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파킨의 종말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저를 믿고 응원해 주시던 모든 분들을 실망 시켜 드린 점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번에 나온 저와 관련된 사건들은 사실이 잘못된 정보가 와전되거나 호도된 것들이 다수입니다. 이에 저는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법적인 조치를 취할 것이며, 조금의 선처도 없을 것을 말씀 드립니다. 앞으로 자숙의 시간을 가지며 앞으로 더 좋은 방송인이 될 수 있도록…….]
그동안 수없이 사과 방송을 했던 파킨이었지만 이번 사과 방송은 매우 특별했다. 잘못했다며 삭발을 하고 눈물을 질질 흘리고 깡소주 50병 푸파도 하고 그렌절 3시간을 하는 등 별별 짓을 다 했지만 그동안 그가 벌인 업보로 인해 몰려든 이들과 파킨의 열성팬들의 충돌은 정말 무시무시했다.
-진짜 수준 토악질 나온다. 파킨이 개새꺄. 아직 살아 있냐?
-이 새끼한테 찍혀서 죽은 애들도 많다며?
-https://wetu.be/kN1Vs31u9sD 파킨이 새끼한테 매장당했던 혜린이 방송 중이다. 저 새끼한테 협박당해서 룸 가서 술시중 든 애들 리스트도 폭로했다.
-미친X들 대기업 X장 빨려도 알아서 가랑이 벌린 주제엨ㅋㅋㅋㅋ
-사회 암적인 새끼들아. 지금 뉴스에 나오는 것만 봐도 이 새끼는 형사 소송감이야. 그만 좀 쉴드 쳐라.
-파킨이 까들 신났죠? 막 날아오르죠?
-그만 때려라. 이 새끼 지금 이혼당해서 자살할 각이닼ㅋㅋㅋㅋ
-자살 생중계 ㅇㅈ ??
“케이 경!”
“아, 죄송합니다.”
포디나 백작의 목소리에 난 시야 한구석에 켜뒀던 위튜브 실시간 방송창을 닫았다.
“조심하게.”
“예. 주군”
이야기가 길어져서 잠시 딴청을 피웠더니 곧바로 딴지를 걸어온다. 예전에 푸른 바람 엘프족을 구원하고 돌아왔을 때는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굴더니 명예 점수도 다 떨어지고 온몸에 약탈자의 문양이 새겨지자 전형적인 선 성향 NPC답게 눈빛이 싸늘하기 그지없다.
탁탁탁…….
포디나 백작의 은빛 검이 내 양 어깨와 머리를 가볍게 두드린 내 미간에 겨눠진다.
“포디나의 지배자이자 법의 수호자인 나 월리엄 드 포디나 백작의 이름으로 케이 아이언하트 자네가 저지른 모든 죄를 사하노라.”
슈우우욱-
손등에 새겨진 약탈자의 문양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이윽고 사라졌다.
검을 거둔 포디나 백작이 냉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디 우리 영지의 명예에 먹칠하는 짓은 하지 말게. 내 만약 자네의 부덕한 행실이 내 귀에 들려올 시 자네의 작위를 회수함과 동시에 자네의 피로써 그 명예를 되돌릴 테니.”
“명심하겠사옵니다.”
“흠, 이만 돌아가 보게.”
마치 더 이상 한 공간에 있기도 싫다는 듯 손을 휘휘 젓는 포디나 백작이다.
물론 이건 어느 정도 각오한 일이었다. 아무리 평민을 죽여도 불명예 점수가 오르지 않는다지만 내가 죽인 이들 중에는 귀족도 다수 존재했으니까.
아마 포디나 백작도 베소 왕국으로부터 푸른바람엘프족을 구원한 공을 통해 얻어 낸 ‘면죄’가 없었다면 나를 만나 주지도 않았으리라.
[철권의 면죄]
백작 이상 고위 귀족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말 그대로 죄를 사하여 주는 것이었다. 귀족의 신분을 가진 가신에게만 수여할 수 있는 권한이다.
외성 근처 성벽에 도착한 나는 근처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고는 상태창을 열어 하나의 텍스트를 주시했다.
[남작]
유저들은 이 작위라는 것을 직업보다 더 우선순위로 뒀는데 그 이유는 작위를 얻음으로 받는 혜택 중 하나인 불체포 특권 때문이었다. 마음 가는 대로 죽이거나 불명예점수가 쌓이지 않는 건 아니지만 타 영지에서 평민을 죽였을 때 체포되지 않는 것이었는데, 이게 좋은 이유는 ‘평민’ 유저를 죽일 때도 이 특권이 적용된다는 것이었다. 법에 저촉되지 않으니 현상금도 걸 수 없다. 물론 살인에 대한 보상이나 사사로운 은원은 어쩔 수 없다지만 중세 배경의 게임에서 귀족이라는 건 치트에 가깝다.
그리고 내가 굳이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한 것은 내가 베소왕국에서 학살극을 벌이고 있을 때 누나가 물어온 귀족 기사만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고급 정보 때문이었다. 알아내는데 돈 좀 들었다고 얼마나 뻐기던지…….
[업적] 무너진 기사도 [희귀 등급]▼접기
-PVP 공격력 5% 상승
-업적의 소유자가 평민일 시 평민 이하 NPC 친밀도 페널티 20% 증가
[업적] 피에 젖은 도살자 [희귀 등급]
-PVP 능력치 5% 상승
[업적] 피에 미친 양민 학살자 [전설 등급]
-모든 공격력 20% 상승
-업적의 소유자가 평민일 시 평민 이하 NPC와 첫 상호작용 시 친밀도 50% 하락
‘무너진 기사도’는 기사 직업을 가진 상태에서 명예 점수가 –1000점이 되면 얻는 업적이고, 피에 젖은 도살자는 명예 점수 –10000점에서 얻는 업적이다. ‘피에 미친 양민 학살자’는 그 명예 점수가 –30000점이 되면 얻는 업적이고. 참고로 명예 점수 –30000점이라는 건 정말 PK에 미치지 않고서는 달성하기 힘든 난이도다.
말 그대로 약탈자만 얻을 수 있는 업적 중 웬만한 건 다 달성했다고 보는 편이 좋았다.
뭐, 작은 문제라면 공격력이 엄청나게 올라가기는 하지만 이 두 업적을 얻는 순간 평민 NPC와의 우호적인 상호작용은 물 건너갔다고 보는 편이 좋다. 세이온의 가장 많은 인구수를 자랑하는 평민들과 관련된 모든 퀘스트의 평화로운 해결이 대부분 막히는 거고.
그러나 내가 이런 페널티를 감수하고서 일을 벌인 건 ‘철권의 면죄’ 가 지닌 특별한 기능 때문이다.
[철권의 면죄의 영향으로 평민 관련 페널티가 삭제됩니다.]
“됐다!”
평민 관련 페널티가 덕지덕지 붙은 약탈자 전용 업적의 페널티를 지웠다. 물론 지하실 바닥을 뚫고 들어간 –30000점의 명예점수를 복구해야 한다는 과제가 생겼지만 그건 약탈자와 몬스터를 잡으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다. 뭐 누군가는 그게 쉬운 일이냐고 반문할 수는 있지만 난 쉽다.
“그것뿐만이 아니지.”
내가 아프리카 길드에서 그런 학살극을 벌인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상태창]
캐릭터 상태창
이름: 케이 레벨:63
종족: 인간
직업: 기사
신분: 남작
명예: -31,417점
“레벨 61.”
그 수많은 NPC를 모조리 레벨로 녹여 버렸다.
-레벨 60이상 [달성]
-오러 능력치: 200 [달성]
-푸른바람 일족 오러 연공술 10티어 [미달성]
-산들바람 걷기 10티어 [미달성]
-업적: [신화 등급] 폭풍 학살자 [미습득]
-소드마스터 알레그로의 가르침- 현자의 돌 필요(0/1)
“이제 두 개 달성했네.”
멸신검
-공격 속도: 100%상승
-반응 속도: 100%상승
-사용 시 10초당 오러 1소모
멸신검의 온전한 오러블레이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위의 조건을 모두 충족한 상태에서 다시 한번 알레그로를 만나야 한다고 써져 있다. 현재 한정적 사용 가능이라는 단서가 붙었음에도 이 정도의 위력을 보이는데 오러블레이드까지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얼마나 강해질지 꽤 궁금하다.
그때 머릿속으로 귓속말이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케이 님. 저 황제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처음 만났을 때야 서로 하하호호 할 상황이 아니라 반말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는데 이야기 좀 나눠 봤더니 나쁜 사람은 아니더라. 난 나한테 돋같이 대하는 놈은 똑같이 돋같이 대해 주고 예의바르게 들어오면 똑같이 예의바르게 해 주는 스타일이다. 첫만남의 자리가 더럽기는 했지만 앞으로 친하게 지낼 수도 있는 거고.
-아프리카 대표님이랑 이야기 잘 끝났습니다. 파킨에 대한 처분은 오늘 저녁 뉴스를 통해 알 수 있게 되실 겁니다.
-그렇군요. 대략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일단은 아프리카에서는 완전히 퇴출시키기로 했습니다. 아프리카 길드의 운영진들도 전부 설득해서 영주 자리에서 쫓아내고요. 또한 현재까지 드러난 파킨에게 피해를 본 이들을 모아 로펌을 통해 법적으로 따져서 민형사 소송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파킨은 완전히 방송 쪽에서 퇴출되는 겁니까?
게임에 들어온다면 내가 지옥까지 쫓아가 실컷 괴롭혀 줄 거지만 현실의 파킨은 건드리기 힘들다. 그래도 최소한 밥줄은 완전히 끊어 놔야 직성이 풀리겠다. 그러나 이어서 들려온 황제의 대답은 회의적이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파킨이 놈이 온갖 미친 짓을 다 해도 지지해 주는 팬들이 워낙 많아서 어느 방송 플랫폼에 가서든 잘 먹고 잘 살 인간이거든요.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도 지지해 주는 팬이 있다고요?
-그렇죠. 막말로 위튜브에 스트리밍 한번 걸고 후원 받으면 하루에 몇억도 땡길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이해 안 되네요.
-뭐, 저도 그런 팬들이 있는 처지라 뭐라 말할 수 없네요. 마냥 욕할 수 없는 게 방송을 오래하게 되면 그런 맹목적인 팬들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거든요. 그리고 그런 분들 덕분에 가끔 위로 받기도 하고……. 후후후.
-그런가요.
-네. 그런데 케이 님은 아마 저보다 많이 생기실걸요?
-예? 그게 무슨…….
-하하하. 아닙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예.
황제의 뜻 모를 말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왠지 더 깊이 파고들기는 싫어진다.
황제와 인사를 나눈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누구처럼 얼굴에 철판 깔고 몇억 땡길 자신 없으니 인벤토리에 가득 찬 전리품이나 팔러 가야겠다.
* * *
“…끄윽 씨발 놈들…….”
지저분한 계단에 걸터앉은 파킨은 입가에서 흘러내린 침이 아끼는 롤렉스 GMT 마스터2 루트비어 콤비에 묻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욕을 내뱉었다. 그는 며칠 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그는 정말 최악의 이틀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 시작은 와이프였다. 그가 건드린 수많은 여캠들의 폭로가 여론을 장식하자 당장 이혼하겠다고 난리를 쳤고, 장인어른이 자신을 불러 뺨을 치며 당장 자신이 마련해 준 집에서 짐을 빼라고 호통을 쳤다. 설상가상으로 여론에 민감한 방송 프로그램들에서는 파킨에게 하차라는 일방적인 통보를 보냈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파킨은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마누라? 까짓것 이혼하면 된다. 눈치 안 보고 이 여자 저 여자 만나러 다닐 걸 생각하니 오히려 좋다. 처갓집에서 받은 게 많긴 하지만 자신도 돈은 많다. 방송? 당장 개인방송 채널 열어 팬들 한 번 집합시키면 몇만 명은 우습다. 근래 플랫폼 대표가 자신을 찍어 내고 싶어 하는 눈치지만 대표는 자신에게 약점을 잡혀서 절대 그런 짓을 못한다.
그렇게 믿었는데… 바로 어제부터 이 모든 일의 원흉이 그 개새끼가 다시 움직이며 모든 것을 망쳐 놓기 시작했다.
“죽일 새끼… 씨발 새끼… 꺼억…….”
싹수가 보이기에 크루로 들어오라고 했는데 감히 자신의 제안을 콧등으로 듣지 않고 무시했다. 업계 선배로써 이 바닥 생리를 가르쳐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전에도 많이 써먹던 방법. 상어들을 예전에 찍어 놨던 콧대 놓은 혜미라는 년과 엮어 시나리오를 꾸몄고, 사이버 렉카들은 막 떠오르려는 신인을 피라냐 떼처럼 물어뜯어 걸레짝을 만들어 놨다. 여기까지는 기분 좋았는데…….
일이 요상하게 굴러가기 시작하고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일까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상황이 골치 아파졌다. 그동안 건드렸던 여캠들이 들고 일어나고 아무 소리 못 하고 업계에서 매장되었던 놈들이 자신에게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으며, 잠잠하던 안티팬들이 들고 일어났다. 뭐 여기까지도 괜찮았다. 자신의 긴 방송 경력 동안 이보다 더 심한 일도 많이 있었으니까. 그에게는 그를 응원하는 강력한 팬들이 있었다. 그가 무슨 짓을 하건 응원해 주는 이들이다.
그런데 오늘 그 죽일 놈의 새끼가 대형 사고를 쳐 버렸다. 마누라 일을 처리하느라 게임에 잠시 소홀했더니 무려 아프리카 길드가 점유하고 있는 영지에 나타나 대량 학살을 저질러 버린 것이다. 누구도 믿지 못할 압도적인 전투력을 보여 주며 말이다.
파킨의 이름이 다시 수면 위로 나타난 건 부차적인 문제다. 진짜는 놈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버린 것. 복수라는 명분을 통해 수백의 NPC와 길드원들을 학살하며 놈은 자신이 유망주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모든 이에게 외쳤다. 그리고 이 사건은 파킨과 케이를 저울질하던 이들에게 무게추가 누구에게 있는가를 말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부로 당신을 아프리카 길드에서 퇴출합니다. 그동안 길드의 공금을 횡령한 것에 대해서는 차후 로펌을 통해 통보하겠습니다.
아프리카 길드 길드마스터에서 쫓겨나며 자연스레 영주의 직위 또한 사라졌다.
자신에게 아부하며 손을 비비던 놈들이 합심해 자신을 몰아낸 것이다. 그뿐인가? 영주의 직위에 있으면서 체면 유지비로 사용한 돈을 걸고넘어졌다. 공금 횡령을 증빙하기는 힘드니 법적으로 대응하면 되지만 아프리카 플랫폼과는 영영 끝이다.
궁지에 몰리자 어쩔 수 없이 대표에 치부가 담긴 영상으로 딜을 제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두 시간 전 그 딜에 대한 대답을 들은 그는 망연자실해졌다.
-형님. 그동안 더러웠고 다시 보지 맙시다.
“뭐? 뭐 이 새끼야!”
머슴이라고 생각했던 병건의 전화.
-형님이 몰래 숨겨 놨던 것들 처리하느라 참 힘들었습니다.
“숨겨 놨다니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하, 병신… 크크크.
그 말과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불길한 예감에 핸드폰과 클라우드에 저장되어 있던 것들을 확인한 파킨은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 놨던, 누군가에는 칼이 될 혹은 그 자신에게 칼로 돌아올 비밀스러운 자료들이 전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
사과 방송을 마친 후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병나발을 불었고 지금 이렇게 침을 질질 흘리며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두고 보자. 개새끼들… 전부 가만 두지 않는다. 끄윽…….”
복수할 것이다. 이 지경까지 몰렸지만 아직 자신에게는 많은 것이 남아 있다. 팬들도 많이 떨어져 나갔지만 핵심 지지층은 그대로다. 정 뭐하면 자신을 따르는 크루와 팬들을 전부 이끌고 나가 새로 플랫폼을 세워도 된다.
“씨발… 죽여 버린… 다.”
파킨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킬 때였다.
뻐억!
뒤통수를 두들기는 막대한 고통과 함께 파킨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앞으로 고꾸라져 버둥대고 있는데 귓가로 건들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씨발 존나 비싼 시계네. 킥킥킥”
“너 새… 끼들…….”
“어, 일어나네? 야. 한 대 박아 줘라.”
퍼어어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