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절대의 차원
“우… 으으으…….”
셋은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하긴 이해는 간다. 기세 좋게 나타났다가 일곱이 그림처럼 삭제됐으니까. 전투라도 제대로 했으면 모를까 일곱 전부터 어이없게 죽어 버렸으니 좀 충격 좀 받았나.
“야. 벌주 먹인다며… 와 봐.”
손가락을 까딱거리니 셋의 얼굴이 붉게 물든다. 덤비지도, 그렇다고 도망치지도 못하고 선택 장애에 빠진 것 같다.
“내가 갈까?”
도와줄 겸 내가 한 걸음 다가서니 셋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난다.
“두, 두고 보자!”
그나마 자존심은 남았는지 한마디 뻑 하고 날리더니 이내 완전히 등을 돌려 도망쳐 버렸다. 음, 꽤 멋진 퇴장이군. 위튜브에 올리면 조회 수 좀 찍겠다.
“으으으…….”
주위를 오만하게 둘러보니 눈빛에 닿는 것도 두려운지 분분히 물러나는 병사들이다.
“재미없네.”
‘친위대 역소환.’
한창 파밍하고 있던 구 씨 삼 형제를 역소환한 후 내가 뒤돌아서 숲을 향해 걷기 시작하자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길이 생겨났다.
뚜벅뚜벅.
아무도 가로막는 이는 없었다.
사실 내 상태가 그다지 좋다고만 말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물론 몸 상태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자잘한 부상이 전신을 뒤덮고 있기는 하지만 급소만은 전부 피했으니까. 그 자잘한 부상도 서서히 아무는 중이고… 생명력은 각종 버프 스킬과 업적 보상, 뱀파이어릭 오라로 계속 보충을 했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일단은 오러가 완전히 바닥을 쳤다는 것. 연공술이 희귀 등급이라서 그런지 오러의 회복이 더뎠다. 해답은 최소 전설급 연공술을 익혀야 한다는 건데, 전설급 연공술은 경매장에 매물로 나오지 않는 스킬북이었다. 아니, 아예 수요 자체가 없다는 편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지금도 인기가 쭉쭉 올라가고 있는 게임이라 희귀급 스킬도 연공술이라면 가격이 폭등하는 판에 전설급이면 말 다 했지.
그렇지만 이것도 큰 문제는 아니다. 오러가 모자라면 도망 다니면서 치고 빠지면 되니까.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내가 이렇게 폼 잡으면서 물러서야 할 만큼 말이다. 그러나… 세상일이 내 뜻대로만 되는 건 아닌 모양이다.
파삭.
“아…….”
들고 있던 듀랜달이 깨지며 반 토막 난 검 자루가 바닥에 떨어졌다. 내구도를 신경 쓸 겨를 없이 쓰다 보니 결국 부서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개폼 그만 잡고 납검이라도 할 것을…….
참고로 무기나 방어구는 깨지거나 박살 나면 수리비가 몇 곱절로 늘어난다. 고강화템이니 수백 골드는 들 거다. 젠장…….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걸 걱정할 때가 아니지.
“어?”
“괴물의 무기가 깨졌다!”
“무기가 없어?”
“이, 이길 수 있어!”
주 무기가 깨졌다고 그게 내 패배라는 뜻은 아니지만, 문제는 그것으로 인해 군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공포에 질려 있던 녀석들의 눈빛이 되살아난다. 도망친 셋이야 자존심이 손톱만큼이라도 있으면 다시 나타나지는 못하겠지만, 엄밀히 말해 지금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군대는 녀석들보다 더 위험하다. 게다가 더 짜증 나는 건 마땅한 보조 무기가 없다는 것이다.
“젠장…….”
아무리 내가 스킬빨이 좋다지만 장비빨도 무시할 수는 없다. 특히 야스마녀 님이 사 주셨던 듀랜달은 지금까지 내 레벨업의 원동력이었다. 스킬이 좋으면 뭐 하나. 단기결전이면 모를까 이런 대군을 상대하려면 평타가 좋아야 하는데, 그 무기가 깨졌으니 기사 같은 고급 병종을 상대하려면 애로사항이 꽃필 것이다. 게다가 내 주력 광역기라고 할 수 있는 어스 브레이크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전군 포위하라!”
와아아아!
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나를 중심으로 기사와 병사들이 둥글게 에워싸기 시작했다.
특히 유일한 탈출로인 숲 쪽으로는 기사들의 방패진이 자리하고 있다. 나를 절대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뜻이다. 마법사들은 뭔가 엄청난 마법을 준비하는지 수인을 맺은 채 영창을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주위의 마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환장하겠네.”
예비 무기를 준비하지 않은 내 멍청함을 탓할 수밖에 없다. 다행이라면 아까 구 씨 삼 형제가 기사들을 루팅할 때 희귀급 무기 몇 개가 들어왔다. 난 가방을 오픈했다.
“쓸만한 건 없네.”
열 자루 정도 보이는데 모두 +3이나 +5 무기밖에 보이지 않는다.
저렙 때야 없어서 못 쓰는 물건이지만 전설급 +10 듀랜달을 쓰던 내게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 내가 마지막 검까지 확인하며 한숨을 푹 내쉬고 있을 때였다. 가장 마지막에 루팅했는지 끄트머리에 이상한 게 보인다.
검받이 부근이 하얀 용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검신까지 온통 순백색인 협봉검…….
“설마…….”
눈을 부릅뜬 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아이템 옵션을 확인했다.
+5 [빙룡도] [신화 등급]
-상고시대 대륙을 멸망으로 몰아넣던 멸망의 증거 빙룡의 심장을 벼려 만든 무기다. 빙룡의 부활을 꿈꾸며 그 강대한 혼을 불어 넣었지만, 검이 그 격을 이기지 못하여 빙룡은 깨어나지 못했다. 빙룡의 모든 조각을 모으면 진정한 빙룡의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
공격력: 200 [+180~300(+270)]
내구력: 920/1000
옵션
-빙룡지혼: 빙룡의 혼은 그 주인에게 무한의 힘을 가지게 한다.
오러 +1,000
-빙룡지력: 빙룡도에 깃든 빙룡의 혼은 자신보다 낮은 격의 모든 것들을 배제하는 힘을 가졌다.
신화 등급 이하 모든 공격을 100% 반사시키는 방어막을 3초간 생성한다.
쿨타임: 1분
-빙룡출현: ??? [미개방]
“허……?”
천공제 새끼… 주무기 떨궜다.
* * *
주변 상황도 잊은 채 난 멍하니 그것을 바라봤다. 아무리 의연한 사람이라도 이 무기의 가치를 안다면 나와 같을 것이다.
“피눈물… 좀 나겠네.”
부활하고 장비 확인할 때 무기가 사라진 걸 알면 속 좀 쓰릴 것이다. 아니, 속만 쓰릴까. 예전에 천공제의 위튜브 영상에서도 그는 자신의 무기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히지 않았다. 웬만하면 공개하지 않는 스킬도 위튜브에 공개한 주제에 빙룡도의 세부 옵션만큼은 공개하지 않은 것이다.
전설 등급이야 돈만 충분하다면 뽑을 수 있지만 신화 등급은 이야기가 다르다. 물론 스킬보다는 뽑기 난이도가 낮은 편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건 +5 강화다.
고작 5 강화냐고 할 수 있지만 무려 5 강화다.
내가 알기로 신화 등급은 +1부터 깨진다. 그렇기에 잘해야 +1~+2 강화 정도만 해서 사용하는 게 보통이다. +5 강화라면 정말 돈이 썩어나거나 미쳐서 질렀다는 뜻밖에 되지 않는다. 전에 쓰던 듀랜달도 몇억은 하겠지만 이건 몇억 단위가 아니다.
말 그대로 돈이 아무리 많아도 살 수 없는 무기인 것이다.
“이렇게 도움이 되는구나. 천공제.”
부서진 듀랜달이 사라지고 멋들어진 하얀 도집이 허리춤에 나타났다.
도의 손잡이가 손바닥에 착하고 달라붙는다. 가볍게 힘을 주자 도집에서 하얀 도신이 그 유려한 자태를 드러냈다. 그 황홀한 모습에 잠시 정신을 빼앗겨 있을 때였다.
“준비!”
“아이스 스피어!”
“아이스 스피어!”
거대한 영창과 함께.
쿠쿠쿠쿠쿠콰콰콰콰콰!
하늘로부터 마법으로 이루어진 수십 발의 얼음 창이 생성되었다. 그 모두가 나를 향해 겨누어지고 있는데 전부 맞았다가는 그대로 끔살이 날 것 같다.
“머리 잘 썼네.”
속성에 치우친 마법이 내게 잘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물질계 마법으로 전환했다. 물론 빙룡도를 얻기 전이라 해도 저딴 것에 맞을 리는 없겠지만 빙룡도를 얻은 지금은 새로운 선택지가 생겨났다. 그것은 바로 빙룡지혼……. 천공제 녀석이 이화접목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던 스킬 덕분이다.
“쏴라!”
얼음의 창들이 비처럼 쏟아진다. 그리고 난 그것을 향해 빙룡도를 들어 올렸다.
‘빙룡지혼.’
파앗!
검신을 중심으로 시리도록 푸른 막이 씌워졌다. 지휘자로 보이는 놈이 나를 손가락질하며 웃고 있는 게 보인다. 하긴 얼핏 보면 날아드는 아이스 스피어들에 비해 너무나도 미약해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푸른 막은 내 전력을 다한 어스 브레이크까지 반사시킨 무적의 방어막이다.
그렇게 잠시 후……. 푸른 방어막은 내 기대를 한 치도 어기지 않았다.
콰콰콰콰쾅!
아이스 스피어가 반사되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으아아악!”
“피해!”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기사단이 날벼락을 맞았다. 아무리 방패로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지만 백여 명의 마법사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뽑아낸 일격필살의 마법이었다. 그것을 그대로 뒤집어쓴 기사단의 전열은 엉망이 되어 쓰러졌다. 참고로 전투에서 상대가 혼란에 빠졌을 때는 전과의 확대를 꾀해야 한다.
“이번에는 시험주행 한번 해 보자.”
파앗!
일검에 방패가 쪼개지며 팔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특별한 스킬도 쓰지 않았는데 그냥 걸리는 건 모조리 베고 지나간 것이다. 예전에 천공제와 검으로 부딪혔을 때 내구도가 뭉텅이로 썰려 나가서 꽤 곤란했었는데 이 정도의 성능 차이가 났던 거구나.
쫘악! 쯔컥! 쫘아악!
“으악!”
“커억!”
마구잡이로 베어 넘기자 내 주위로 목과 팔다리가 날아다니며 넓은 원이 생겨났다. 능력치나 장비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면 이하의 것들과는 아예 차원이 달라진다고 하더니 지금이 그런 상황이다.
“죽어라!”
그때 공중으로 뛰어오른 화려한 갑옷의 기사들이 오러가 잔뜩 머금어진 거대한 망치를 내 머리에 내리꽂았다. 숫자는 십여 명 하나하나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이다.
‘이럴 때는 어스 브레이크가 딱인데… 뭐 상관없지.’
비록 검이 박살 나서 어스 브레이크라는 유일한 광역기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지만, 엄밀히 말해 어스 브레이크는 한정된 오러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스킬일 뿐 오러가 풍부하면 굳이 스킬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마침 빙룡도 덕분에 오러는 넘칠 지경…….
이것을 가르쳐 준 것도 알레그로다.
파아아아악!
공중으로 베어 올린 빙룡도로부터 막대한 오러가 터져 나갔다. 그리고 그것에 적중한 기사들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박살 나며 흩어졌다.
“쓸만한데?”
어째서 세이온의 랭커들이 일인군단이며 재앙이라고 불리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리고 나 또한 그들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도…….
* * *
빠밤밤빰빠빠빠~ 빠밤빠빠빠빠빠~
귀가 먹먹할 정도로 요란하게 울리는 음악 속에 수십 명의 헐벗은 남녀가 싸이카 조명 아래 뒤엉킨 채 춤을 추고 있다. 젊음을 불태우며 광란의 파티를 즐기는 그들… 그리고 스테이지가 내려다보이는 VIP룸에는 조금은 다른 의미의 광란으로 뒤엉킨 남녀가 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땀이 범벅된 향수 냄새가 VIP룸을 가득 채운 가운데 드러누워 있던 남자가 그의 옆에 쓰러져 달뜬 숨을 내뿜고 있는 짙은 화장의 미녀에게 말했다.
“이만 나가 봐. 밍키야.”
“네. 근데 오빠.”
“응?”
“다음에 합방 한 번만 해 주시면 안 돼요?”
“그래. 이년아. 해 줄게. 나가서 병건이 좀 들어오라고 해.”
“헤헤… 네.”
그녀는 주변에 떨어진 속옷 쪼가리들을 주섬주섬 주워 든 뒤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민둥민둥한 대머리에 덩치 좋은 사내가 VIP룸 안으로 들어섰다.
“형님 찾으셨습니까?”
“그래. 병건이. 이리 와서 앉아 봐.”
파킨이 손을 까딱거리자 병건이 굽신거리며 들어와 그의 오른쪽에 슬쩍 엉덩이를 걸쳤다. 구독자 5만의 병건은 파킨의 크루로 소속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상 그가 하는 일은 하꼬 여자 비제이들을 꼬셔다가 파킨에게 공급하거나 하는 등의 더러운 일을 대신하는 머슴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자기 딴에는 오른팔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병건아. 너 요즘 물관리가 잘 안 되는 거 같다? 어떻게 와꾸도 쓰레기에 기본도 안 된 년이 합방 이야기를 먼저 꺼내.”
“죄송합니다. 형님. 요즘 함량 미달 애들이 많이 들어와서…….”
“자식아, 그런 함량 미달에서 괜찮은 거 건져 오라고 너 데리고 다니는 거잖아.”
“예.”
“에휴, 새끼야… 넌 뭐 제대로 하는 일이 없냐.”
혀를 차며 과일 접시에서 사과 하나를 집어 입에 밀어 넣은 파킨이다.
최근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계속 저기압인 파킨이었다. 케이라는 싹수 좀 보이는 놈한테 붙어 어그로 좀 끌어보려다가 개 쪽을 먹은 후 아는 인맥들을 총동원해 찌라시를 퍼뜨리고, 같은 플랫폼의 그 어떤 비제이와도 합방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렇게 교육 좀 한 뒤 자신의 크루에 넣을 생각이었는데, 이놈이 뜬금없이 블루 포레스트에 나타나 혼자 꿀을 빠는 방송을 시작하자 다른 비제이들이 오히려 케이라는 놈과 합방하기를 바라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는 곳만 알아내면 방송을 켜지 못하도록 좀 밟아 주겠지만 비제이의 개인정보는 플랫폼에서도 절대 알려 주지 않는다. 그나마 요즘 기분이 좋은 건 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방송을 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오랜만에 이렇게 바깥바람을 쐬러 나왔다. 그때 그의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병건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형님께 말씀드릴 게 하나 있는데…….”
“뭔데?”
“그, 혜미 아시죠?”
혜미라는 말에 파킨의 눈이 번쩍 뜨인다. 워낙 반반하게 생겨서 예전에 스폰 제의를 넣었다가 대차게 까였던 여자 비제이다. 본래대로라면 일찌감치 플랫폼 파비에 들 정도로 포텐이 뛰어났지만, 그의 방해로 아직 메인에 들지 못하고 있는…….
“걔가 왜? 이제 내 말 고분고분 듣는다니?”
“그건 아니고요. 제가 우연찮게 정보 하나를 입수했는데…….”
“했는데?”
“그 케이라는 놈이랑 혜미가 같이 산답니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