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마족 기사 카펠린
“죽인다!”
후우웅!
흑빛의 검신을 지닌 롱소드가 내 허리를 노리고 날아온다.
챙! 채채챙! 챙!
중갑을 걸치면 둔하다는 상식을 깨부수듯 엄청나게 빠르고 날래다.
[푸른 바람 일족 오러 연공술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와앗!”
오러를 끌어올리려 했는데 그조차 되지 않는다. 되든 안 되든 준비한 공격을 날린다.
챙! 채채챙! 채앵!
순식간에 다섯 번의 검을 나눈 후 바닥에 떨어져 땅바닥을 구르니 어느새 흑빛의 검신이 내 목을 찔러 오고 있다.
채에엥!
자세가 흔들린 상황에서 부딪히기는 했지만 빙백도가 힘없이 밀려났다.
“확실히 위협적이고 힘도 세네.”
밀려나는 검의 힘을 거스르지 않고 상체를 회전시키며 검을 도끼처럼 찍었다.
쩡!
이번에는 목가리개에 막혔다. 날이 반치 정도나 들어갔지만 꿈쩍도 안하는 걸 보면 갑옷 두께가 최소 손가락 한마디는 될 것 같다. 흡사 이건 말 그대로 움직이는 탱크다.
“더럽게 단단하네! 안 덥냐?”
“…….”
“재미없는 놈이네.”
“죽어라!”
“왜 자꾸 죽으라고 해. 그거 혹시 언령이냐? 백번 말하면 이뤄지는?”
화아악!
놈의 검을 피하는 순간 검집이 불시에 찔러 들어왔다. 통짜 금속으로 되었기에 맞으면 타격이 클 것 같다. 나름 회심의 한 수인지 명치를 향해 꽂혀 오는 검집 끝이 살벌하기 이를 데 없다.
[빙룡지력]
지이이이잉!
다행히 빙룡지력에 공격이 막혔다. 신화급 무기의 스킬은 통하는구나.
역시 아무리 사기 같은 고유 스킬이라도 격의 한계는 뛰어넘지 못하는 것 같다.
공격의 데미지를 고스란히 돌려받은 녀석의 몸이 경직시킨다.
파아앙!
“흡!”
카카칵!
흑색 갑주에 섬광이 피어오르며 긴 사선이 그어진다.
신화급 무기인 빙룡도의 날카로움으로도 뚫리지 않는 갑옷이다. 최소 전설급!
“이것도 막아 봐.”
채채챙!
빙룡도의 날이 채 빠져나가기도 전에 갑옷 면을 교묘하게 움직여 날을 잡아두고는 롱소드의 폼멜로 얼굴을 가격해 오자 난 곧장 뒤로 빠져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다. 처음으로 대치가 이루어졌다.
“어떻게 마나를 썼지?”
“무기가 좋거든.”
내가 빙룡도를 까딱이며 말하자 녀석의 눈 또한 탐욕에 물들었다.
“좋은 검이군. 그걸 넘기면 살려 주마.”
“넌 기본이 안 됐다.”
“그게 무슨 뜻이지?”
“부탁을 할 때는 좀 정중하게 해야지.”
“지금 내가 부탁하는 걸로 보이는가?”
“그럼 죽일 실력이 된다는 걸 먼저 보여 주든가.”
“크크큭!”
내 말에 녀석이 비틀린 웃음을 터뜨리며 머리에 쓰고 있던 투구를 벗어 땅에 떨어뜨렸다.
텅!
길고 검은 머리카락과 긴 귀, 보라색 피부의 얼굴이 드러났다. 눈이 깊어 그늘진 밑으로 삼백안이 자리해 있었는데 턱에서 이마까지 가로지르는 큰 상처가 인상적이다.
“네놈 제대로 상대해 주마.”
“난 건성으로 상대할 건데.”
도발을 날리며 해맑게 웃어 주니 녀석의 냉막한 얼굴에 살짝 금이 갔다.
“에이, 왜 그래? 도발이야, 도발. 도발 한두 번 당해 보냐?”
“네놈 쉽게 죽이진 않겠다.”
“화났냐? 화났니? 화났네?”
깐죽거리며 계속 빙글빙글 놀려 주자 녀석의 몸을 두르고 있던 마기가 커졌다.
“개처럼 기어 다니게 만들어 주지.”
“거참, 도발이라니까 그러네. 도발은 참아야 한다고 못 배웠냐?”
쉬아아아악!
마기에 물든 검은 롱소드가 빠르게 찔러 들어온다.
채에앵!
“와우, 힘 빡 들어갔네.”
막기는 했는데 손목이 은은하게 아려온다. 이어지는 놈의 연환 공격!
팟! 파파팟! 파팟!
중갑 검술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쾌속의 검격이다. 오러를 쓰지 않은 순수 능력치만으로는 따라잡기 버거울 정도라 연신 뒤로 물러서며 흘릴 건 흘리고 피할 건 피했다.
“좋은 검술이네. 이름이 뭐냐?”
“이놈!”
나름 진지하게 칭찬해 줬는지 오히려 화를 내며 더 달려든다. 아… 이건 진짜 칭찬인데.
아닌 게 아니라 녀석이 펼치는 검술은 정말 훌륭했다. 단순히 힘이 세고 빠르기만 한 게 아니다. 오랜 세월 실전이 녹아들어 완성된 중갑 검술이다. 하나 흠이 있다면 보법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걸치고 있는 갑옷의 무게 때문인지 두 발은 반보 전진, 반보 후진, 사선 전진, 사선 후진 따위의 팔방으로만 움직이는데 5분 이상 상대하니 슬슬 단조롭다고 느껴졌다.
마치 함정처럼.
“합!”
녀석이 처음으로 기합을 토하며 검을 찔러 왔다.
“하!”
내가 간격 밖으로 거리를 벌리는데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과도하게 앞으로 몸을 날리며 검을 베어 들어온다. 검에 실린 심상찮은 힘을 감지한 난 곧바로 빙룡지력을 사용했다.
쾅! 콰쾅!
검은 마기가 하얀 막을 연속으로 두들겼다. 그 짧은 시간에 두 번을 벤 것이다.
“스킬 아니었으면 위험할 뻔했네. 그건 그렇고 숨기고 있던 게 이거구나.”
상대의 스킬을 무력화시킨 채 검술과 피지컬로만 상대하는 줄 알았더니 결정적인 순간에 마기를 검기처럼 썼다. 누나도 몰랐으니 이건 잘 알려지지 않은 정보다.
척!
내 말에 답하지 않겠다는 듯 검을 들어 내 미간을 겨눴고 나 또한 빙그레 웃으며 마주 빙룡도를 중단세로 들었다.
“왜 만만하지가 않아?”
“이놈이……!”
“진지하게 충고하는데 제대로 안 하면 훅 간다?”
“죽여 버린다!”
살짝 눈이 돌아간 마족 기사가 거칠게 달려든다.
“흠…….”
채앵!
이젠 전보다는 좀 받을 만하다. 몇 분 어울렸더니 눈에 익어서 얼추 따라 할 수도 있을 정도니까. 사실 이 전투는 좀 더 빠르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왜냐고? 녀석의 마나컨퓨즈가 막을 수 있는 건 딱 전설급까지였으니까.
물론 보통의 유저라면 거의 대부분의 스킬이 봉인당하겠지만 난 이터 스킬이 있었다. 그리고 이터 스킬 몇 개만 사용해도 금방 제압이 가능하다.
챙! 채챙!
그렇지만 난 스킬을 일부러 사용하지 않았다. 이 녀석이 사용하는 검술을 배워 보고 싶었으니까. 소드마스터의 벽을 선물한 알레그로와는 전혀 다른 방향성을 지닌 검술. 오러를 사용하지 않으니 날것 그대로의 느낌으로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챙! 카카칵!
빗겨 올려치는 검을 대각선으로 흘리며 전진해 들어갔다. 계속해서 물러나던 내가 처음으로 접근하자 흠칫 하고 놀라더니 마주 힘을 준다.
카칵! 카카칵!
단순히 검을 맞대고 있을 뿐이지만 그 안에는 미세한 힘 조절의 대결이 있다.
빠악!
“큭!”
순간 눈앞이 번쩍 하며 별이 보였다.
챙! 채챙!
황급히 정신을 차리며 추가 공격을 막아 내는데 코에 흐르는 뜨거운 게 느껴졌다.
“이 새끼 비겁하게 박치기를……. 아, 코피.”
“크크크, 잘 어울리는군.”
“시발…….”
실전 검술이니 박치기 같은 변칙공격을 충분히 대비했어야 했는데 이건 내가 실수한 거다. 코피를 슥 하고 훔친 후 다시금 검을 맞부딪혔다.
챙! 채챙! 챙! 퍽!
“윽!”
이번에는 놈이 신음을 내질렀다. 한 손으로 국부를 쥔 채 주춤주춤 물러나는데 일그러진 얼굴이 참 마음에 든다.
“아, 미안… 다른 곳은 다 꽁꽁 싸맸는데 거기만 비어 있어서.”
국부가리개가 없기에 무릎으로 훼이크를 준 후 가볍게 모아 쥔 손등으로 그곳을 가격해 버렸다.
“으으음…….”
국부는 가볍게 툭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충격이 크다. 수컷은 수컷인지 허리를 못 펴네.
“좀 두들겨 줄까?”
“더러운 새끼!”
“대가리 단단한 새끼!”
“젠장!”
욕설을 내뱉은 녀석이 다시금 자세를 잡았다. 국부 공격의 충격이 컸는지 45도 방향으로 서 있던 자세가 70도로 바뀌었다. 그렇게 하면 수직 베기가 느려질 텐데. 놀려 줄 겸 고간치는 시늉을 하자 진심으로 분노했다는 듯 마기가 화악 피어올랐다. 젠장 나도 상태가 좋지 못하다고.
“아씨 진짜 이놈에 코피…….”
코가 부러졌는지 코피가 계속 흐른다. 패시브 회복력 때문에 이 정도 상처는 금세 사라지는데 이놈에 마나컨퓨즈 영향인지 회복력도 떨어졌다. 회복력 관련해서는 업적이 가장 많은데 설마 상대의 업적 중 전설급 이하는 전부 막아 버리는 건가. 신화급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걸 확인하고는 조금 실망했는데 업적까지도 간섭한다면 꽤 쓸 만한 스킬 같다. 하지만 바로 죽이기는 싫었다. 좀 더 이놈과 검의 대화를 나누고 싶다.
챙! 채챙!
베고 막고 흘리고 밀고 두들긴다. 허초로 상대를 기만도 하고 가벼운 블러핑에 물러나기도 한다. 비록 실제 몸을 움직이는 건 아니지만 그 어우러짐 속에 감각이 최고조로 달아오르고 그렇게 무아지경의 검격 속에서 상대와 소통을 한다. 비록 상대가 나를 죽이고자 하는 악의에 찬 NPC이며 보스지만 그 대화는 그 누구보다 순수하다.
채채챙! 채채채챙!
“으아아아!”
“하아아!”
전력을 다해 맞부딪히자 어느 순간 놈의 입가에 나와 같은 미소가 걸렸다. 게임을, 아니 죽음을 초월한 끈끈한 뭔가가 느껴진다.
타탁!
뒤로 물러선 녀석이 검을 가볍게 돌리며 말했다.
“대 치나 제국의 특임 기사단 수석 기사 카펠린이다.”
“포디나 백작가의 기사 케이 아이언우드.”
“시골 촌놈이었군.”
“뭐래는 거야. 이 퍼랭이가.”
“큭큭.”
이놈 참 마음에 든다.
그리고 그렇기에 최선을 다해 죽일 것이다.
하지만.
슈우우… 퍽!
“윽!”
진흙 방패의 자동 방어 기능도 무력화시킨 강력한 화살이 내 가슴에 꽂혔다.
“허…….”
방심하지 않았어야 했다. 마나 컨퓨즈라는 위험 요소도 있었지만 그걸 떠나 난 일대일의 순수한 결투를 보며 놈들이 최소한의 예의는 지킬 줄 알았다. 순진하게도.
슉… 슈슈슈슉!
[진흙 방패]
팟!
소리 없는 무음의 화살들이 날아오자 자동 발동하는 진흙 방패가 일어나 화살 두 대를 막아 냈으나 날아온 공격은 고작 두 개가 아니었다.
퍽! 퍼퍼퍽!
“큭!”
연달아 날아온 세 대의 무음 화살이 가슴과 왼팔 허벅지에 꽂혔다.
“와아!”
“쏴라! 더 쏴!”
퍼퍼퍽!
“컥!”
고함과 함께 수십 대의 화살이 내게 쏟아졌다. 마족 기사를 등지고 있었지만 녀석들은 마족기사의 중갑을 믿는지 내 쪽을 향해 가차 없이 화살을 날렸다.
퍽! 퍼퍼퍼퍽! 퍼퍽!
“으윽!”
처음 몇 대의 화살은 피했지만 날아오는 숫자가 너무 많다. 끝내 유도 화살 다섯 발이 복부에 연속으로 틀어박혔다. 젠장, 모두 내 실책이다. 내 감각과 회피력, 스킬을 믿었기에 방어구에 소홀히 한 대가를 신나게 치르는 중이다.
퍽! 퍼퍽!
너무 많은 화살이 박혀서 감각이 사라질 지경이고 생명력은 이미 바닥을 친 지 오래다.
“절대 방어.”
뒤로 빠르게 후퇴하며 마지막 구명줄인 절대 방어가 저장된 절대 방어의 반지를 발동시켰다.
그러나.
팟!
빛이 터지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하, 씨발… 이러면 나가린데.”
빙룡도랑 이터 스킬을 너무 믿은 게 화근이다.
언제든 죽을 각오는 되어 있었지만 이렇게 어이없게 죽는 건 계획에 없었다. 두 무릎에 힘이 풀려 간다.
“쓰러진다!”
“놈을 죽여라!”
“와아아아!”
“빙룡도가 저기 있다!”
끝내 마나 컨퓨즈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난 무릎을 꿇었다. 상태창에 부상 수치를 보면 전신이 검게 변했다. 치료하지 않으면 그대로 죽을 상황. 나를 향해 달려드는 놈들이 마치 영화 속의 좀비들 같다.
“X 됐네.”
적대국이라 내 아이템 대부분이 약탈 가능하다.
내가 아무리 재능빨 스킬빨로 논다지만 아이템빨도 무시 못 한다.
한동안은 전력 복구가 힘들다는 뜻. 다시는 이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거다.
그렇게 내가 다 체념한 채 뒤로 누워 버리려는 순간이었다.
눈앞에서 그런 나를 지켜보던 마족 기사가 돌연 내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이 명예도 모르는 놈들. 감히 신성한 대결을 망치다니.”
검은 갑주에서 마기가 구름처럼 피어오른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맹렬하게.
흠… 쟤 진짜 화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