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보스 스킬 쓴다-120화 (120/154)

120. 전후 처리

“어… 어어…….”

제갈량은 지금 아무런 사고(思考)도 할 수 없었다. 단 하나 떠오르는 단어는.

‘망했다.’

하늘에 하얀 달이 떠오르고… 그가 믿던 모든 것이 스러졌다.

하얀 달은 곧 달의 눈이 펼쳐졌다는 것을 뜻한다. 그녀의 친위 암살집단인 달의 눈이 만들어 낸 세스만의 고유 스킬로, 저 하얀 달이 떠오르는 곳은 그녀의 영지다.

슈르르…….

전신을 휘감은 하얀 오오라가 걷히자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밤의 장막처럼 검은 망토를 발밑까지 드리운 검은 투구의 여인의 손에는 조금 전 천재지변을 일으켰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하얀 검이 들려 있다. 제갈량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학살공주 세스.’

‘공식 세이온 전투력 세계 랭킹 1위.’

‘비공식 세이온 전투력 세계 랭킹 1위.’

‘공식 세이온 PK 랭킹 1위.’

‘세이온에서 가장 싸우기 싫은 인물 절대적 1위.’

과거 일본의 10대 길드 중 하나가 그녀에게 덤볐다가 30분 만에 전멸했고…….

얼마 전에는 별 이유도 없이 치나 제국의 거대 길드 하우스 하나를 통째로 증발시켰다.

게임 초반부터 학살을 워낙 밥 먹듯이 해서 이명도 ‘학살 공주’이며 들리는 바에 의하면 세이온 최초로 자신의 이명을 ‘고유 업적’으로 인정받았다고 알려졌다. 코리 왕국보다 몇 배는 거대한 영토를 지닌 치나 제국이 코리 왕국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이며 세이온이라는 게임에 네임드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하게 만든 인물이 바로 이 여인이다.

‘세이온 최강의 약탈자.’

“왜…….”

제갈량은 이해할 수 없었다. 세스는 국가의 일에 무관심하다고 알려졌다. 물론 그 이유 중 하나가 코리 왕국의 고위 귀족 중 하나가 세스를 건드렸다가 영지 자체가 소멸한 일로 코리 왕국에서는 그녀를 재해급으로 지정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항간에는 그녀가 지닌 힘이 너무 강해 헤븐즈 게이트에서 그녀가 자중하도록 컨트롤하고 있다는 게 꽤나 신빙성 있는 의견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녀가 움직이면 세이온 게임 자체가 들썩인다는 뜻이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물론 이 전쟁이 코리 왕국과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녀는 솔직히 국가의 소속이라는 개념에서도 초월한 존재였다.

후드를 벗자 삼단 같은 검은 긴 머리가 드러났다. 그 밑으로 드러난 새하얀 피부의 미녀 그리고 그 얼굴에 가득한 누구보다도 선명한 약탈자의 문신… 그녀의 붉고 도톰한 입술이 열렸다.

“달의 눈 집합.”

척… 처척… 처처척…….

하늘에 떠 있던 달의 눈이 사라지고 그녀의 주변으로 그녀와 같은 검은 망토를 입은 단원들이 내려섰다. 그 숫자는 총 100명.

“당신이 왜 여기에…….”

제갈량은 떨리는 목소리로 세스에게 물었다. 문장을 완성하지는 않았지만 뜻은 분명했다.

그녀 정도 되는 인물이 왜 이 전쟁에 참전했는지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세스가 참전한다고 알려졌다면 이런 식으로의 침공은 아예 없었을 것이다. 아니, 엄두도 내지 않았으리라. 일천의 레드 가드가 아니라 알스 공작 본인이 와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으니까.

그의 물음에 세스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케이 님 회장이거든.”

“예?”

“케이 님 구독자라고.”

구독자라는 뜬금없는 대답에 벙 찐 표정이 된 제갈량. 그러나 세스는 그의 물음에 대답해 줄 의무도 의지도 없었다.

“시끄럽고… 케이 님이랑 얘기 좀 하게 넌 꺼져라.”

세스가 제갈량을 향해 손을 펼쳤다.

“헉!”

헛바람을 집어삼킨 제갈량.

자신을 향해 뻗친 손을 본 순간 제갈량의 멈춰 있던 뇌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세계 랭킹 1위가 되었던 이유. 그리고 PK 랭킹 1위이며 가장 싸우기 싫은 인물에 선정된 스킬… 저건 그 스킬이다!

[흡성대법]

위이이이-

그녀의 손으로부터 시작된 흡인력이 그의 머리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으, 으어……!”

저항할 수가 없다. 신화급의 방어 스킬을 지닌 그였지만 그녀의 손에서 시작된 흡인력은 그 모든 것을 무시한 채 그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이윽고 그의 머리가 손바닥에 닿는 순간.

쫘아아아아아악!

[생명력이 흡수됩니다.]

[마나가 흡수됩니다.]

[능력치가 흡수됩니다.]

“으… 으아아아! 컥!”

모든 것을 흡수당한 이에게 남은 건 죽음뿐이다. 마치 탈수기로 돌린 것처럼 순식간에 쭈글쭈글하게 변한 제갈량이 바닥에 쓰러졌다. 오호대장군의 하나라고 치기에는 너무나도 허무한 죽음이었다.

* * *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스 님이 아니었으면 죽었을 겁니다.”

“별거 아니에요. 뭘, 오히려 너무 늦은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도와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가볍게 웃는 세스.

음… 말로는 별거 아니라고 하지만 그녀가 ‘휩쓴’ 현장은 내가 세이온을 하면서 봤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상 깊었다. 내가 한 3천 정도 죽인 거 같은데 그녀와 암살단 달의 눈은 그 짧은 시간에 5천을 쓸어 버렸으니까. 전에는 이만하면 세스에게도 비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역시 내 오산이었다.

특히나 그 ‘흡성대법’을 직접 내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세스를 악명을 떨치는 약탈자로 만든 흡성대법은 세이온에 꽤 많이 알려져 있었다.

워낙 유명한 인물이 쓰는 스킬이기도 하려니와 그 스킬의 능력이 너무나도 악독하기 때문이었는데 흡성대법은 상대의 생명력과 마나, 능력치까지 모조리 흡수해 버리는 신화급 최상위계의 스킬이었다. 스킬의 피해자만 해도 십만을 가볍게 넘긴다더라.

물론 능력치를 모두 빨아오는 것이 아니라 일정치를 가져오는 것이라지만 그녀에게 찍혀 말 그대로 모든 능력치를 흡수당해 세이온을 강제로 접은 이들만 해도 한 트럭이었다. 어찌 보면 내가 가진 이터 스킬과 어느 정도 같은 계열로 느껴지는데 이터 스킬과는 다르게 그 자체로 엄청난 대인 공격력을 지닌 스킬이 바로 ‘흡성대법’이었다. 게다가 나와는 다르게 오픈베타 때문터 세이온을 플레이하여 스킬의 깊이나 숙련도는 비교할 수도 없으리라.

“아뇨. 세스 님이 아니었으면 정말 꼼짝없이 죽을 뻔했습니다.”

“그런가요?”

“예.”

“저기 그럼 케이 님. 팬의 입장에서 하나 궁금한 게 있었는데요.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뜬금없는 나이를 묻는 세스다.

“음, 저는 스무 살입니다.”

“스무 살이요?”

내 대답에 놀랍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세스다. 그런데 이상하게 표정이 좀 작위적이네.

“그럼 저보다 한 살 많으시네요.”

“그런… 가요?”

그녀가 19살이라는 말에 오히려 내가 놀라 버렸다. 너무 어린 나이이기도 하지만 내가 알기로 세스의 신상은 알려진 게 지금껏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놀랍네요. 열아홉 살일 줄이야.”

“하하, 역시 그렇죠? 사람들도 제가 나이가 많을 거로 생각하더라고요.”

“그거야. 세스 님은 풍기는 분위기가 좀 무거우니까요.”

“음… 무겁다기보다는 정확히 말하면 무서워하는 거죠.”

“하하. 잘 아시네요.”

“저도 어느 정도 알고는 있어요. 사람들이 저를 많이 무서워한다는 걸. 뭐 지금까지 지은 죄가 있으니 뭐라고 할 형편은 아니지만요. 쯧.”

“약탈자 세계 랭킹 1위면 대부분 무서워하지 않을까요?”

“갑자기 팩트로 때리시네요. 저도 되고 싶어서 된 건 아닌데…….”

“되고 싶어서 되신 게 아니라고요?”

“네. 아시다시피 제 주력 스킬이 흡성대법인데 그게 남들이 좋아할 만한 건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죠.”

능력치를 흡수하는 건 캐릭터 자체를 망가뜨리는 악독한 행위였다. 아마 중세 시대였다면 마녀로 몰리지 않았을까?

“저도 처음부터 이러지는 않았어요. 덤비는 애들 죽이고 흡수하다 보니 원수 갚겠다고 줄줄이 사탕처럼 계속 덤비더라고요. 몇 번 엮이고서는 일부러 피하기도 했는데 그것도 제때제때 처리하지 않으면 뭉쳐서 덤비니까 그냥 싹 쓸어 버렸죠. 어찌저찌 그러다 보니까 언제부턴가 제가 약탈자 1위더라고요.”

“흠, 그렇군요.”

“그나마 지금은 지레 겁먹고 덤비는 놈들이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정말 말도 아니었어요.”

“고생이 많으셨겠네요.”

“고생뿐인가요. 여관에서 로그아웃했다가 죽은 게 몇 번인지 셀 수도 없어요. 덕분에 레벨도 엄청나게 깎이고. 오죽했으면 제가 아는 최고 렙이 90렙이 넘는데 저는 아직 80렙도 못 넘겼어요.”

“저런…….”

세스는 한풀이라도 하듯 내게 이런저런 푸념을 늘어놓았다.

“거기에 퀘스트도 죄다 피 줄줄 흐르는 약탈자 관련된 것만 얽혀요. 맨날 누굴 죽여라. 또 누굴 죽여라… 에휴……. 저도 남들처럼 좀 평범한 퀘스트 좀 하고 싶은데 이젠 그런 퀘스트랑 엮일 인연도 죄다 사라지고 같이할 사람도 없고…….”

“음, 제가 캡슐 개인 번호 드릴 테니 혹 불러주시면 무슨 일이든 발 벗고 나서겠습니다.”

“앗? 정말요?”

“예.”

내 말에 세스의 눈이 반짝하면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간다.

친추가 되어 있기는 하지만 친추는 지역을 벗어나면 무용지물이 되기에 진짜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는 캡슐 안에서 연락하는 개인 번호를 공유한다. 그런데 개인 번호 공유하는 게 그렇게 좋아할 일인가.

“음, 케이 님의 개인 번호랑 도움권이라… 나쁘지 않네요.”

“하하하… 예. 번호는… 2113XTD입니다.”

“2113XTD라… 꼭 연락할게요.”

“네.”

“그럼 일도 다 끝났고… 저는 이만 바쁜 일이 있어서. 나와라! 달그림자”

급한 일이 있는지 갑자기 작별 인사를 하는 세스.

히이이잉!

그녀의 말이 끝나자 하늘에서 검은 그림자가 내려와 땅 위에 뭉치더니 이내 한 마리의 흑마로 변신했다.

[팬텀 쉐이드]

팬텀 쉐이드를 소환하는 전설급 스킬인데 소환된 팬텀 쉐이드는 일반 군마보다 2배 이상 빠르며 웬만한 보스급 몬스터도 상대할 정도로 강하다고 알려졌다. 흑마 위에 훌쩍 올라탄 세스가 말했다.

“다음에 볼 때는 말 편하게 해요.”

말을 마친 그녀가 말의 옆구리를 툭 치자 한차례 투레질을 한 흑마가 바람처럼 달려 사라졌다. 빠르기도 하네. 그런데… 음… 달의 눈 애들은 왜 안 따라가고 고개만 절레절레 젓고 있지.

* * *

카머슨 남작령과의 전쟁에서 포디나 백작이 승리했지만 포디나 백작이 카머슨 남작령을 차지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이기도 하려니와 차지한다고 해도 마땅한 국경 방어 수단이 없는 터라 지키기가 더욱 힘들 것이기에 포디나 백작은 카머슨 남작에게 그동안의 이번 침략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와 더불어 다시는 포디나를 넘보지 않겠다는 양해 각서, 그리고 이천만 골드라는 거액의 배상금을 뜯어냈다.

이천만 골드… 현실의 돈으로 치자면 무려 200억 원이다.

거기에 카머슨 남작을 지원 온 귀족들의 몸값도 100만 골드씩 뜯어서 총 2,400만 골드의 엄청난 자금이 영지에 수혈되었다.

“전부 들어오는 거 아냐. 5년 거치로 받는 거니까.”

“에이… 그게 뭐야.”

“야, 영지 1년 예산이 얼만데 그걸 한 번에 주겠냐.”

“그런가. 그런데 적국인데 혹시 떼먹는 거 아냐?”

“흐흥, 그러지는 못할걸?”

“왜?”

“공증을 성국에서 받았는데 배를 째라고 누우면 카머슨 남작 명예가 똥통으로 들어가는 건 둘째치고 성국에서 이번 전쟁에 연루된 모든 영지의 성당과 사제들을 철수시켜 버릴 테니까.”

“아하…….”

성국이라는 건 당연히 세이온의 유일신 헤븐을 섬기는 교국을 뜻한다. 뭐 규모가 대단한 건 아닌데 그들이 믿는 신이 진짜 신(게임사)이라서 절대 거역하지는 못한다. 특히 영지에서 성당과 사제들을 철수시키면?

“차라리 어기는 게 나을 수도 있겠네.”

“그렇지.”

성직자 계열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직업 계열들은 모조리 망했다고 보면 된다.

직업 스킬을 얻거나 직업 퀘스트를 전부 성당에서 얻으니까. 게다가 성당이 하는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할 수도 있는 것. 게임사의 유저 퀘스트 또한 받을 수 없게 된다. 유저 퀘스트를 받을 수 없는 영지에 어떤 유저들이 찾아올까.

“근데 넌 뭐 받는 거 없어?”

누나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음… 마치 돈 뱉어 내는 ATM을 보는 눈빛 같아서 기분이 좀… X 같다.

“자작위에 영지, 100만 골드 혹은 그에 준하는 아이템 준다더라고.”

“우와? 자작? 영지? 언제?”

“내일 승전 파티 때 임명식이랑 수여식 한대. 남작위를 너무 개같이 던져 줘서 이번에는 좀 성대하게 해 주려나 봐.”

“와! 와와와! 그럼 난 영지 가진 자작부인이 되는 건가?”

누나가 방방 뛰며 말했다. 그게 그렇게 좋은가.

“좋아?”

“당연히 좋지! 너 영지 가진 귀족이 무슨 뜻인지 몰라?”

안다. 영지의 주인이 영지 안에서 얼마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는지.

영지를 하사받으면 내가 곧 그 영지의 법이다. 부역과 공납, 세금을 통해 말 그대로 골드를 생산하는 공장을 얻는 것이다. 영지를 잘만 키우면 현실의 건물주처럼 놀고먹고 살 수 있다는 뜻. 그렇지만 난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

“그 영지 그냥 돈으로 받으면 안 되나.”

“왜!”

“영지 가지면 내가 영지에 묶이게 되잖아. 주변 몬스터 토벌도 내가 해야 하고 영지민들도 돌봐야 하고…….”

“이런 똥멍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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