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보스 스킬 쓴다-113화 (113/154)

113. 카타레나 방어전

빛 한 점 들이지 않는 어둠 속 한 소녀가 몸을 웅크리고 있다.

마치 시체인 것처럼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소녀. 그녀는 회상했다. 그를 처음 본 그날을.

“잘생겼다.”

그 어떤 물질적 부족함도 사랑도 뭔지 모르던 어린 그녀는… 난생처음 누군가를 영원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참을 수 없는 욕심을 느꼈다. 그것이 할아버지가 말하던 이씨 집안 혈통의 타고난 소유욕인지 혹은 그녀의 감정인지는 알 수 없지만, 솔직히 그런 건 상관없었다. 그냥 처음 본 순간 그녀의 심장에 소년의 화인(火印)이 새겨졌으니까. 바로 친해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천진난만한 제 나이 또래 소녀의 모습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그리고 친해졌다. 그와 함께 있으면 행복했다. 얼굴만 보고 있어도 좋았다. 말을 재미있게 하는 것도 아니고 기분 좋은 말을 해 주는 것도 아니었지만 소년과 나누는 모든 추억은 그녀에게 소중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신으로 인해 그가 크게 다치고 부모님께 보육원 방문을 금지당했다. 식음을 전폐한 지 열흘이 되던 날, 할아버지가 말했다.

“넌 분명 싫증이 나 벽장에 처박아 두는 인형처럼 잊게 될 거다.”

“안 그래요!”

“글쎄, 그건 모를 일이지.”

“절대 잊지 않아요! 그리고 오빠는 내 거예요.”

“좋다. 나를 똑 닮은 내 사랑스러운 손녀야. 그렇지만 네 것을 가지고 싶다면 그만한 힘을 가져라. 지금의 넌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단다.”

“가질 거예요. 절대!”

인내하며 힘을 키웠다. 오빠를 가질 날을 기약하며. 그런데… 모든 걸 망쳤다. 아직 완전히 힘을 갖춘 건 아니지만 먼발치에서라도 한번 보고 싶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저도 모르게 다가가지만 않았어도…….

그때 그녀의 곁에 묵묵히 서 있던 30대 중반의 검은 양복의 여자가 입을 열였다.

“성급하셨습니다. 아가씨. 차라리 저를 데려가셨다면…….”

“유 비서를 데려갔다면 엄마 눈을 돌릴 수 없었겠지.”

“사모님께서는 이미 어느 정도 눈치채고 계셨습니다.”

“알아. 두고 보고 있었다는 거.”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아직 오빠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떻게든 눈앞에서 치워 버릴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지금까지 최대한 오빠와의 접점을 가지지 않으려고 했었다.

지금까지 잘 참아왔고, 앞으로도 참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최소한 성인만 지나면 자신에게 묶여 있던 족쇄 하나는 풀리니까.

그렇지만 은행에서 나오던 오빠의 은은한 미소를 보는 순간 그녀는 참을 수 없었다.

“사장님께서 움직이셨습니다.”

“어떻게?”

“로펌을 통해 이번 일에 대해 함구하는 조건으로 치료비 천을 제시했더군요.”

“천? 설마 천만 원?”

“사장님은 고약한 분이시니까요.”

꾹.

보통의 부모라면 이럴 수는 없다. 자신이 크게 다칠 것을 막아 줬는데 대리인을 통해 고작 천을 제시했다. 보통의 부모라면 이러진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크게 분노하지는 않았다. 익숙하니까.

대신 손바닥에 피가 나도록 주먹을 쥐었다. 세상 모두에게 그를 가지는 것에 방해받는 기분이다. 그는 이 일로 자신을 또 얼마나 더 미워하게 될까. 자신을 바라보던 그 차가운 눈빛을 다시금 마주한다면 그녀는 버틸 자신이 없다. 그러나 그것만 아니라면… 그녀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그녀는 그만한 힘을 가졌으니까.

“차 대기시켜.”

“어디로 모실까요?”

“한남동.”

서초는 거성그룹의 심장이 있는 곳. 바로 회장인 할아버지의 저택이 있는 곳이다.

“결심하신 건가요?”

“응. 최소한 성인 때까지는 참으려고 했는데 이제는 안 되겠어.”

시간이 지나면 좀 더 자연스럽게 자신의 것을 넘겨받을 수 있었겠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오빠가 너무 잘난 게 문제였다. 이대로라면 금세 옆에 다른 여자가 생기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그 꼴은 못 봐.’

그는 자신의 것이다. 그때 유 비서가 말했다.

“그런데 아가씨… 그분 이대로 괜찮으시겠어요? 이대로라면 감정이 더 안 좋아질 거 같은데…….”

“나도 알아. 그래서 어떻게든 사과하고 싶은데……. 현실에서는 힘들 거 같고 오빠를 도울 방법 뭐 없을까?”

“어떤 도움 말씀이신가요?”

“아이템을 지원해 준다거나 레벨을 올려준다거나… 유명세를 떨치게 만들어 준다거나.”

평범하지만 쉽게 떠올릴 방법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위의 세 가지면 상당한 도움이 될 테니까. 그렇지만 그녀가 말하는 오빠에게는 전혀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분은 혼자 둬도 잘나가시는 분입니다. 오히려 건드리지 않는 게 돕는 거죠.”

“역시 그렇지? 하아… 왜 오빠는 게임을 잘해서.”

그가 세이온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는 뛸 듯 기뻤다. 단순히 그와의 접점이 생겨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세이온에서만큼은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초강자였으니까.

그래서 은근슬쩍 접근해서 친분을 쌓으려 했었다. 나름 순조로운 출발. 그러나 이놈의 오빠는 그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성장세를 보면 그녀를 아득히 뛰어넘는 재능 금수저였다.

“제가 누차 예전에 말씀드렸죠. 알을 스스로 깨고 나와야만 의미 있는 거라고.”

“알아.”

그에 대한 목마름으로 오늘도 인내를 배워 가는 수정이었다.

* * *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퇴원하고 싶지만 셋이 결사반대를 해서 2주 동안 얌전히 입원해야 했다. 특히 상도 형이 난리였는데 한창 중요한 시기지만 그것보다는 건강이 우선이라며 만약 몰래 와서 게임 들어가면 캡슐 박살 내 버린다더라.

골목길에서 과속을 한 배달부는 그냥 봐주기로 했다. 물론 골목길에서 과속을 한 잘못이 있기는 했지만 그 배달부가 우리 집에 자주 배달 오는 사람이라는 것도 있었고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휴학하고 하루 14시간 오토바이를 탄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셋은 너무 물러 터진 거 아니냐고 했지만 뭐 어쩌라고. 내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사실 이건 그 배달부녀석을 위한 게 아닌 날 위한 것이었다. 녀석의 아버지랑 찾아와 무릎을 꿇으려고 하는데 이상하게 그런 꼴은 못 보겠더라.

세이온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포디나와 카머슨 남작령의 사이는 화해보다는 전쟁으로 흐르는 중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의 예상대로 카머슨 남작이 청했던 화해안은 단순한 시간 끌기가 맞았다. 화해안을 요청하면서 뒷구석으로는 남작령 주변의 영주들은 병력을 끌어모았다. 특히 알스 공작의 지원이 파격적이었는데 무려 일천의 레드가드와 오인의 네임드를 카머슨 남작령으로 파견했다.

‘유비, 관우, 장비, 조자룡, 제갈량.’

중국 쪽에서는 오호대장군이라 불리고(황충이랑 마초가 아니라 유비랑 제갈량이 낀 건 우습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촉패밀리라 불리는 이 다섯 명의 네임드들은 알스 공작이 보유한 네임드 중 하위권에 이름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네임드라 불리기에 충분한 업적을 가진 이들이었다.

물론 나야 그냥 좀 반가운 호갱님들이다. 일본 길드 따라 참전했다가 나한테 나란히 목이 따였지.

“얘들 오랜만이네. 조자룡은 누구야? 누나?”

“바이홍이라는 물류그룹 대표 막내아들이라고 되어 있네.”

누나가 태블릿을 내밀었다. 레드에볼루션 길드 홈페이지였는데 조자룡이라는 놈의 소개 페이지에 재미있는 영상이 하나 올라가 있다.

[난 상산의 조자룡이다!]

[으아악!]

[우왁!]

백마에 올라탄 채 은색에 번들거리는 중국 갑옷을 입은 녀석이 앞을 가로막은 수백의 병사들을 뚫고 나간다. 마침내 병사들의 대열을 완전히 관통한 녀석이 들고 있던 창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외친다.

[나는 무적이다!]

[우와아아!]

[케이 따위는 내 상대가 아니야!]

[백마 무적! 백마 무적!]

“와…….”

“왜? 세 보여?”

“아니, 어떻게 이런 소름 끼치게 오글거리는 대사를 치지.”

재능이라면 재능이다. 밑에 있는 장비의 ‘장판파’라는 영상은 도저히 눌러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근데 얘는 왜 내 이름을 팔고 지랄이야?”

처음 보는 놈이 내가 자기 상대가 안 된다느니 하니까 기분이 더럽다.

“네가 세이온에서 중국 상대로 꽤 핫이슈거든. 레드에볼루션이 너한테 한 부대가 작살 나니까 나오는 애들마다 전부 자기가 네 대항마라나 어쨌다나…….”

“대항마라 재미있네.”

“너 교통사고 나서 누웠다는 기사 걔네 커뮤니티에 뜨고 나서 기세등등해.”

“어? 기사 떴어?”

“웃기는 게 우리나라는 잠잠한데 중국 기사에 떴더라고. 볼래?”

“중국?”

“어, 볼래?”

“으응.”

내 대답에 누나가 태블릿을 가져가 몇 가지를 쿡쿡 누른다.

촌스러운 빨간색과 황금색 바탕에 역시 촌스러운 한자가 하나 가득한 초대형 커뮤니티다. 번역을 누르고 기사를 읽으니 내용이 가관이다.

[한국의 영웅 케이. 교통사고로 중상!]

-한국의 케이는 지난… 경 교통사고로 중상을 당해… 향후 불투명하게… 우리의 영웅들은…….]

-우리 중화영웅들이 두려워 죽은 체하는 거겠지.

ㄴ당연한 거 아닌가. 붉은혁명단이 마음먹은 이상 이미 끝난 거지.

ㄴ이건 한국 놈들의 습성이야. 놀랄 필요도 없어.

-세이온을 정복하라! 붉은혁명단!!!

ㄴ위대한 중화!!

ㄴ세이온은 원래 우리 거다!

ㄴ맞아. 우리의 위대한 기술을 훔쳐다 만들 카피일 뿐이야!

ㄴ부끄러움을 모르는 소국을 점령하라!

“세이온이 중국 거였어?”

“그럴 리가 있니. 그냥 얘들은 원래 이래. 좋은 건 다 자기네 거고, 나쁜 건 남에 거고…….”

“에이, 그게 말이 돼?”

아무리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고 해도 그런 생각을 한다고? 14억 명이?

“걔들은 그걸 믿어. 뭐… 안 그런 사람들도 많겠지만.”

“어질어질하네.”

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그 망상도 오늘로 끝내주겠지.”

누나가 씨익 웃으며 날 바라봤다.

“당연하지. 수속은?”

“응, 내려가서 원무과 들르면 돼.”

“좋아.”

* * *

카머슨 남작령과 포디나 백작령의 경계는 구불구불하고 야트막한 카타리나 협곡에 놓인 관문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협곡이지만 길게 이어진 협곡의 줄기는 천연 방벽이 되어 오랜 시간 치나 제국의 침략 야욕을 막아 내었다.

비록 이전에 마족 기사를 위시한 600의 유저들에게 털리기는 했지만 그러한 기습이 아니고서는 뚫기 힘들 정도로 카타리나의 벽은 증축에 증축을 거듭한 거의 20m에 달하는 관문이었다.

그리고 관문의 앞에 펼쳐진 널따란 평원에는 거의 이만에 달하는 병력이 도열해 있었다.

중앙의 카머슨 남작의 군세와 필두로 좌우 둘씩 총 다섯의 귀족 군영들이 도열해 있었는데, 그 뒤로는 용병으로 이루어진 오천의 병력과 각기 100~200으로 이루어진 말을 탄 기사단이 있었다. 보기만 해도 기가 질릴 대군세. 그러나 실상 이 병력 중 진정한 저력은 전면에 길게 횡으로 포진한 레드가드들이었다. 고작 일천이라고는 하지만 내뿜는 군기와 그들의 전면에 선 한 인영의 외침이 국경 관문을 지키는 이들을 긴장하게 했다.

“XX이 쪼그라들어 벽 뒤에 숨은 것이 부끄럽지도 않으냐! 케이! 나서라 내 친히 네놈을 응징해 주겠다!”

번쩍거리는 갑주를 갖춰 입은 조자룡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지만, 이쪽은 묵묵부답이다.

“케이 나와라!”

“저 새끼 또 시작이네.”

성벽 위에 도열해 있는 오백의 병사들 사이에서 던 황고슈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푸념을 했다. 든든한 성벽을 두고 굳이 나가서 드잡이질할 일도 없지만 삼 일째 저 모습을 바라보니 짜증이 나서 미치겠다.

그러나 그것이 힘든 것은 첫째 현재 방어군의 숫자는 고작 3,500명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는데 일단 백작의 주변 영지에서 보내온 것이 1,500명. 1,000명은 백작의 병력이고 500명은 유저로 이루어진 용병단. 마지막 500명은 푸른 바람 엘프족에서 지원 온 500명의 엘프 전사단이었다.

상대적으로 카머슨 남작령에 비해 1:6의 불리한 병력 숫자.

왜 이렇게 숫자가 적냐고 묻는다면 빌어먹을 귀족파 놈들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모여드는 국왕파의 군세를 귀족파가 방해하고 있다.

타 귀족의 군세가 자신들의 영지를 지나치는 것을 거부한 것. 한바탕 붙을 수 있지만 포디나는 한시가 급했고 결국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나라가 침략당한 마당에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방해하는 그 꼴에 포디나 백작이 부들부들 떨었지만 일단 눈앞에 놓인 칼을 치우고 볼 일이다.

“씨발 것들. 어떻게 정치하는 것들은 현실이나 여기나 전부 똑같은지.”

두 번째 문제는 이쪽에서 나설 인물이 없다는 것이다. 저쪽에서 대표로 나선 건 한창 인기인으로 떠들썩한 조자룡이다. 물론 중국산이기에 뻥스펙을 조심해야겠지만 알려진 무력만 참작해도 확실히 신화급의 소유자였다. 아무리 세이온이 재능과 경험을 무시 못 한다지만 신화급에 이르면 그것도 무의미하게 만들기에 섣불리 도전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돌아가는 꼴이 딱 봐도 장기전이니 좀 친다는 유저들도 아직 엉덩이를 떼지 않았다. 굳이 처음부터 들어와서 시간 낭비 하느니 제대로 한 판 붙을 때 참가하겠다는 것.

“케이는 안 들어오려나.”

교통사고로 다쳤다는 것은 들었다. 덕분에 퀘스트도 아직 미완료 상태.

그러나 지금은 그런 거 다 떠나서 얼른 들어와 줬으면 좋겠다. 그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최소한 저 조자룡이라는 놈이 기세등등하게 외치는 일도 없을 테니까. 다른 이들은 아직 평가절하 중이지만 황고슈는 케이가 싸우는 모습을 직관했다.

“케이만 들어오면 싹 정리 가능한데…….”

-미친, 케이가 무슨 신이냐?ㅋㅋㅋ

-황고슈 지지난주부터 맛감. 막 케이 새끼한테 케이 님 케이 님 그러지 않나.

ㄴ황고슈 드디어 방송 놓는 날 오는 건가.

ㄴ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애 이렇게 맛이 간 거슈?

‘후, 말을 할 수도 없고…….’

함께 움직인 건 케이 쪽에서 영상을 올리기 전까지는 엠바고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다. 물론 워낙 성대하게 저질러 놔서 그런 게 의미 있나 싶기는 하지만 최대한 약속을 지키는 이미지로 남고 싶다.

-암튼 중국은 단합력은 진짜 알아줘야 함. 손가락 척하니까 천 명 딱!

ㄴ쟤들 다 군인인데 무슨 단합력이냐 ㅋㅋㅋ

ㄴ그러게 중국 무지성으로 빠는 새끼들 보면 진짜 이해가 안 돼.

ㄴ이제 인정해라. 중국이야말로 세계를 제패할 거다.

ㄴ시박… 짱깨 새끼였네.

카타레나 방어전을 중계하는 위튜버가 몇 없는 탓에 시청자가 몰렸다. 황고슈도 딱히 중계할 게 없어 그냥 입 다물고 송신만 하는 중.

그때였다.

덜컹.

관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검은 가죽 갑옷으로 몸을 칭칭 감은 그의 한 손에는 푸르스름한 예도가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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