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공격대 레이드
“오래간만에 공격대 풀파티니까 최대 속도로 달린다! 3팀! 함정 장치방 열쇠지기 클리어 출발!”
“예!”
“2팀! 영접관 카운터 정리해!”
“알겠습니다.”
“우린 탑지기 할아범 털러 간다!”
“옛!”
숙련된 공격대의 움직임은 보기만 해도 눈이 돌아갈 정도로 빠르다.
특히나 그게 회사라는 조직으로 구성된, 거기에 시간에 쫓기는 직장인 공격대라는 건 낭비를 혐오하는 극한의 효율을 지향하기 마련이고, 그런 공격대와 함께한다는 건 까딱 정신을 놓으면 어리바리하게 행동하게 된다.
폐허의 입구를 지키는 키메라들을 해치우자 곰팡이 냄새와 썩은내가 어우러진 던전의 내부로 진입했다. 세 개의 갈림길에 서서 파티장인 이 부장님의 지시에 따라 공격대는 세 팀으로 갈라졌는데, 나는 이 부장님과 함께 정면의 길로 뛰어갔다. 달리는 와중에 이 부장님이 계속해서 내게 브리핑은 해 줬는데, 솔직히 말하면 진짜 투머치토커다.
“탑지기 할아범은 저주를 거는데 방이 좁아서 저주를 피할 길이 없어. 눈 마주쳤는데 탑지기 눈이 붉게 빛나면 곧바로 뒤돌아서 벽에 가서 붙어. 들고 있는 지팡이 끝에서 불이 확 타오르면 방 끝 모서리까지 도망쳐야 된다. 카운터 넷 정도 세면 파이어인페르노 밀고 들어와.”
“예.”
“파밍은 내가 다 맡았으니까 건드리면 안 되고, 녹화도 절대 안 된다고 아까 말했지?”
“네.”
“혹시 뭐 필요한 거 있냐? 따로 챙겨줄게.”
“아니요. 저는 테오 린드스턴만 구해 가면 돼요.”
“흐흐흐, 욕심 없네. 여기서 전설템도 나오는데… 알았어. 내가 알아서 챙겨줄게.”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우리가 오히려 고맙지. 직업 퀘스트에다가 진보스도 얻어탈 수도 있는 건데. 포디나 레인저 스트라이더 카렌 린드스턴 직업 퀘스트라고 했지?”
“예.”
“간만에 포디나 가 보겠네.”
“근데 직업 다 있지 않으신가요? 그리고 가더라도 얻는다는 보장은 없는데…….”
“혹 실패하더라도 카렌이랑 인맥 만들면 수지타산 맞는 장사야. 운 좋게 직업퀘 받으면 갈아타야지. 빌어먹을 나무꾼 직업 이제 지겹다. 아무튼 카렌 친화도 숙련작이 필요하긴 하지만 이렇게 짧은 건 없어. 중간에 끼어든 거긴 하지만, 뭐 신랑 구하는데 한 손 거들었다고 하면 카렌이 고마워서라도 실마리 던져 주겠지.”
머릿속에 진짜 생각 많은 분이다. 부장들은 다 이런가…….
“클리어!”
“좋아. 사람 많으니까 빨라서 좋네.”
대화 몇 마디 나누니 탑지기 할아범이라는 신장 3m 정도의 시체골렘이 클리어되어 있다.
“에이, 쓰레기네. 김 과장, 탑지기 의족 챙겨서 먼저 뛰어!”
“예!”
금세 파밍을 마치고 공격대가 다시금 달린다. 그사이 열쇠지기를 클리어한 3팀이 돌아오고, 영접관 카운터를 정리했다는 2팀이 맞은편에서 기다리고 있다.
들어오는 경험치가 적기는 하지만 나 혼자 들어왔으면 진짜 며칠 개고생해야 할 정도로 흑마법사의 탑은 길고 넓었다. 듣기로는 중간 보스만 20마리가 넘고, 절반이 함정 구간이라 희귀 등급의 함정 간파 스킬이 없으면 그냥 맨몸 헤딩해야 한단다.
물론 극한의 효율이라는 건 가끔 생명력도 걸어야 한다.
“이거 하나 빨고 3분 달린다.”
해독 포션을 복용하고 독가스가 뿜어지는 구간을 일제히 달린다. 해독 포션 빤다고 생명력 안 깎이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 계산한 건지 생명력이 아슬아슬하게 남은 후에야 독가스 구간을 벗어났다.
“이걸로 중간보스 6마리는 건너뛰었다. 독인장 누가 갈래?”
“막내들이랑 제가 가겠습니다.”
“어, 박 대리 다녀와. 나머지는 박 대리 다녀오기 전까지 6구간 뚫는다! 그레이트웜 킹이랑 싸울 수 있으니까 쿨타임 긴 건 쓰지 말고!”
“예!”
시체를 얼기설기 이어 붙여 만든 신장 4미터의 어보미네이션들이 불쌍할 정도로 처참하게 죽어 나간다. 방 하나에 열 마리 정도가 지키고 있는데, 개미떼처럼 달라붙어 해체해 버렸다.
“박 대리가 늦네.”
“막바지랍니다.”
“좋아. 화장실 다녀올 사람 안전지대 깔고 10분 휴식! 나머지는 조련사까지 밀어붙인다!”
사람이 많으니 절반씩 지휘하며 빠르게 던전을 클리어해 나갔다. 늑대를 소환해 부리는 좀비가 찢어지는 동안 화장실 다녀왔던 사람들이 다음 보스방으로 달린다.
“3층 도착! 1시간 31분 54초! 21분 줄였네.”
분명 3층까지 걸리는 시간이 20인 공격대 기준으로 6시간 걸리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걸 1시간 31분으로 끊어 냈다. 인원이 배가 많으니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장담컨데 아무리 인원이 많아도 이보다 빨리 끝낼 수는 없을 것 같다.
거대한 부쳐나이프를 든 요리사와 도살자를 처치하고 배양시설에 도착하자 드디어 내 퀘스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테오 린드스턴과 만날 수 있었다.
“모두 조용! 중요한 퀘스트니까 모두 입 싸물어!”
퀘스트는 NPC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진행되기 때문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이 부장님이 내게 퀘스트를 진행하라고 손짓했다. 내가 한 걸음 나아가자 마치 폐허의 한 부분처럼 쓰러져 있던 사내가 주춤주춤 일어나 내게 걸어왔다.
주름진 푸르댕댕한 피부, 긴 갈색 수염 초점을 잃은 눈빛. 금세라도 죽어 버릴 것 같은 노인의 모습으로… 피 묻은 쇠사슬을 꽁꽁 묶인 그가 내 등에 걸린 카렌의 활을 발견하고는 성큼성큼 다가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너는… 누구지.”
목소리조차 심하게 갈라져 도저히 카렌 씨와 비슷한 나이로는 보이지 않는다.
“카렌 린드스턴 씨의 의뢰로 당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테오 린드스턴.”
“카렌이? 내 아내가 살아 있어?”
“예.”
“다행… 흑… 다행이야.”
눈물이 줄줄 흘리는 것을 보니 지금까지 카렌이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띠링~
[전직 퀘스트- 테오 린드스턴의 추적] [완료]
[전직 퀘스트2- 테오 린드스턴을 구출하라]
-보상: 레인저 직업으로의 전직, 10,000exp, 100골드, 명예 점수 100점
전직 퀘스트의 연계 퀘스트가 떴다.
“그럼, 혹시… 레나는? 레미는? 내 아이들도 만났나?”
“아이들은 카렌 씨와 함께 포디나에 잘 살고 있습니다.”
“그렇군.”
눈물이 짙은 그리움에 뒤섞여 흐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테오 린드스턴이 입을 열었다.
“나는…….”
놀 토벌을 나갔다가 놀 대족장에게 사로잡힌 그는 한동안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흑마법사에게 넘겨진 후였는데, 알고 보니 흑마법사는 놀 대족장에게 저주를 가르쳐 주고 놀 대족장은 흑마법사가 필요로 하는 ‘재료’를 수급해 주는 상부상조 관계였다고 한다. 놀 대족장에게 사로잡힌 그는 탑의 주인인 흑마법사에게 끌려왔는데, 본래는 흑마법사의 재료가 될 운명이지만 마침 흑마법사의 조수가 죽어 그 노릇을 하고 있었다.
“놈은 7서클의 흑마법사일 뿐만 아니라 수많은 키메라를 부하로 두고 있어.”
“꽤 자유로운 것 같은데 빠져나갈 수는 없었던 겁니까?”
내 물음에 그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쇠사슬을 들어 올렸다.
절그럭…….
“이 복종의 쇠사슬은 놈이 아니면 풀 수 없게 되어 있다네. 이 탑을 나서게 되면 그 즉시 날 조여든다네. 아이들 생각에 탈출하다가 이 꼴이 되었지.”
목덜미에 검게 죽은 쇠사슬 모양의 상처가 보인다.
“그렇군요. 그러나 이제 그것도 끝입니다. 저희가 흑마법사를 처단할 테니까요.”
내가 뒤에 서 있는 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나 테오 린드스턴은 고개를 저었다.
“놈이 진정 두려운 이유는 그레이트웜 킹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이네. 놈이 그것을 움직인다면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어. 나는… 나는…….”
생각만으로도 두려운지 어깨를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의 눈에 공포의 빛이 가득하다.
“그래도 나가야죠. 테오. 레나와 레미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레나… 레미…….”
“예. 그리고 카렌 씨는 당신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큰 상처를 입고 얼마 전에야 깨어났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카렌 씨는…….”
난 내가 포디나에서 본 것들을 그에게 말했다. 잠시 테오 린드스턴의 입이 꾹 다물어진다. 그리고 곧이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자네들이 흑마법사를 처단할 수 있도록 돕지. 나를 따라오게.”
띠리링!
[공격대 퀘스트]
고대의 흑마법사 켈드리언을 처단하라.
보상: 업적 [어둠을 깨치는 자 [희귀 등급]] 경험치 20,000exp, 희귀~전설 스킬 뽑기권 x1, 명예 점수 50점
“우왓! 공격대 퀘스트!”
“업적에다가 희귀 전설 뽑기권까지?”
사람들이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같은 공격대 퀘스트라도 보상이 천차만별인데, 업적에 희귀~전설 스킬 뽑기권을 주는 퀘스트는 정말 만나기 힘들다.
“모두 조용! 클리어도 안 했는데 벌써 들뜨면 어떻게 하냐!”
이 부장님이 크게 소리쳐 주위를 환기시켰다.
“자식들아. 세이온 하루 이틀 해? 보상이 좋으면 뭐다?”
“아아, 좆나게 힘들다.”
“그래. 좆나게 힘들다. 그렇다고 빠질 놈은 없겠지만 까딱하면 뒈질 거 같으니까 가진 거 전부 꺼내야 한다. 알겠냐?”
“예!”
“저주 저항템 예비도 챙겨 왔지?”
“예!”
“장비는 최대한 저주 저항 쪽으로 맞추고, 그레이트윔 킹이 페이즈로 나타날 가능성 크니까 딜러진 쪽에서는 최대한 광역기 쏟아내는 걸 염두에 둬라!”
철컹… 쿠쿠쿠쿠쿠…….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딛고 있던 바닥이 천천히 꺼지기 시작했다.
“와, 바닥 전체가 움직이네.”
사람들이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고 있자 큼지막한 조종타 같은 것을 붙잡고 있던 테오가 말했다.
“이 흑마법사의 탑은 과거 고대인들이 그레이트웜을 연구하던 지하비밀 연구 시설이었다네. 지상 위쪽으로는 전부 세월에 부서졌지만 이처럼 지하로는 아직 움직이는 기계장치들이 많이 남아 있지.”
딛고 있는 바닥은 계속해서 지하로 내려갔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간 후에야 마침내 요란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동공 한가운데에 멈췄다.
“따라오게.”
테오가 공격대를 이끌고 도착한 곳은 온갖 기계장치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통로였다.
“이 앞으로 계속 전진하면 흑마법사의 연구실로 연결되어 있다. 내가 장치를 움직여 최대한 놈의 수족들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출입문들을 조작할 테니, 그사이에 놈을 쳐 죽이면 돼.”
테오가 큼지막한 레버를 붙잡고는 나를 바라본다.
[공격대 레이드를 시작하시겠습니까?]
시야 한구석으로 메시지 창 하나가 떠올랐다. 내가 이 부장님을 바라보자 이 부장님이 공격대를 마지막으로 점검한 뒤 내게 말했다.
“준비 끝이다.”
“예.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고대의 흑마법사 켈드리언 레이드가 시작되었습니다.]
* * *
모습을 드러낸 흑마법사의 연구실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외마경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로데스크한 풍경을 자랑했다. 심장의 혈관 같은 것들이 온사방에 가득하고, 대체 재질이 뭔지 의심스러운 진득진득한 액체가 벽과 바닥에 들러붙어 기분이 더럽다.
“쯧, 얼마나 큰 게 나오기에 이렇게 으리으리해.”
이 부장님이 천장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나도 위튜브에서 배웠는데 보스룸의 크기를 보면 대략 상대하게 될 보스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도 이곳은 심하게 컸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제대로 된 레이드는 나도 이번이 처음이네.’
5인파티 놀족장 따위는 그냥 앞동산 소풍처럼 느껴지는 위압감이다. 거기에 이번은 5인이 아니라 무려 40인이다. 솔직히 말해서 초반에는 잘하면 내가 보스 솔킬 딸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도 했다. 솔킬을 따내기만 하면 레이드 보스의 그 엄청난 스킬이 내 것이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지금은 그런 마음보다는 그냥 안 죽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크다.
그리고… 내가, 아니 정확히 말해 내가 속해 있는 공격대가 상대해야 할 보스를 처음 봤을 때 내 머릿속을 싸한 한기가 타고 올랐다.
‘세이온 만만치 않구나.’
“잘 왔다, 버러지들…….”
그 거대한 그레이트웜 킹의 머리 위에 유유히 서서 우리 쪽을 오만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검은 로브의 흑마법사를 본 첫 느낌이란… 진짜 더럽게 세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