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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보스 스킬 쓴다-63화 (63/154)

63. 인간 사냥꾼

-그만해! 이런 짓 한다는 말은 없었잖아!

-킥킥킥! 병신이냐? 잡았으면 맛을 봐야지.

-제발 그만해! 부탁이야!

한 남자가 무릎을 꿇은 채 빌고 있다.

-뭘 그만해! 크크크… 이제 한참 재미있어지려고 하는데…….

기다란 귀의 여자 엘프 하나가 남자들에 둘러싸여 오들오들 떨고 있다.

-키도…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미친년, 아직 상황 파악 안 됐나 보네. 저 쫄보 새끼는 널 우리한테 안내한 거야.

-그럴 리 없어요! 키도! 거짓말이죠?

엘프가 빌고 있는 남자에게 소리쳤다.

-끄윽, 제발… 이렇게 빌 테니 그녀를 놔줘.

-놔주긴 뭘 놔줘. 너 따위가 엘프의 친구 칭호 없었으면 우리가 같이 놀아 줬을 것 같냐?

-캬캬캬! 자식아. 오늘 이 형님들이 너한테 신세계를 보여 줄 테니까 얌전히 주는 거나 처먹어.

-부탁이야. 그만둬!

무려 한 시간이나 길을 헤매다 찾아낸 일본 놈들은 한창 촬영이 진행 중이었다.

“흠…….”

마치 삼류 일본 애니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런 영상을 뽑아내는 것도 능력이지 싶다.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창과 후원 메시지를 보면 AV 제작자들이 모두 이쪽으로 전업한 거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도 든다. 저 NPC 엘프도 이 상황극의 배우가 아닐까 싶기는 하지만 내가 알기로 세이온이 NPC들은 제4의 벽. 그러니까 게임 외 현실을 다루는 대화는 인식하지 못한다고 알고 있다. 한마디로 지금 저 엘프가 보이는 반응은 순수 반응이라는 것이고, 일본 애들이 어떻게 영상을 만드는지 몇 편 감상한 바로는 저 엘프는 곧 매우 더러운 짓을 당하게 된다. 제목에 NTR&BSS라고 써져 있는데, 지금 뭐 그런 것을 알고 싶지는 않고… 지금 해야 하는 건…….

[피의 검]

피가 쭉쭉 달더니 이내 메시지가 떠올랐다.

[진(眞) 광폭화]

생명력이 10% 이하로 떨어지며 공격 속도 2배와 500% 데미지 상승의 광폭화가 활성화되었다. 쿨타임 30분짜리지만 내가 가진 여러 가지 업적들과 합쳐지면 정말 끔찍한 데미지 증폭 효과가 있다. 거기에 카렌이 준 푸른바람의 장궁에 붙은 스킬인 가이디드 에로우가 포함되면 정말 신나는 사냥이 가능하다.

이곳에 오기 전 이 가이디드 에로우 스킬에 대해 알아봤다. 전설 등급에서 비인기 스킬류에 속해 있었는데, 왜 그런가 했더니 스킬에 데미지 증폭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먼 거리에서 저격이 가능하기 때문에 약탈자들에게는 꽤 인기 있지만 소모되는 마나에 비해 데미지가 너무 약해 사양 스킬 중 하나다. 그러나 이게 나한테 들어오니 전혀 다른 스킬이 되었다.

최근 투기장의 제왕 업적으로 인해 PVP 시 100% 데미지 상승 효과를 얻은 후로 내 대인 공격력은 웬만한 최상위권 유저에 맞먹는다고 누나가 말해 줬다. 그 말은 내 원거리 공격력도 끔찍하게 강해졌다는 뜻이지.

드드드득…….

고개만 빠끔히 들어 머리를 샛노랗게 물들인 갈색 피부 날라리 대가리를 목표로 시위를 당긴다. 거리는 약 100미터… 시야 한쪽에 배치해 놓은 실시간 방송을 통해 놈들의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보이는데, 마침 먹잇감의 껍질을 대부분 벗기고 본격적인 시식에 들어가려는 참이다. 내가 그런 꼴은 또 못 보지.

파아앙!

[가이디드 에로우]

시위를 놓자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화살이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음 같아서는 감상 좀 하고 싶지만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건 난사다. 연달아 시위를 당기자 거목과 거목 사이를 뚫고 화살이 날아갔다.

드드득! 파앙! 드드득! 파앙!

가이디드 에로우 스킬도 필요 없다. 지금 쏘는 것은 가이디드 에로우의 존재를 숨기기 위한 것일 뿐이니까. 물론 무한의 화살통 덕분에 화살 걱정도 없고, 가이디드 에로우가 아니라고 해도 1분간 [진(眞) 광폭화] 효과는 그대로니까.

쉬이익!

퍼어억!

-컥!

상의가 다 찢어진 여자 엘프를 바닥에 쓰러뜨린 채 위에 올라타 있던 노란 머리 태닝남의 가슴에 한순간 수박만 한 구멍이 뻥 하고 뚫렸다. 나름 머리를 노린다고 노렸는데 아이템 스킬이라 그런지 정교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러나 가슴에 구멍이 뚫렸다는 건 즉사 판정이라는 뜻이고, 녀석이 나처럼 불사 계열 스킬이 없는 이상은 게임 아웃이다.

가이디드 에로우가 노란 머리를 죽인 뒤 뒤이어 쏜 내 화살들이 현장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쉬이익! 쾅! 쉬이익! 콰쾅!

-엘프들이다!

-이런 빌어먹을! 도망쳐!

내 공격을 엘프들의 것으로 오해했는지 영상을 찍고 있던 놈들이 헐레벌떡 도망치기 시작한다.

퍼어엉!

“으악!”

한 녀석이 내 화살에 꿰여 거목에 날아가 박혔다. [진(眞) 광폭화]의 영향으로 데미지는 괴랄하기 그지없어 단 한 방에 어깨를 포함한 가슴이 박살이 났다.

[레벨업 하였습니다.]

“얼쑤!”

레벨들이 높아서 그런지 단 두 놈만으로 레벨업 해 버렸다. 이제 33레벨. 저들의 레벨은 아마 못해도 50레벨에서 60레벨 정도 될 것이다.

-센티넬이 떴다!

-뭐라고? 센티넬이 이런 외곽까지 왜 나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씨발! 빨리빨리 튀어!

내 미친 데미지에 오해의 골이 더욱 깊어진 놈들이다.

나무에 박힌 녀석을 뒤로한 채 혼비백산한 셋이 거목 사이를 미친 듯이 달린다.

“으음…….”

놈들은 방송이 켜진 줄도 모르고 여전히 도망치기 바쁘다. 이게 좋은 게 방송으로 볼 수 있으니까 녀석들이 옆으로 도는지 아니면 후퇴하는지 알 수 있어 편하다. 그냥 도망칠 생각인가 본데 난 놓아줄 생각이 없다.

[친위대 소환]

“크릉! 컹컹! 크앙!”

난 구씨 삼형제를 소환했다. 내 레벨이 낮아 아직 그렇게 강한 건 아니지만 공격 편향의 내 능력치와 웬만한 현질러들 뺨치는 장비 세팅 그리고 일반적인 몬스터 AI와는 비교할 수 없는 뛰어난 머리로 셋이 덤비면 웬만한 유저 하나는 찜 쪄 먹을 수준이 된다.

“추적!”

“크아앙!”

내가 손가락을 들어 가리키자 구씨 삼형제는 놀 특유의 민첩한 몸놀림으로 가장 처져서 도망치는 녀석을 쫓기 시작했다. 잠시 후 유저의 것으로 짐작되는 비명 소리가 숲을 울린다.

“크라락! 크앙!”

“으, 으아악!”

멀리서 들리는 비명 소리를 감상하며 난 녀석들이 일을 벌이고 있던 곳으로 접근했다. 여자 엘프와 그녀를 이곳으로 유인해 온 멍청이가 서 있다.

“미안해. 미안해. 용서해 줘! 내 친구 녀석이 질 나쁜 놈들이랑 어울리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럴 줄은 몰랐어.”

남자 녀석이 질질 짜면서 여자 엘프에게 용서을 구하고 있었고, 라리엘이라는 여자 엘프는 남자 녀석에게 받은 망토로 찢어진 상의를 가리는 중이다. 망토를 두 손으로 꾹 잡은 채 싸늘한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던 여자 엘프가 잠시 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됐어. 괜찮아 난…….”

“고마워. 고마워. 라리엘…….”

눈물을 글썽이며 웃는 남자다.

와, 저걸 용서해 준다고? 엘프들 성격이 한번 믿음을 주면 웬만하면 변하지 않는다더니 진짜인가 보다. 그러나 엘프는 용서해 준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난 봐줄 수 없다. 하나하나가 피 같은 경험치니까.

[가이디드 에로우]

쉬익! 퍼어억!

워낙 근거리라 그런지 쏘아 낸 화살은 남자의 뒤통수에 정확히 적중했다. 광폭화 효과는 사라졌지만 투구를 안 쓰고 있는 탓에 즉사 판정이 나 힘없이 꼬꾸라진다.

“키도!”

놀란 여자 엘프가 남자의 이름을 외쳤지만 이미 죽어 버린 후다.

내가 접근하자 엘프가 나를 향해 표독스러운 눈빛을 던진다.

“너……! 키도를……!”

“…….”

쳇… 그래도 나름 생명의 은인인데 너무하네. 바꿔 말하면 내가 엘프의 친구가 되었을 때 이런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기는 한데 섭섭한 건 섭섭한 거다. 난 그녀를 무시한 채 첫 번째 죽은 노란 머리와 나무에 박혀 죽은 녀석을 파밍했다.

“좋아.”

레벨이 높아서 그런지 나온 상당한 고가템들이 드랍됐다. 그것도 무려 +5강 희귀급 활이다.

“오… 활…….”

희귀급이지만 강화템은 항상 비싸다. 안타까운 건 내 가방이 꽤 무거워 몇 개 못 챙길 것 같다는 거고… 구씨 삼형제가 사냥한 녀석을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질질 끌고 왔다. 파밍해서 나온 건 별거 없지만 난 육포를 꺼내 입에 물고는 녀석들에게도 하나씩 던져 주며 말했다.

“잘했어.”

“크릉! 크앙크앙! 크르릉!”

펫 키우는 스트리머 채널에서 봤는데 음식을 공유하면서 칭찬해 주면 펫이 엄청 좋아한단다. 무리의 리더와 동질감 어쩌고 하던데, 그딴 건 모르겠고 그냥 귀여워 죽겠다. 내가 셋의 머리를 벅벅 문지르고 있는데 라리엘이리는 여자 엘프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내 등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망토 어디서 난 거지? 그건 분명 센티넬님들만 가진 건데?”

“루네라는 분한테 받은 겁니다.”

“앗, 루네 님이요?”

루네라는 말에 급격히 어투가 공손해진다. 걸치고 있으면 엘프들에게 공격받지 않을 거라고 하더니 진짜네. 눈빛도 종전에는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더니 갑자기 순둥 순둥하게 변했다.

게임이라 감정 변화가 심한 건가. 친밀도로 따지면 혐오에서 관심 정도로 상승한 것 같은데 에픽 퀘스트를 해결하기 위해 푸른바람엘프 세력과 우호도를 쌓아야 하는 내 입장에서야 참 바람직한 변화다. 구씨 삼형제를 역소환한 나는 라리엘이라는 엘프를 돌아보며 말했다.

“키도라는 놈 다시 나타나면 곧바로 죽여 버려요. 멍청하게 따라가지 말고. 당신, 나 아니었으면 험한 꼴 당하고 죽었을 겁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건 그렇고 이거 받으세요.”

난 녀석들에게 파밍한 활과 카렌의 활통을 그녀에게 건넸다.

조금 아깝기는 하지만 이 엘프의 친밀도를 높이면 푸른바람엘프족과의 우호도도 높아지니까 투자 차원이다.

“……?”

“돌아가다가 다른 놈들과 마주칠 수 있으니 호신용으로 드리는 겁니다.”

“저, 같이 안 가시나요?”

“저는 블루 포레스트 외곽을 돌아다니며 엘프들을 노리는 놈들을 사냥할 생각입니다.”

경험치 덩어리들이 사방에 깔렸는데 이걸로 만족할 리가 있나.

누나가 준 ‘약탈자 고인물 되는 법’을 보면 유저를 같은 사람이 아니라 경험치로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동 레벨 유저를 죽였을 때 얻는 경험치가 비슷한 레벨의 몬스터 50마리와 같은 수준이다. 나보다 훨씬 레벨 높은 놈들을 죽였으니 최소한 100마리 정도를 사냥한 것과 같은 수준이라는 뜻이다.

물론 다 좋기는 한데 몇 가지 문제가 있다.

“다음 타깃은 어떻게 찾나.”

지도가 없는 건 검색과 길찾기 막대로 어느 정도 커버한다지만 목표를 찾는 건 발로 뛰는 수밖에 없다. 방송하는 놈들이 자기들 일 벌이는 곳을 말해 줄 리 없는 터라 조금 전 잡은 놈들도 채팅방의 다른 시청자들에게 넌지시 물어 알아냈다. 그때 라리엘이라는 엘프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저, 괜찮으시면 그 사냥 제가 껴도 될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난 그녀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물론 엘프가 따라붙어 준다면야 나쁠 건 없다. 아무래도 나보다는 이 근방 지리를 잘 알 테니 내가 방송을 보며 근처에 뭐가 있는지 해가 어느 방향에 있는지만 말해 줘도 위치를 가늠해 줄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이 엘프는 저 아는 사람 죽였다고 날 도끼눈 뜨고 보던 년이다. 기습적으로 치고 빠지며 적을 상대할 건데 과연 내 명령에 따라 줄지도 의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기각!

“역시 그렇군요.”

아쉽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라리엘이다. 으음, 뭔가 사고방식이 잘 이해가 되지 않기는 하지만 상관할 필요는 없겠지.

“그럼 이만……?”

내가 몸을 날리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눈앞에 퀘스트가 떠오른다.

[반복 퀘스트]

-푸른바람엘프족 장로의 딸 라리엘과 함께 블루 포레스트의 평화를 위협하는 침입자를 퇴치하시오.

-침입자: 0/10

-보상: 50,000exp, 100골드, 라리엘과의 친밀도 상승, 푸른바람엘프족 우호도 상승

“어라?”

이러면 얘기가 달라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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