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악마를 죽여라
‘사면초가’, ‘고립무원’, ‘진퇴양난’이라는 말이 있다. 사방에 적이 있어 뒈지게 힘들다는 뜻의 고사성어인데, 뭐 지금 딱 내 상황이라고 하면 될 거 같긴 하다. 몇 가지 다른 점이라면 뒈지게 힘들긴 하지만 난 재미와 스릴이 넘치고 있다는 것이다.
“죽여!”
“으아악!”
[멸신검]
-공격 속도: 100% 상승
-반응 속도: 100% 상승
-사용 시 10초당 오러 1 소모
촤아아아아아아아악!
베고 찌르고 자르고 부순다. 순식간에 휑해진 공터. 사방에서 덮쳐 오는 적들의 살기에 피부가 따끔거리고 나를 향한 살해 의지에 신경이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롭게 벼려진다. 재미있다. 재미있어.
슈욱!
“오, 나쁘지 않아!”
두 개의 화살이 내 가슴을 아슬아슬 스치고, 파팍하고 피가 튀며 생명력이 깎여 나갔다. 사방에서 공격이 날아오니 모두 피하는 건 역시 무리다. 진흙 방패가 쿨타임마다 발동되며 공격을 막아 내기는 하지만 무적은 아니다.
츠카카칵!
“죽여!”
화려한 갑주의 기사가 빛을 머금은 거대한 대검을 내리쳐 왔다. 찰나의 빈틈을 노린 것으로는 100점을 주겠지만 걸어 들어온 곳이 함정이라는 것에서는 낙제를 주고 싶다.
“헉, 뭐… 뭐야.”
대검에 맺힌 빛이 꺼지며 기사의 두 다리가 비틀하며 무너졌다. 마나 컨퓨즈의 영향권으로 들어오자 모든 스킬과 버프가 취소되어 버린 것.
번쩍!
바닥을 쓸며 앞으로 튀어 나간 내가 빙룡도를 휘두르자 궤적에 걸린 모든 것들이 쪼개져 사라졌다. 뒤이어 달려오는 두 기사 또한 허리를 양분해 버리자 피의 비가 터져 나가고 피의 폭풍우를 뚫고 다시금 십여 개의 창이 쇄도한다.
“재미있네!”
카카카카카칵!
찔러 들어오던 창들의 힘을 흘리고 거슬러 뿌리자 그 공격들은 엉뚱한 병사들의 머리와 복부에 꽂혔고 자신들의 공격이 아군의 몸에 박힌 것에 주춤하고 멈춘 녀석들 또한 사이좋게 머리를 날려 줬다. 참고로 이건 스킬이 아닌 순수한 테크닉으로 이룬 것이었는데, 모든 감각이 깨어나는 지금의 상태에서는 더한 것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플레임스피어!”
화아아아악!
붉은색 로브를 입은 종군 마법사의 지팡이로부터 시작된 거대한 화염의 창이 내게 쏘아졌다. 상당한 고위 주문인지 오렌지빛으로 망멸하며 날아오는 화염의 창은 주변의 모든 공기를 빨아들이며 내게 날아왔다.
“으음…….”
피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마나 컨퓨즈가 먹히면 좋겠지만 내가 알아낸 바로 마나 컨퓨즈는 범위 밖에서의 마법이나 오러는 방해하지 못한다. 하긴 그것까지 모조리 방해해 버린다면 벨런스 붕괴겠지. 뭐 상관없다.
“쪼개져라!”
파팍!
반으로 나누어진 플레임스피어가 양옆으로 날아가 폭발하고, 난 플레임스피어의 영향권 밖으로 피하려는 병사들을 쫓아 들어가 일거에 베어 버리며 돌파했다.
[산들바람 걷기]
최대로 운용한 산들바람 걷기를 통해 나는 순식간에 플레임스피어를 쏘아 낸 종군 마법사에게 날아갔다.
“어, 어떻게 마법을……!”
벌벌 떨고 있는 마법사. 아마 어떻게 마법을 쪼갰냐고 묻는 거 같은데.
“나도 몰라.”
단지 하나 말해 줄 수 있는 건 마나 컨퓨즈를 배워 마나의 흐름을 좀 더 면밀하게 살필 수 있게 되었고, 마나와 마나의 결을 찾아 쪼개면 마법이 취소되거나 잘라질 수 있다는 확실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음… 근데 나 시체 앞에 두고 뭐하냐.
츠컥!
“으아악!”
“커억!”
목이 날아간 마법사를 뒤로하고 다시금 앞으로 달려 나가 단 세 번의 칼질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십여 명의 병사들이 두 동강 냈다.
하아… 하아…….
숨이 거칠다. 단순히 지쳤다는 스크립트가 아니라 정말 지친 기분이다. 어째서일까? 이건 실제의 내 몸이 아니다. 게임상으로 구현된 가상의 아바타일 뿐. 그런데도 지쳤다고 느껴진다. 이건 진짜 지친 것일까? 아니면 내 본능이 만들어 낸 가식된 신호일까.
“…….”
뭔가 머릿속이 확 하고 밝아지는 기분과 함께 거칠게 몰아쉬던 호흡이 잠잠해졌다.
마치 내 안에 있던 뭔가가 자신의 정체를 들킨 것에 놀라 후다닥 사라진 것처럼 그렇게 되어 버렸다.
“신기하네.”
순간 왠지 다른 뭔가가 되어 버린 느낌이다. 이 현상에 대해 좀 더 고차원적인 사유를 하고 싶지만, 환경이 도와주지 않는다. 일단은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전부 치워야지.
뱀파이어릭 오라 [전설급] [11티어]▼접기
-오라 발동 후 공격 시 생명력, 마나 흡수
-30초간 공격력의 54%만큼 생명력과 마나를 흡수하며 흡수당한 상대의 무기력 저주 [3레벨 부여] 쿨타임 1분, 필요 마나: 150
쿨타임이 돌아온 뱀파이어릭 오라를 사용하자 내 발밑으로 붉은 원이 생성되었다. 10티어 이전에는 생명력만을 보충해 주더니 11티어가 되자 마나까지 흡수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시작해 보자.”
나를 포위해 들어오던 병사들의 눈에 공포가 어렸다.
* * *
두두두두!
앞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 채 진군하던 병사들은 뒤로부터 들려오는 무자비한 말발굽 소리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소리의 진원지를 확인했다. 진군 중에 절대 해서는 안 될 행동이지만 점차 가까워지는 그 소리에 하나둘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그곳에는 키가 2m는 될 거대한 짐승의 무리가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쾅! 콰쾅! 콰드득!
“으아악!”
“아악!”
완전무장을 한 기사를 태운 전마의 무게는 거의 500kg에 육박했다. 시속 30km 정도의 속도로만 달려도 그 자체가 전차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는 수준. 그러나 지금 치나 제국 측의 기사단들이 돌파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아군의 병사들이었다. 조금의 시간이라도 있었다면 병사들을 지휘하여 기사단이 지나갈 길을 열겠으나 지금 날뛰고 있는 괴물은 그들에게 그런 여력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미친놈들!”
“으아악!”
기사단은 무자비했다. 설령 그것이 아군이라 할지라도 명령이 떨어진 이상 그들은 말을 몰아 돌파할 뿐이다. 다행이라면 기사단이 돌격을 본 병사들이 알아서 길을 열었다는 것이었고, 거치적거리는 것들이 사라지자 기사단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기사단! 거창!”
“거창!”
처처처척!
랜스를 앞세운 기사단은 군세를 이제는 확연히 눈에 들어온 괴물을 향해 더욱 속도를 높였다.
“하아!”
카머슨 남작의 요청으로 파견된 우르고스 남작령의 기사 로이덴은 바이저 사이로 가까워지는 괴물의 모습을 바라봤다. 잔상을 흩뿌릴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주위의 병사들을 처참하게 도륙하고 있다. 저 움직임은 뭐랄까. 너무나도 여유롭게 농락하는 것 같다. 마치 술래잡기라도 하듯 사방으로 베며 지나가는데 대체 포위된 놈이 맞는지 그 움직임에 긴장이나 두려움 따위는 묻어있지 않는다. 거기에 놈의 뒤로 펼쳐진 것은 그야말로 시체의 밭이라는 표현이 부족하지 않을 지경. 못해도 수백은 죽인 것 같은데도 놈은 지치지도 않는지 칼을 휘두르고 있다.
그야말로 목숨을 수확하는 사신.
“악마 새끼…….”
카머슨 남작령의 병사와 용병으로 이루어진 600명을 단 혼자도 전멸시켰다 했던가. 처음에는 과장된 소문이라 생각했다. 그런 근거 없는 헛소리는 언제나 넘쳐났으니까. 천이 넘는 백골을 이끄는 네크로맨서라는 소문은 시체 두엇 세울 줄 아는 어설픈 흑마법사였고, 수백 명의 목을 쳤다는 망나니 출신 산적은 도끼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어설픈 놈이었다.
케이라는 놈 또한 같을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앞에 보이는 놈은… 그냥 악마였다. 그것도 보통 악마가 아닌 미친 악마다. 무려 이만에 가까운 병력에 홀로 달려드는 미친 악마!
“악마를 처단하라! 으아아아아!”
“처단하라!”
“으아아아!”
비명과도 같은 고함과 함께 기사단은 더욱 빠르게 악마를 향해 달려 나갔다.
드드드드드득!
랜스를 든 오른팔의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올랐다. 비전의 스킬로 단 한순간 모든 오러를 끌어올려 무기에 집중하는 것이다. 한 번 사용한 후로는 그 후유증으로 한동안 검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부작용이 심한 스킬이지만 그는 지금 모든 역량을 끌어모아 악마를 처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단 한 번에 모든 힘을 투사하겠다는 듯 전신의 오러를 모조리 한 손에 집중한 로이덴은 마침내 악마를 향해 랜스를 찔러 넣었다. 그리고…….
[빙룡지력]
퍼어어어어어어어엉!
의식이 끊겼다.
* * *
“어… 어어…….”
언제 어디서나 냉철한 판단만을 내리던 말튼 자작은 순간 말문이 막혀 연신 ‘어어’만 반복했다. 이것은 눈으로는 정보를 인식했으나 뇌가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으로 흔히 얼이 빠졌다거나 넋을 잃었다고도 표현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잘못만이 아니었다. 지금 그의 주위에 있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모두 그처럼 넋을 놓고 바라보는 중이었으니까.
쿠쿠쿠쿠쿵…….
묵직한 울림의 뇌우 소리가 들려온다. 눈으로 보던 것과는 약 1.5초 정도의 차이가 있는 걸 보면 그 말도 안 되는 현장과의 거리는 대략 400미터 정도 되는 것 같다.
전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가장 화려하고 거대한 지휘 막사에는 침묵만이 가득했다.
이번 전쟁에 참여한 군주는 총 다섯이었다.
가장 상석인 중앙에 위퍼스 자작을 필두로 우측으로는 카머슨 남작과 우르고스 남작이, 왼쪽으로는 로윈 자작과 블레오 자작이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중앙의 위퍼스 자작이었다.
“저게, 무슨… 마법인가.”
묻기는 했으나 답하는 이는 없다. 그 누구도 저것을 설명할 수 없다.
카머슨 남작 옆에 앉아 연신 술과 음식을 탐하던 우르고스 남작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술을 워낙 좋아해 항상 만취해 있던 우르고스 남작은 자신이 헛것을 본 거라고 착각했는지 계속해서 눈을 비빈다. 왜 아니겠는가.
지금 피떡이 된 기사단은 바로 그가 가장 애지중지하는 기사들이었으니까.
그러나 현장의 모습은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그대로다. 여전히… 우르고스 남작이 아끼는 기사단 전원은 돌격하던 그대로 한순간 말과 피떡이 되어 무너졌다. 수십의 기사가 한순간 죽어 버렸다. 말튼 자작 본인도 이게 꿈이었으면 하고 생각 중일 지경이다.
“허… 허허… 저게… 저게… 허허허…….”
너무 충격이 크면 오히려 웃음이 나온다고 했던가. 우르고스 남작이 털썩 주저앉았다. 기사단은 비싼 무력 집단이었다. 가장 근접에서 호위하는 이들이었기에 높은 충성심을 요구했고 그 뛰어난 무력에 걸맞은 급료를 지급해야 했다. 우르고스 남작 또한 금이야 옥이야 하며 키웠던 우르고스 기사단이 단 한순간 전장의 붉은 칠로 변해 변해 버렸다.
“저게 무슨 일이냐고!”
체면조차 잊은 채 노호성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우르고스 남작이 앞에 놓인 식탁을 뒤집어엎었다. 상석에 앉은 위퍼스 자작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무례한 처사. 그러나 그의 행동을 비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우르고스 기사단이 전멸한 그 자리로 카머슨 기사단과 블레오 기사단이 돌격해 들어가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