것인지, 투기장 카운터가 시작되면 곧바로 발동이 가능했다. 공교롭게도 카운터가 시작되고 끝나는 게 딱 4초라서 1초만 더하면 절반의 생명력을 흡수한다는 것이다. 실험도 해 봤는데 계산한 데미지가 고스란히 나왔다.
“아주 필살기 수준이지.”
생명력 50% 이하에서 발동하는 일반 광폭화로 1.25배의 공격 속도와 300% 데미지 상승에 피의 검을 이용해 흡수한 50%의 데미지가 두 배 증폭된 100% 데미지가 융합되어 600%가 되고, 마지막으로 듀렌달의 스킬인 어스브레이크가 데미지 증폭 1,000%를 시켜 줘서 총 6,000%의 사기적인 데미지가 완성이 되어 버린다.
마지막 20연승을 할 때 질기게 버티던 탱커, 전사, 힐러 조합을 이것으로 정리해 버렸다. 아마 당한 이들도 어안이 벙벙하리라. 자랑하던 방어막이 한 번에 쪼개지는 것도 모자라 셋을 일 검에 정리해 버렸으니까.
“그럼 슬슬 달려 볼까?”
슈욱!
개인전 창에서 튼실한 갑옷을 입은 탱커를 하나 골라 클릭했고 잠시 후 콜로세움에 상대와 마주 섰다.
[피의 검]
곧바로 피의 검을 켜자 생명력이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한다.
3… 2… 10% …20%
대전 상대는 피식 웃으며 나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아주 여유가 만만하네. 마치 재롱 한번 떨어 보라는 것 같은데.
1… 시작! 30% …40% …50%
[광폭화]
컨버트를 통해 100% 증가된 데미지가 전신을 치달리고 동시에 광폭화가 발동하며 머릿속이 화악 하고 달아올랐다.
“언제까지 웃을 수 있나 보자.”
차아앙!
+10 듀렌달을 뽑으며 전력을 다해 달려 나갔다.
상대의 얼굴이 급격히 가까워진다. 내가 이렇게 무식하게 돌격할 줄은 몰랐는지 살짝 당황하더니 이내 가볍게 웃으며 자신의 방패를 들어 올렸다. 고작 그런 성급한 기습에 자신이 당황하겠냐는 눈빛인데… 방패 너무 믿는 거 아냐?
파앗!
마지막 순간에 가볍게 뛰어오른 난 전력을 다해 듀렌달로 내려 베었다.
[어스 브레이크]
“쪼개져라!”
콰아아아앙!
귀를 찢는 맹렬한 폭음이 터진 후… 방패째로 반으로 쪼개져 버린 탱커의 허망한 눈빛을 마지막으로 나의 승리를 알리는 메시지가 들려왔다. 너무 쉽군.
승리!
“딱 3초… 30연승 금방 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