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애송이 레인저
바닥의 흔적을 유심히 살피던 레인저가 발자국의 흙을 집어 들더니 맛을 본다. 아마 저게 레인저의 추적 스킬 중 하나인 것 같은데 하는 꼴을 보니 별로 얻고 싶지 않다.
“확실히 서쪽 가도의 흙 맛입니다. 숫자는 총 스물이고 현재 셋으로 찢어졌습니다.”
“아가씨의 발자국은요?”
“없습니다. 흔적을 정교하게 조작해 방향을 추정하기도 힘듭니다.”
그의 말에 길쭉한 장궁을 비켜 맨 카렌 씨가 바닥의 흔적을 손으로 훑는다.
“발자국의 깊이까지 조작했군요. 그나마 북쪽이 가장 유력한데… 어쩔 수 없네요. 우리도 셋으로 찢어집니다. 동쪽은 루카가 지휘하고! 서쪽은 테레스! 북쪽은 제가 지휘합니다.”
“알겠습니다.”
“외곽을 순찰하는 레인저들에게 통신은 날렸겠죠?”
“예! 치나 제국 쪽으로 향하는 숲길로 향하고 있을 겁니다.”
“기사들은? 그쪽에는 누가 나가 있나요?”
“말이 준비되는 대로 타이 녀석이 기사님들을 모시고 가도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좋습니다. 놈들을 잡아 배후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최악의 경우 아가씨를 인질 삼을 수 있으니 모두 추적에 신중을 가하도록 하세요.”
“예!”
“루카는 신입을 잘 챙기도록.”
“맡겨 주십시오.”
난 카렌 씨의 지시에 따라 동쪽 팀에 끼어 어둠에 잠긴 숲속을 뛰었다. 우리 팀의 숫자는 총 셋이었는데, 선두가 루카, 중위가 나, 후위가 만이라는 레인저였다.
“신입! 빨리 안 뛰냐!”
선두를 달리는 루카라는 레인저가 고리눈을 뜨고 내게 외쳤는데, 이게 현실이었으면 일 끝나고 따로 불러서 얼차려라도 줄 기세다. 젠장… 어차피 누가 구하든 상관없는 퀘스트라 뒤에서 설렁설렁 움직이며 느긋하게 구경했는데… 미운 털이 제대로 박힌 모양이다.
잠시 후 깊은 산속에 접어들어 걸음을 멈춘 루카가 말했다.
“흔적이 끊겼어. 인위적이지 않은 걸 보면 마법사가 있는 것 같은데… 골치 아프군. 쯧.”
기척을 지우는 마법을 가진 마법사를 쫓기 위해서는 이쪽에서도 마법사나 아이템이 필요하다. 루카가 혀를 차자 만이 루카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하는 수 없지. 고생 좀 하는 수밖에… 지금부터 각자 흩어져서 찾는다.”
“알겠습니다.”
“케이, 넌 서쪽 방면을 맡아라.”
“예.”
“똑바로 해!”
“알겠습니다.”
굳이 게임에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나.
마음 같아서는 그냥 돌아가서 로그아웃해 버리고 싶은데 잘못 걸렸다가는 직업 자체가 사라질 수 있으니 그건 못하겠고… 젠장, 어디 짱박혀 있어야겠다.
* * *
어둠이 짙게 깔린 숲속 나무들 사이로 교묘하게 몸을 숨긴 세 명의 남녀가 자세를 낮춘 채 살금살금 걷고 있다. 어깨에 커다란 보따리를 짊어진 가죽으로 된 검은 야행복을 걸친 사내가 앞서 걷던 여자에게 말했다.
“어이, 마법사.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천천히 움직여야 하는 거야?”
“대체 몇 번 물어보는 거예요. 우리가 이 숲을 들키지 않고 탈출할 때까지라고요.”
지겹다는 듯 대답하는 마법사의 행동에 사내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빌어먹을! 그냥 빨리 움직이면서 걸리적거리는 건 전부 썰어 버리면 되잖아!”
“이봐요. 지금 당신 어깨에 짊어진 그 영애를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남작에게 전달하지 않으면 퀘스트고 뭐고 다 실패인 거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씨발, 그러니까 빨리 가자고! 나도 이런 짐덩이 매고 있는 거 불편하니까!”
“나도 찬성. 빨리 좀 갑시다.”
레릭의 뒤를 따르는 남자마저 불평하자 그녀는 목까지 튀어나온 욕설을 다시 밀어 넣었다. 자신이 펼쳐둔 광역 교란 마법이 아니라면 이미 골백번은 걸렸을 정도로 조심성이 없는 두 남자를 보니 없던 스트레스도 쌓이는 기분이다.
‘젠장, 이런 퀘스트였으면 끼는 게 아니었는데…….’
그녀가 있던 영지의 주인인 카머슨 남작이 성공하면 가신으로 삼는다는 말에 덜컥 퀘스트를 수락한 게 실수였다. 만약 이것이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적국의 백작가 영애를 납치하는 퀘스트라는 걸 알았다면 친밀도 좀 포기하더라도 단호히 거부했으리라. 그것도 가장 적으로 상대하기 싫은 한국 유저들이 우글거리는 포디나라면 더더욱 말이다.
치나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코라 왕국의 포디나 백작은 포디나를 포함하여 총 세 개의 지역을 다스리고 꽤 거대한 영토를 소유한 이였다. 세 아들과 늦둥이 딸이 있었는데, 그 늦둥이 딸에 대한 사랑이 끔찍해 이번 납치만 성공하면 포디나 백작을 크게 압박할 수 있다는 것. 문제는 이 포디나 백작의 영지를 초기에 많은 한국 유저들이 스타트 지점으로 선택했고, 초보를 벗어난 후에도 마음의 고향 비슷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드세고 강하기로 유명한 한국 유저들이 많은 영지이기에 타국 유저들은 웬만하면 포디나와 엮이는 것을 기피한다. 자칫 잘못 건드리면 아주 겜생이 피곤해지다 못해 망조의 길로 들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곳에 오기 전에는 그녀도 계산이 서 있었다. 영애 납치 작전에 투입된 인원만 무려 20명이었다. 레벨 50대의 유저 10명과 NPC기사 셋 그리고 길잡이를 할 NPC 레인저 일곱으로, 그들만 잘 보조하다가 빠져나올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영애를 보쌈해서 탈출하는 역할의 선두를 맡아 버렸다. 이 빌어먹을 남자들과 함께…….
그때였다. 그녀의 탐지 마법에 누군가 걸려들었다.
<숨어요!>
그녀의 파티 말에 몸을 바짝 숙이는 남자들. 잠시 후 유저 한 명이 수풀 사이에서 나타났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유유자적 걷고 있었는데, 척 봐도 밤 산책 나온 것처럼 느긋해 보인다.
<뭐야? 고작 유저 하나잖아?>
괜히 긴장했다는 듯 레릭이 몸을 반쯤 일으킨다.
<숙여요! 들키려고 작정했어요?>
<빌어먹을, 알았다고!>
팀의 리더는 마법사이기에 레릭은 욕설을 내뱉으며 다시금 자리에 엎드렸다. 그러나 그냥 지나칠 것으로 생각했던 유저가 적당히 튀어나온 바위에 주저앉아 시간을 때우기 시작하자 도둑고양이처럼 이동하는 것에 불만이 쌓여 있던 레릭의 눈이 점차 사납게 일그러졌다.
<염병 저 새끼 소풍 왔나.>
<이상하네요. 여기가 몬스터 젠되는 곳도 아닌데…….>
아무리 봐도 추격자는 아니다. 특히나 입고 있는 갑옷도 허름한 것이 아무리 봐도 30렙도 안 돼 보인다.
<우리 기척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쪼렙 같은데 그냥 죽이고 지나가지?>
<쪼렙이라도 상대는 한국 유저에요. 놓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 줄 몰라서 그래요?>
<그러다가 추격대에 발각되면 그게 더 문제겠지!>
<내가 마법으로 기척을 완전히 감추고 있으니 상관없어요.>
<썩을 나는 못 참겠어!>
레릭이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자 그녀가 그를 붙잡았다.
<이봐요! 지휘권자는 나예요!>
탁!
신경질적으로 그 손을 뿌리치는 레릭.
<흥, 우리가 놈을 순식간에 처리해 버릴 테니 그때부터 전속으로 달리자고!>
<아니, 대체!>
<난 찬성… 흐흐.>
남자들을 말리려 했지만 그들은 이미 그녀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두 남자는 천천히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들었다. 놈과의 거리는 고작해야 30m. 이대로 덮치면 놈은 자신들의 존재조차 모른 채 아웃될 것이다.
<한 방에 깔끔하게 처리한다. 내가 선두로 머리를 쪼개겠어!>
<좋아. 그럼 내가 허리를 맡지.>
파악!
상의를 마친 둘은 총알처럼 달려 나갔다. 바위 위에 한가롭게 앉아 있는 놈의 몸이 급격히 확대된다.
“죽어라.”
[섬망살]
그가 자랑하는 가장 빠른 스킬로 쪼렙 새끼의 대가리를 쪼갰다. 아니, 쪼갰다고 착각하는 순간…….
파팟!
“응?”
베었다고 생각한 순간 놈이 사라졌다. 빠르게 시선을 움직여 목표를 찾은 레릭의 눈이 부릅떠졌다. 놈은 그의 머리 위로 회전하듯 날아올라 검을 뽑아 내는 중이었으니까.
츠컥!
“어?”
레릭은 점차 자신의 시야가 일그러지자 잠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깨닫지 못했다. 회전하며 베어오는 날카로운 검광을 포착하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찰나 게임과의 연결이 끊긴 것처럼 시야가 검게 암전되었다가 회복된 것이다. 그리고 이후로 이상하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바라보려 할 때 그의 반쯤 잘린 머리가 스르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커컥…….”
파팍!
레릭의 머리를 광속으로 베어 버리고는 쓰러지는 몸을 딛고 공중으로 높이 날아오르자 놈의 허리를 베고자 했던 사내는 금방 자세를 고쳐 잡고 자신의 주력 스킬 중 하나인 크레센트 샷을 준비했다. 사정거리가 짧기는 하지만 거대한 반월형의 오러로 피할 공간 자체를 차단하는 차지형 광역 공격 스킬이다.
검을 두 손으로 잡은 그가 내려오는 놈을 노려보며 크레센트 샷을 준비할 때였다.
“뭐지?”
마주 검을 내려칠 것 같던 상대가 갑자기 집게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킨다.
그 이해 못할 행동에 그가 고개를 갸웃했을 때…….
삐이이이잉!
놈의 손가락에서 발사된 엄청난 속도의 붉은 광선이 그의 목을 꿰뚫고 지나가 버렸다.
“크헉…….”
너무나도 빨라 피하고 자시고도 없었다. 그냥 붉은 빛이 번쩍했을 뿐인데 급소인 목이 블랙아웃이 되며 즉사 판정이 떠 버렸다.
“커윽….”
목을 붙잡고 바닥에 무너진다.
타탁…….
바닥에 내려선 남자가 조용히 읊조렸다.
“둘…….”
“어… 어어…….”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여자 마법사는 두 멍청한 남자를 절명시킨 사내의 고개가 돌아가 자신과 눈이 마주친 순간 자신이 준비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공격 마법을 준비했다.
위이잉!
캐스팅조차 필요 없는 매직 미사일! 약하기는 하지만 빠르며 타깃형 스킬이라 절대 빗나가는 일이 없다.
“난 멍청이들처럼 당하지 않아! 매직 미사… 응?”
매직 미사일로 틈을 만들고 그사이 백작 영애를 인질로 삼으려던 마법사는 상대가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리자 매직 미사일이 강제로 취소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실수였다. 차라리 그 매직 미사일을 그대로 발사했다면 아무리 전투 은신으로 몸을 숨겼다 해도 날아오는 매직 미사일을 피하기 위해 공격을 멈췄을 것이다.
파악!
“컥!”
마법사의 머리에 화살 한 대가 솟아났다.
* * *
[영지 퀘스트] [납치당한 소녀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보상: 경험치 5,000 exp, 10골드, 명예 점수 100점
[레벨업 하였습니다.]
내 손에 게임아웃 당하신 셋의 레벨이 얼마나 높았는지 레벨업한 지 반나절 만에 또 레벨업 했다. 뭐, 지금쯤 웬 개쪼렙한테 당했다고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겠지만, 원래 세이온은 살아남은 놈이 강한 놈이다.
기절한 백작 영애가 기사들에게 인계되어 사라지자 나를 반기는 것은 눈에 띄게 호들갑을 떨며 나를 칭찬하는 카렌 씨였다.
“정말 대단해요! 침입자 셋을 혼자 처치하고 백작 영애를 구하다니…….”
“아, 네.”
“대체 어떻게 발견한 거죠?”
“운이 좋았습니다.”
“어머! 운이라뇨! 과한 겸손은 무례함과 다를 바 없어요.”
“아닙니다. 흠흠, 그보다는 저와 함께 움직이신 다른 선배님들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도와준 건 손톱만큼도 없지만 난 루카와 만을 추켜세워 줬다. 내가 짧게 사회생활을 하면서 배운 건데 입으로 하는 것만큼 쉽고 효율적인 건 없더라.
“그렇군요. 루카 씨도 수고하셨어요.”
“흠흠, 저희가 도와준 건 별로 없습니다. 다 이 친구가 그만큼 특별한 것이겠죠.”
아까는 어디 하나 걸려 봐라 하는 눈빛이었으면서 남아도는 덕담 좀 나눠 줬더니 금세 태세 전환을 했다. 뭐, 그렇지만 할 말은 없다. 솔직히 얌전히 짱박혀 있다가 완료되면 나올 요량으로 으슥한 곳을 찾아 쉬었는데, 하필 거기에 놈들이 숨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으니까. 저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운 좋게도 잠시 투덕거린 덕분에 놈들의 기습에 방비할 수 있었다.
아니었으면 정말 뒈졌겠지.
[영지 공헌도가 10 상승했습니다.]
아, 진짜 빨리 이 동네 탈출해야 하는데… 공헌도는 왜 쌓이고 지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