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악운에 강하다
“뭐냐 너흰?”
“뭐긴, 널 잡으러 오신 저승사자님들이다.”
셋은 적당한 거리를 둔 채 내게 검을 겨눴다.
“저승사자? 무슨 역할노름 하냐?”
“흥, 고작 25레벨 투기장에서 날아다니는 주제에 간이 부었구나.”
투기장을 콕 찝어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짚이는 게 있다. 바로 신조길드. 어제부터 악연을 쌓은 녀석들인데 빨리도 움직였다.
“신조길드니?”
“후후, 잘 아는구나.”
녀석의 주위를 둘러보니 아니나 다를까 몇몇 수상한 움직임이 내 쪽을 주시하고 있다.
이미 진득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다. 어떻게 내 위치를 특정 지었는지가 궁금해진다.
‘피곤하게 됐네.’
소수라면 어떻게 해 보겠는데, 적이 몇인지 알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일단 녹화 버튼을 켠 후 난 짐짓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폈다. 이런 상황에서는 신중하되 기세에서 밀리면 안 된다.
“흠… 나를 용케도 찾았네?”
“흐흐, 네 녀석들 레벨업 구간 동선이야 뻔하지.”
“거길 전부 감시했다는 거야?”
“흥, 우리를 우습게 보지 마라.”
거의 대부분의 우리나라 유저가 포디나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곳을 기점으로 사방으로 흩어지는데, 대략 25레벨에서 40레벨 정도의 사냥터를 기준으로 봤을 때 대략 아홉 군데의 마을을 감시했다는 뜻이 된다.
“대단하네.”
“네, 네놈에게 칭찬받으려고 한 게 아니다.”
“어, 나도 칭찬한 건 아냐.”
“이 자식이!”
“진짜 유치하네. 하긴 투기장 썸네일 보면 수준이 보이긴 하지만…….”
“죽고 싶나?”
“와 봐.”
“이 새끼가…….”
“도발 당하지 마. 멍청한 녀석아.”
가볍게 어그로 끌어 볼까 했는데, 리더로 보이는 녀석이 꽤 신중하다. 1차 작전은 실패.
‘일단 치고 나가야겠네.’
이 녀석들 분명 나보다 한참 높은 레벨들이다.
설상가상으로 주위를 포위한 녀석들을 아홉까지는 파악했는데, 아무래도 더 시간 끌기는 힘들 것 같다. 친위대 소환을 해서 구씨 삼형제를 제물로 바치더라도 여기서는 빼는 게 맞다. 내가 슬슬 피의 검과 친위대 소환을 준비하려 할 때였다.
“돌아서 가라!”
“아, 뭐야?”
한쪽에서 시비가 벌어졌다. 나를 포위하고 있던 녀석들 중 하나가 입구를 지나가려던 세 명의 유저를 가로막자 걸음을 멈춘 셋이 귀찮다는 듯 머리를 긁적인다.
“방해 안 할 테니까 그냥 좀 지나가자.”
“돌아가라고 했지?”
챙!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포위하고 있던 다섯이 셋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서며 무기를 뽑아 든다. 4:3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어 쫓아낼 요량이었던 것 같은데…….
“아, 진짜 우리 바쁘거든? 그냥 좀 가자.”
“더 다가오면 베어 버린다.”
“하, 진짜 피곤하게…….”
“신조길드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경고하겠다. 돌아가라.”
“아, 신조길드인지 신발길드인지 알 바 아니고… 척 보니 중국분들 같은데 그냥 좀 지나갈게. 응? 우리 건드리면 무서운 아저씨들이야.”
“뭐? 신발? 고작 40레벨 대 필드에서 노는 놈들 주제에 감히 우리 신조길드를 무시해?”
챙! 채챙!
신조길드원들이 칼을 뻗었다. 보기에는 그냥 위협만 하려던 것 같은데… 문제는 그것이 셋의 심기를 긁어 버렸다는 것이다.
“무릎 꿇고 사죄해라.”
“무릎?”
“그래. 감히 신조길드를 모욕하다니. 거부하는 순간 네놈들은 여길 살아서 나갈 수 없을 거다.”
타탁! 타타탁!
공중에서 십여 명의 중국 유저들이 검을 뽑으며 너풀너풀 뛰어내렸다. 내 이목에 걸리지 않은 놈들이다. 하… 나 잡으려고 스물이나 왔었어? 사람이 진짜 썩어나나 보네.
채채채챙!
14:3이 되었다.
“꿇어!”
“아, 진짜 간만에 마누라한테 허락 받고 캡슐방 왔는데 별 잡것들이…….”
머리를 벅벅 긁던 사내의 손이 자신의 칼 위에 얹어진다.
“짜증 나게 하고 있어!”
슈우우우우! 콰가가가가각!
그 말을 끝으로 그의 검이 섬광처럼 움직여 상대의 목을 날려 버렸다.
“짱깨가 어디서 꿇으라 마라야.”
“이것들 빵즈 새끼들이다!”
“모두 쳐!”
그들을 포위하고 있던 모든 신조길드가 일제히 칼을 뽑는다.
“어라? 꽤 많네? 야야! 영업2, 3팀 모두 모여라!”
“어? 이 부장님? 영업팀 전부 집합!”
어디 숨어 있었는지 아홉 명의 유저들이 우르르 튀어나와 신조길드와 싸우고 있는 셋에 합류했다.
“감히 우리를 건드려? 다 죽여 버려!”
단순한 길막 시비에서 시작된 시비가 혈전으로 번져 버렸다.
콰콰콱! 쾅쾅!
“간만에 스트레스 좀 풀러 들어왔더니!”
“다 뒈져 버려!”
“짱깨 새끼가 감히 어디서 목소리를 높여!”
“뒈져! 뒈져!”
“와…….”
눈이 돌아가서 거의 광전사 수준으로 날아다니는데, 나도 모르게 감탄이 흘러나온다. 솔직히 말하면 피지컬이 어마어마하게 좋거나 스킬이 강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묘하게 팀웍이 좋다. 1:1의 전투보다는 2:1의 상황만을 차근차근 유도하며 죽여 나가는데, 하루 이틀 손발을 맞춘 이들이 아니다. 게다가 기세마저 압도적이다. 너 한 방, 나 한 방. 허허허허 같이 죽자. 하고 달려드는데 저렇게 덤비면 나도 좀 쫄 거 같다.
그건 그렇고 나도 슬슬 움직여야지. 간만에 얻은 힐링 타임을 빼앗긴 눈물 젖은 아저씨들의 검이 저들을 모조리 도륙 내 버리기 전에 말이다.
[피의 검]
“야.”
“어?”
이 새끼 넋 빠졌네. 이빨도 잘 박히겠다.
[뱀파이어릭 오라]
[진 광폭화]
“가서 전해라.”
“……?”
“위튜브 각 잡아 줘서 고맙다고.”
[어스브레이크]
슉… 콰콰카카카칵!
밑에서 위로 올려 친 듀렌달에서 뻗어진 어스브레이크가 셋을 휘감았다.
“으아악!”
“아악!”
확실한 한 방이 있을 때는 이게 좋다. 셋을 찢어 버린 후 고개를 돌리자 나를 포위하고 있던 녀석들의 당황스런 표정이 보인다. 가볍게 검을 돌리며 슬금슬금 다가가자 한 놈이 외쳤다.
“뭐해! 공격!”
“으아앗!”
그 말을 시작으로 놈들이 덤벼들기 시작했다.
[친위대 소환]
“크아앙! 크앙!”
“가자!”
백구, 황구, 흑구를 앞세워 밀고 들어간다. 흑구의 방패가 상대의 스킬을 막아 낸 순간 아직 현재 진행 중인 광폭화와 피의 검으로 증폭된 어스 브레이크가 다시 한번 폭발했다.
콰가가쾅!
“으악!”
오러가 빠르게 줄어들지만 이전보다는 훨씬 감당할 만하다. 투신전의 전사라는 업적이 주는 50의 오러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줬다.
“이런 미친! 저거 계속 쓸 수 있는 거였어?”
“피해!”
“무슨 딜러가 이런 미친 광역기를 계속 뽑아내!”
“놀 새끼들을 막아!”
세이온은 레벨이 높다고 무조건 강해지는 게임이 아니었다. 물론 레벨이 높으면 능력치가 높아지고 업적도 많아지며, 가장 결정적으로 보유한 스킬의 개수가 많아진다. 그러나 마치 현실 세계에서 싸움을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이 구분되는 것처럼 게임 속에서도 그런 재능의 차이는 그대로 드러난다.
“죽어 버려!”
츠츠츳!
[진흙 방패]
공격 스킬들이 날아와 내 등을 후려쳤다. 뱀파이어릭 오라로 차오르던 생명력이 일순간 쭉 하고 떨어진다. 치명타를 자동 방어해 주는 진흙 방패 덕분에 생명력만 떨어졌지만 더 이상의 공격을 허용하면 위험하다.
‘회피 전용 이동기가 아쉽네.’
그동안에는 회피가 어렵지 않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다수의 유저를 상대로 싸우니 회피 스킬이 마렵다. 그러나 없는 건 없는 거고 지금은 있는 것으로 어떻게든 돌파해야 한다.
[어스 브레이크]
콰콰콰콰쾅!
* * *
“형, 영상 작업 하나만 빨리해 주세요.”
-킁, 지금 바쁜데…….
“위튜브에 메인으로 올릴 만한 녀석이에요.”
-어? 그래? 무슨 일 있었어?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
난 광수 형에게 투기장에서 있었던 일에서부터 마르바트 마을에 있었던 이야기까지 빠짐없이 이야기해 줬다. 편집자라는 건 단순히 영상을 다듬는 작업이 아니다.
촬영을 하는 건 나지만 광수 형은 내 영상을 가공하여 더욱 맛깔스럽게 만들어 주는 스토리 텔러다. 그렇기에 일의 전후 사정을 모두 알고 있어야 좀 더 자연스러운 영상을 만들 수 있다.
-쫌생이 같은 새끼들이네.
“저야 고맙죠. 길드 놈들이 이름 까고 덤벼 줬는데…….”
-그런가?
“예. 어그로 확실하잖아요.”
-쯧, 그런데 괜찮겠냐. 괜히 위튜브에 영상 올리면 그 쫌생이 같은 놈들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데?
“그런 고난을 이겨 내게 된다면 제 가치가 더 올라가겠죠?”
-하긴 그렇지. 알겠다. 근데 그 영상 몇 분짜리냐?
“7분이요.”
-흠, 7분이라… 늘려서 10분 정도로 만들어 줘?
“그건 형 마음대로 해 주시고, 이 영상을 시작으로 나머지 영상들 중에 작업 된 거 전부 올려주세요.”
-알았다.
광수 형에게 조금 전 게임 속에서 있었던 일을 녹화한 영상을 전송한 난 곧바로 다시 게임에 접속했다.
“끝났니?”
조금 전 나와 함께 신조길드를 썰어 대던 이 부장이라는 분이 물었다.
“네.”
“그럼 얼른 올라타. 우리 시간 없다.”
“하하하, 예.”
내가 짐마차에 올라타자 곧 여기저기서 거친 목소리가 터진다.
“출발!”
“출발!”
“빨리! 빨리! 움직여!”
* * *
“20살? 이야~ 내 아들뻘이네!”
내 나이를 들은 이 부장이라는 분이 허허허 하며 웃는다. 아까 전 눈이 돌아가서 단숨에 목을 날린 광전사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기분 좋은 웃음이다.
“주민이가 벌써 스무 살이에요?”
“그래. 임마 넌 나랑 일한 지 몇 년이 됐는데 그걸 까먹냐.”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저 얼마 전에 딸내미가 나이 물어보는데 생각 안 나서 혼났어요.”
“사실 나도 가끔 까먹어.”
“아, 난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허, 박 주임아. 넌 안 그럴 것 같지?”
“크크크크크, 너도 이제 의무방어전이다.”
“조 대리님! 아직 그 정도 아니거든요.”
“크크큭, 아니래.”
유쾌하게 웃고 떠드는 이들은 같은 회사 영업팀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내 세이온 동아리인데, 회사 끝나고 이렇게 한 번씩 세이온 하는 게 낙이라고 했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 빠르게 던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분들을 신조길드 놈들이 건드린 거다.
운도 지지리 없지. 아무튼 신조길드 놈들이 모두 죽거나 도망친 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파티장이신 이 부장님에게 귀가 번뜩 뜨일 만한 정보를 들었다.
“테오 린드스턴? 아아… 지하 3층에 흑마법사 던전 3층 그레이트웜 배양 시설에 붙잡혀 있는 그 녀석 말하는 건가?”
“허… 테오 린드스턴을 아세요?”
“알지. 거기 3층 중간에 문이 하나 있는데, 그걸 열어 주는 게 그 녀석이야. 구출해 주려고 했는데 뭐 자기는 저주에 걸려서 흑마법사를 죽지 않는 한 나가지 못한다고 하더라고. 우리들만으로는 힘들다면서 흑마법사 위치를 말해 주지 않고…….”
“제가 포디나에 카렌 린드스턴이 남편 찾아달라는 퀘스트 가지고 있거든요.”
“오, 그럼 네가 가면 그 녀석 태도가 좀 달라진다는 소린데…….”
“이 부장님, 이거 진보스 출현 퀘스트인 거 같은데요?”
“어? 그러고 보니 진짜네?”
뭐, 대충 이렇게 된 거다. 악운이라면 엄청난 악운인 셈이다. 나를 잡으려던 신조길드 덕분에 만난 사람들이 흑마법사의 탑 레이드 전문 파티고, 거기에 테오 린드스턴에 대해서까지 알고 있을 줄이야.
“펜던트… 그레이트웜 킹이라……. 최악의 경우 흑마법사랑 싸우던 중에 킹이 나타날 수 있다는 거군.”
내가 린드스턴의 펜던트를 그레이트웜 킹에게 얻은 이야기까지 해 주자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쓸던 이 부장님은 곧 회사 내에 있는 모든 세이온 유저들을 끌어모으셨다. 그렇게 모인 인원은 나를 포함해 총 40명. 특별 지원군으로 60레벨대까지 끌어모아 나는 이들과 함께 흑마법사의 탑으로 이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