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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보스 스킬 쓴다-53화 (53/154)

53. 방심의 대가

탁탁… 화륵…….

부싯돌에서 튀긴 불똥이 바닥에 내려앉자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불빛 한 점 없는 캄캄한 어둠 속 피어오른 작은 불꽃은 상황에 따라 로맨틱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내가 있는 장소는 그런 것을 챙길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잉?”

펑 하고 터지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화악 하고 휘발유처럼 피어오르길 기대했다. 그런데 웬걸. 아무리 봐도 이건 손바닥만 한 양키 캔들 불꽃이다.

“불량품인가.”

아이템 정보에서 확실히 [상급 품질]을 확인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불꽃은 여전히 귀엽다. 지독한 냄새에 누가 다가오지 않을까 점점 조바심이 나는데 불꽃은 커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끙, 이럴 줄 알았으면 사용 설명서라도 찾아보는 건데…….”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아닐까 하고 살살 바람을 불어 본다.

“후우우… 오…….”

내 입김에 죽을 것 같던 불꽃이 아주 조금 더 커졌다.

새끼 손가락만 하던 불꽃이 중지만 하게 커졌다.

후우우…….

조금 더 커졌다. 좋아. 몇 번만 더 하면 손바닥만 하게… 응……?

“헛…….”

화르륵!

바람을 불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불꽃이 수배 이상 커졌다.

기뻐해야 마땅하지만 불꽃의 상태가 이상하다. 푸른… 불꽃?

“색이… 왜… 으헉!”

화아아아악!

급격히 커지는 불길에 뒤로 확 나자빠진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날렸다. 그리고…….

콰아아앙!

“으아악!”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몸이 붕하고 떠오른다. 그렇게 거의 10여 미터를 날아간 나는 바닥을 구른 후 뒤를 힐끔 바라봤다.

“이런 젠장……!”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 본래 내가 생각했던 건 휘발유였다. 그냥 잘 타게 만드는 휘발유 말이다. 계획도 심플했다. 군사 지구의 건초 창고를 불태워 병력의 이목을 돌린 후 내성으로 침투해 청동상을 폭파한다. 그리고 불을 진화하는 사이 성을 빠져나와 유유히 도주한다. 그런데…….

콰아앙!

영지전에서 화공 쓸 때 사용한다고 했지, 폭발물이라는 말은 없었잖아!

기름은 마치 글리세린이라도 되는 듯 연속적으로 폭발하며 강렬한 푸른 빛 화염을 부풀리는 중이다. 이미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의 불길이 일어난 상태. 문제는 지금 타오르고 있는 게 한 동이 분량도 안 된다는 거다. 진짜는 건초 창고 주위를 흠뻑 적신 기름인데 만약 저기까지 불꽃이 간다면 얼마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날지 상상하기도 힘들다.

“씨발!”

속으로 화염 슬라임 기름을 추천한 혜미 누나를 골백번 욕하며 난 전력을 다해 달렸다. 그리고 잠시 후…….

콰아아아앙!

귀청이 찢어질 것 같은 대폭발이 내 등을 두들겼다.

“우와악!”

[진흙 방패]

파파파팍!

바닥을 수십 바퀴는 구른 것 같다. 나무 등걸에 몸을 숨기고 재빨리 상태창을 열어 보니 이미 생명력의 절반이 날아가고 부상으로 전신이 붉게 물들어 있다. 진짜 이삼 초만 늦었어도 정말 어이없이 게임아웃 당할 뻔했다.

“큭, 뜨거워!”

등으로 느껴지는 화염의 열기가 예사 수준이 아니다. 난 가방에서 재빨리 물약을 꺼내 들이켜며 근처 골목으로 달렸다.

콰쾅! 쾅!

불쏘시개로 사용하려 했던 건초 창고는 이미 보이지 않는다. 그 자리에 있는 건 높이 20m는 됨직한 거대한 불기둥이었는데 사방으로 불꽃을 휘날리며 주위에 모든 것을 탐욕스럽게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뭐야!”

“으아아악!”

“이… 이런, 미친! 불이야!”

“피해!”

퍼퍼퍼퍼펑!

“살려 줘!”

병영에서 뛰어나온 나온 병사들이 폭발에 휩쓸려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병사들을 집어먹은 폭발을 계속해서 커지더니 어느 순간 기사탑을 향해 그 불길을 뻗어 가기 시작했다. 음… 아무래도… 폭파 공작 스케일은 애초에 넘은 것 같은데……?

콰아아아아아!

불꽃은 마치 거대한 맹수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를 지르며 계속해서 몸집을 불려 나갔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명예 점수 +15]

[명예 점수 +7]

[명예 점수 +11]

레벨이 쭉쭉 차오르기 시작했다. 30레벨을 달성하며 여러 가지 메시지가 쭉쭉 올라왔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불을 꺼!”

“병사들을 구해라!”

“히이이잉!”

“히잉!”

마구간에 불이 옮겨붙자 말들이 미쳐 날뛰다가 소리를 지른다.

“전투마들을 구해!”

“우아악!”

“살려 줘!”

“히히히힝!”

콰쾅! 쾅!

마구간이 박살 나며 말들이 미친 듯이 뛰어나와 사람들을 짓밟는다. 말 그대로 아비규환.

대낮같이 밝아진 하늘 위로 화염과 뒤섞인 연기가 피어오르고 영지민들이 우르르 몰려들었지만 폭발이 내뿜는 열기에 가로막혀 모두 멍하니 불타오르는 병영과 마구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천벌을 받는구만…….”

“잘 타네.”

평소에 인심을 얼마나 잃었는지 영지민들이 불을 끌 생각은 않고 구경하기 바쁘다.

그리고 난 그 틈에 섞여 이동을 시작했다.

“좋아.”

생각했던 대로 내성으로 향하는 문을 지키는 이들이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난 전투 은신을 켠 채 조용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외성 쪽이 화염과 아우성으로 시끄러운 반면 내성은 의외로 잠잠했다. 몇몇 NPC들이 불이 난 곳으로 달려가기는 했지만 나를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청동상이 있는 작은 광장에 도착했다.

“반하크라 카머슨의 청동상… 오케이…….”

광장 중앙에 멋들어진 갑주에 망토를 휘날리는 젊은 기사의 청동상이 보인다.

이제 이것만 폭발시키면 퀘스트는 완료다. 난 가방에서 스크롤을 꺼내려 했다. 찢고 던지면 끝인 아주 손쉬운 상황. 그러나 난 스크롤을 꺼내지 못했다.

쉬이이이익!

[진흙 방패]

파아악!

“컥!”

날아온 화살을 진흙 방패가 막아 줬음에도 옆구리에 꽂혔다.

시선을 내리자 옆구리에 매달린 화살이 보인다. 검은 살대에 검은 깃털이 달린 화살이다.

‘나이트 킬러…….’

야간 사격에 특화된 암살자용 화살이다.

“크윽!”

화살을 뽑아 던지고 포션을 들이켜고 있자니 발소리가 들린다.

척척척.

동상의 뒤쪽에 숨어 있던 번쩍이는 갑주를 입은 다섯 명의 기사들이 내게 걸어온다. 낮에 봤던 그놈들이다. 내게 활을 쏜 놈은 가장 오른쪽에 서 있는 놈이었는데, 지금도 나이트킬러를 시위에 끼운 채 날 노려보고 있다.

“쥐새끼 같은 놈… 적당히 숨어들 것이지… 쯧.”

다섯의 가운데에 선 화려한 갑주의 유저 기사가 혀를 차며 말한다.

“그러게 말입니다. 슈엔 경. 이래 가지고는 일 잘하고 남작님께 욕을 먹게 생겼습니다.”

“뭐 어쩌겠나. 그래도 잡았으니 다행이지.”

이미 나를 잡은 것인 양 저들끼리 대화를 나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자니 마치 내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뭐지?

‘내가 여기 온 건 포디나 백작이랑 카렌 씨 그리고 성의 핵심 인물 몇 명밖에 모를 텐데…….’

폭파 공작 퀘스트가 중간에 샜다. 포디나 백작은 당연히 아닐 테고, 남은 건 몇 명 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영지 일을 보좌하는 총관이나 그 총관을 돕는 보좌관 셋. 남쪽의 숲 언저리까지 길 안내를 해 준 NPC 기사랑 향사… 그리고……. 의외로 많네?

[영지 퀘스트] 정보원을 처단하라

-백작가 내에 적들에게 정보를 흘리는 이가 있다. 색출하여 처단하라.

-보상: 10,000exp, 50골드, 공헌도 100, 포디나 백작 친밀도↑

퀘스트가 떴다. 보상도 좋고 돈도 좋고 포디나 백작의 친밀도가 올라가서 나쁘지는 않는데…….

‘내가 참 멍청했네.’

사람이 뒤통수 맞는 걸 누가 좋아하겠냐마는 난 유독 그런 걸 싫어한다. 예전에 중학교 때 일이다. 나한테 친해지자면서 들러붙던 놈이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뒤로 내 욕을 엄청 하고 다니더라. 나중에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고아 새끼가 놀아 주니까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따진다며 도리어 들이대기에 분을 참지 못하고 두들겨 팼다.

뭐… 각설하고. 고작 게임이지만 두들겨 맞은 뒤통수가 따끈따끈하다.

그러나 그때처럼 스위치가 들어가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차분해진다.

난 최대한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살려 주십시오.”

“뭐? 크크큭…….”

“하하하! 여기까지 숨어들었기에 꽤 대범한 놈인 줄 알았는데, 목숨을 구걸하다니.”

나를 경멸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다섯이다.

“모두 나서지 마라.”

스르릉…….

“이런 비겁한 녀석 따위 내가 처리할 테니까.”

슈엔 경이라는 유저 기사가 검을 뽑으며 거만하게 걸어오는데, 날 죽이고 아이템과 경험치를 먹겠다는 생각이 빤히 보이는 수작이다. 화살이 꽂힌 옆구리를 붙잡고 처연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마치 처형장의 집행인처럼 검을 치켜들어 곧장 내 목을 향해 베어 들어왔다.

“죽어라.”

죽기는 개뿔… 웃기지도 않는다.

* * *

“어?”

검을 내려찍던 슈엔은 순간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을 느낀 건 마지막 순간 놈과 눈이 마주쳤을 때였다. 두려움이나 공포에 젖어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무감각하게 변한 것이다. 곧 죽을 놈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위화감이 엄습하지만 베던 공격을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머릿속으로 느껴지는 불안감을 지우기 위해 내리 베는 검에 좀 더 힘을 줬다. 아니, 힘을 주려던 때였다. 놈의 옆구리에서 붉은 빛이 번쩍였다고 느낀 순간까지는 말이다.

번쩍!

거의 무의식적으로 검을 들어 그 빛을 막아 내나 싶었지만…….

퍼어어엉!

“커어억!”

현실에서 덤프트럭에 치이면 이런 기분일까? 빛과 검이 부딪힌 찰나 블랙아웃에라도 빠졌는지 순간 정신을 잃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뒤로 날아가는 중이었다.

‘어째서?’

뭐에 당한지도 모르겠다.

뭔가 엄청난 스킬이라는 건 알겠지만 그 실체는 보지도 못했다.

‘검조차 뽑지 않았는데?’

저항할 생각조차 없는지 멍하니 서 있기에 추수하는 기분으로 베었는데… 놈의 허리춤에서 쏘아진 뭔가에 당했다. 암습에 당한 것. 비겁한 연기에 당했다고 생각하니 머릿속에 분노가 차오른다.

‘놈……!’

바닥에 내려서면 곧장 놈에게 돌진해 박살을 내 줄 것이다.

조금 전에는 방심해서 크게 당했지만 이제 놈에게 그런 요행은 없다. 한 번으로 끝내지 않을 것이다. 죽이고 또 죽여서 게임을 접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질끈 깨무는 슈엔. 그러나 그는 어째서 시간이 지나도 자신의 몸이 바닥에 안 떨어지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어째서……?’

케이의 앞에 머리 잃은 기사의 시체가 털썩 하고 무릎 꿇었다.

쉬이이익!

나이트 킬러 한 발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파악!

화살은 본래의 목표가 아닌 그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시체의 등에 적중했다.

“다음은 너다 새끼야.”

기사의 시체를 방패 삼아 붙잡은 케이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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