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보스 스킬 쓴다-87화 (87/154)

87. 영지 매장식

올 때와 마찬가지로 포탈을 타고 포디나로 돌아온 난 카렌 씨와 함께 곧장 백작에게 향했다.

“…하여,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카렌 씨가 보고를 마치자 포디나 백작은 흡족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납치당한 하이엘프의 딸을 구한 것도 모자라 블루포레스트를 베소 왕국의 침략에서 구해 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니 이렇게 기뻐하는 것도 당연하다.

“블루포레스트로부터 자네들의 활약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

“과찬이십니다.”

“아닐세. 이번 일로 인해 우리 영지는 든든한 우군을 두게 되었어.”

세 개의 영지를 다스리고 있기는 하나 서북쪽으로 치나 제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기에 안전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위치였다. 그런 와중에 인간과는 다르게 약속에 철저한 엘프들에게 빚을 지었으니 도움을 청하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리라.

포디나 백작의 칭찬에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카렌 씨는 뒤에 부복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사실 그 활약의 대부분은 제가 아닌 여기 있는 케이의 것입니다.”

“그래. 자네들의 활약을 들으며 내 이런 인재를 못 알아보고 있었다니 눈이 있으나 눈이 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럽기 그지없더구먼. 케이 군은 일어나 앞으로 다가오라.”

“예. 백작 각하…….”

그의 말에 난 한 걸음 나아가 카렌씨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내 자네에게 이번 임무를 완수하면 기사의 작위를 내리겠다고 약속했지만 들어보건대 그것으로는 자네를 온전히 품을 수 없다고 생각하네. 하여 자네에게 남작의 작위를 수여할까 하는데 어떤가.”

[목표 초과 달성으로 보상이 상향되었습니다.]

“……!”

생각지 않은 보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작위라는 건 귀족을 뜻한다. 전체 세이온 유저들 중 5%도 되지 않는다는 귀족. 당연히 현재 내 상태는 평민이다.

평민과 귀족의 차이점은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사람들이 왜 기를 쓰고 강해지려 하겠는가. 강해져야 공을 쌓아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세이온은 기본 적으로 봉건주의적 신분제를 채택하고 있었고, 그것은 유저와 유저 사이에서도 그대로 통용되는 법칙이었다.

막말로 귀족 유저는 마음만 먹으면 평민 유저를 감옥에 가두거나 영지 밖으로 추방할 수도 있었다. 또한 평민일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사회적 위상을 지니며 좀 더 높은 작위로 올라가는데 용의해진다.

“백작 각하의 큰 은혜 감사드립니다.”

“좋네. 다만 베소 왕국의 눈치가 있어 정식이 아닌 약식으로 진행해야 하네. 차후 정식으로 자네에게 작위 수여를 할 테지만 이것으로 만족해 주게.”

“알겠습니다.”

정식이든 약식이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잠시 후 검을 뽑아 든 포디나 백작이 어깨와 머리를 짚으며 내게 작위를 수여하자 머릿속으로 기분 좋은 알람이 들려왔다.

[새로운 직업 ‘기사’를 획득하셨습니다.]

[직업 스킬] [중갑 마스터리] [희귀 등급] [패시브]

-중간 착용 시 적의 공격을 흘릴 가능성이 증가합니다.

[직업 스킬] [웨폰 마스터리] [전설 등급] [패시브]

-근접 무기 계열 숙련도 상승 속도 100%

[직업 스킬] [기마] [고급 등급] [패시브]

-기승수를 부릴 수 있습니다.

기사가 지닌 직업 스킬의 꽃은 뭐니 뭐니 해도 웨폰 마스터리였다. 근접 계열 무기 사용 시 숙련도 상승 속도를 무려 100% 상승시켜 주는 이 전설 스킬을 얻기 위해 기사 직업에 올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숙련도를 빠르게 올려 준다는 건 해당 무기를 사용하는 모든 스킬들의 티어에도 영향을 미치기에 말 그대로 근접 무기 스킬 숙련도에 날개를 달아 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줘도 안 가지는 비주류 스킬인 기마 스킬이야 상관 없지만 이것으로도 큰 전투력의 상승을 가진다. 그러나 포디나 백작이 하사한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강철 같은 심장으로 적들을 도륙했으니 자네에게 아이언하트라는 성을 하사하겠네.”

빰~! 빰빠라라라빰~ 빠빰~

‘케이 아이언하트 남작.’

[평민에서 남작으로 승급하였습니다.]

[귀족 특전]

-남작 이하 모든 계급에 대하여 사회적 우위를 차지합니다.

-소속된 영지에서 상업 활동 시 세금이 대폭 감면됩니다.

-평민 계급 살해 시 불명예 수치가 오르지 않습니다.

기사의 직업과 남작 작위를 얻었다. 최고의 수확.

본래의 계획은 기사 직업을 얻은 후 퀘스트로 백작의 신임을 얻어 귀족의 작위를 얻는 것이었지만 블루 포레스트에서의 활약으로 한꺼번에 얻어 버렸다. 이후 계획은 백작에게 부탁하여 코리 왕국을 돌아다니며 각종 보스들을 솔로킬하여 보스 스킬을 수집하려고 했지만 계획이 바뀌었다.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는 놈들이 어떻게 되는지 교훈을 새겨 줄 참 피의 순례를 한 바퀴 돌 참이다.

* * *

“꺄아악!”

어둠이 드리워진 더러운 골목길.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바닥을 거칠게 굴렀다. 어깨에서 흘러내린 찢어진 옷을 부여잡은 소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나, 남작님 왜 이러시나요. 흐흑.”

“크크큭, 네년이 너무 맛있게 생겨서 참을 수가 없단 말이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 남자가 소드 벨트의 검을 붙잡자 그 모습을 바라보는 소녀의 두 눈에는 공포가 어린다. 도망이라도 치고 싶지만 골목을 막아선 남작의 뒤로 십여 명의 남녀가 이쪽을 구경하듯 쳐다보고 있다.

“제, 제발… 이러실 분 아니잖아요. 흐흑…….”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이틀 전 상인인 아버지를 따라 도착한 이 영지에서 처음 만난 남작은 첫눈에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본래는 하루만 묵으려 했지만 자신이 고집을 부려 이틀을 묵게 되었다. 그와 한 번이라도 더 만나고 싶은 마음에 고집을 부렸는데 지금은 그때의 자신이 미치도록 미울 지경이다.

“크크… 아니긴 뭐가 아냐.”

카칵!

“꺅!”

그녀의 두 다리 사이로 박힌 검.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치자 치마가 찢어지며 뽀얀 허벅지가 드러났다. 음심이 번들거리는 두 눈이 다리 사이를 훑는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걸 깨달은 그녀는 체념한 듯 드러누워 눈을 꾹 감았다.

“컷!”

뒤쪽에서 들려온 고함에 소녀에게 다가서던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야이, 씨발 새끼야. 애 포기하고 눈 감았잖아!”

목소리의 주인공은 뒤쪽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였다.

“이거 그냥 강간물 아니라고! 좀 더 발악하게 한 다음에 옷 다 찢고 네가 매혹 한 번 더 걸어서 저년 뿅 가게 만들었어야지! 어? 대본 제대로 안 봤어? 촬영 한번 흐트러지면 말짱 꽝인 거 몰라?”

“죄, 죄송합니다.”

“아오, 됐으니까. 잠깐 쉬었다 하자. 저년 웹으로 묶어.”

마치 자신이 감독이라도 된 양 스타트를 외치는 사내는 아프리카에서 비제이를 하고 있는 비제이 쌔비였다. 겉으로 드러난 주 컨텐츠는 세이온 일상과 탐험이지만 실제로는 여자 NPC들을 엽기적인 수법으로 살해하거나 강간 영상을 찍어 일억 이상 후원해 준 VIP들에게 비밀리에 파는 일을 했다.

“쯧, 이런 거 지겹다고 좀 신선한 거 찍으라고 했는데 이렇게 해서 수금이 제대로 될라나 모르겠네.”

그의 말에 자신에게 빌붙어 일을 배우고 있는 하꼬 비제이 녀석이 허리를 굽실거리며 말했다.

“헤헤, 그럼 다음에는 한 셋 정도 잡아다가 찍죠.”

“새끼야. 셋이나 잡아먹으면 골치 아파져.”

“그래도 길드에 상납은 해야죠. 아침에 병건이 새끼가 개지랄 떨더라고요.”

“끙… 그렇지. 씨발…….”

파킨에게 가져다 바칠 상납금을 떠올린 쌔비가 인상을 찌푸렸다. 길드에서 점령한 영지니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촬영할 수 있는 건 좋은데, 길드장인 파킨이 최근 케이라는 놈한테 잘못 엮여 이름 있는 로펌을 선임한다고 상납금을 왕창 늘렸다.

그뿐인가? 그는 파킨이 케이를 물어뜯을 때 앞장서서 여론을 선동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워낙 증거들이 명확해 경찰에서 조사가 나올 수도 있다는데, 파킨은 모르겠지만 자신은 경찰에 터는 순간 끝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크루도 유지하기도 빡빡한데 상납금을 늘렸으니 절로 욕이 나올 일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중립 박고 존버 타는 거였는데…….”

괜히 나서서 파킨의 나팔수가 되었다가 시청자만 반 토막 났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건 그의 주수입인 영상 판매에 쓰일 여자 NPC가 항상 흘러 들어와 강간 컨텐츠가 성업 중이라는 것이다.

“씨발, 마음 같아서는 영상들 19금에 풀어서 구독자 확 땡기고 싶다.”

자신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놈들을 떠올리며 쌍욕을 내뱉은 그가 본격적으로 강간이 시작될 장소로 시선을 돌릴 때였다.

터턱…….

묵직한 것이 내려앉는 소리와 함께 땅을 타고 옅은 진동이 흐르다가 사라진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목이 통째로 뜯어질 것 같은 강렬한 고통과 함께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쿠우우웅!

“커억!”

거의 5m는 날아가 골목의 오물에 처박힌 그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끄윽…….”

등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세이온을 하는 유저의 대부분은 통각 수치를 절반 정도로 맞추고 게임을 한다. 즐기는 게임에 웬 고통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통각을 낮추면 동기화율이 극단적으로 낮아져서 말 그대로 과거 온라인 PC게임처럼 움직이게 된다.

감각을 다루는 모든 일이 이 통각과 연계된 만큼 동기화율을 올리고 싶으면 통각 수치도 올려야 하고, 게임을 업으로 삼은 비제이들은 필연적으로 이 통각 수치를 최상으로 올리고 게임할 수밖에 없다. 게임 실력이 떨어지는 비제이는 경쟁력이 없으니까.

사냥보다는 영상 판매에 집중하는 쌔비였지만, 가끔 영상을 찍을 때 직접 나서기도 해서 쾌락을 위해 그 통각을 최상으로 올린 덕분에 지금 쌔비는 죽을 맛이다.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키는데 귀를 찢는 날카로운 하울링이 들려온다.

“크앙!”

“크아앙!”

쉬이익! 콰지직! 쾅쾅!

검고, 누렇고, 하얀 잔상이 사방으로 날아다니며 자신의 크루를 찢어발기고 있다. 너무 빨라 자신의 눈으로는 쫓을 수도 없다.

“아악!”

“꺄악! 살려!”

“커억!”

영상 촬영을 위해 제대로 된 장비조차 걸치지 않은 크루원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간다.

번쩍하면 상반신이 날아가고, 번쩍하면 머리가 부서졌다. 몬스터가 나타난 건가 싶기도 하지만 이곳은 자신들의 영지 외성 한복판의 거리였다. 수십 명의 기사들과 수백 명의 병사들로 보호 받는 영지의 심장 말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한 남자가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다.

스르르릉…….

그가 허리춤에서 기다란 도가 뽑혀 나왔다.

“너 뭐야! 히익…….”

상대의 손에 들린 도를 본 쌔비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날이라 부를 곳에 날카로운 톱니가 번뜩이는 톱날도다. 톱날도는 공격력과 내구도가 그다지 좋지 않은 기형 무기였다. 그러나 이 톱날도가 좋은 점이 단 하나 있으니 피격자에게 극도의 고통을 선사한다는 것이었다.

통각 수치를 절반으로 낮추고 게임하는 유저들조차도 진저리를 치게 만들 고통을 주는 톱날도는 상대에게 고통을 주기를 즐기는 새디스트들이 주로 사용하는 지독한 무기였다. 생각해 보라 팔이나 다리를 슬근슬근 톱질하는 것을…….

“너, 넌 케이?”

톱날도를 든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쌔비가 소리쳤다. 루머에 시달려 방송도 게임도 하지 않고 있다던 케이가 뜬금없이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너 이 씨발 새끼! 하꼬 주제에 감히 플랫폼 선배를 암습해?”

쌔비가 목소리를 높였다.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건 안다. 플랫폼을 떠나 케이를 아는 대부분의 실력파 게이머들이 거의 역대급 전투력이라고 평가받는 케이였으니까. 30레벨대 구간에서는 거의 무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컨디션에 따라 60레벨에서 70레벨까지 따 버릴 실력이라고 했다. 자신의 현재 레벨은 50. 그도 세이온을 못하는 건 아니지만 덤빌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케이가 자신과 같은 플랫폼이고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하꼬라는 걸 알기에 목소리를 높여 보는 쌔비였다.

그의 말에 케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업계 선배라는 분이 사실 확인도 안 하고 저를 짓밟았습니까?”

파킨이 폭로한 것들이 모두 조작된 것이라는 건 세간에 알려진 사실이고 그도 거기에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 그건 나도 파킨한테 속아서 그런 거야! 조만간 해명 영상 올리려고 했어!”

“아, 그러셨어요? 해명 영상이라……. 그런데 해명이 아니라 사과 영상이라고 해야 하는 게 정상 아닙니까?”

“존만한 하꼬 새끼 주제에 사과 영상? 너 새끼 이 바닥에서 아예 매장 당하고 싶어?”

지금 파킨이 좀 밀리고 있긴 하지만 그가 가진 업계 영향력과 인맥이면 하꼬 하나 매장시키는 건 여반장이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업계 퇴출시킨 놈들도 수두룩하다. 그러나 상대는 전혀 겁먹은 표정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입가에 미소까지 띠며 다가선다.

“잘됐네요. 오늘 저도 이 영지 매장해 버리려고 왔는데.”

“미친 새끼……!”

영지를 매장해 버린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영지를 박살 내 버리기 위해서는 영주뿐 아니라 영지에 소속된 수많은 전투 NPC들과 길드에 소속된 플레이어들의 항복을 받아야 가능하다. 그뿐인가? 현재 이 길드에는 아프리카의 지원을 받는 수많은 실력파 비제이들이 길드원으로 소속되어 있었다. NPC 기사 또한 30명이 넘으며 영지 내에 모든 병사를 끌어 모으면 거의 천이 넘는 병력이 집결한다. 각 왕국을 대표하는 네임드들이나 가능할까. 고작 게임 시작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은 하꼬 새끼가 할 소리는 아닌 것이다.

“죽어!”

케이의 눈치를 보던 쌔비가 돌연 손을 쭉 뻗어왔다. 언제 빼 들었는지 검은 기운이 풀풀 날리는 단검이 들려 있다. ‘맹인의 단검’이라는 희귀 등급 무기로 찔리는 상대의 눈을 멀게 한다. 그러나 그는 손을 미처 다 뻗지도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벼락같이 베어진 톱날도에 손목이 날아간 것.

“으악!”

톱날도에 잘려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단검을 낚아챈 케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애들 몰려올 동안 좀 놀아주시죠. 심심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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