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언더독
고함과 비명, 피 먼지가 난무하는 혼돈의 현장!
케이의 뒤로 은신 스킬로 접근하던 쌍겸(雙鎌)을 든 유저의 목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대체 자신이 어떻게 걸렸는지 이해 못 하겠다는 듯 빙글빙글 돌아가는 머리에 달린 눈에는 경악으로 물들어 있다. 난전 속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기도 벅찰 텐데 은신까지 감지해 냈으니까. 아프리카 길드에서 나름 실력파로 알려진 암살계 비제이인 천호지만 케이의 기감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삐이이이이익!
머리를 걷어차 날린 케이의 손가락이 시체를 돌파하며 뛰어든 기사를 가리키고 곧이어 붉은 광선이 뻗어나가 기사를 포함해 그 궤적 안에 모든 것을 꿰뚫어 버렸다. 세이온의 마법들 중 최고의 속도를 지닌 데스레이다.
“으아아악!”
“커억!”
모든 마법 중 최고의 속도를 지녔다는 건 단순히 발동이 빠르다는 게 아니다.
빛에 근접한 속도를 지닌 광선류 마법은 그 자체로 사기와 같은 위력을 지녔기에 세이온 개발진에서도 일부 보스 몬스터에게만 허락했다. 그런데 케이는 스킬이터의 능력으로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유저와 NPC들도 만만치 않다.
“공격하라!”
슈슈슈슉!
대형을 이룬 궁수대와 유저들이 쏘아 낸 무수히 많은 화살들이 케이를 향해 쏘아졌다. 각종 스킬을 머금은 수십 발의 화살.
그와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죄 없는 NPC들이 화살 밥이 되었다. 그러나 고슴도치가 되어 죽어 가는 수많은 이들 속 정작 당사자인 그는 흐느적거리듯 공격을 피해 내며 쾌도난마로 적을 쓸고 지나갔다.
“살려 줘!”
“떨어뜨려!”
“아악!”
그가 노리는 것은 전투를 철저히 난전으로 유도하는 것. 그리고 그에게는 아주 최적화된 스킬 하나가 더 있다.
[광역매혹]
주변에 있는 적들을 20%의 확률로 13초간 우군으로 만드는 군중 제어기에 20여 명의 NPC와 유저가 걸려들었다. 곧바로 무기를 돌려 동료들을 공격해 대자 케이를 둘러싸던 무리에 균열이 일어났다.
“으악! 왜 이래 갑자기!”
“컥!”
“CC기! 서포터들 빨리 풀어!”
CC기에 무지한 이들은 아니었기에 곧바로 상황을 파악한 유저들이 광역 매혹에 걸린 이들에게 해주 주문을 걸었지만 케이가 바라던 목적은 이미 모두 달성한 상태다. 찰나 포위를 풀고 빠져나가 다시금 무리에서 동떨어진 이들을 야금야금 박살 내고 있다. 적으로의 입장에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
불리한 싸움이지만 오히려 다수 측이 심리적 한계에 몰렸다.
아프리카 측 유저들의 머릿속에 하나의 단어가 자리 잡기 시작한다.
“괴물이다.”
“저건 못 잡아.”
“네임드야. 네임드…….”
‘네임드.’
네임드라 불리는 이들은 수십 수백에게 둘러싸여도 여유를 잃지 않는다. 설령 그곳이 도산검림이라 해도 그들은 유유히 그 모든 것을 박살 낸다. 타인과는 다른 시간 속에 살기에 일반 유저의 칼질이나 마법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네임드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에 상응하는 무력을 지닌 NPC 혹은 같은 네임드뿐.
네임드라 하면 흔히 강한 무력을 지닌 이를 지칭하는 대명사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세이온에서의 네임드라는 명사는 조금 다른 의미로 불리었다.
‘차원이 다른 재능을 가짐과 동시에 그 재능을 전투 능력으로 치환시킬 수 있는 인간.’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케이는 네임드라 불리기 시작했다. 양을 몰 듯 적들을 끌고 다니며 야금야금 베고 썰고 부순다.
물론 영지 동원령으로 모여든 유저와 NPC 들은 단순한 지능의 몬스터가 아니었다. 세이온의 NPC AI는 뛰어나기로 정평이 나 있었고 유저들의 지휘가 없더라도 뛰어난 조직력으로 상대를 압박했다. 문제는 그것이 단일 표적에 대한 공격보다는 다수에 대한 저항에 특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이들을 거침없이 부셔댄다. 놀라운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덜덜… 안 가기를 잘했네.
-대체 스킬이 몇 개야?
-모르겠다. 씨발… 잡캐 같은데… 돈 존나 많은 새끼네…….
-원거리도 가능하고, 근거리도 가능하고, 거기에 은신까지 써 대네 ㅋㅋㅋㅋ
-은신이야 레인저니까 직업 스킬이라 쳐도 진짜 사기다!
-씨발 이게 게임이냐.
중수라고 할 만한 레벨 50 정도가 되면 직업 스킬 외에 보통 괜찮은 액티브 공격 스킬 두세 개와 패시브 두세 개 정도를 쓰는 게 일반적이었다. 과금 좀 하면 거기에 두어 개 더 있고… 그런데 케이는 그 일반적인 수준을 훌쩍 넘어섰다. 아프리카 길드가 점령하고 있는 도시가 작은 중소 규모라고 해도 일개 유저가 박살 내고 다닐 만한 곳은 아니었다.
케이의 개인 방송 채널인 ‘룰러’에는 순식간에 수천 명의 사람이 몰려들었고, 케이의 예전 시청자들도 하나둘 모여들어 후원으로 그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케이짱바라기 님 1,000원 후원 감사합니다.]
-드디어 케이 님이 돌아오셨꾼녀!
[호제 님 10,000원 후원 감사합니다.]
-몇 달 전까지 초보 던전 팠는데 많이 컸네 우리 케이
초보 시절을 함께 보낸 시청자들부터…….
[한겨뤼 님 1,000,000원 감사합니다.]
-이야 케이 동생 생방송은 처음이네?
[세스 님 1,000,000원 후원 감사합니다.]
-너무 멋지다!
뜸하던 큰손들이 큼지막한 후원으로 존재를 알렸다.
[악마사냥꾼01 님 10,000원 후원 감사합니다.]
-케이 님을 저희 악마소환자 길드에 모십니다.
ㄴ어디 듣보 길드가 감히ㅋㅋㅋㅋ
[라이크 유스 님 10,000엔 후원 감사합니다.]
-라이크 유스 MCN 대표 차중권입니다. 연락처는… XXX
케이의 소식을 듣고 몰려온 몇몇 중소 길드와 MCN 회사의 후원들도 줄을 이었고, 곧 시청자는 순식간에 3천 명을 넘어섰다.
-케이 님! 너무 멋있어요!
ㄴ눈 돌아가게 멋진데… 진짜 눈 돌아갈 거 같다. 속이 울렁거려…….
ㄴ저도… ㅠㅠ
ㄴ그냥 실시간 롤러코스터 탔다고 생각하3… ㅠㅠ어쩔 수 없… ㅠㅠ
-근데 파킨이 새끼 어쩌려나. 동원령을 내렸는데도 이 지경이니.
ㄴ안 나오는 거 보면 쫄았지. 그 새끼 지금 방송도 안 하지?
ㄴㅇㅇㅇ
ㄴ니미럴 길드 망하게 생겼는데 또 어디서 술 빨고 있는 거 아냐?
ㄴㅋㅋㅋ어찌 되건 꿀잼이지 뭐.
ㄴ케이가 진짜 파킨이 목 따려나?
ㄴ그게 말이 되냐. 내성 들어가면 쥐덫인데…….
ㄴ하긴.
내성에서는 외성에서처럼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 모든 전력이 한곳에 집중된 만큼 단신으로 날뛰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케이의 적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아프리카 길드의 진정한 정예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나타났다.
파팟!
하늘로부터 푸른빛이 번쩍이더니 이십여 명의 인영이 케이의 주변에 내려섰다.
콰콰콰쾅!
자욱한 폭연과 함께 히어로랜딩으로 멋들어지게 무릎 꿇고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황금빛의 커다란 대검에 붉은 비늘로 된 스케일아머를 입은 찰랑이는 금발을 뒤로 묶은 굵은 선의 사내다.
-황제와 아프리카 기사단이다!
ㄴ와… 파킨이랑 손절 친 줄 알았는데 왔네?
ㄴ오고 싶어서 왔겠냐. 길드 이름 똥값 되면 지들도 피해가 크니까 왔겠지.
ㄴ그런가.
ㄴ그런가는 무슨ㅋㅋ 척이면 척이지.
-난 황제 거 방송에서 봐야지.
황제는 아프리카 비제이 순위 따위가 아닌 궁귀와 더불어 아프리카 길드 무력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알려진 실력파 프로게이머였다.
-이제 황제가 왔으니 케이도 끝이네.
ㄴ그렇겠지? 아무리 케이라도 황제에다가 아프리카 기사단까지 왔으니…….
채팅방의 모든 이들이 우려의 빛을 내비쳤다. 케이가 강하다고 해도 황제는 세이온 오픈 때부터 이름을 떨친 네임드였기에 아무래도 무게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멈춰라!]
쿵!
천둥 같은 목소리에 그의 주위에 서 있던 모든 이들이 바닥에 절로 무릎을 꿇었다. 황제의 간판급 메인 스킬이라고 불리는 ‘패왕의 군림! 주위의 모든 생명체들의 능력치를 하락시킴과 동시에 스킬에 당한 생명체들의 숫자만큼 본인의 능력치가 올라가는 사기적인 스킬이다.
-9억 8천짜리 등장이요!
-황제가 이거 뽑고 팬티 벗고 소리 질렀지 ㅋㅋㅋ
-도네로 3억인가 수금했잖아.
-여튼, 신화급 군중기 쩐다.
-대규모 쟁에서는 사기급 스킬이지. 예전에 스피드 길드랑 싸울 때 별동대로 뛰어들었을 때 저거 써서 거의 백 명을 혼자 베었잖아.
-보는 것만으로도 으슬으슬하네.
-드디어 케이 사망각 떴다
주위를 둘러본 황제가 분노에 찬 표정으로 외쳤다.
“죄 없는 영지민들을 이렇게…….”
컨셉인지 진심인지 손도 부들부들 떤다.
“더럽고 추악한 약탈자 놈! 얌전히 무릎 꿇어라!”
그의 손에 들린 그레이트 해머가 위협적으로 흔들렸다.
당장에라도 케이를 피떡으로 만들 분위기다. 그러나…….
* * *
“재미있네.”
난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점점 지쳐 가던 몸에 새로운 활력이 돈다.
황제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에 대해 아주 잘 알았다. 세이온을 공부하며 참고했던 비제이 중 하나가 바로 그였으니까.
“꿇을 생각 없으니 그냥 붙지?”
“뭐라?”
우우웅-
황제의 전신으로부터 황금빛 막이 펼쳐졌다. 황제가 전력을 다하겠다는 의미.
뭐, 보통이라면 두려워해야 할 테지만…….
“훗…….”
오히려 난 즐거운 긴장감에 가볍게 미소 지으며 몸을 낮췄다.
게임을 시작하고 첫 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 세이온에서의 죽음. 물론 가볍지 않다. 레벨 다운이나 스킬 숙련도 하락은 물론이고, 게임 내의 모든 NPC들의 뇌리에서 케이라는 존재로 쌓은 모든 관계가 사라지는 거니까. 그렇지만 상관없다.
“어디 한번 나를 죽여 봐.”
난 아직 내가 가직 역량의 끝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 끝을 보기 위해서라면 죽음 정도는 몇 번이고 감당할 용의가 있다. 게임하면서 죽는 게 대수인가. 어디 한번 나한테 한계를 가르쳐 줘 봐.
츠츠츠…….
나와 황제를 둘러싼 공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전투가 시작되면 내 첫 번째 목표는 황제가 아닌 아프리카 기사단이다. 황제가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내가 분석한 바로는 그보다 기사단이 더 치명적이었다. 전장을 운영하는 머리가 황제라면, 그 손발은 기사단이니까. 두들겨 맞더라도 일단 최대한 두서넛이라도 끊고 시작하자는 마음에 검을 쥔 손에 힘을 준 순간 생각지 못한 귓속말이 들려왔다.
-케이 님. 이쯤에서 물러나 주시면 안 될까요?
발신자는 눈앞의 황제다.
-싸우러 온 거 아닌가?
-저 평화주의자입니다.
-그런 거치고는 당장 저를 씹어 삼킬 것 같은 분위긴데?
-그거야 이렇게 안 하면 영지민들 민심이 바닥 쳐 버리거든요. 거의 개복치 수준이라… 아무튼 케이 님이나 저나 게임 하루 이틀 할 것도 아니고 앞으로 자주 마주칠 텐데 그때마다 얼굴 붉히긴 좀 그렇잖아요? 그러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시죠. 어차피 목적은 충분히 달성하셨잖아요.
영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는데 대응하지 않겠단다.
-흠.
하긴 본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했다. 애초에 녀석이 나올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녀석의 주특기가 물 타기인데 단신으로 쳐들어와 이렇게 어그로를 잔뜩 끌었으니 이제 이 일은 절대 묻지 못할 거다.
경험치도 많이 먹고 숙련도도 많이 키우고 분풀이도 하고 보너스로 인지도도 챙겼다.
그렇지만 이렇게 물러나는 건 성미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뭔가 부족하다.
-파킨을 부르지? 영주 자리는 양도를 받든 협박해서 강제 계승시키든 상관 안 할 테니 그 새끼만 정리하면 깨끗하게 물러날게.
난 오늘 파킨이를 정리할 것이다라는 뜻을 명확히 밝혔다.
-하, 그건 당장은 곤란한 일이라서요.
-그럼 교섭 결렬이네.
-진짜 고집 부리시면 저도 전력을 다할 생각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황제의 갑옷에 옅은 오라가 피어오른다.
대답 여하에 따라 바로 공격하겠다는 뜻. 그런데 뭐… 덤벼 주면 나야 좋지.
-츄라이 츄라이… 와 봐.
“끙…….”
내가 손을 까딱거리자 황제는 침음성을 흘리며 오러를 껐다. 그도 현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것이리라. 붙으면 내가 무조건 이득이다. 운 좋게 나를 잡아도 황제 입장에서는 자랑은커녕 얼굴에 똥칠은 확정. 철저한 언더독인 난 이름값만 높아진다. 그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순순히 물러나게 하는 게 가장 베스트라는 것.
-후우, 원하시는 걸 말씀하시죠.
-파킨의 목!
-그게 후우…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세이온에서 그 새끼 얼굴 못 본 지 오래됐습니다.
-음?
전혀 뜻밖의 대답이다.
-다른 건 안 하고 영지 업무 볼 때만 접속하는데, 그게 영주 집무실이 영주가 락을 걸면 절대 안으로 들어갈 수 없거든요. 접속도 영지자금 횡령할 때뿐이고… 저나 궁귀도 답답합니다. 영주 권한이 이렇게 클 줄 알았으면 절대 안 시키는 건데…….
-영주 권한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의무는 없는 주제에 중세 시대 영주 그대로라고 하면 설명이 될 겁니다. 게다가…….
황제는 쌓인 게 많았는지 내게 주절주절 파킨의 흉을 봤다. 지금 이 대화가 녹음될 수도 있다는 건 생각 못하는 건가.
-그래도 이번 일을 근거로 길드나 플렛폼에서 확실히 찍어 낼 참입니다. 그러니 오늘을 여기서 물러나 주시죠.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보상은 확실히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