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500연승을 위하여
핵 해명 영상이 나간 지 일주일이 흘렀다.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하자면 핵 이슈는 대략 이틀 동안 시끌벅적했지만 삼 일째 되는 날부터는 놀랍도록 빠르게 사라졌다는 것이다. 물론 그 첫 번째 이유를 꼽자면 인터뷰하자는 모든 쪽지를 내가 씹었다는 게 첫 번째였고, 두 번째 이유로는 미국의 CSA 길드라는 곳에서 100레벨대 지역의 탐사를 성공했다는 기사가 지면을 뒤덮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미지의 땅.’
게임이 오픈된 지 6개월이 지났지만 아직 세이온 세계의 20%만이 유저들에 의해 밝혀졌다. 애초 세이온이라는 게임 내 구현된 월드의 크기가 지구보다 월등히 크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세이온은 아직 초기 개척 시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이야기가 이틀 만에 잠잠해지긴 했지만 얻은 건 무척 많았다.
일단 중국 위튜버들이 신나게 어그로를 끌어 준 덕분에 내 위튜브 채널의 구독자 수는 일주일 만에 30만을 넘었고, 아프리카 방송의 시청자도 엄청나게 늘었다. 일주일이 지난 현재 후원으로만 오천만 원을 찍었는데 이것저것 제하면 삼천만 원 정도가 내 돈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고작 시작한 지 한 달 반이 되어 가는 지금 거의 기적에 가까운 성장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빨리 큰 만큼 적도 많이 만들어 얼른 성장해야 한다는 누나의 말에 따라 난 열심히 세이온을 플레이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지겹게 끌고 오던 퀘스트 하나를 완전히 마무리할 참이다.
“감히 레인저 따위가 나를!”
거참 나름 카머슨의 학살자라는 이명까지 얻었는데 일개 레인저라고 하다니 너무하네.
그러나 확실히 상대는 나를 따위라고 할 만한 직위의 소유자였다. 총관을 보좌하는 이들 중 가장 연장자인 도날드 씨는 포디나 백작을 가장 오랜 시간 모셔 온 이들 중 하나였으니까. 그러게 왜 도박 따위에 손을 대서 이 꼴이 나나.
“도박장에 있던 카머슨 남작령의 세작들이 모두 실토했습니다.”
“이, 이익! 죽어라!”
품에서 다짜고짜 단검을 꺼내 내게 휘두른다. 하…….
단검을 간단히 튕겨 내고 팔을 꺾은 후 바닥에 자빠뜨리자 마구 발버둥을 치기에 뒤통수를 야무지게 후려쳐 버렸다.
[마동구 님 1,000원 후원 감사합니다.]
-병사들 오기 전에 빨리 집무실 뒤져서 증거 찾으세요.
“예.”
가져온 밧줄로 도날드의 몸을 칭칭 감은 난 그의 집무실을 뒤지기 시작했다.
시청자들이 말해 준 ‘빠른 클리어’를 위해 심증만으로 쳐들어왔기에 증거를 찾지 못하면 일이 복잡해진다.
[크고웅장한 님 1,000원 후원 감사합니다.]
-벽에 있는 쓸데없이 안 어울리는 목수 그림 뒤가 수상함!
크고웅장한이라는 시청자의 조언에 따라 그림을 치우자 헐겁게 채워 넣은 벽돌이 모습을 드러낸다. 벽돌을 빼내자 작은 상자가 하나 나왔는데, 상자를 열자 각종 서신과 서류가 한가득 들어 있다.
“빙고! 증거 찾았네요. 후 힘들었다.”
세이온의 퀘스트는 어렵기로 유명했다. 초보 때 주는 퀘스트야 정해져 있다지만 웬만한 퀘스트는 전부 NPC들 간의 관계를 통해 그때그때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거의 무한정의 경우의 수가 존재했다. 전투 재능은 하등 도움이 안 될 이 퀘스트에 부딪혔을 때 누나가 조언을 해 줬다. 시청자들과 함께 풀라고…….
누나의 조언에 따라 시청자들과 퀘스트를 시작할 때는 이걸 진짜 잘 해결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역시나 집단지성이라는 건 대단했다. 시청자들은 내가 놓쳤던 부분이나 생각지 못했던 디테일로 나 대신 추리를 해 줬고, 나보다 앞선 세이온 경험을 통해 퀘스트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클리어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수거한 증거와 함께 도날드를 카렌 씨에게 데려가자 카렌 씨는 내가 내민 증거들을 하나하나 읽고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어리석군요. 도박에 빠져 영지를 팔아넘기려 하다니…….”
“카렌 경, 그건 오해일세. 난 백작가를 위해 평생 헌신해 왔어. 도박 빚이라니… 이보게!”
“닥치세요! 이렇게 카머슨 남작의 인장까지 찍힌 증거를 두고도 거짓을 말하려 하다니! 도날드! 백작영애의 납치 사건에도 연루된 바 참형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건 나도 모르는 물건이야! 정말일세!”
자신이 좆 됐다는 걸 깨달은 도날드가 고개를 마구 흔들었지만 이미 끝난 이야기다. 잠시 후 병사들과 기사들이 찾아와 증거와 함께 도날드를 데려가자 카렌 씨가 조금은 피곤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덕분에 백작령 내의 세작들을 모두 처리할 수 있었네요.”
띠링~
[백작령의 세작 퇴치]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보상: 9,000exp, 50골드, 일반~전설 아이템 뽑기권 x1, 영지 기여도 50점
[영지 기여도가 500점을 돌파하여 승급이 가능합니다.]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니에요. 아무튼 이 일은 내가 직접 백작님께 보고 드릴 테니 돌아가서 쉬세요.”
“네.”
카렌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난 그녀의 레인저탑을 나와 내 숙소로 돌아왔다.
“일단 포디나 퀘스트는 다 했네요. 기여도 500점 미션 클리어했습니다.”
[페르단드 님 100,000원 후원 감사합니다.]
-성공 축하드립니다. 이제 준남작 작위만 얻으면 되네요.
-축하축하! 이제 백작만 잘 삶으면 됨. 500점에 말만 잘하면 작위 득
-백작이 좋아할 만한 선물 가져가면 더 좋을 거예요.
-직빵은 백작영애 꼬시는 건데…….
-평민 나부랭이가 백작 영애 꼬시면 80% 확률로 댕강임.
-ㅎㅎㅎ 20% 확률로 부마 되는 거죠.
-겨우 500점으로 도전하면 안 됨. 최소 1,000점이 안전빵이죠.
-아… 나 예전에 기여도 올린다고 거의 한 달 동안 입에 단내 나도록 뛰어다녔는데…….
-그래서 지금 계급이 뭔데요?
-ㅎㅎㅎㅎㅎㅎ 새로 키워서 다시 평민이요. 준남작까지 찍었는데 자작가 아들내미 잘못 죽여서…ㅜㅜ
세이온에서 신분을 상승시키기 위해서는 기여도를 모아야 했다. 흔히 공후백자남이라고 불리는 오등작뿐만이 아니라 평민에서 천민으로도 떨어질 수 있는 이 신분제도는 더 상위의 직업을 얻기 위해서 꼭 필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물론 모든 직업이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준귀족이 되는 것만으로 웬만한 범죄는 면책 특권이 적용된다.
일례로 어떤 유저가 퀘스트를 하다가 운 좋게 후작가 미망인 NPC의 정부가 되어 남작의 작위와 기사라는 직업을 얻기도 했다니 말만 잘해도 엄청난 보상을 얻을 수 있었다. 뭐 나중에 ‘모녀XX’라는 업적을 따려고 미망인 NPC의 딸과 통정을 하다 걸려서 다 뺏기고 목이 잘려 버렸지만 말이다.
아무튼 지금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슬슬 들어가 볼까.’
진짜 중요한 건 바로 500연승 도전이다.
시청자들과 대화를 나누던 나는 빠르게 투기장 창을 열어 한 명을 찍어 1승을 찍고는 곧바로 닫아 버렸다.
499승
“감질나게 1승씩 올리기 참 힘드네요.”
-ㅋㅋㅋㅋ게릴라 투기장 러쉬 성공.
-어쩔 수 없잖아요 ㅋㅋㅋ 지금 케이님 500연승 막겠다고 중국애들 눈에 불을 켜고 있으니…….
-지들은 어뷰징해 가지고 500연승 찍은 주제에, 케이 님 어뷰징한다고 매일 지랄거리는 거 보면 진짜 있는 정도 떨어짐.
“제가 실수한 거죠. 천공제만 잡으면 좀 잠잠해질 줄 알았는데 이렇게 철면피일 줄은 몰랐습니다.”
일주일 전 천공제랑 싸우며 내가 예상했던 건 죄다 빗나갔다.
난 중국 애들이 캐삭빵을 한 주제에 도망친 천공제가 부끄러워 500연승 저지에 손을 뗄 줄 알았다. 중국인들이 명분과 체면에 목숨 건다고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건 그들을 너무 좋게 봐준 것이었다. 덤빌 거면 캐삭빵 걸고 덤벼라, 하고 말했던 것도 지켜지지 않았다. 웃기는 건 하는 짓을 봐서는 내가 패배하자마자 캐삭하라고 공격을 퍼부을 것 같다.
하는 꼴들이 미워서 골탕 먹일 생각에 떠올린 게 게릴라 투기장이다.
하루 종일 딴짓하다가 뜬금없이 접속해 1승씩 추가한다. 날 저격하기 위해 하루 종일 대기하고 있는 놈들에게 스트레스나 왕창 받으라고 시작했는데, 이게 의외로 효과가 좋았다. 나야 하고 싶은 거 다 하다가 접속하는 거지만, 투기장 방을 파놓으면 딴짓을 할 수 없으니 저들 입장에서는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일주일간 야금야금 올려서 이제 드디어 1승이 남았다.
“무패의 제왕 옵션 정말 궁금하네요.”
개인전 500연승 단체전 100연승의 업적인 무패의 제왕의 옵션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난 그 옵션의 내용을 모두에게 공개하기로 미리 공지해 놓은 상태라 많은 사람들이 내 행보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중이다.
-오, 드디어 마무리 짓는 건가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무패의 제왕이 나오네ㅎㅎㅎ
-케이 님 어떻게 보면 운 진짜 좋음. 진짜 강한 애들은 50레벨 이상부터인데 워낙 저렙에서 시작하셔서 걔들 전부 다 피함.
-쯧쯔,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또 뇌피셜 돌리는 사람 등장했네. 저렙 때 연승 찍는 건 쉬운 줄 암? 오히려 고렙 때보다 저렙 때가 더 위험함. 저렙 때는 아이템이나 스킬 영향 많이 받아서 막말로 지갑전사 제대로 만나 교통사고 당하면 테크닉이고 뭐고 없이 순삭 당함.
-그건 네가 약한 거곸ㅋㅋㅋㅋ
-뭐 새끼야? 너 어느 도시야?
-수도 산다. 촌놈아.
[서울곰치 님이 강제 퇴장당했습니다.]
[호랑나비전사 님이 강제 퇴장당했습니다.]
-마지막 1승은 언제 하실 건가요? 지금 당장?
“아니요. 그건 아주 나중에 할 겁니다. 지금 중국애들 499승 저지 못한 것 때문에 신경 곤두서 있을 텐데 굳이 찾아 들어갈 필요는 없죠.”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비겁하다! 빵즈 놈!
-실망이네.
-케이 님. 좀 비겁한 거 같지 않음?
-그냥 500연승 지금 해라.
-잠복해 있던 짱깨들 발견 ㅋㅋㅋㅋ
-짱깨라는 말은 중국인에게 모욕입니다.
-니들이 빵즈빵즈 거리는 거나 멈추고 말해라.
-열 받죠? 할 말 없죠?
-야, 비겁으로 따지면 너네 천공제 캐삭 영상 먼저 보내라고 해라. 캐삭 약속한 영상까지 있는데 조작된 거라고 입에 거품 무는 거 진짜 안 부끄럽냐.
-우린 조작만 일삼는 너희 빵즈 놈들보다 우리 천공제를 믿는다.
“에휴, 말다툼하기도 질리네요. 일단 저는 저녁 먹고 좀 쉬겠습니다.”
-고생하셨어여~
-케이 님 파이팅~
방송을 마치고 캡슐 밖으로 나오니 창밖이 어둑하다. 부엌으로 가 레토르트 식품 두 개를 냉장고에서 꺼내 껍데기를 뜯은 후 전자렌지에 집어넣었다.
지이이잉…….
전자렌지가 돌아가는 사이 난 혜미 누나가 식전에 먹으라고 했던 영양제를 싱크대에 올려놨다. 스틱 형태로 되어서 하얀색의 겔을 짜먹는 것이었는데, 장시간 누워 있어 장운동이 원활하지 않은 이들을 위해 고안된 일종의 정장제란다. 먹고 나서 서너 시간은 접속을 가급적 자제하라나, 뭐라나…….
“이걸 겁나서 어떻게 먹냐. 쯧…….”
쓰레기통에 버린 후 창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가니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온다.
“적적하네.”
혼자 있는 시간이 낯선 것은 아니지만 가끔 그 공허감이 못 견디게 싫을 때가 있다. 왜 그럴 때 있지 않은가. 낯선 사람들 사이에 섞이고 싶을 때…….
“나가서 먹어야겠다.”
주머니도 든든한데 집에서 인스턴트로 궁상떨고 있을 이유가 없다. 난 청바지에 회색의 후드집업 캔버스화를 신은 난 빌라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