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대회 준비
“어디 더 꺼낼 건 없나?”
“그러게. 너 준비 착실히 해 왔구나?”
“당연하지. 후후후. 이제 네 연승도 끝이다.”
“그런 것 같다. 뭐 아무튼 당첨이네.”
“무슨 말이지?”
“이거 당첨이라고…….”
삐이이이잉!
붉은 광선이 놈의 벌어진 입을 꿰뚫어 버렸다.
2,000/ms의 한계가 존재하지만 애초에 이것을 피할 유저는 세이온 내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나조차도 흑마법사가 손가락으로 나를 짚기에 뭔가를 하는구나 싶어 감으로 피했을 뿐이니까. 미친 마나 소모만 제외하면 단일 공격기로 이것만 한 게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난 그 혜택을 투기장에서 신나게 누리는 중이다.
“숙제다. 다음에는 이것도 대비해서 와라.”
“이 빵즈 새끼야!”
뒤통수가 시원해진 놈이 털썩 쓰러졌다.
데스레이는 저주라던가 혹은 카운터 스킬에 완전 극상성의 효율을 보였다.
물론 떡장갑이나 전설급 방어 스킬에는 원킬이 힘들지만 피의 검과 광폭화, 뱀파이어릭 오라 콤보에 이은 어스 브레이크를 꽂으면 웬만하면 두 동강이 났지만 웬만하면, 이라는 단서가 붙는 건 조금 전 붙었던 놈처럼 예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승리!
“힘들었다. 400연승.”
드디어 400연승 고지에 올랐다.
기대하던 알림음과 함께 하나의 메시지가 눈앞에 떠오른다.
[업적] [신화의 검투사] [전설 등급]
-PVP 시 공격력 10% 상승
-PVP 시 방어력 10% 상승
-마나 1,000
300연승 업적에 이어 400연승 보상도 얻었다. 300연승 보상은 전설의 검투사라는 업적이었는데, PVP 시 공격력과 방어력이 7% 상승에 생명력 1000이 붙은 거였다. 이제 남은 것은 개인적 500연승 단체전 100연승이 달린 무패의 제왕 업적뿐인데, 근래 내게 꽁승을 제공해 주던 신조길드가 싹 사라져서 애로사항이 꽃피는 중이다.
“하나도 안 보이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신조길드가 투기장에서 사라졌다.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치워져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데, 문제는 신조길드보다 더 독한 것들이 몰려들었다는 것이다. 조금 전에도 까딱했으면 크게 당할 뻔했고…….
“오늘은 이만 할까?”
날 저격하기 위해 몰려든 함정 카드들이 보인다. 제목이나 썸네일도 착한 척, 약한 척 다하면서 들어가면 전설 신화 스킬과 장비들로 무장한 놈들이다. 누나 말로는 이제부터 진짜 헬 난이도란다.
“그러니 굳이 어울려 줄 필요 없지.”
싸워 볼 만하지만 준비된 놈들을 상대하면 심력 소모가 크다. 좋은 길 놔두고 굳이 험한 길 가는 취미는 없으니까.
[로그아웃]
“후아… 상쾌하구만.”
이전과 같은 두통은 전혀 없다. 아니, 오히려 뽀송뽀송한 쿠션 덕분에 오히려 더 개운하다.
“비싼 게 좋긴 좋아.”
제이텍의 협찬을 받아 설치한 5세대 캡슐 타이탄은 웅장하고 유려한 곡선부터가 이전의 갈데아와는 차원이 다른 녀석이었다. 처음에는 차이가 나면 얼마나 나겠어, 했다가 딱 한 시간 하고는 피눈물을 흘렸다. 내가 그동안 이렇게 좋은 걸 두고 그 개고생을 했구나 하고…….
초당 300프레임이니 최정상급 동기화율 보정 기능 따위를 떠나서 그냥 캡슐 안에서 잠자고 밥 먹고 싶을 정도로 사용감이 좋다. 게다가 제이텍에서 파견해 준 서비스 직원이 나한테 딱 맞게 세팅을 조정해 줬는데 그 덕분인지 내 평균 순간 반응 속도가 30% 정도 더 좋아졌다.
“화면에 로고 하나 붙이고 캡슐에 계약금 천만 원에 대회 한 번 출전이면 진짜 개혜자지.”
레드섹을 밟아 주는 별도 미션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건 이미 달성한 것과 마찬가지니까.
“벌써 일주일이 지났네.”
치나 제국의 납치범들을 붙잡고 일주일이 흘렀다. 포디나 레인저라는 명칭에서 포디나라는 명사를 빼려던 내 의지와는 다르게 영지 공헌도 컨텐츠는 의외로 방대했고, 쓸모 있는 것이 많았다. 게다가 영예를 구해 낸 공로를 함께 있던 레인저와 나눈 덕분인지 처음에는 애송이 취급하던 그들의 친밀도가 급격히 높아졌고, 그 덕분에 얻은 영지 퀘스트는 고스란히 경험치가 되었다.
“그래서 29레벨이라는 말이지.”
자잘한 숙련도 보상까지 다 합치면 평범하게 몬스터 사냥한 것보다 괜찮은 소득이다. 게다가 내가 한동안 포디나에 있기로 한 이유 중 다른 하나는 바로 대회 준비 때문이었다. 대회를 참석하려니 접속 시간이 짧아져서 아직은 포디나를 벗어날 이유가 없어졌다.
“그럼 오늘도 들어가서 훈련해 볼까.”
난 캡슐 한쪽에 설치한 책상 위에 놓인 지갑에서 카드 한 장을 꺼냈다. 제이텍에서 준 것인데 대회 참가자들에게만 지급하는 터미널 주소다.
데스크탑의 키보드를 끌어당겨 카드에 적힌 터미널 주소를 입력한 후 다시금 캡슐에 누워 터미널에 접속했다.
[누리온배 참가자 081님께서 접속하셨습니다.]
하얀 공간에 내려서자 시야 한편으로 메시지가 떠오른다. 눈앞에는 눈사람처럼 생긴 몰개성한 NPC 하나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누리온배 세이온 버츄얼에 출전하시는 참가자가 맞습니까?”
“그래.”
“확인되었습니다.”
누리온이라는 캡슐방 프렌차이즈에서 여는 이 대회는 새로 출시된 세이온 아이언 피스트 버츄어라는 세이온 IP를 이용한 대전액션 게임 대회였다. 제이텍에서 5세대 캡슐 타이탄을 홍보할 겸 참가 신청했다는데, 본래 계약 진행 중이던 레드섹 녀석이 상성 쪽으로 빠지자 그 자리에 내가 급하게 들어간 것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세이온이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면 이 아이언 피스트로 경기가 진행된다니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게다가 나온 지 한 달도 안 된 따끈따끈한 신작 게임이라 그런지 아이언 피스트 버츄어는 배우는 맛이 있었다.
“방송을 시작해 볼까?”
세이온의 결투장과는 다르게 이곳에서는 승패에 구애받지도 않고 전략 노출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마음껏 방송을 켤 수 있다. 방송을 켜자 시청자가 주르륵 들어오기 시작했다.
거의 천 명 정도가 순식간에 채워졌다. 전부 신선한 아이디들이군.
“안녕하세요!”
-케이 님!
-안녕하세욧!
-캬캬캬 레드섹 방에서 이민 왔슴다.
-이 집이 그렇게 맛집이라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레드섹 이주민입니다.
[케이짱바라기 님 1000원 후원 감사합니다]
-욕설, 비방 등은 경고 없이 쳐냅니다.
“이주민분들 모두 환영합니다. 그럼 이제 방을 파 보죠.”
새 방 만들기를 클릭한 후 일주일 동안 써먹어 이제는 익숙한 방제를 적었다.
[레드섹 들어와라. 100패 찍어야지?]
-으아… 저 저주받은 방제!
-ㅋㅋㅋㅋ노빠꾸! 직진으로 때려 박네. 근데 벌써 100패임?
-어제 89패까지 봤으니까 오늘 11패만 하면 100패임.
-레드섹 님 지금 미칠 지경이겠네욬ㅋㅋㅋㅋㅋㅋㅋㅋ
-걔 구독자 지금 20% 날아감.
“안 들어오네요.”
-씨발거리고 있어요.ㅋㅋㅋㅋ
-지금 걔 방송 보는 중인데 사람들이 빨리 케이 님 깨라고 성화하는데도 모른 척하고 있네요.
시청자들의 채팅에 난 빙그레 미소 지었다. 제이텍에서는 게임대회에서 한번 깨 달라고 했지만 어디 그 한 번으로 제대로 밟아 줄 수 있겠는가. 난 항상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방송인이다.
-레드 방에서 온 이주민입니다. 실력 방송 부탁드립니다.
[레드병쉰 10,000원 후원 감사합니다]
-실력 방송 따라 이주해 왔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그래도 타 방송 비제이에 대한 과한 욕설은 자제 부탁드려요.”
-크… 레드섹 좌와는 다르게 개념인!
-우리 케이 님은 너무 착하셔. 레드섹은 맨날 씨발씨발 거리는데...
-그렇지만 케이 님 우린 매운맛을 원해요!
뭐 매운맛 방송 할 수 있긴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난 레드섹에게 고마운 입장이었다. 지금 실시간 방송에 들어와 준 사람 중 절반 이상이 레드섹에게서 빼앗아 온 이들이니까. 덕분에 소문이 쫙 나서 이 부장님이 대회에서 밟아 주는 계약 항목은 그냥 지워 줬다.
그리고 마침 오늘의 주인공이 내 방에 등장했다.
붉은색과 검은색이 혼합된 가죽 자킷을 입은 장신의 남자다.
[레드섹003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야이, 개새끼야.”
“들어오자마자 욕부터 박으시네.”
“씨발 놈아! 너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으로 이러냐!”
“억하심정은 무슨……. 그냥 이 동네에서 젤 잘 친다기에 도전하는 건데…….”
“도전? 씨발 인간적으로 80패 정도 뺏었으면 됐잖아!”
“아니, 그러기에는 너무 맛집이라 찍먹만 하려고 했는데 자꾸 퍼먹 하게 되네.”
“뭐? 이런 개새끼가!”
“주둥이로만 나불대지 말고 꼬면 덤비시라고요. 레디 안 하나?”
“오냐! 씨발! 내가 레디 해 준다!”
요 며칠 줄기차게 도발해 줬더니 바로 레디를 눌렀다.
로딩되는 동안 채팅창을 보니 난리가 났다.
-ㅋㅋㅋㅋㅋㅋ와 케이 님. 겸손할 때는 무지 겸손한데 매운맛일 때는 입이 그냥……. ㅋㅋㅋ
-지금껏 관찰했는데 케이 님 저거 다 컨셉임. 근데 무서운 건 저거보다 더 매운맛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건데…….
-ㅎㅎㅎㅎㅎ케이 님 세이온하는 거 보면 매운맛이라는 말 못 할 텐데
-세이온 할 때 더 무서워요?
-어우… 핵불닭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눈감고 싶을 때도 있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
-왜 웃기만 함?
-그냥 케이 님 세이온 방송할 때 와서 보세요. 잘 싸우지는 않는데 제대로 붙으면 25금이랑 19금을 넘나들면서 대량 학살이니까.
-헉? 대량 학살이요? 세이온에 대량 학살이 있어요?
세이온은 레벨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이상 대량 학살은 불가능한 게임으로 알려졌다.
-케이 님은 가능함.
-케이 님 핵과금 고래임?
-그건… 아니요. 충격적이게도 돈 내고 유료 가챠 지르는 걸 못 봤어요. 유료 상점에서 골드로 소모품 사는 건 봤어도……. 아무튼 나중에 세이온 방송 열면 들어와서 보세요.
-모두 조용! 시작하네요!
대회 공식맵으로 이동하자 어느새 단검을 치켜 든 레드섹이 전면에 소환되었다.
“어제는 창이더니 오늘은 단검이네? 뭐 새로운 거 배워 왔어?”
“그래 임마! 너 죽이려고 무사트 단검술 배워 왔다.”
챙!
세이온 아이언 피스트는 일종의 세이온 초반 튜토리얼을 대전 액션 형식으로 만든 게임이었다. 그게 무슨 재미가 있겠냐 싶지만 자신만의 콤보나 필살기 따위를 맨손 격투에서부터 무기술을 통해 모든 것을 제작할 수 있었다. 레벨이 쌓여 강해지는 세이온과는 다르게 모든 것을 동등한 입장에서 시작하는 거다.
“아, 그래?”
신박한 콤보라도 준비해 왔나 보다. 그러고 보니 문득 레드섹과 처음 만난 날이 떠오른다.
“레드섹 님 만나서 영광입니다.”
“아, 그래요. 특별히 제가 한번 어울려 드릴게요. 크크크큭.”
“네!”
거만한 레드섹이 아량을 베푼다는 듯 내 도전을 받아줬다.
처음만 힘들었지 그다음은 쉬웠다.
당황과 분노에 찬 레드섹을 처리하는 건 말이다.
“다시 붙어!”
“하하하! 네.”
실력파 비제이라는 건 져도 멋있게 져야 한다. 그리고 하하호호 하면서 친교를 나눠야 하는데, 내가 좀 잔인하게 농락했다. 언더독 입장에서는 뜯어먹을 게 많은 레드섹은 최고의 맛집이었으니까.
[무기를 선택해 주십시오.]
“롱소드.”
철컥!
난 공중에서 나타난 롱소드를 양손으로 쥐었다. 듀렌달을 베이스로 만들어서 그런지 아주 익숙한 그립감이다.
“와 봐.”
검 끝을 까딱거리니 이를 악문 레드섹이 달려든다. 리치의 길이라는 이점으로 견제할 수 있지만 뭘 준비해 왔나 보고 싶어서 그냥 놔뒀다.
슈슉! 팍!
“죽어!”
곧장 안으로 파고들어 두 개의 쌍단검으로 오른쪽 횡이동을 견제한다. 근데 그 속내가 너무 훤히 보이는 게 문제다.
‘왼쪽을 공략하는 콤보를 만들어 왔나 보네.’
오른쪽을 잠그고 왼쪽으로 함정을 판다. 어디 한번 보자는 심정으로 왼쪽으로 움직이자 자세를 낮추며 하단을 크게 휩쓴다. 가볍게 발을 들어 피하자 곧바로 불꽃이 번쩍이는 어퍼컷이 들어왔다. 하단 공격을 피할 것을 예측하고 어퍼컷까지 노린 공격! 단검은 눈속임이고 진짜는 이거구나.
“띄우시려고?”
공중으로 띄워서 콤보를 넣겠다는 수작이다. 불꽃이 번쩍이는 걸 보면 가드해도 딜레이 프레임이 상당할 것 같다. 그렇지만… 준비한 게 고작 이거라면 참 실망일 것 같은데.
콰득!
“으아악!”
노골적으로 함정 팠다고 신호를 날리던 왼쪽으로 돌아 다리를 베어 내니 비명을 지르며 어퍼컷이 취소되었다. 함정 팠다고 신호만 날리면 뭐하냐. 떡밥을 던져야지. 병신 같은 선택을 한 레드섹에게는 이게 답이다.
쫘악!
“올려 베고.”
공중으로 띄워졌다. 두 번 상단 횡베기! 살짝 뛰어서 십자 베기! 내려와서 돌려 베기! 바닥에 떨어질 때 하단 쓸기를 쓰자 언제나처럼 벽에 몰렸다.
촤악! 쫙!
마무리 벽콤보까지 써 주니 생명력의 1/3이 날아갔다.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킨다. 음… 그냥 보내 줄 수 없지.
“재미있는 이지선다 놀이… 하단.”
사커킥을 찰 것처럼 자세를 잡자 황급히 몸을 굴린다. 어… 잘 속네.
촤악!
사커킥을 차려던 다리를 접고 중단킥으로 머리를 돌려 차니 다시 쓰러진다.
일어서려는 녀석에게 다시 이지를 건다.
“다음도 하단?”
“컥!”
구르지 않고 바로 일어나다가 사커킥에 머리를 허리를 얻어맞고 다시 쓰러진다.
“이 새끼가!”
“이번에는 중단?”
“커억!”
구르면 중단! 일어나면 하단! 안 숙이면 상단 압박! 어라? 개기네? 중단! 중단! 중단!
“악! 악! 악!”
단순한 하단, 중단 이지인데 머리에 열이 뻗친 레드섹은 번번이 내 발에 걸려 바닥에 쓰러졌다.
-와, 진짜 신나게 패시네.
-내 우상 레드섹… ㅠㅠ 근데 피해자 모드에서 보다가 가해자 모드로 보니까 왜 이렇게 재미있냐ㅠㅠ
K. O.
[케이 승리!]
82승도 참 쉽다. 100승 찍어서 하이라이트 만들면 이 부장님이 참 좋아할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