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악몽의 재림
“걔는 알까. 자기를 고용한 이유가 누군가의 지독한 길치 본능 때문이라는 걸.”
“초치지 마. 누나.”
“말 타고 최고속도로 달렸을 때 5시간 걸리는 이곳을 어떻게 하면 8시간이 걸리니?”
“…나 전리품 확 경매장에 다 던져 버린다?”
“죄송합니다. 고갱님.”
“잘하세요. 부인”
“호호호, 네. 이럴 줄 알았냐? 제일 비싼 게 걸레짝이잖아! 적당히 살살 망가뜨렸어야지. 이거 전설급이라 수리비가 얼만데! 네가 주워 온 거 다 팔아야 수리비가 감당이 안 돼.”
세상 어떤 인간이 풀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마족 기사를 적당히 살살 두들겨 팰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어차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중이다.
“내가 망가뜨린 거 아냐.”
“그럼?”
“나중에 영상 봐. 좀 복잡해.”
명예 어쩌고 하더니 미쳐서 자기 편을 공격한 그놈 탓이지. 물론 기껏 피 다 깎인 마족 기사한테 포션 먹이고 다시 붙었다고 하면 아마 쌍욕을 퍼부을 것이다. 그런 미친 짓을 하냐고.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사나이의 로망인 것을.
“뭐 아무튼……. 든든하게 걷어 왔네. 고생했어.”
“이 정도야 껌이지. 근데 혼자 챙겨오려니 역시 가방이 너무 작아.”
내 말에 누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신화급 가방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신화급 가방은 구하기 힘든가?”
“응. 신화급 가방은 여기저기 수소문해 봤는데 아무도 안 내놓더라. 솔직히 있다고 해도 지금 우리 가진 돈으로는 언감생심이지. 워낙 쓰임새가 많아서 무기나 방어구보다 비싸게 거래되니까.”
“역시 그렇지?”
“응.”
무기나 방어구도 신화급이 되면 웬만한 건물 한 채 값이겠지만 웃기게도 전설급 정도까지만 올라가도 가방이 더 비쌌다. 유저들이 제작할 수 있는 한계가 희귀급이고, 전설급이나 신화급은 보스 드랍이나 고위 귀족들이 애지중지하는 보물을 수여받는 수밖에 없다.
“뭐,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거지.”
“그래. 그건 그렇고 내일 오후 1시부터라고 했지?”
“응.”
“자신 있어?”
“못할 자신이 없어. 사소한 문제만 아니면.”
“사소한 문제?”
“원래 계획은 암흑가에서 가짜 신분증 만든 다음에 카머슨 남작령 침투하려고 했거든. 그런데 놈들이 먼저 쳐들어오는 바람에 그럴 수 없게 되었어.”
얼굴 까면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포디나의 이름값이 따라붙기 때문이다. 하물며 카메리아의 학살자라는 거창한 칭호까지 받았으니 이제 카머슨 남작도 내 얼굴은 알고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허락 받고 나가야 한다는 건데 적당한 핑계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럼 출격 허락도 받지 않고 함고슈한테 그런 약속을 했어?”
“함고슈가 아니라 황고슈야. 그리고 어쩔 수 없었어. 내 예측대로라면 한시라도 빨리 나가야 해.”
“무슨 예측?”
“아아, 더 물어보지 마. 나 지금 피곤해서 죽을 거 같아.”
“으음, 그럼에도 버티는 거 보면 이제 너도 진성 하드게이가 되어 가는구나. 성인용 기저귀라도 구해다 줄까?”
“그걸 입느니 차라리 죽을 거야.”
세이온 하드 게이머들은 캡슐 들어가기 전에 성인용 기저귀 찬다는데 난 죽었으면 죽었지 그 짓은 못할 거 같다. 캡슐에 경고 장치도 있고 정 급하면 어디 숲에서 은신이라도 한 다음에 급하게 화장실 다녀오면 된다.
“알았어. 그런데 그 전설 갑옷 세트 네가 입을 거야? 입는다고 하면 어떻게든 고쳐 주고.”
“아니, 중갑이라서 별로야. 그리고 그거 착용 제한에 중갑 숙련도 있잖아.”
“중갑 숙련이야 새로 배우면 되지. 무게는 파츠 몇 개 빼던가.”
“나도 고민 좀 했는데 역시 안 되겠더라고 그냥 팔아 줘.”
마족 기사 카펠린이 입었던 갑옷은 정말 방어에 특화된 것이었다.
그러니 내가 날린 치명타도 대부분 받아넘긴 것이겠지만 그 방어력의 반대급부는 관절 가동 범위가 예상보다 좁으며 정말 더럽게 무겁다는 것이다. 그걸 입고 그렇게 날아다녔다는 게 신기할 따름.
“으음, 알았어. 그럼 필요한 거 있어?”
“가죽 재질 갑옷 전설급으로나 천천히 알아봐 줘.”
“시간이 좀 걸려.”
“언제는 안 그랬나. 그래서 천천히라고 했잖아.”
“오키도키, 우리 동생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
“그렇지.”
이번에 죽을 뻔하고 느낀 건데, 이놈에 게임은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 솔직히 자동 방어 기능이 있는 진흙 방패를 믿고 있었는데 그 자동 방어를 무력화시키는 무음시가 들어올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알았어. 다른 건?”
“내일 소모품 준비 좀 부탁할게. 지금 너무 피곤하네.”
“그래. 얼른 들어가서 쉬어.”
“응.”
누나와 헤어진 난 근처에 있는 국경 경비 숙소로 향했다.
“충!”
마주친 병사들이 하나같이 잔뜩 군기가 든 표정으로 경례를 한다.
기사용으로 마련된 숙소로 들어선 난 침대에 몸을 뉘였다. 낡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쓸만하다. 옆에 있는 병사용 숙소도 봤는데 침대가 아니라 통로 양쪽으로 침상이 있는 형태다. 예전 사진에서 봤었던 80년대 군대 같은 느낌이랄까?
“나쁘지 않네.”
지금 밖에는 퀘스트로 동원된 일반 유저들이 안전지대에 막사를 짓느라 한창이다.
그런 것에 시간을 허비할 필요 없으니 역시 귀족이라는 건 참 좋은 거다.
“얼른 로그아웃해서 쉬어야지.”
오늘 하루도 참 파란만장했다.
* * *
푸슉!
“윽…….”
캡슐에서 일어나자 예의 그 두통과 멀미가 찾아왔다. 광폭화를 무리하게 쓰면 항상 이랬다.
“지우든가 해야지.”
아무리 좋으면 뭘 하나. 몸에 안 좋은데…….
좀 더 좋은 보스 스킬을 얻으면 곧장 광폭화를 갈아 버릴 것이다.
사실 광폭화는 그리 좋은 스킬도 아니었다. 사기적인 공격력을 제공하지만 생명력을 절반 이하로 유지해야 하니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진다. 날카로운 명검 위에 서서 춤을 추는 느낌이랄까. 이제 적들의 공격이 좀 더 교묘해지고 강력해질 테니 이런 극단적인 스킬을 배제해야 한다.
“조용하네.”
누나는 윗층에 있을 테고 상도 형이랑 광수 형은 어디 나간 모양이다.
거실로 나가니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빼고는 어둠이 가득하다. 창밖으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에서 어째서인지 단절감이 느껴진다.
“불 좀 켜놓지.”
거실에 불을 켠 후 쇼파에 앉았다. 문득 불빛이 비치지 않는 주방의 어두운 곳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것도 없지만.
‘무서워.’
누군가 있는 것 같다. 그래. 작은 몸집에 한 아이가 머리를 감싼 채 그곳에 쪼그리고 숨어 있다. 두려움으로 눈을 꾹 감고 있는 얼굴 곳곳에 멍이 든 아이가 말이다.
“씨발…….”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한동안 정신을 놓고 살았다. 어쩌면 당연했을 것이다. 아빠의 사인은 자살이었으니까.
한참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나이임에도 난 혼자 있는 습관을 들여야 했다. 새벽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는 엄마로 인해 툭하면 저런 구석진 곳에 숨어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고, 술에 취해 들어온 엄마는 나를 매질했다.
“같이 죽자. 같이 죽어.”
행복했던 기억이 있긴 했던가. 하루하루가 지옥이었고 간혹 누군가 현관을 두들길 때면 혹 무서운 빚쟁이 일까 두려워 벌벌 떨었다.
‘흐… 흐흑… 정현아. 엄마가 미안해.’
‘나쁜 새끼! 혼자 죽으니 좋아? 너도 똑같아.’
‘우리 다 같이 죽자!’
언제나 술냄새를 잔뜩 풍기던 엄마가 기억난다. 나를 보육원에 버린 그날.
난 그날을 기억한다. 항상 술에 취해 있던 엄마가 슬픈 눈으로 날 씻기던 그 날.
너무나도 오랜만에 느껴 보는 다정한 엄마의 손길이 너무 좋았다. 매질하던 손은 무서웠지만 그마저도 없어질까 무서웠으니까. 내게 깨끗한 옷을 입힌 엄마가 말했다.
‘우리 소풍 갈까?’
‘응! 좋아요!’
뭔가 불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꼭 잡은 엄마 손이 너무 좋아 방글방글 웃었다.
‘요 앞에서 누구 좀 만나고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응!’
‘그래. 정현이는 착한 아이니까. 엄마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야 해.’
‘응!’
나를 보육원 앞에 놓아둔 엄마는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듯… 사라졌고, 나는 참 오랫동안 그 앞에서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미운 네 살 엄마 아들 나정현은… 슬픈 네 살 보육원 아이 나정현이 되었다.
“기분 더럽네.”
짜증 나는 기억일 뿐이다.
* * *
“거기 벽돌 좀 얼른 가져와!”
“최소 2m는 파야 한다고! 더 깊게!”
일렌 자작이 병사들과 유저들을 지휘하여 관문을 수리하고 있다. 부서진 방책을 더 보강하여 다시 세우고 그 앞에는 작지만 해자도 파낸다고 난리가 아니다.
한참 수리를 진두지휘하던 일렌자작이 아는 체를 하며 다가왔다.
“우리 카메리아의 학살자가 왔군!”
“부끄러운 칭호일 뿐입니다.”
“어허! 부끄럽다니! 자네의 그 용기와 무용은 영웅 그 자체였네. 만약 자네가 아니었다면 국경 근처 마을은 전부 초토화가 되었을 거야. 그러니 영웅이지.”
“그게 어찌 저 혼자의 힘이겠습니까. 적기에 병력을 끌고 오신 백작님의 공이 컸지요.”
“허, 거참……. 사람이 너무 겸손하군.”
“하하.”
난 한없이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내 본모습을 아는 누군가가 본다면 가식적이라고 손가락질 했겠지만 일렌 자작은 이런 걸 좋아했다.
[일렌 자작의 친밀도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나를 바라보는 일렌 자작의 눈에 꿀이 떨어지는 것 같다.
“저, 그런데 백작님이 어디 가셨습니까?”
“본성으로 돌아가셨네. 선전포고도 없이 쳐들어온 귀족으로서의 명예도 모르는 카머슨 남작에 대한 징치는 둘째치고, 사태의 중함이 우리 영지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니까 말일세.”
“그렇지요.”
사실 나도 어제 군세를 보고 좀 놀라기는 했다.
전해들은 바로 카머슨 남작령은 기사 30명 정도에 병사는 일천이 좀 안 된다고 들었는데 어제 본 군세는 유저를 빼더라도 200명이 넘었고 거기에 황실에서 파견한 귀족 기사도 있었으니 적은 단순히 카머슨 남작 하나가 아니었다.
이대로 간다면 전격적인 확전은 불가피하다.
“백작님께서 자네에게 많이 미안해하신다네.”
“예?”
“자네가 치나 제국과 카모슨 남작의 준동을 예견하지 않았는가.”
“아, 예.”
그거야 카머슨 영지를 쳐들어 갈 구실을 찾다가 소 뒷걸음질로 쥐 잡은 거지만 맞춘 건 맞춘 거다.
“자네 말을 들어 방비를 좀 더 철저히 했다면 이런 피해도 없었겠지.”
“그렇겠죠.”
아닌 게 아니라 이번 기습으로 인해 백작은 상당한 인적 손실을 봤다. 기사들은 그나마 살았지만 병사들 상당수가 죽임을 당했다. 이건 상당한 문제다. 포디나는 병사를 충원하기 어렵다. 보통 다른 영지에서는 유저들도 병사로 많이 지원하는데 이놈에 포디나는 병사가 될 만한 레벨이 되면 좀 더 강한 몬스터가 있는 영지로 떠나 버린다.
“아무튼 앞으로 내가 이곳에 책임자로 있는 이상 자네 의견을 적극 반영하겠네. 그러니 자네도 너무 실망하지 말고 영지를 위해 힘써 주게.”
“알겠습니다.”
일렌 자작이 예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밀어준다면야 나야 고마울 뿐이다. 백작의 최측근일 뿐만 아니라 영지의 이인자였으니까. 그때 문득 하나의 기발한 생각이 들었다. 마침 정오부터 개시할 카머슨 영지 침투에 어떤 핑계를 가져다 붙일까 고민했는데 일렌 자작이 그 단초를 던져 준 것이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제가 일렌 자작님께 건의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말해 보게.”
“현재 저희 영지는 병사든 레인저든 모두 부족한 형국입니다.”
“그렇지.”
“그리고 지금 가장 필요한 건 적진 깊숙이 들어가 정보를 파악할 레인저지요.”
“음…….”
내 말에 동감하는지 일렌 자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굳이 알아볼 필요도 없는 포디나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영지는 터무니없이 넓은 주제에 각 가도를 관리할 레인저의 수는 절대 부족이었으니까. 포디나 레인저가 아직 도착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유저를 쓰면 되는 거 아니냐고 물을 테지만 위에 말한 대로 쓸 만해지면 떠나는 게 이 동네 일상이다.
“그래서 제가 오늘부터 정찰을 나설까 합니다.”
“기사인 자네가 직접 말인가?”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뜨는 일렌자작이다.
보통의 기사들은 정찰 같은 일을 하길 꺼려 한다. 정찰이라는 건 매우 고달픈 일이었고, 적들과 명예롭게 싸우는 것이 아닌 몰래 정탐을 하는 것이니까. 그런데 내가 먼저 나서서 정찰에 나서겠다고 하자 놀란 것이다.
“나야 자네가 나서 준다면 고맙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정찰로 뺄 만한 인원이 없어.”
정찰은 절대 혼자서 나갈 수 없다. 만약을 대비해 최소 3인 일조로 편성하는데 그 이유는 비박을 할 시 보초 인원이 최소 3명은 되어야 어느 정도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은 필요 없습니다. 물론 길잡이 한 명 정도는 필요하겠지만 그 또한 용병을 쓰면 되고요.”
“용병을? 그치들을 믿을 수 있겠는가? 혹시라도……. 아, 아니군. 잠시 자네가 누군지 깜빡했네. 카메리아의 학살자를 무시할 이는 없겠지.”
“하하하…….”
“좋네. 그 일은 자네에게 모두 일임하지.”
“감사합니다.”
구실 만들기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