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중상모략
“너 진짜 질기다.”
“말 시키지 마세요. 머리 아파 죽겠으니까.”
“야, 어차피 게임인데 죽긴 뭘 죽어.”
“아저씨도 한 시간 동안 병사들한테 둘러싸여서 싸워 보실래요? 오붓한 자리 한번 마련해 드릴 수 있는데.”
내 물음에 이 부장님이 입을 꾹 다문다. 하긴 나한테 거기 다시 들어가라면 그 말을 한 녀석을 대신 던져 버릴 것이다. 나도 어떻게 살아 나왔는지 신기할 만큼 절망적이었으니까. 그러나 이 부장님이 미워할 수 없는 건 날 구해 준 게 이 부장님의 용병대라는 것이다.
본래 받은 퀘스트가 남작령 영지 경계를 돌아다니며 시선을 끌라는 것이었는데, 적들을 추격하다 보니 성 근처까지 왔단다. 근데 성에 불길이 치솟고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사람들이 아우성치기에 뭔 일인가 싶어 들어왔다가 운 좋게 성문 입구 쪽에 있던 나를 발견한 것이다.
“근데 궁금한 게 너 왜 성문 근처에서 그렇게 싸웠던 거냐? 그냥 탈출하면 되는 거였는데…….”
“몰라요. 아, 거참. 궁금한 거 참 많으시네. 좀 쉬면 안 돼요? 너무 피곤해서 여기가 남작령만 아니면 아무 곳이나 안전지대 펼치고 눕고 싶다고요.”
“쩝, 알았다. 쉬어.”
입맛을 다시는 이 부장님. 길을 잃어서 못 나왔다는 건 죽어도 말 못 한다.
“후우…….”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살아나온 게 신기하다. 백구와 황구마저 역소환된 후 난 한 시간 동안 정말 사력을 다해 싸우고 또 도망쳤다. 골목과 골목, 건물과 건물 사이를 오가며 따돌리는 것에 주력했는데, 뱀파이어릭 오라와 광역 매혹, 전설급 가방에 넉넉히 챙겨 온 붕대가 아니었으면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레벨이며 숙련도는 많이 올랐네.”
건초 창고를 폭파시킬 때 30렙. 정신 없이 병사들을 썰다 보니 32레벨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것에 앞서 더 큰 소득은 따로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새로운 업적을 얻었다는 것이다.
[업적] [죽어도 안 죽는다] [전설 등급]
-자연 치유 [희귀 등급] 패시브
-부상 확률 30% 하락
-즉사 판정 수치 10% 하락
거의 후반부에 얻은 이 업적이 아니었다면 아마 병사들의 창칼이 아니더라도 부상으로 죽었을 것이다. 세이온에는 신체 부위별로 손상이 되는데, 이게 심해지면 생명력이 떨어지게 되고, 종국에는 게임 아웃이 된다. 붕대도 다 떨어져서 뱀파이어릭 오라로 생명력만 근근이 채우고 있었는데, 이 업적을 얻으니까 느리기는 하지만 부상이 천천히 회복되더라.
당장은 쓸모없어 보이지만 죽어야 할 부상과 공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해 주는 유용한 업적이다.
“오늘도 조금 더 강해졌네. 후우…….”
* * *
“대단하지?”
“대단하다뿐입니까?”
약 두 시간 전. 그들이 봤던 광경을 다시금 떠올린 김 과장이 저도 모르게 몸을 오슬오슬 떨었다. 대체 몇 명을 베었는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시체가 널린 대로에 홀로 서서 병사들을 베어 넘기는 그 모습은, 마치 영화나 소설에서나 봤을 법한 그런 장면이었다.
정현은 자기들이 자신을 구했다고 말하지만, 당시 상황을 보면 그냥 성에서 걸어 나와도 그를 제지하는 이는 없었을 것이다.
“이제 한 30레벨 정도 되었겠죠?”
“아마, 그렇겠지.”
“재능일까요?”
김 과장의 물음에 이 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게 재능이라는 말로만 설명되는 걸까? 혼자 성 하나를 박살 내는 게?”
“모르겠네요. 도저히 상상이 안 가서… 차라리 핵이라면 모를까.”
“나도 그래.”
가상현실기기의 총아인 캡슐을 제작하는 회사의 부장으로써 그는 많은 네임드를 알고 있었다. 캡슐의 성능이라는 건 곧 최고의 퍼포먼스와 직결되는 이야기니까.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그 어떤 네임드도 고작 30레벨에 성 하나를 씹어 먹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김 과장의 말대로 핵이라면 이해가 간다. 그러나 세이온에는 지금껏 단 한 번도 핵이 나타난 적이 없었고, 정현의 캡슐을 수거해서 확인한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이전에도 놀라웠지만 갈수록 엄청난 모습을 보여 주는 정현이다.
“30레벨에 저 정도인데 최상위권인 70레벨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김 과장의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 부장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우리가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이 되겠지.”
자신이 한 말이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턱을 쓸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 부장이다. 그러나 평소 이 부장의 개그도 열심히 받아주던 김 과장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뭔 그런 중2뽕 찬 발언입니까?”
“중2뽕이라니! 나름 신경 써서 말한 건데!”
“저희 집 둘째도 그런 말은 안 할 겁니다. 그보다 회사 차원에서 생각했을 때 어떠냐고요.”
“아하, 회사 차원…….”
회사 차원이라는 것은 케이라는 상품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묻는 것이다.
“단순한 협찬으로 끝나서는 안 될, 꾸준한 투자를 통해 육성해야 할 우량주라고 해야겠지.”
“역시 그렇죠?”
“그래. 아직까지 터지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로 잠재력이 엄청나.”
“이제 시작한 지 한 달 조금 되었을 뿐이니 당연한 거죠. 그리고 제가 여기저기 알아본 결과 아무리 삽질해도 최소 반년 안에는 터질 것 같습니다.”
“그래?”
“예. 그러니 전에 이야기 나왔던 거 적극적으로 다시 한번 건의해 보죠. 어쩌면 이 기회가 저희 제이텍에 천재일우의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김 과장의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전에 나왔던 이야기라는 것은 바로 스폰서 계약을 말하는 것이었다. 위튜버든 프로게이머든, 어쨌건 근본은 수입이 불안정한 프리랜서다. 물론 각종 방송을 통해 상당한 수입을 벌어들인다고는 하지만 실제 넉넉한 수입을 벌어들이는 이들은 정말 극소수에 불과했다. 거의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나머지는 게임 내의 제화를 대부분 생활비로 충당하느라 제대로 된 성장이 힘들었기에 그런 이들에게 기업의 스폰서는 온전히 방송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 주는 단비와 같다.
김 과장의 말에 동조하는지 이 부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말 잘했다. 한번 추진해 보자. A급 5년짜리로…….”
“예? A급이요?”
A급이라는 것은 스폰서 계약 시 가치 측정에서 최상급으로 대우한다는 뜻이다. 잘해야 B급 정도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부장은 오히려 한술 더 떠서 이야기를 했다.
“그래. 그리고 최대한 빨리해야 돼. 저 녀석… 곧 뜬다.”
* * *
포디나로 돌아온 나는 보고도 하지 못한 채 곧장 내 숙소로 향해 로그아웃했다.
“우으…….”
캡슐에서 내려오니 진짜 정신이 어질어질하다. 간단하게 레토르트 식품 하나 돌려 먹은 후 곧장 침실로 가서 누운 후 스마트폰을 들어 광수 형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어, 정현아.
“저 지금 로그아웃했는데 영상 편집해 주세요.”
-그래. 근데 내용이 어떻게 되냐?
“영지 퀘스트로 다른 영지에 침투해서 좀 싸웠어요.”
-그래? 대략 몇 분짜린데?
몇 분짜리냐는 말에 난 잠시 남작령에서 있었던 일들을 반추했다. 방화를 한 것을 빼더라도 거의 시간 반 정도는 될 것이다. 물론 광수 형은 하이라이트로 쓸 만한 장면을 묻는 것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딱히 뺄 만한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죄송한데 한번 풀영상으로 한번 보고 형이 영상 좀 뽑아 주세요. 보시다가 빼야 될 거 같다고 생각되시는 건 빼 주시고요.”
-뭐, 알았다.
광수 형과의 통화를 마친 나는 그대로 잠에 빠져들어 거의 열 시간을 내리 자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으음, PT는 건너뛰었네.”
아침 스케줄이 통째로 날아갔다. 스마트폰을 보니 부재중이 몇 개 들어와 있는데, 아무래도 트레이너님 같아서 열어 보기 두렵다. 가볍게 식사를 하고 씻은 난 습관처럼 캡슐 안에 앉았다.
“오랜만에 아침 세이온이나 해 볼까.”
몸이 너무 피곤해 포디나에 오자마자 퀘스트 보고도 못 하고 곧장 로그아웃을 했다.
보상도 궁금하지만 포디나 내에 있는 남작의 정보원에 대해서도 카렌 씨에게 알려야 한다.
“정말 고생하셨어요.”
띠링!
[히든 퀘스트] 카머슨 남작령으로 침투하여 카머슨 영지에 폭파공작을 수행하라. 를 완료하셨습니다.
-보상: 30,000exp, 100골드, 영지 공헌도 +100
퀘스트가 완료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보상이 들어왔다.
“이 소식을 포디나 백작님께 보고 드리면 따로 부르실 테니 가급적 성내에서 대기하고 계세요.”
퀘스트 내용에 있는 성과별 차등 보상이라는 것이 백작에 의해 나오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 전에 카렌 씨에게 먼저 말할 게 있다.
“그런데 카렌 씨.”
“예.”
“사실 제가 갔을 때…….”
난 남작령에 침투했을 때 적 기사들이 보였던 반응에 대해 카렌 씨에게 이야기를 했다. 내 말을 곰곰이 듣던 그녀의 이맛살이 조금씩 찌푸려지더니 내가 말을 끝마쳤을 때는 얼굴에 한 겹 서리가 어린 것처럼 표정이 딱딱해졌다.
“그 말이 사실인가요?”
“네. 제가 청동상을 폭파하러 올 것을 정확히 알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이 작전에 대해 아는 건 일곱 명밖에 되지 않아요. 나와 백작님, 총관인 벨모트 님과 그 심복인 둘… 그리고 그림자 기사단장과 그리고 케이 씨죠.”
“그 말씀은 총관인 벨모트 님과 그림자 기사단장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라는 거군요.”
“그래요. 이야기가 샜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니… 일단 이 문제는 제게 맡기세요. 모두 함부로 의심할 수 없는 이들이니까요.”
“알겠습니다.”
카렌 씨에게 보고를 마친 난 그녀와 헤어져 장비를 고치기 위해 포디나의 상업지구로 향했다.
“21골드입니다.”
“윽…….”
꼬장꼬장한 대장장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수리비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고작 무기 하나에 21골드. 그러나 그 무기가 +10듀렌달이라는 것과 이 가격도 포디나에서 레인저로 근무하는 덕분에 가능한 가격이라는 것을 알기에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상업지대를 모두 돌아 나오니 수리비로만 35골드가 빠져나갔다. 소모품까지 보충하니 50골드. 보상으로 받은 돈 중 절반이 날아갔다.
유저 기사한테 얻은 창을 팔면 손실이야 충분히 만회되겠지만, 이건 황구한테 줄 것이다.
방어는 그럭저럭 괜찮지만 무기가 부실한 구씨 삼형제다. 탱커로만 이용할 수 없으니 앞으로 꾸준히 투자해 줄 생각이다.
그렇게 정비를 마친 후 다시 내성에 있는 내 집으로 향할 때였다.
삐빅~ 삐빅~ 삐빅~
-정현아. 나 혜미 누나인데 좀 나와 봐야 할 것 같아.
캡슐 외부에서 게임 안에 사람을 호출할 때 사용하는 메신저가 알람과 함께 깜빡였다.
-예. 3분 뒤에 나갈게요.
-그래.
로그아웃을 해서 나가니 캡슐 옆에 혜미 누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다.
“무슨 일이에요?”
내가 묻자 누나가 캡슐 옆에 붙은 모니터에서 위튜브를 열더니 하나의 영상을 클릭했다.
“이거 봐 봐.”
[대국의 병사들을 학살하는 대한민국 핵 유저!]
“뭐에요? 이 유치한 제목은?”
“한 중국 위튜버가 한 시간 전에 올린 핵 영상인데, 그쪽 애들이 너도 나도 퍼 날라서 지금 전 세계적으로 난리가 났어.”
“에이, 걔들 핵 이야기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걸 누가 믿어요.”
서로 간에 합의된 규칙을 지킨다는 개념이 없어 핵이 나왔다고 하면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이들을 오히려 바보 취급하는 이상한 가치관을 지닌 것이 중국 유저들이었다. 아직까지도 세이온에 대해서도 꾸준히 핵 제작을 시도하는 그들이기에 중국 위튜버에게서 핵 이야기가 나오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내 말에도 누나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누나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에 난 벙 찐 표정이 되었다.
“그게 너니까 문제야.”
“예?”
누나의 말에 놀란 난 고개를 돌려 영상을 바라봤고, 영상 속에서 자극적인 빨간색의 한자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후 본 화면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화면 속의 인물은 누나의 말대로 나였다.
“도망친다!”
“잡아! 죽여!”
“으아악!”
삼중 사중으로 포위한 병사들을 거침없이 베어 넘기며 골목으로 도망치는 나를 누군가 뒤쫓는 시점이다. 앞뒤로 포위당하자 건물의 벽을 밟고 지붕으로 뛰어오르더니 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저들을 베고는 또다시 달린다.
콰쾅! 콰콰쾅!
“피해!”
“막아!”
[보시다시피 코라 왕국에서 넘어온 대한민국 유저가 우리 치나 제국의 영토에서 무자비한 학살을 벌이고 있습니다.]
“죽어라!”
숏소드를 든 유저 하나가 내게 검을 찌르자 그것을 어깨로 받아 내고는 목에 롱소드를 베며 지나간다. 진흙 방패를 믿고서 받아 낸 건데 각도 때문인지 보이지 않는다.
[충분히 치명타가 들어갔음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반격하는 모습입니다. 참고로 신뢰할 수 있는 소식통에 의하면, 저 대한민국 유저의 아이디는 케이! 레벨은 고작 30이었고, 전투 시간 1시간 46분 동안 죽인 기사와 병사의 숫자는 무려 기사 8명! 병사 36명, 유저 42명입니다! 이게 핵이 아니고서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화면을 해설하는 이가 피를 토하는 듯 격렬하게 외쳤다.
그건 그렇고 많이도 죽였네. 레벨이 두 개나 올라서 그러려니 했는데 막상 다른 사람이 찍은 것으로 보니 꽤 신선하다.
틱~
그때 화면을 멈춘 누나가 내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핵 쓴 거 아니지?”
아니, 나를 뭘로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