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불장난
작전의 기본 개념은 양동 작전이었다. 양동의 한 축은 두 영지 사이의 경계에 용병단을 투입해 경계를 지키는 카머슨의 병사들을 공격하는 것이다. 책을 잡히지 않도록 포디나에 적을 두지 않은 용병단을 섭외해 공격한다는데, 공교롭게도 그 퀘스트를 맡은 게 이 부장님이 용병단장으로 있는 제이텍의 용병대다.
아무튼 그들이 카머슨 영지 외곽을 어지럽히는 사이 난 저들이 침투해 들어온 루트를 따라 카머슨 영지에 숨어드는 것이 이 작전의 골자다. 그런데 조금 불안하다. 적의 심부까지 숨어들었다가 탈출하는 게 절대 쉽지 않다는 것을 아니까.
“이런 건 불편하단 말이야.”
과거의 게임에서는 퀘스트라고 하면 어디 가서 무엇을 잡고 어디 가서 무엇을 하고 시스템이 쥐어주는 실마리만 따라가면 되었으나 세이온은 그런 것이 없었다.
퀘스트 목표 하나와 주변 상황만 설명해 주고 끝이다. 그것을 어떻게 달성할지는 모두 본인이 연구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엄청난 무력이 있다면 그냥 쳐들어가 다 때려 부수고 나오면 그만이다. 신분이 높고 세력이 있으면 군을 일으켜 쳐들어가 부숴 버린다. 돈이 많으면 대신할 사람을 수배하면 된다.
과정이야 어쨌건 결과만 달성하면 퀘스트가 완료되는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없는 난 혜미 누나에게 자문을 구했다.
“어떻게 하긴. 혼자 열심히 침투해서 박살 내야지. 심플하게.”
“심플이요? 치나 제국의 적국 영지로의 잠입인데?”
“네가 엄청난 명성이 있거나 그쪽 동네에 수배가 떨어지거나 한 건 아니지?”
“아마, 그렇겠죠?”
“그럼 쉽잖아. 터트리고 잘 달리는 말 한 마리 구해서 미친 듯이 달리는 거야. 아참, 너 기마 스킬은 있지?”
당연하다는 듯 묻는데… 으음…….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없는데요.”
“왜 안 배워? 생활 스킬이라서 개수 제한도 없을 텐데?”
“그게 굳이 배울 필요가 없어서…….”
“뭐?”
눈빛에 그런 개떡 같은 소리를 뱉는 게 그 주둥아리냐고 적혀 있는데 정말 배울 필요가 없어서 안 배웠다.
“당장 가서 고급 등급이라도 라이딩 스킬 배워라. 얼마 하지도 않는 걸 왜 안 배워.”
“그거 꼭 배워야 돼요?”
“당연하지. 라이딩 스킬 없이 말 타면 그냥 말에 실려 가는 거랑 같아. 그리고 말 타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데. 그걸 안 배우냐?”
“끙…….”
말이라… 말… 좋다. 좋긴 한데…….
그래. 솔직히 말하자. 난 말을 탈 수 없다.
“누나.”
“왜?”
설명하려니 쪽팔려서 한숨만 나온다.
“그게… 후우… 저기 제가 좀 심각한 길치잖아요.”
“응. 알고 있어. 그래서 피트니스 클럽도 저 아래쪽에 잡았잖아. 걸어오기 편하라고.”
“알죠. 그게… 그러니까. 게임 안에서 말을 타면 제가 방향을 못 잡아요.”
“뭐?”
“말 타고 길 찾기를 못해요.”
“…거짓말이지?”
“쩝…….”
부끄럽게도 사실이다. 솔직히 말해 내가 말 타는 걸 안 해 봤겠는가. 20레벨에 말타기 체험 퀘스트가 떴다. 일정 명예 점수가 되면 뜨는 퀘스트였는데, 약탈자를 하도 많이 죽여 저렙에 받을 수 있었다. 퀘스트는 인심 좋은 말 상인한테 가서 말을 얻어 타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말에 올라탄 후에 벌어졌다. 인심 좋은 말 상인이 근처 한 바퀴 돌고 오라기에 신나게 말을 타고 달리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한참 달리다 보니 길을 잃어버렸다.
“말 타고 돈 게 어딘데?”
“포디나 상업지구요.”
“거기 3분이면 다 돌지 않아?”
“한 시간… 걸렸어요.”
“심각하구나.”
“아무튼… 그래서 제가 말을 못 타요.”
“뭐, 굳이 라이딩 스킬이라는 게 항상 좋은 건 아니지만 그 좋은 걸 못 쓰다니…….”
라이딩 스킬 좋은 건 나도 안다. 세이온에서 말이라는 건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니까. 위튜브에서 본 건데 말을 타고 싸우는 마상 전투 스킬이 따로 있으며, 특히 희귀 등급의 전투마는 타고 돌진하는 것만으로 웬만한 저렙 몬스터는 그냥 쓸어버린다.
“걸어 다니면서 지도 보고 길 찾는 건 돼?”
“예. 그건 돼요.”
“그나마 다행이네.”
한심하다는 눈빛 좀 거둬 주세요.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빠른 방법이 안 된다면 잔꾀를 쓰는 수밖에…….”
“잔꾀요?”
“그래. 이 누나가 오랜만에 머리 좀 써 주지.”
* * *
멀리 카머슨 남작의 성이 보인다.
“끙… 드디어 도착이네.”
짊어진 가방 무게에 저리다 못해 상태 이상이 걸릴 것 같다. 어깨에 붕대질을 하며 성문에 도착하니 경비병들이 들어오는 이들을 검문하고 있다. 치안이 안 좋은 지역에서는 종종 볼 수 있는 풍경이라고 하는데, 검문하는 게 어째서 치안이 안 좋은 곳에서 발생하는 일이냐 하면 바로 이런 것 때문이다.
“수고 많으십니다.”
땡그랑…….
“좋아. 통과.”
반짝반짝 빛나는 은화 세 닢이 경비병의 손아귀에 떨어지자 통과를 외친다.
치안이 불안하다는 것은 공권력이 제구실을 못 한다는 뜻이다. 내가 은화 두 닢을 손바닥 위에 내려놓자 경비병은 내 얼굴을 확인도 하지 않은 채 통과를 외쳤다.
거참 들어가는 건 쉽네.
“아저씨, 너무 배고파요. 한 푼만 주세요.”
“제발, 도와주세요.”
성문을 지나 대로를 걷는데 곳곳에 빈민들이 가득하다.
“아, 귀찮아. 비켜!”
“악!”
유저 하나가 허리춤이나 올 아이를 거칠게 밀어 버린다. 포디나라고 빈민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고 화를 낼 것도 없는 게 이런 일은 비단 이곳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었다.
“소매치기 잡아라!”
한 무리의 꼬마들이 우르르 도망치고 그 뒤를 유저들이 쫓아간다.
“아악!”
“살려 주세요!”
일부는 잡히고 일부는 도망쳤다.
붙잡은 꼬마들을 유저들이 짓밟았지만 다른 NPC들은 그 모습에도 어느 하나 동정의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아니, 행여 자신들에게 불똥이 튀지 않을까 피하기 바쁘다.
“쯧, 듣기는 했는데 진짜 개판이네.”
침투하기 전 카머슨 남작령에 대해 위튜브에서 알아봤다. 중국인들이 가장 많은 치나 제국답게 이 남작령 또한 중국 유저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남작령 치안이 이 꼴이 된 것은 전부 중국 유저들 때문이었다.
중국 유저들이 영지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하는 게 상권을 장악하는 것이란다. 그것이 정당하고 건강한 경쟁이라면 문제없겠지만 막대한 자본과 머릿수로 밀고 들어와 저가정책으로 NPC들이나 다른 국가 유저들의 상점을 말라 죽게 만든다. 물론 이 방법이 모두 통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도 바보는 아니니까. 그러나 음지의 조직들을 장악해 그들을 통해 장사를 방해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금줄을 조인다.
결국 고리대금을 쓰게 만들어 파산시켜 버리고 그렇게 중국 유저들에게 밀려난 기존의 영지민들은 끝내 빈민층으로 전락하고 그런 꼴을 보기 싫은 유저들이 다른 영지로 가 버리면 그때부터 중국 유저들은 본색을 드러낸다.
빈민층으로 전락한 이들에게 피죽 한 그릇 사 먹지도 못할 일당을 주고 개처럼 부려 먹는다. 그렇게 쌓은 부를 통해 영지의 고위 NPC들에게 뇌물을 먹이고 친밀도를 쌓아 영지의 중요 직책을 차지한다.
통치자 입장에서는 좋다. 이렇든 저렇든 세수는 많이 걷히니까.
영지민들이 쥐어짜이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뇌물을 먹은 NPC들이 눈을 막고 군사력을 키우게 만든다. 그렇게 키운 군사력으로 주위 영지를 잡아먹게 만든 후 최악으로 치달은 민심을 등에 업어 결국에는 영지의 통치자까지 반란으로 교체한다고 하니 헤븐즈 게이트사에서 골칫덩어리로 악명이 높은 중국 유저들이다.
척척척!
“비켜라!”
“물러나라!”
고함 소리와 함께 절도 있는 군화 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번쩍이는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들과 오와 열을 맞춘 병사들이 대로를 따라 걸어오고 있다.
‘기사들이군.’
기사. 세이온에서 가장 강력한 무력 클래스이며 전투의 스페셜리스트들이다.
평균 레벨은 40~60대지만 그들의 강함은 단순히 레벨로만 측정할 수 없다. 일반 유저들은 꿈도 못 꿀 무기술과 중갑술을 가지고 있고 오러를 익숙하게 다룰 줄 안다. 게다가 말과 함께 움직이게 되면 그 자체가 작은 탱크와 마찬가지의 힘을 지니고 있어 아무리 병사들이 많아도 저들이 한번 쓸고 지나가면 들판의 보리를 베듯 땅에 쓰러진다.
지금 그런 기사가 무려 다섯이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선두에 걸어오는 기사의 갑옷이 유난히 빛난다.
‘유저 기사구나.’
유저가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클래스 중 하나인 기사. 내가 가진 클래스인 레인저보다 최소 두 끗발은 더 높다. 거기에 다른 NPC 기사들을 거느리고 있는 것을 보면 기사 중에서도 수석 기사… 최소 50레벨 이상이라는 소리다.
“쟤랑 싸우면 골치 아프겠네.”
싸우면 지지는 않겠지만 작정하고 발목을 붙잡으면 성가시다.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자니 기사와 병사들이 내 앞을 지나 병영 쪽으로 사라진다.
신경을 끄고 대로를 따라 걷다 보니 내성의 입구가 보인다. 내가 목표로 하고 있는 청동상은 내성의 중앙에 있었는데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필히 이 입구를 지나야 한다. 그러나 내성의 입구에 다가간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누나 예상대로네.”
네 명의 경비병과 한 명의 기사가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게 보인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주위를 감시하는 것을 보면 성문 앞에서 같은 짓을 했다가는 대번에 저 기사의 칼이 뽑힐 것 같다.
“전투 은신이 먹히려나.”
밤이 되면 전투 은신의 효과가 좀 더 좋아질 것 같긴 한데 확신이 서지 않는다. 생각 없이 왔다면 난감했을 상황. 그러나 나에게는 누나가 세워 준 계획이 하나 있다. 누나 딴에는 잔꾀라고 했지만 내 생각에는 80% 확률로 먹힌다. 포디나에서 어깨가 빠지도록 짊어지고 온 준비물을 툭툭 두들긴 후 뒤돌아섰다.
“그럼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려 볼까?”
* * *
냐아옹… 냐앙…….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내 앞에 엉거주춤 멈춰 서서 날 빤히 바라보고 있다. 눈이 마주친 건지 아니면 기척을 느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눈빛이 참 부담스럽다.
“뭘 봐.”
“하아악!”
내 말에 놀랐는지 하악질을 하고는 재빨리 도망친다.
“내가 더 놀랐다, 인마.”
한밤중에 골목 어귀 쓰레기더미 속에 숨어 있던 내 잘못도 있지만 하필 내가 숨은 쓰레기더미 앞에 응가를 하려는 꼴은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다. 그건 그렇고 완전히 어두워졌으니 슬슬 움직여 볼까?
몸을 일으키니 주위가 조용하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카머슨 남작성의 군사지구였다. 기사탑과 병영, 레인저탑, 마굿간, 대장간 등이 몰려 있는 곳이었는데 거주 구역과는 꽤 멀리 떨어져 있고 순찰을 도는 경비병들이 있어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스스스슥…….
건물의 그림자에 숨어 걷다 보니 어느새 내가 목적지로 삼은 곳이 보인다.
그곳은 바로 군마들을 관리하는 마굿간 옆이었는데, 야트막한 언덕 위에는 말들에게 먹일 건초를 보관하는 판자로 된 창고가 있다.
“음, 좋군.”
창고의 판자를 손으로 문지르자 바짝 말라붙은 딱딱한 질감이 기분을 즐겁게 한다. 그럼 이제 한번 시작해 볼까?
탁…….
난 가방에서 내 상체만 한 큼지막한 항아리를 꺼냈다. 입구가 단단히 밀봉된 이것은 포디나 레인저라는 클래스와 영지 퀘스트라는 이유가 아니었다면 가져오지 못했을 것이다. ‘전쟁 물자’로 분류되는 이것은 바로 ‘화염 슬라임 기름’이었다.
뽕…….
“크으, 냄새…….”
코를 찌르는 악취가 코를 자극한다. 화염을 뿜는 슬라임에게서 채취할 수 있는 이 기름은 영지전 같은 전쟁 시에만 사용되는 것이었다.
“냄새 때문에 빨리 처리해야겠네.”
항아리를 기울이자 회갈색의 액체가 쏟아져 나와 바닥을 적신다. 금세 한 통을 비운 난 가방에서 다시 항아리 하나를 꺼냈다.
“하나로는 안심이 안 되지.”
이걸 가져오느라 어깨가 빠질 뻔했지. 아마 흑마법사 레이드를 하며 얻은 가방이 아니었다면 이것을 가져오는 건 꿈도 못 꿨으리라.
콸콸콸…….
건초 창고를 돌며 화염 슬라임 기름을 뿌렸다. 좀 과한 게 아닐까 싶지만 뭐 어떤가. 모자란 것보다는 넘치는 게 낫지. 흐흐흐…….
“좋아! 준비 끝.”
총 다섯 항아리의 화염 슬라임 기름을 모조리 바닥에 쏟아부었다.
“이제 불장난을 시작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