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몰이사냥
누나의 공략집에 들어가 있는 에보나트 분지는 몇 가지만 극복할 수 있다면 꽤나 효율 넘치는 그런 사냥터였다. 온통 모래와 바위만 가득한 황량한 이 분지의 장점이라면, 생명력은 많지만 느리고 공격력은 약한 놈들이 한 가지로 지겹게 나온다는 것이고. 단점이라면 그 몬스터가 돈 되는 건 그다지 뱉지 않는다는 것과 엄청나게 징그럽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 동네를 주름잡는 대빵에게 잘못 걸리면 그냥 소리 소문 없이 게임아웃 된다는 것이다.
“난 꽤 귀여운데…….”
[일반][그레이트웜][42레벨]
그레이트웜은 대략 3~4m 정도에 주둥이에는 둥근 톱니 이빨이 달린 거대 지렁이였다.
스토리상으로는 분지 중앙에 있는 폐허가 된 흑마법사의 탑에서 끊임없이 그레이트웜이 기어 나온다는 설정인데, 그 모습이 마치 국수 기계에서 우동 사리 뽑는 것 같아서 여자 유저들이 극혐하는 장소 중 하나라고 하더라.
꾸웅… 꾸웅…….
끊임없이 꾸웅거리며 땅을 기어 다니는데, 눈은 없지만 바닥에 진동으로 적을 찾는다고 한다. 한마디로 정신없이 싸우다 보면 주위로 슬금슬금 몰려들어 포위당한다는 거지. 뭐, 나한테는 오히려 고마운 거지만…….
쩌적!
듀렌달로 그레이트웜을 반으로 쪼갰다. 아무리 레벨 42 몬스터라도 +10강 전설 무기는 언제나 진리다. 경험치도 많이 주니 진짜 톱니 이빨만 조심하면 여기보다 좋은 사냥터는 없을 것 같다. 물론 내가 이 정도로 만족할 리는 없겠지.
“얘들아! 슬슬 몰아와!”
“컹! 컹컹!”
내 외침에 주변을 뛰어다니던 구씨 삼형제가 나를 향해 달려왔고, 구씨 삼형제에게 어그로가 끌린 그레이트 웜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기어 오기 시작했다. 대충 따져도 거의 20마리가량은 될 것 같다.
“점프! 점프!”
“왕왕!”
내가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자 구씨 삼형제도 뭐가 좋은지 나를 따라 연신 공중으로 뛰었다. 누가 보면 노는 건가 싶겠지만 진동을 일으켜 좀 더 끌어모으는 거다. 꽤 많은 그레이트웜들이 저들끼리 이리저리 꼬일 정도로 뭉쳤을 때 난 공중으로 뛰어 올랐다.
“수확의 시간이다!”
[뱀파이어릭 오라]
[피의 검]
[진(眞) 광폭화]
[어스 브레이크]
콰콰콰콰쾅!
전방 2m의 반월형 구간에 들어온 모든 그레이트웜이 단숨에 죽어 버렸다. 만 단위가 넘는 데미지의 광역기는 그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쉽네.”
뱀파이어릭 오라 덕분에 절반으로 줄었던 생명력은 다시 쭉 차올랐고, 남은 건 1.25배의 공격 속도와 300% 데미지 증가, 피의 검의 100% 데미지 증가로, 폭발의 범위에서 운 좋게 빠져나간 것들을 정리하는 것이다.
[레벨 업 하였습니다.]
[친위대 소환 스킬이 2레벨로 상승하였습니다.]
“아이고 달다. 쭉쭉 차오르는구나.”
이곳에 도착한 지 고작 2시간 만에 레벨 업을 했다.
큼지막한 바위를 후방에 두고 오목하게 말려 들어오는 지형으로 한 번에 가장 많은 그레이트웜을 쓸어담을 수 있는 명당이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누나의 공략집 덕분이지 뭐…….
본래라면 30렙 정도의 몬스터가 나한테는 적정 수준일 텐데, 터무니없는 스킬과 장비의 시너지 효과로 이곳에서 폭렙을 하고 있다. 난 상태창을 열어 5개의 능력치를 오러에 투자했다.
“근데 다 좋은데 어스브레이크가 오러를 너무 잡아먹네.”
한 번에 10 정도를 잡아먹으니 총 4번 쓸 수 있는데, 회복 속도가 너무 느리다. 물론 연공술 티어가 올라가면 회복 속도도 올라가겠지만 지금으로는 능력치를 투자하는 수밖에 없다.
“고생했다.”
세 개의 육포를 공중으로 획 던지자 그것을 요령 있게 받아먹은 백구, 황구, 흑구가 기분 좋은 표정으로 꼬리를 팔랑팔랑 흔든다.
“헥헥헥…….”
“컹컹!”
“크릉크릉!”
단검질 창질 방패질 다 잘하는 걸 보면 정체성이 놀인데, 하는 짓은 개다. 뭐, 그게 나쁜 건 아니다. 오히려 좋지. 이렇게 좋은 쫄다구 셋이 뒤를 받쳐 주니 든든하기 이를 데 없다. 설명에는 1/5 능력치를 가진 소환수라고 되어 있지만 이건 의외로 많은 가능성을 내포한 단어였다.
“신기한 놈들… 설마 오러까지 가질 줄이야.”
처음에는 몰랐다. 워낙 미미해서 그런 것이었는지 아니면 내가 제대로 관찰을 하지 않은 건지……. 그런데 레벨업 하며 능력치를 오러에 투자하자 셋이 오러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간혹 치명적인 공격을 한 번씩 해 대는데, 절대 일반적으로 낼 수 없는 공격력이다. 말이 통했으면 물어봤을 텐데 아쉽게도 대화는 안 된다.
아무튼 스킬이터가 가진 보스 스킬들도 레벨업을 하는 것을 보면 친위대 소환이라는 스킬이 나중에 어떻게 발전할지 사뭇 궁금해진다.
“그럼 이제 또 달려 볼까?”
“컹컹!”
구씨 삼형제가 신나게 달려 나간 사이 난 죽어 버린 그레이트웜을 파밍하기 시작했다.
[중급 물약 x1]
[그레이트웜의 진액]
[그레이트웜의 이빨]
[그레이트웜의 이빨]
[강화석]
“젠장, 중급 물약이랑 강화석 빼고는 돈 되는 게 없네.”
이빨은 상점에 1쿠퍼에 팔리고, 진액은 연금술에 쓰이는데, 경매장을 보니 올리는 사람도 얼마 없고 사는 사람도 얼마 없다. 그나마 1골드짜리 강화석이랑 중급 물약이라도 없으면 완전 적자나는 사냥터다. 덕분에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아 좋긴 하지만… 지금은 더 큰 문제가 하나 있다.
“왜 혈석의 자침이 빙글빙글 돌고 있냐는 거지.”
분지에 들어서기 전에는 꾸준하게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더니 분지에 들어서자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의미하는 바가 있겠지만 특정 지을 단서가 없기에 일단은 사냥을 진행하고 있을 뿐이다.
“역시 저길 들어가야 하나.”
분지 중앙에 있는 폐허, 흑마법사의 탑 지하던전이 퀘스트 해결의 유력한 후보다.
물론 흑마법사의 탑은 상당한 난이도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흑마법사의 탑은 지하로 이어지는 3층의 던전 구성이었는데, 내부로 들어가면 그레이트웜과 함께 불완전한 키메라라는 녀석들이 뜬다. 그레이트웜이야 많은 숫자가 몰리지만 않으면 상관없지만 불완전한 키메라는 정예 몬스터로 구성하고 있는 각종 몬스터의 조각에 따라 그 능력이 천차만별이라고 되어 있었다. 어떤 녀석은 괴물 같은 힘을 가지고 있고, 또 어떤 녀석은 독을 그리고 어떤 녀석은 원거리 공격을 날리기도 해 파티장이 판단력이 빠르지 않으면 금방 몰살당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보스로 나오는 ‘키메라’는 지랄 같은 패턴 스킬 때문에 기피되는 보스 몬스터 1순위라 파티를 구성하기도 힘들다. 공략 영상 말미에 ‘지랄 맞은 패턴을 공부하기보다는 그냥 패스하는 걸 추천해.’라고 했으니 말 다 한 거 아닌가.
“혼자는… 힘들어.”
던전 공략 영상을 짧게 본 결과 내가 내린 결론은 절대 혼자서는 돌파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몬스터가 까다로운 것도 있고 보스도 지랄 맞지만 더 중요한 건 중간중간 나오는 함정이 다인이 합동하여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은 우선적으로 25레벨 찍은 뒤 파티를 구해 저 흑마법사의 탑으로 들어가야 한다.
“컹! 크릉! 컹컹!”
“오야. 알았다.”
구씨 삼형제의 짖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그레이트웜을 잔뜩 끌고 셋이 신나게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다.
“붓산아이 님은 뭐하고 계시려나.”
파티를 생각하니까 붓산아이가 떠오른다.
예전 헤어질 때 파티와 함께 북쪽으로 간다고 했는데, NPC 백작 둘이 영지전이 나서 용병을 잔뜩 모집 중이라 그곳에 낀다고 했었다. 친구 등록을 열어 보니 비활성화되어 있다. 지역이 다르면 귓속말도 막아 버리는 빌어먹을 헤븐즈게이트의 배려 덕분이다.
“컹컹!”
구씨 삼형제의 짖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주위에 그레이트웜을 모조리 끌고 사방을 휘젓는 중이다.
“잘했어! 이리 와!”
[뱀파이어릭 오라]
[피의 검]
[진(眞) 광폭화]
[어스 브레이크]
콰콰콰콰콰콱!
땅가죽이 찢어지며 다시 수십 마리의 그레이트웜이 죽었다.
구씨 삼형제의 생명력도 꽤 깎여 나간 터라 잠시 쉬게 하고서 그레이트웜의 파밍을 했다.
[그레이트웜의 진액]
[그레이트웜의 이빨]
[부식된 롱소드]
[강화석]
“다음에는 돈 뱉는 인간형 잡아야지. 진짜 적자네, 적자.”
야생형, 마물형 몬스터는 재료를 드랍하고 인간형 몬스터는 골드나 장비를 드랍한다.
투덜거리며 그레이트웜을 파밍하고 있을 때였다.
쿠구구구구구…….
지축에 은은한 울림이 느껴졌다.
보이지도 않고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확실히 땅이 진동한다.
누나가 공략집에 써 놨던 그놈이다. 이 동네 대빵……!
“이리 와!”
난 구씨 삼형제와 함께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잠시 후…….
쿠구구구구궁!
땅을 뚫고 치솟은 것은 거대한 금색의 주둥이였다. 그레이트웜을 수십 배로 확대한 것 같은 그 모습에 난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마치 거대한 자연의 일부분처럼 느껴지는 그것은 웅장한 몸을 떨치며 하늘로 솟구쳤다.
[보스][그레이트웜 킹][50레벨]
지상으로 5m가량 솟구친 그것은 하체를 땅에 박은 채 바닥에 널브러진 그레이트웜의 사체들을 으적으적 게걸스럽게 삼키기 시작했다.
“에보나트 분지의 필드보스…….”
지하수로의 놀대족장처럼 필드 곳곳을 자유롭게 다니며 들쑤시고 다니는 놈이다. 누나의 공략집에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는 한마디는…….
‘자연재해.’
저 빌어먹을 필드보스의 별명이 자연재해인 이유는 간단했다. 만나기도 힘들고, 만나서 재빨리 도망치지 못하면 그대로 잡아먹히니까. 공략집을 읽을 때는 한번 비벼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엄두가 나지 않는다. 저레벨대에서 가장 처음 만나는 초대형 몬스터는 대항심마저 사라지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초대형 몬스터.’
가장 말석을 차지하기는 하지만 저 정도 크기의 몬스터는 초대형으로 분류하며 레이드하기 위해서는 한지역의 패권을 장악한 길드 단위의 공격대가 필요하다고 한다. 아무리 내 순간 단일 딜량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레이트웜 킹을 공략하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하다.
“얼른 처먹고 가라.”
놈은 내가 파밍을 마치지 못한 그레이트웜까지 꿀떡꿀떡 삼켰다. 아까운 것들… 듣기로는 저런 몬스터류를 죽이면 뱃속 어딘가 찌꺼기처럼 뭉쳐 있던 온갖 주인 잃은 장비들을 대량으로 뱉는다는데, 굳이 도전하고 싶지는 않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그레이트웜킹이 땅 속으로 사라졌다.
“간 건가.”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그레이트웜킹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장소로 다가갔다. 바닥이 모래와 흙으로 되어 있어서 그런지 녀석이 나타났던 흔적은 완전히 메꿔진 후다. 킹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레이트웜들이 다시금 슬금슬금 기어 나왔으니까.
“그럼 이제 다시 시작해야지.”
잡을 수 없는 몬스터 따위는 머릿속에서 지우고 지금은 레벨업에 집중한다.
내가 다시금 구씨 삼형제에게 그레이트웜을 몰아오라고 지시하려 할 찰나였다.
킹이 사라진 자리에 뭔가 흐릿하게 빛나는 게 보인다. 안력을 집중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빛이다.
킹이 사라진 자리로 다가간 나는 빛이 나는 물건을 집어 들었다.
[테오 린드스턴의 펜던트]
“염병, 이게 여기서 나오네.”
나도 모르게 인상이 구겨진다. 테오 린드스턴은 카렌의 남편의 이름이었다. 한마디로 내가 지금 가장 신경 쓰고 있는 퀘스트의 단서라는 뜻인데, 문제는 그 단서가 그레이트웜 킹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저걸 잡아 죽여야 하나?”
그레이트웜 킹은 길드 단위로 덤벼야 하는 놈이다.
웬일로 카렌이 손쉽게 직업 퀘스트를 준다 했더니 이런 함정이 있을 줄은 몰랐다.
차라리 흑마법사의 탑 던전을 뺑뺑이 돌고 말지… 젠장.
“일단 레벨 업이나 하자.”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일단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 냈다. 지금은 1차 목표에만 집중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