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학살공주 세스
싸움에 있어서 내 행동 목적은 항상 같았다.
‘목표 수립 후 빠르고 효율적으로 적을 분쇄한다.’
전장에서는 길게 생각할 수 없다. 영화라던가 소설을 보면 수십 또는 수백이 얽히는 전장에서 피 터지게 싸우다가 멋있는 대사를 치거나 대단한 전략을 수립하지만, 실제 전장 뺨치는 세니온에서는 그딴 짓 하면 즉시 화살이 날아와 머리에 예쁘게 꽂힌다. 행동하면서 최대한 단편적으로 생각을 치고 나가야 한다는 뜻. 목적을 기준으로 작은 목표들을 끊임없이 세우며 빠르고 효율적으로 삭제해 나간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볼 때 당황한 표정으로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이 멍청이는 내가 가장 사랑하면서도 가장 질색하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쓸데없는 대사로 나한테 충분한 시간을 만들어 줬으니까.
“어째서 마법이!”
내게 물어오지만 대답해 줄 의무는 없다. 넌 그냥 목만 내주면 되는 거… 응?
텅!
둔탁한 소리와 함께 빙룡도가 나아가기를 멈췄다. 정확히 말하면 제갈량의 목 바로 앞에 투명한 막이 형성되어 빙룡도를 막아 낸 것이다. 신화급이군.
“큭!”
내 공격을 뒤늦게 인식한 제갈량이 황급히 뒤로 펄쩍 뛰며 외쳤다.
“죽여!”
척척척!
남아 있던 네 명의 기사들이 순식간에 접근해 들어온다.
지이이잉!
둘의 검에서 오러블레이드가 솟구친다. 넷 중 가장 후위에 있던 이의 검에서 오러블레이드가 솟구쳤다. 하나하나 방심할 수 없는 수준의 강자지만 저치는 절대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나도 믿는 구석은 있다.
[진(眞) 광폭화]
파앗!
공격 속도와 공격력을 폭발시키는 광폭화!
흠칫하던 기사들이 더욱 빠르게 내게 날아들었다. 그렇게 나와 검을 마주하려던 순간.
“큭!”
마나가 가득 담긴 검을 찔러 오던 기사가 헛바람을 내지르며 움찔하고 멈췄고 난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사의 머리를 베었다.
츠컥!
마나 컨퓨즈의 본래 주인인 마족 기사보다 범위는 작지만, 오히려 그것이 장점으로 작용해 내 근처에 오기 전에는 알아차릴 수 없다.
“흩어져!”
맨 마지막 기사의 외침에 셋이 좌우로 흩어지며 세 방위로 나를 포위했다. 내 주위에 다가서면 뭔가 스킬에 문제가 생긴다는 걸 알아낸 모양이다.
파파팍!
나는 땅을 박차며 앞으로 나아갔다. 전면을 가로막은 건 오러블레이드의 기사. 그는 내게 맞서기 보다는 뒤로 물러나며 포위를 유지했고 내가 등을 보이자 나머지 두 기사가 내 뒤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러나 이건 내가 일부러 만든 빈틈이다.
[빙룡지력]
츠카칵! 카카캉!
섬뜩한 절삭음과 함께 두 기사의 팔이 잘려 뒤로 날았다. 목을 노렸지만 역시 실력이 있는지 팔만 잘랐다. 그러나 나 또한 전면을 포기한 대가를 비싸게 치렀다.
쫘악!
“큭!”
오러블레이드가 사라졌음에도 기사는 당황하지 않고 내게 달려들었다. 진흙 방패가 발동했지만, 기사의 검은 그것조차 뚫고 들어와 가뜩이나 방어구도 없는 내 등을 베어 버렸다.
챙! 챙챙! 채채챙!
퍼어억!
“윽!”
빙룡도로 후속타를 막아 냈지만, 순간적으로 검을 쳐올리고는 내 배에 밀어차기를 해 버린다.
콰콰콰콱!
거의 5m가량을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재생 관련 업적이 없었다면 진즉에 죽었을 정도로 온몸이 엉망진창이다. 하… 진짜 힘드네.
“죽어!”
내가 비틀거리고 있자 병사들이 이때다 싶었는지 창을 뻗어온다.
[뱀파이어릭 오라]
“고맙다.”
오라를 켠 채 병사들 베어 내자 생명력과 마나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놈에게서 물러나라!”
병사들을 베며 내가 회복한다는 걸 알았는지 기사가 노호성을 치며 내게 달려들었다.
챙! 채챙! 챙챙!
기사의 검이 마치 뱀처럼 꼬이며 내 전신을 노려왔다. 분명 마나 컨퓨즈로 마나를 움직이기 힘들 텐데도 순수한 검술 실력만으로도 나를 몰아붙이는 걸 보면 역시 알레그로와 같은 소드마스터다. 그러나 내게는 그의 검을 감상할 틈이 없었다.
“죽여 주마! 그레이브 스피릿!”
제갈량의 주먹으로부터 거대한 빛의 구체가 솟구쳐 올랐다.
일렁이는 빛의 구체가 내게 쏘아져 온다.
“으음…….”
저 구체는 분명 나를 즉사의 수준으로 몰고 갔던 그 공격이 분명했다.
절대 경시할 수 없기에 일찍 몸을 뺐건만 그레이브 스피릿이라는 구체는 마치 유도 미사일처럼 나를 따라 움직였다.
“어라……?”
그리 빠르지는 않지만 데미지도 무시하지 못할 수준인데 유도 성향까지 있다. 설상가상으로 내가 상대해야 할 적은 구체뿐만이 아니다. 현재 상태로는 감당하기 버거운 기사까지 하나 달라붙는 중이고 주위에는 적 병사들이 가득하다.
콰아아앙!
[절대 방어]
난 최후의 보루인 반지의 방어 스킬을 사용해 그레이브 스피릿을 막아 냈다.
쿠쿠쿠쿠쿵!
전신이 뒤흔들리며 속이 진탕되는 느낌이다. 어찌어찌 막기는 했지만 덕분에 어느 정도 차오르던 생명력이 다시 바닥에 달라붙었고 마나 또한 대부분 소모되었다.
“젠장…….”
내가 그간 절대 방어라는 방어 스킬을 안 썼던 이유는 이 마나 소모량 때문이었다.
거기에 상처 부위가 전부 터져 부상도가 최악으로 치달았다. 말 그대로 가만히 둬도 죽을 지경.
“하아, 여기서 끝인가.”
허탈하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후련했다. 뭔가 정말 원 없이 놀아 본 기분이랄까? 지금까지 세이온을 하면서 이번처럼 극한으로 몰리기는 처음이다. 비록 그 대가가 재 첫 번째 죽음과 아이템을 모조리 잃어버리는 것이라 속이 매우 쓰리기는 하지만. 뭐 돈이야 또 벌면 되니까. 씁쓸함에 혀를 차고 있을 때였다.
누나에게서 온 메시지 하나가 눈앞에 떠올랐다.
-기습 성공
* * *
“아하하!”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에 나도 모르게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검을 늘어뜨린 채 내게 다가서던 기사가 흠칫하며 멈춰 섰다.
“왜 웃지?”
“글쎄, 왜 웃을까?”
기사의 물음에 난 어깨를 으쓱했다. 음… 이제 말해 줘도 되겠지.
“너희 본진 지금 누가 지키고 있냐?”
“그게 무슨 말이지?”
“너희들이 영주 곁에 없다면 지금 영주들은 누가 지키고 있냐고.”
“……!”
“설마!”
“아마 네 머릿속에 떠오른 그 ‘설마’라는 가정이 맞을걸?”
내가 2만이라는 대군에 혼자 꼬라박은 건 분명 미친 짓이었지만 이 짓을 하기 위해서 선결되어야 할 문제는 포디나 백작의 허락이었다. 그렇다면 포디나 백작은 왜 이런 짓을 묵인해 줬을까?
그것은 바로…….
“우와아아아!”
멀리서 환호성 소리가 들린다. 그것도 치나 제국의 다섯 귀족이 무거운 엉덩이를 쉬고 있을 곳에서. 젠장, 그건 그렇고 더럽게 느리네. 아무리 대군의 시선을 피하려고 멀리 돌아 들어갔다지만 거의 두 시간 정도를 싸운 기분이다. 그렇지만 이 기습에 가장 큰 변수라고 할 수 있는 친위기사들까지 내가 어그로를 끌어 줬으니 실패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
“우리가 이겼다!”
“우와아아!”
멀리 언덕에서 말을 탄 병력이 모습을 드러냈다.
포디나의 기사들과 레인저, 푸른바람 엘프들로 이루어진 500명의 결사대다.
화려한 차림의 다섯 영주가 사이 좋게 밧줄에 묶여 있다.
“이겼네.”
세이온의 영지전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일까? 상대 영지의 탈환? 혹은 모든 무력 저항의 말살? 아니다. 세이온의 영지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영지의 주인이었다. 다 죽어가는 마당이라도 영지의 주인만 잡으면 기막힌 역전이 가능하다.
“져… 졌다.”
텅… 터텅…….
병사들이 무기를 하나둘 떨어뜨렸다. 병사들에게 다시금 창을 쥐게 해야 할 독전관마저 무기를 떨어뜨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럴 수가…….”
친위기사들마저 허망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현대의 전쟁에서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세이온에서는 이게 당연한 상황이다. 뭐 이해한다기보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기는 했지만, 막상 실제로 보니 조금 웃기기도 하다. 그러나 역시 모두에게 통하는 건 아닌가 보다.
“레드 가드! 놈을 포위하라!”
쿵쿵쿵!
NPC들이야 전쟁의 패배를 받아들였지만 치나 제국의 유저들은 아니었다.
처처처처처척!
어느새 다가선 거대한 방패의 벽이 내 주위를 둥글게 포위했다. 이전보다 더욱 촘촘하고 단단해 보이는 그 벽 사이로 제갈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통천지벽을 펼쳐 놈을 압사시켜 버려라!”
화아악!
붉은 오오라가 피어오르는 방패의 벽이 나를 향해 천천히 좁혀지기 시작했는데 그 열기에 그나마 남아 있던 생명력이 천천히 깎여 나가는 것이 이대로라면 곧 죽을 것 같다.
“젠장…….”
더 이상 반항할 여력이 없기에 난 가만히 서서 죽음을 기다렸다.
부활하게 되면 다른 건 다 때려치우고 일단 알레그로의 퀘스트를 먼저 해결하고 그 후에 이터 스킬을 파 봐야겠다. 전력으로 부딪혀 보니 내가 부족한 게 뭔지 알겠다. 가만히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쉬이이이…….
“어… 어어…….”
“저게 뭐야?”
뭔가 심상찮은 소리가 들려온다.
주위가 술렁이기 시작한다. 공기가 차가워진 느낌. 피부를 태우던 열기가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건 하늘을 가득 채운 듯한 거대한 만월이었다.
그리고…….
챙!
달과 함께 하늘이 반으로 갈라졌다.
* * *
“어… 어어…….”
황고슈는 전장의 하늘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것이 뭔지는 알고 있었다. 아니 너무나도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광경이다. 그러나 그가 놀란 건 저것을 여기서 볼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세이온 유저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그것.
“학살공주의 달의 눈!”
쿠… 쿠쿠쿠쿠쿠…….
반으로 쪼개진 달로부터 시작된 하얀 빛무리가 레드 가드를 포함한 치나 제국의 병사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저것의 밑에서 살아 숨쉴 수 있는 것이 있냐는 원초적인 의문부터 저것이 진정 스킬인지도 의문이 들 정도로 그 파괴력은 엄청났다.
콰콰콰콰콰쾅! 쾅! 콰콰쾅!
“피해!”
“도망쳐!”
빛의 폭격 속에 둥근 방패의 벽이 종잇장처럼 찢기고 박살 났다. 그 무자비한 공세는 모두에게 평등했다. 일만이든 이만이든 상관없이 모조리 집어삼킨다.
쿠쿠쿠쿠…….
반으로 쪼개진 달을 뒤로하며 한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고작 하나지만 그 하나는 대한민국의 세이온 유저 모두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세이온 랭킹 세계 1위.
학살공주 ‘세스’.
타탁!
그녀가 내려선 곳을 중심으로 하얀 파형이 퍼져 나갔다. 거의 지름 일백여 미터는 될 법한 그 거대한 파형이 휩쓴 순간.
쫘아악! 쫙! 쫘아아아악!
지름 안에 있던 모든 존재가 단숨에 반으로 쪼개지며 쓰러졌다. 비명을 지를 기회조차 주지 않는 단 한 번의 참격으로 거의 일천을 베어 버린 그녀는 눈처럼 하얀 검을 가볍게 떨치고는 걸레짝이 되어 비틀거리고 있는 제갈량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