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보스 스킬 쓴다-112화 (112/154)

112. 그다지 좋지 않은 기억

“아니, 대체 이 잘생긴 얼굴을 왜 가리고 다닌 거야!”

어깨에 묻은 머리카락을 털어 주는 헤어 디자이너 아줌마가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밖에 나갈 일이 별로 없어서요.”

“어이구, 낭비야, 낭비! 거기에 피부가 왜 이렇게 좋아? 화장품 뭐 써?”

“스킨로션만 쓰는데요.”

“타고났네. 타고났어! 부모님한테 고맙다고 해야겠어.”

“아, 네. 이제 머리 감으면 되죠?”

“그렇지.”

그다지 꺼내고 싶지 않은 주제에 난 단답형으로 대답하고는 서둘러 머리를 감았다.

“스타일 좀 더 다듬어 줄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내가 해 주고 싶어서 그래. 돈 안 받을게! 서비스야!”

“다음에 와서 받을게요.”

“아이, 그럼 그렇게 해. 호호호.”

계산을 마친 후 밖으로 나가니 목을 간질이는 바람의 느낌이 상큼하다.

아까 아줌마의 말에 가라앉았던 기분도 다시 좋아진다.

“다음은 은행!”

난 근처에 있는 은행으로 걸어갔다.

삐빅!

‘118,591,526원.’

“하아…….”

온라인 입출기에서 잔액을 확인하는데 화면에 뜬 금액이 잘 실감나지 않는다.

누나 말로 건물 사느라 계좌가 텅 비었다던데, 나한테는 1억 원도 엄청난 금액이었다.

거기에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세이온 계좌에 있는 골드 또한 세금처리만 하면 전부 자산이었다.

“얼마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따로 계산하는 편이 아니라 누나가 정산을 보여 줘야 그 정도 모였구나 안다.

“그래도 좋네.”

난 원래 캡슐방에 취직하거나 공장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딱히 돈을 벌 만한 기술 같은 건 없었으니까. 그런데 형 덕분에 세이온을 시작했고 어쩌다 보니 한 달에 몇천, 몇억은 우습게 버는 네임드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딱히 사고 싶은 건 없어.”

돈도 써 버릇 해야 쓸 줄 안다고 막상 거금이 있지만 ‘뭔가를 사고 싶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보육원 출신들은 대부분 이렇다. 머릿속에 뿌리박힌 게 아껴야 한다는 것뿐이라 구매에 대한 욕구가 거의 거세된 것이다. 누군가는 멋진 스포츠차를, 누군가는 명품 시계를, 또 누군가는 집이나 땅을 산다는데, 집이나 땅이라면 모를까 다른 건 별로 마음이 가지 않는다. 그렇지만 마음이 안 갈 뿐이지 돈에 대한 생각은 언제나 같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난 보육원 원장님의 말씀을 잊지 못한다. 돈으로 완전한 행복을 살 수는 없지만 돈이 많으면 그럭저럭 괜찮은 행복은 살 수 있다고. 그리고 대부분의 불행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 돈 많이 벌고 혹 넘치도록 벌면 보육원에 기부도 좀 하라고 말이다.

“일단 천만 원 정도만…….”

아직 넘치도록 번 건 아니지만 이 정도는 괜찮겠지. 누나가 기부는 절세에 좋다고도 했으니까. 천만 원을 보육원 후원 계좌에 송금한 난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은행을 나섰다.

“좋은 일 했으니까. 행운이 좀 쌓였으려나.”

딱히 신을 믿는 건 아니지만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걸 믿고 싶다.

“간만에 외식이나 하고 들어가야지.”

맨날 집 밥이나 배달 음식만 먹다보니 좀 비싼 게 땡긴다.

길을 헤맬 가능성도 있지만 그거야 핸드폰 네비게이션이 있으니까.

식당가로 기분 좋게 발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오, 오빠…….”

순간 등 뒤로 낯선 목소리가 들린다. 내 앞으로는 아무도 없기에 설마하고 돌아봤는데 웬 처음 보는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얀색의 하늘하늘한 미니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내가 지금까지 봤던 어떤 여자보다도 예뻤다. 순간 가출하려던 정신을 부여잡은 난 그녀에게 말했다.

“혹시 저를 부르신 건가요?”

내 물음에 그녀의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하더니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내가 이런 미녀랑 아는 사이였나.

“저를 아세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 정현 오빠.”

정현이라면 내 이름이 맞다.

한 걸음 다가오는데 훅하고 느껴지는 달큰한 향기에 난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저기 죄송한데 저는 그쪽이 누군지 모르거든요.”

“아…….”

내 말에 실망했다는 듯 고개를 숙였고, 순간 내가 엄청나게 큰 죄를 지은 것처럼 그녀에게 미안해졌다. 그렇지만 기억나지 않는 걸 기억난다고 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제가 사람을 그다지 잘 외우지 못해서요. 죄송합니다.”

“아니, 그게… 저기… 저 수정이에요. 이수정.”

“이… 수정이요?”

“네. 그게 예전에… 그러니까 8년 전쯤에… 오빠가… 구해준…….”

“아…….”

순간 정수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차가운 물에 얻어맞은 것 같다.

두근거리며 달아오르던 기분이 순식간에 수직으로 고꾸라진다.

이제야 기억났다. 이수정.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기억의 주인!

“수정이?”

“기억나셨어요?”

“그래. 오랜만이다. 수정아.”

내 말에 수정이는 금세 환해져서 다시금 한 걸음 다가선다. 그러나 이전과 같은 두근두근한 향기는 더 이상 없다.

“그만, 다가오지 마. 반가웠고. 잘 가.”

인사를 하고 곧장 뒤돌아 잰 걸음으로 뛰었다.

“저, 저기…….”

탁탁탁.

뒤따라 뛰어오는 구두 소리가 들렸지만 난 뒤돌아보지 않았다.

걸음을 더욱 빨리하자 구두 소리가 멀어진다. 잊고 있었던 악몽이 머리를 뜨겁게 채우는 것과 별개로 가슴은 차가워졌다. 사실… 한 번 정도 뒤돌아보고 싶었다. 아주 가끔. 정말 가끔 보고 싶기는 했으니까. 그러나 그런 생각과는 다르게 내 다리는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그렇게 내가 대로 옆으로 뚫린 골목들을 지날 때였다.

부우웅! 부앙!

무심히 지나치던 미로처럼 복잡한 골목 사이로 오토바이 소리가 들린다.

성격이 급한지 연신 스로틀을 돌리며 빠르게 가까워지는 엔진음.

골목을 지나쳤던 난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았다. 수정이는 아직도 뛰어오고 있다. 구두가 불편한지 나를 보면서 뛰어오는데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친다. 이건 일종의 육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도 상당히 잘 들어맞았고 세이온을 시작한 후로 어째서인지 이게 더욱 날카로워진 그 육감이 지금 위험을 알리고 있다. 망설이면 안 된다고.

“젠장!”

가까워지는 오토바이 소리와 위험 신호가 머릿속에 떠오르자 난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수정이를 향해 뛰었다. 내가 몸을 돌리자 걸음을 멈추는 수정. 그런데 하필 그게 골목길이다.

부아아앙!

삐! 삐! 삐이이이잉!

엔진음과 함께 오토바이 경적 소리가 울린다.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돌리지만 이미 늦었다.

“멍청아!”

난 그대로 수정이를 몸으로 감싸고 밀었다. 그리고 종아리를 묵직한 뭔가가 다가와 때렸다.

퍼어억!

“악!”

“꺄아악!”

수정이의 비명과 함께 내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오토바이 바퀴에 부딪힌 충격으로 몸이 밀려 나간다.

퍼퍽! 쾅!

수정이를 안은 채 굴러간 난 그대로 전봇대에 처박혔고 나와 부딪힌 과속한 오토바이는 바닥을 쓸며 굴러가 도로로 밀려 나가 버렸다.

“끄으으…….”

다리와 허리가 너무 아프다. 품에 안긴 수정이는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지만 정신을 아예 못 차리고 있다.

“큭, 야… 괜찮아?”

흔들어도 정신을 못 차린다. 어떻게 든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아가씨!”

“야, 이 새끼 빨리 치워!”

억센 손이 나를 내던지듯 옆으로 밀어 버렸다.

“큭!”

바닥을 두어 번 구르고 상체를 일으키자 검은 양복에 선글라스를 낀 두 남자가 수정이를 보호하듯 둘러싼 채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수정 아가씨! 아가씨!”

“철수야! 빨리 차! 아니, 엠뷸란스 불러!”

둘은 나나 쓰러진 배달원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호들갑을 떨며 핸드폰을 들었다.

“예! 사고가 났습니다. 여기가 어디냐 하면 말이죠!”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키는데 순간 이마를 타고 뜨끈한 게 흘러내렸다.

손으로 닦아보니 온통 시뻘겋다. 2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머리를 다듬었는데 말짱 도루묵이네. 큭… 크큭… 그래. 그때도 이랬다.

철컹철컹!

컹컹! 크르릉!

“수정아! 빨리 도망쳐!”

“오, 오빠! 나… 다, 다리가!”

“빨리 가라고! 멍청아!”

크아앙!

“아악!”

“오빠! 오빠!”

“아윽! 빨리 도망치라고 병신아!”

기분 나쁜 주마등이 연이어 뇌리를 두드린다.

“쟤 때문에 우리 수정이가 저런 위험한 곳에 간 거잖아요! 이래서 부모 없는 것들이랑 놀리면 안 된다니까!”

“엄마! 그거 내가 가 보고 싶다고 한 거야! 오빠는 잘못 없어!”

“오빠는 무슨 오빠! 장 비서 뭐해요! 수정이 빨리 차로 안 데려가고! 저 더러운 건 얼른 치워!”

“오빠! 오빠!”

정말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다. 난 정신을 잃은 수정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병신 같은 계집애. 너랑 얽히면 난 항상 다치는구나.”

“뭐라고? 너 이 새끼! 우리 아가씨한테 지금 뭐라고 했어?”

내 말을 들었는지 전화를 마친 선글라스가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고 기분이 최악으로 치달은 내 입에서도 좋은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 썅년 데리고 꺼져 병신아.”

“이 새끼가!”

녀석은 다짜고짜 내게 주먹을 휘둘렀다. 머리를 노리는 정직한 공격이다.

허리와 다리가 끊어질 듯 아팠지만 이딴 것에 맞을 정도로 내가 만만하지는 않다.

난 녀석의 안쪽으로 한 걸음 파고들어 그대로 어퍼컷을 날렸다.

퍼어억!

“컥!”

턱에 제대로 얻어맞은 녀석이 그대로 허물어진다. 마음 같아서는 쓰러지는 녀석의 머리를 한 대 더 갈겨 주고 싶지만 거칠게 움직여서 인지 배가 욱신거려 움직일 수 없다.

“저 새끼가!”

수정이에게 붙어 있던 녀석이 넥타이를 거칠게 풀며 몸을 일으킨다. 몸 상태가 최악이기는 하지만 둘 정도야 우습지. 너도 와라!

“윤석 아저씨!”

“아가씨… 지금은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귓가가 윙하고 울린다.

순간 수정이의 목소리가 물에 잠긴 듯 작게 들려왔다. 어라… 몸이 왜 이러지.

* * *

“정현아!”

정신을 차리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상도 형의 부담스러운 얼굴이었다.

“어우… 제발… 안구 테러 자제 좀!”

“이 새끼야!”

상도 형의 솥뚜껑 같은 주먹이 내 머리 위에서 부들거린다. 한 대 때려 주고 싶다는 아우라가 팍팍 풍긴다. 온몸이 욱씬거리는데 왜 웃길까.

“쳐 웃네. 미쳤냐?”

“나 정신 놨었어?”

“그래.”

“얼마나?”

“반나절”

“끙, 그럼 대충 알겠네.”

설명하려면 짜증 났을 텐데 알고 있다니 다행이다.

“그래. 한 시간 전쯤에 변호사라는 새끼가 와서 치료비라고 천만 원 던져 주더라. 입 다무는 조건으로… 하… 씨발.”

“받았어?”

“미쳤냐? 그 새끼 주둥이에 쑤셔 넣어 주려다가 참았다.”

“큭큭큭, 잘했어. 아윽…….”

배에 힘이 들어가니 허리와 복부가 사정없이 당긴다. 이렇게 다쳐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참 당황스럽다.

“나 얼마나 다친 거야?”

“디스크 다 튀어나와서 허리 병신 된다더라. 어쩌냐. 강제 캡슐행이네.”

“헐…….”

“농담이고 갈비뼈 하나 금가고 종아리랑 허리 근육이 많이 다쳐서 최소 2주 입원 물리치료까지 한 달이라더라.”

“입원이면 그냥 캡슐에서 하면 안 되나? 어차피 누워 있는 건 똑같은데.”

“미친 새끼, 그 짓 하다가 병신 된 놈들 여럿이라니까 닥치고 얌전히 치료받아.”

“네네.”

“으휴.”

크게 한숨을 내쉰 형이 핸드폰을 들었다. 문자를 보내는 듯 화면을 쿡쿡 누르며 형이 말했다.

“듣기는 했는데 네가 제대로 설명해 봐. 왜 네가 왜 개 같은 거성그룹 금지옥엽이랑 여서 다쳤는지.”

우리나라의 10대 대기업인 거성그룹. 수정이는 그 그룹 회장의 단 하나뿐인 친손녀였다.

“그게…….”

난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형에게 이야기를 했다.

잠시 후 내 이야기를 다 들은 형은 익히 예상했던 반응을 일으켰다.

“그 씨발 것들은 어떻게 옛날이랑 똑같은 짓을 하냐.”

“후… 그렇지.”

난 천천히 예전 기억을 다시 더듬었다.

그것은 약 8년 전 이야기다. 옛날 수정이는 그녀의 부모를 따라 보육원에 온 적이 있었다. 당시 보육원에서는 매달 정기 후원 행사를 했었는데 기부자로 초대되었던 것. 기자에 둘러싸여 있는 부모님 덕분에 심심해하던 수정이는 어쩌다 보니 나와 어울리게 되었다.

“오빠 잘생겼어.”

“어, 고마워. 근데 넌 누구니?”

“난 수정이. 이수정.”

* * *

“컹컹!”

“저거 호랑이 할아버지네 개인데 진짜 위험해. 가까이 가면 안 돼.”

“우리 집 폴리랑 똑같이 생겼는데 폴리는 착해.”

“착하기는… 저거 사람도 물었어.”

“아냐 아냐! 착해!”

“아니, 가면 안 된다구!”

수정이가 다가가자 개는 미친 듯이 짖어 대며 몸부림쳤고 끝내 묶여 있던 말뚝이 뽑혔다. 난 당시 수정이를 보호하다가 개한테 물렸는데 수정이의 울음소리에 어른들이 몰려오고 나서야 개의 이빨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나에게 돌아온 건 아직도 잊히지 않는 그녀 엄마의 앙칼진 목소리였다.

“쟤 때문에 우리 수정이가 저런 위험한 곳에 간 거잖아요! 이래서 부모 없는 것들이랑 놀리면 안 된다니까!”

“엄마! 그거 내가 가 보고 싶다고 한 거야! 오빠는 잘못 없어!”

“오빠는 무슨 오빠! 장 비서 뭐해요! 수정이 빨리 차로 안 데려가고!”

내 팔에는 아직도 당시의 상처가 깊게 남아 있다. 아니, 가슴에는 더 큰 상처가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다.

“근데 걔랑 연락 중이었냐?”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그럼 어떻게 널 찾아와? 얘기 들어보니까 우연히 마주친 것도 아닌 거 같은데.”

“몰라. 나도 갑자기 만나서 놀랐다니까.”

“뭐야? 설마 감시?”

형의 물음에 나 또한 볼을 긁적일 수밖에 없다.

수정이 걔가 어떻게 그 시간에 거기에 있었는지는 나도 이해가 안가니까.

“후, 모르겠다.”

지금은 닥친 일만을 걱정해야 할 때다. 하필 가장 중요한 시기에 다쳐서 누워 버리다니.

유저가 없어도 세이온의 사건은 흘러간다. 유저가 접속하지 않으면 NPC들과의 관계는 틀어지고 가지고 있던 사회적 지위 또한 사라질 수 있었다. 막말로 내가 누워 있는 동안 카머슨 남작이 쳐들어와 포디나가 점령당하게 된다면 내 기사 작위는 물론 남작이라는 신분도 날아갈 수 있다는 소리다.

“빨리 낫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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