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보스 스킬 쓴다-77화 (77/154)

77. 이제 셋

“멈춰라!”

천지가 떠나갈 듯한 사자후가 전장을 진동했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병사들은 물론이고 나조차도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릴 정도다.

“으으…….”

“넌 운이 좋구나.”

내 검에 배가 뚫릴 뻔한 기사가 신음을 지르며 뒷걸음친다.

“모두 물러나라!”

다시금 사자후가 터지자 나를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이 대열을 갖추며 뒤로 물러났다. 음… 파밍할 시간 없어서 골치 아팠는데 잘됐네. 열 명의 남녀가 내게 걸어오고 있다. 비단으로 된 풍성한 소매와 하늘하늘한 겉옷 위로 금속제 방어구를 착용하고 있다. 투구를 안 써서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장발이 바람에 휘날린다.

“흠…….”

중국 무협 게임의 전형적인 전투복장. 척 봐도 중국애들 같은데, 쟤들은 세이온을 가지고 무협 게임을 하네. 물론 쟤들 컨셉 놀이에 대해 딱히 딴지를 걸 생각은 없다. 난 지금 파밍을 해야 하니까.

‘친위대 소환.’

“컹컹! 크릉! 크아앙!”

황구, 백구, 흑구 차례로 소환되었다. 덩치가 거의 나만 해져서 놀이 아니라 늑대인간이다. 난전 중에 꺼내 봤자 1분도 못 버틸 것 같아 쓰지 않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참 요긴하다.

“파밍해.”

“멍!”

“멍멍!”

친위대 소환 스킬의 티어가 올라가며 새롭게 생긴 자동 아이템 파밍 옵션이다.

“좋아.”

진공청소기처럼 인벤토리로 들어오는 아이템을 보니 기분이 좋아진다.

대부분 NPC들이라서 그런지 대부분 고급 등급 아이템이지만, 잡은 숫자가 워낙 많아 희귀 등급도 군데군데 보인다. 전설 등급 가방을 가지고 있기를 망정이지 절반도 못 먹을 뻔했다.

“희귀 등급만 주워.”

“컹컹!”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인 구씨 삼형제가 파밍을 하는 사이 난 30m 앞에 멈춰선 열 명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남자 여섯, 여자 넷 아주 조화로운 숫자다. 한껏 폼을 잡고 있던 그들은 내가 자신들에게 시선을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치나제국 진무십천의 이름으로 명한다. 엘프의 악몽! 얌전히 투항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마!”

“…….”

와, 순간 항마력 뚫릴 뻔했다. NPC들과 대화할 때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잘 알아듣지 못하니 어쩔 수 없다 쳐도 같은 유저끼리 그러니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다.

“역시…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시려 드는군.”

“…….”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저들끼리 뭐라 중얼중얼 거린다. 그런데 열 명 중 하나가 낯이 익다.

“천공제네.”

예전에 투기장에서 만났던 그 녀석이다. 투기장 30레벨대의 절대 강자 어쩌고 하면서 내 손발을 오그라들게 하다가 목이 따였던… 음, 여기서도 역할 놀음 중인가. 투구 때문에 못 알아보는 것 같은데 굳이 아는 척할 필요는 없겠지. 잠시 후 이야기가 끝났는지 천공제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너 따위에게 우리가 전부 나서는 건 수치스러운 일! 진무십천의 일천인 나 무당제일검 천공제가 네 악행에 종지부를 찍어 주마.”

스르릉!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를 늘어뜨리며 자세를 낮춘다.

예전에 봤던 그 푸른색의 검을 뽑아 든 녀석이 조금씩 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투기장에서 했던 짓을 여기서도 하고 있네.

그건 그렇고 무당제일검이라… 설마 나머지 녀석들은 소림 어쩌고라던가 개방 어쩌고는 아니겠지.

슛… 슈슛…….

녀석의 신형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본격적으로 빨라지기 시작한다. 다행이라면 처음이 아니라는 것 이미 저 짓은 겪어 봤다. 게다가 당시 상당히 애를 먹은 탓에 녀석의 스킬은 위튜브로 알아봤다.

‘이형환위, 이화접목, 일섬향…….’

광고하기 좋아하는 녀석인지 스킬들을 자랑스럽게 공개해 놔서 찾기 쉬웠다.

친절하게 파훼법까지 올려 줘서 잘 기억하고 있다. 녀석의 신형이 본격적으로 둘로 쪼개져 나를 향해 짓쳐든다. 확실히 엄청난 속도! 이형환위는 최상급의 속도와 함께 극한의 회피율 패시브를 지닌 보법이었다.

파팟! 파파팟!

‘시작은 항상 이형환위…….’

그러나 난 당황하지 않았다. 상대가 둘로 쪼개진 잔영을 보며 당황해 할 때 녀석은 항상…….

팟! 쫘아아악!

버릇처럼 뒤에서 나타난다.

“아주 나쁜 버릇이지.”

“크악!”

난 몸을 빙글 돌리며 전면의 두 개의 잔영이 아닌 뒤에서 순간이동하듯 나타난 천공제의 머리를 그대로 베어 버렸다.

깔끔히 반으로 절단되어 날아가는 녀석의 표정이 참 볼만하다. 그러게 무협 컨셉 놀이 좀 그만두고 투구 좀 제대로 쓰지. 신화 전설급 아이템으로 무장하면 뭐하나. 머리가 노출되어 있는데.

탁!

빙글빙글 날아오른 머리를 솜씨 좋게 붙잡았다.

[레벨업 하셨습니다.]

오, 레벨 좀 올렸나 보네. 드디어 50레벨! 십여 개의 메시지가 주르륵 올라왔지만 스킵해 버렸다. 지금은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

고개를 돌려보니 얼빠진 표정의 아홉 명이 보인다.

쟤들도 경험치 많이 줄 것 같다.

“좋아.”

난 손에 들린 머리를 진무십천에게 내던지고는 산들바람걷기를 시전했다.

* * *

“어?”

공동마검 마선풍은 무당제일검 천공제가 단숨에 목이 날아가자 얼빠진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잘난체하며 나설 때야 속으로 욕을 했지만 저렇게 썰려 나갈 줄은 몰랐다. 그의 옆에 오만하게 서 있던 아미검후 제갈혜 또한 같은 표정으로 서 있다. 거들먹거리고 자랑하기 좋아하는 천공제지만 자신들 진무십천 중 수좌인 일천의 자리에 있는 것이 그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단 일검에 썰렸다? 설상가상으로…….

쉬이이익!

경악에 물든 표정의 천공제의 머리가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고 있다.

“흥! 얕은수를!”

퍼엉!

코웃음을 친 공동일검 진무혁이 주먹을 뻗어 날아오던 머리가 터뜨렸다.

훅! 훅훅! 파팟! 팟!

양팔을 요란하게 흔들며 그가 자랑하는 흑룡대력수의 기수식을 준비했다. 물론 진짜 흑룡대력수가 아니고 카오스피스트라는 신화급 스킬의 이름을 바꾼 것이지만 그 위력만큼은 진무십천 중 최강이라고 할 만하다.

“멍청한 천공제가 우습게 당했지만 나는 다를 것이다!”

호기롭게 외치는 진무혁… 그러나 그는 앞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멍청하다고 말은 했지만 천공제는 진무십천의 일천이라는 자리를 가질 정도로 강했다. 그런 그가 한 방에 죽었다는 건 그만큼 강한 상대라는 것. 그러나 잠시 후 상대가 보인 행동에 자리에 있는 구인은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

“도망쳐?”

머리를 던진 상대가 그대로 숲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한 것이다. 한순간 긴장한 것이 허탈할 정도로 어이없는 모습. 진무혁이 피식 웃었다.

“도망치는 꼴이 우습군요.”

“감히 우리에게서 도망치려 하다니…….”

“그렇지. 특히 나 청성의 청뢰대협 앞에서 말이야.”

도사복 차림의 눈이 날카로운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내가 먼저 가지. 놈의 목은 내 것이다.”

팟!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진무십천 중 가장 빠른 보법을 지닌 그다.

“칫!”

“뺏길 수는 없지.”

나머지 8인도 덩달아 달리기 시작했다. 분명 천공제를 죽인 한 방에 모든 힘을 끌어모은 것이 분명하다. 자신들도 그런 비장의 스킬 하나씩은 가지고 있기에 쓰고 난 후가 어떤지 잘 알고 있다. 한마디로 놈의 목숨을 끊을 절호의 기회라는 것! 그러나 청뢰대협보다 빠른 이들은 없었다. 청뢰대협은 점차 가까워지는 놈의 등을 바라보며 득의에 찬 미소를 지었다.

슈슉!

팔이 안으로 감기며 시위를 당기듯 팔이 꺾이는가 싶더니 이내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그러자 그의 검으로부터 긴 오러가 뻗어 나갔다.

“옥천마현검!”

그의 스킬은 오러를 채찍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상대의 몸에 꽂아 버릴 수도 있고, 휘감아 그대로 갈아 버리기도 한다. 유틸성이 뛰어난 전설급 스킬로 가장 숙련도가 뛰어나다. 그는 그대로 오러를 상대의 다리를 베어 버리려고 했다. 기동성을 봉쇄한 후 농락한 후 죽여 버릴 것이다.

그의 오러가 길게 뻗어 나갈 때였다.

휘릭!

도망치던 상대가 갑자기 뒤로 돌아섰다. 도망칠 수 없으니 최후의 발악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표정을 마주친 순간 청뢰대협은 등골을 싸하게 타고 올라오는 소름을 느꼈다.

‘웃어?’

상대는 웃고 있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자신이 의도했다는 것처럼. 허풍이라 생각했지만 언제 뽑았는지도 모를 상대의 검에 자신이 쏘아낸 오러를 집어삼켜지는 것을 보며 그는 크나큰 낭패를 느꼈다.

푸아아악!

* * *

내가 도망치는 척하자 신나게 달려오던 녀석의 허리가 양분되며 뒤로 날아간다.

기쁨의 표현 따위는 없다. 내 전면에는 아직 여덟이라는 숫자의 강자가 달려들고 있으니까. 다행이라면 첫째 그들의 얼굴 모두에 당황의 표정이 어려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들이 상대하기 적당하게 떨어져 있다는 것, 세 번째는 시간이 기막히게 맞아떨어져 진(眞) 광폭화가 발동했다는 것. 마지막으로 왠지 저들이…….

“쉬워 보인다는 거지.”

처척!

마주 달린 두 걸음 만에 두 번째 상대와 마주했다. 양 주먹을 감싼 완갑을 낀 덩치 큰 놈이다. 놈의 주먹이 내 머리를 노리고 뻗어온다.

“복룡출해!”

파아아아아아!

녀석의 전신을 휘감은 검은 흑룡이 주먹에서 쏘아져 내게 날아든다.

다행이라면 녀석이 스킬명을 말해 준 탓에 스킬이 발동하기 전 피했다는 것이다.

‘산들바람걷기.’

속도에서는 꿇리지만 산들바람걷기는 회피에 극대화된 보법이다. 종이 아닌 횡의 움직임에 탁월하다는 뜻! 내가 흑룡을 피하며 안으로 파고들자 놈의 무릎이 내 턱을 노리고 솟구친다.

“열황각!”

당황하면서도 정석적인 대응을 하는 걸 보면 나름 침착한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공격이 너무 정직하다. 넌 몬스터만 잡았구나? 난 몬스터보다 사람을 더 많이 잡고 레벨업 했는데.

쿵!

강하게 바닥을 밟으며 무릎을 최대한 굽힌다. 바닥에 붙듯이 상체를 뒤틀어 무릎을 피하고 자연스럽게 가슴에 붙인 검이 녀석의 가랑이에 붙었다.

쫘아악!

“아악!”

아무리 통각이 약하다고 해도 언제나 민감한 곳은 있는 법이다. 특히 남자들에게는 작은 고통도 크게 다가오는 곳이라 게임 속에서도 이곳을 공격하는 건 금기 중의 금기였다.

그런데 뭐 어쩌라고? 내가 굳이 그걸 지킬 이유가 있나? 고통에 얼룩진 놈의 품으로 파고 들어간다.

내 몸은 지금 진(眞) 광폭화 상태다. 한마디로 부딪히면 죽는다는 뜻.

츠컥!

무릎이 펴지며 반동으로 몸을 회전시키자 검의 궤적에 걸린 놈의 머리가 반으로 쪼개졌다.

“둘”

“죽엇!”

슬쩍 몸이 공중에 떠오른 틈을 타고 여인이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오러가 잔뜩 주입된 협봉검을 찔러 온다. 그녀의 등 뒤로 천사의 날개가 활짝 펼쳐진다. 이것도 신화급 스킬인가?

청순한 얼굴에 사나운 표정이 참 언밸런스다. 앞서 둘을 처리하는 동안 확실히 자세를 잡은 터라 이제 기습은 통하지 않는다. 기습이 통하지 않으면? 정공법이지.

꾸욱…….

난 듀랜달을 붙잡은 두 손에 힘을 줬다. 피의 검과 진(眞) 광폭화를 통해 증폭된 에너지가 모여든다.

“흡!”

기합과 함께 듀랜달을 오러가 가득한 여인의 검에 마주쳐 갔다.

‘어스 브레이크.’

콰콰콰콰콰쾅!

검과 검이 마주친 순간 엄청난 소음과 함께 미녀가 폭발하듯 터지며 상반신이 찢겨 나갔다.

당연한 일이다. 오러의 운용이 능숙해진 난 부채꼴로 퍼져 나가는 오러를 한 점으로 집중시킬 줄 안다. 웬만한 보스도 원킬을 내는 스킬을 한 점으로 집중했으니 저렇게 폭사하는 것도 당연하다.

“셋… 데스레이.”

삐이이이잇!

폭발하는 살점을 뚫고 붉은 광선이 뒤편에 서 있던 놈의 머리를 관통했다. 대머리에 승복을 입은 걸 보면 소림사 컨셉이었던 것 같은데, 빤닥빤닥한 머리에 찍힌 계인이 좋은 표적이 되어 줬다.

“다섯!”

쓰러지는 여인의 시체를 짓밟고 앞으로 튀어 나가니 이제는 공포에 질린 눈들이 나를 맞이하고 있다. 남은 것은 이제 넷이다.

“어, 어어…….”

넷은 서서히 뒷걸음질 치고 있다.

호기롭게 나타났던 것과는 다르게 이제 상황파악이 제 대로 된 것 같다. 토끼 잡으러 출동했는데 사냥감이 호랑이면 좀 황당하긴 하겠지. 지금 저들에게 난 어떻게 비칠까? 확인하고 싶다. 극대화된 감각이 주위에 모든 것들을 집어삼켜 내게 알려준다. 난 강하다고… 절대 지지 않는다고…….

“자, 잠시만요!”

풍만한 미드와 잘록한 허리가 돋보이는 붉은 경장의 미녀가 내게 걸어오며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걸어가자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꽈드드득!

그녀의 입이 열릴 찰나 내 듀랜달이 그녀의 쇄골에서부터 복부까지 내리그어졌다. 당황하는 눈빛 그대로 쓰러졌다. 미녀에게 저지른 짓치고는 욕 좀 먹을 것 같지만 상관없다.

말은 싸우기 전에 하는 거지. 말발이나 미모에 자신이 있었던 것 같았는데 안타깝게도 난 그런 것에 초연한 편이다.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남자 둘, 여자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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