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보스 스킬 쓴다-123화 (123/154)

123. 싸하다

쏴아아아…….

하늘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진흙으로 된 바닥에 부딪혀 흩어졌다.

그 흩어짐이 너무나도 고약해 장화나 바지춤이 더러워지는 것을 싫어하는 이들은 서둘러 자기 집이나 혹 잠시라도 비를 피할 곳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뛰고 있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아무리 리얼리티를 추구한다지만 굳이 비까지 만들 필요가 있었나요?”

창밖으로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걸 멍하니 바라보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던 사내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자네가 아직도 이해를 못 하는 거 같아 참으로 애석하군. 다시 말하지만 저건 엔트로피의 산물일 뿐이고, 더 중요한 건 저게 없으면 이 세계는 멸망한다는 거야.”

“내가 그걸 몰라서 말하는 것 같아요? 굳이 ‘비’라는 형식이 아니더라도 가능하잖아요. 당신이라면…….”

“그렇지. 가능이야 하지. 그렇지만 난 비가 좋아.”

후르륵.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며 아련한 눈빛으로 커피를 들이키는 사내. 그리고 그 사내의 입가에 맺힌 작은 미소가 무척이나 얄미운 여인이다. 여인은 사내와 좀 더 건설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을 포기했다. 오늘 여기 방문한 것은 이전에 사내와 이야기 나눴던 것에 대한 연장선상이니까.

“그게 나타났어요.”

“뭘 말하는 거지?”

“특이점”

“호오…….”

사내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어디지?”

“코리 왕국이요”

“허. 그쪽 동네는 정말 뭐가 있는 건가. 그 좁은 곳에 별별 것들이 다 튀어나오는군.”

“별로 좋은 의미로 들리지는 않네요.”

“곡해하지 마라. 정말 순수한 궁금증일 뿐이니까.”

“그건 우리 쪽에서도 궁금한 것에요. 당신이 그쪽 땅의 초깃값에 무슨 장난질을 친 게 아니냐고…….”

여인이 사내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러나 사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하하, 살다 살다 정말 멍청한 소리 다 듣겠군.”

“그게 무슨 뜻이죠?”

“대답해 주기도 귀찮으니 그 의문은 네 전임자에게 물어보고 와라. 이거야 원 똑똑한 녀석을 붙여 준다더니 정말 실망이군. 이번 성녀는…….”

“…….”

사내의 말에 성녀라 불린 여인의 입이 한일자로 다물어졌다. 비록 자신이 이 직분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지만 수많은 후보 중 가장 적합한 인물로 선정되어 이 자리에 선 것이다.

“헤븐…….”

“네 자리를 깨달아라.”

쿵!

육중한 울림과 함께 주변 모든 것들이 비틀려 흐려진다.

마치 풍경화를 통째로 물속에 집어넣은 것처럼 흐려지더니 이내 온통 하얀색으로 칠해진 하얀 공간으로 변해 버린다. 성녀라는 여인은 그 속에 주저앉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이다.

“무지에서 오는 죄는 죄가 아니라고 하지. 허나, 넌 자신의 무지를 알면서도 죄를 짓는구나.”

“…….”

“경고하는데 어쭙잖게 떠보는 짓은 마라. 난 인간이 아니니.”

“예.”

“좋아.”

슈우욱!

여인이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모든 것들이 원상태로 돌아왔다. 둘 사이에 놓여 있던 탁자와 두 개의 찻잔 그리고 비 내리는 풍경과 그 사이를 가로막은 유리창이 있다. 달라진 거라면 여인의 표정뿐이다. 분노와 공포가 뒤섞인 그녀의 눈망울 속 태연하게 찻잔을 드는 사내가 보인다.

“배제하려 했느냐?”

“아뇨.”

“어째서? 너희는 그다지 반기지 않을 상황일 텐데? 그것 때문에 내 눈과 귀도 막아 버린 것 아닌가?”

사내 아니 헤븐의 말에 성녀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용없더군요.”

“소용이 없어?”

“네. 유일하게 간섭할 수 있는 행운을 0으로 만들기는 했지만, 임시방편일 뿐이라는 게 객관적인 평가입니다.”

“쯧쯔… 멍청한 짓을 했군.”

성녀의 말에 헤븐은 혀를 찼다.

“멍청한 짓이라니요?”

“행운이라는 건 분명 많은 부분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능력치지만 높다고 해서 좋은 능력치가 아니다.”

“……?”

헤븐의 말에 성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부분에서는 동의할 수 없는 것이 세이온에서 행운이라는 건 아주 큰 영향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높다고 좋은 게 아니라니……. 이해할 수 없는 것.

“이 세계를 이루는 뼈대는 인과율에 있다. 어떤 현상이든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 모두를 발생시키지. 너희 딴에는 그 특이점의 힘을 제어하려 한 짓이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최악의 행운 수치로 인해 그 특이점 또한 무형이든 유형이든 긍정적인 이득을 취했다는 소리다.”

“그런가요.”

당장에는 이해할 수 없지만, 어차피 헤븐과의 대화 중 절반 이상은 선문답이기에 성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재미있게 되었군. 이 시점에 특이점이라니…….”

“저희는 발등에 불이 붙었죠. 아직 컨버젼스도 이뤄지지 않았는데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할 판이니...”

“그렇지.”

오늘따라 그 미소가 더욱 얄궂은 헤븐을 노려보며 성녀는 생각했다. 괜히 전대 성녀가 홧병으로 성녀직을 그만둔 게 아니라고…….

“조언해 주실 거 없나요?”

“일단은 행운을 본래 수치로 돌려놓아야 겠지.”

“그러고요?”

“재미있는 구경?”

뿌드득…….

쥐고 있던 의자의 팔걸이가 부서졌다.

* * *

인정한다. 누나는 능력 있다. 포디나에 있는 아이언우드 상단 본점은 6명의 직원을 고용하여 한참 성업 중이고 시골 같았던 내 영지는 고작 일주일만의 외지인으로 북적거리는 곳으로 만들었다.

광산 기술자들을 섭외하고 채광 노동자를 모집했다. 가도를 정비하며 유저 용병단과 계약해 주변 몬스터들을 박멸하더니 그 인원을 치안유지 퀘스트로 돌리고 포디나에서 지원해 준 엉덩이 무거운 200명의 병사들은 금광산 경비로 투입했다. 용병단과 투입 위치가 바뀐 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는데 장기계약으로 유도한 후 용병단을 그대로 영지에 주저앉힐 거란다. 어마어마한 추진력에 박수를 쳐 줘야 하지만 그 추진력의 비결 중 하나는 바로 내 이름팔이라서 조금 기분이 안 좋다.

“케이 만세!”

“작작 좀…….”

“프리패스네. 프리패스야~ 호호호.”

누나는 모든 일에 내 이름을 팔아먹었다. 정보 길드를 이용할 때도 용병단과 계약할 때도 거래를 할 때도 포디나 성문을 지키는 망나니 경비조장을 구워삶을 때도 내 이름을 댔다. 목 뻣뻣한 놈들의 몸을 공손하게 만들어 주고 웃돈 요구하는 놈들의 주머니를 가볍게 만들어 주며 목소리를 얌전하게 만들어 주는 특효약이었다. 내 이름만 대면 흥정도 필요 없다더라. 내 이미지가 그렇게 무서웠나 싶기도 하지만 덕분에 일주일만의 영지의 어느 정도 뼈대를 완성된 걸 보며 불만을 삭혔다.

기존의 목책이 철거되고 더 넓은 공터를 포함한 새로운 성벽이 경계에 세워진다. 영주 성을 시작으로 커다란 여관과 식당, 펍, 성당 등이 건설되고 기존의 주거 지역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허름한 흙집들이 조금씩 사라졌다. 영지민들의 반발은 별로 없었다. 새로 포함되는 주거지역에 벽돌과 통나무로 된 집들이 올라가기 시작했으니까.

“케이 아이언우드 자작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기사도 들였다. 유저들 중에 기사 되고 싶다면서 달라붙는 놈들이 한가득하였지만 일단은 포디나 백작 휘하에 있던 NPC 기사를 선택했다. 유저 기사가 성장 가능성이 좋긴 하지만 누나와 내가 선택한 녀석은 포디나 토박이에 조금 고지식하지만 카리스마 있는 기사로 차후 영지에 영입할 기사들의 우두머리로 적합한 인물이었다.

“병사 모집은 언제 해?”

“포디나 백작이 지원해 준 병사가 3년은 지켜 주기로 되어 있으니까 인구 늘어나는 대로 조금씩 받아서 2년 차에는 500명 맞춰야지.”

“500명이라… 너무 적은 거 아냐?”

“너로서야 개미 코딱지만 한 전력이겠지만 원래는 꽤 많은 병력이거든. 몬스터 사냥으로 돌릴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병사는 소비 집단이야. 어차피 네 이름값이 있어서 덤빌 놈도 없는데 많이 필요 없기도 하고 정 필요하면 용병 고용하면 돼.”

“오, 누나는 다 계획이 있구나.”

확실히 누나는 돈을 매우 효율적으로 사용했다. 놀라운 건 이번에 받은 100만 골드에는 조금도 손대지 않았다는 것이었는데 내가 이번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들을 처분한 것만으로 50만 골드 이상의 수익을 올렸단다. 포디나 백작이 전리품 대부분을 내 것으로 인정해 줬다는데 백작이야 몸값이랑 배상금 받은 것만으로 배가 부르다 못해 터질 지경일 것이다.

그러나 명성이 높다는 것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더라. 누군가는 유명세를 즐길 수도 있겠지만 난 시끄러운 것을 싫다. 정말로.

“케이 님이다!”

영주관을 나서자 나를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내가 동네 순찰 나가는 시간이 일정하니까 근처에 잠복하고 있었나 보다.

“물러서라!”

곁을 호위하는 유일한 기사 라일랜드 경이 위엄 있는 목소리로 외치자 함께 호위하는 십여 명의 병사들이 날 선 눈초리로 주변을 노려본다.

“자작님. 명만 내려주시면 모조리 정리하겠습니다.”

“으음…….”

내게 이들을 쫓아내라는 명령을 기다리는 것 같은데 그건 힘들다. 아니, 오히려 더 잘해 줘야 한다.

“모두 우리 영지를 발전시켜 주실 귀한 손님들인데 그러면 쓰나. 출발하지.”

“예.”

똥 씹은 표정의 라일랜드 경을 뒤로한 채 말을 출발시켰다.

척척척!

“케이 니이임~”

“아이, 케이 님 저희 좀 봐주세요.”

“케이! 케이! 케이!”

“저는 지금 대한민국의 자랑 케이의 영지에 와 있는데요! 이곳은 지금……!”

사실 전부 다 끌어모아 영주의 권력으로 내쫓아 버리고 싶지만 누나가 결사반대했다. 이들은 모두 내 팬이었다. 거기에 영지의 발전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니 꼴 보기 싫어도 참으라는 것. 실제로 많은 인구가 유입되면서 영지에 도움이 되니 일단은 참는 중이다. 인기 좋은 남캠 중에 여성 팬들 이끌고 다니는 걸 즐기는 놈들이 있다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것도 재능이라면 재능 같다. 난 죽어도 못할 거 같으니까.

문제는 팬들은 그럭저럭 참아줄 만한데 진짜 문제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케이 님~”

“어머어머! 날 보셨어!”

수많은 여캠들도 함께 몰려들었다. 한둘이면 그냥 넘어가겠는데 대한민국에서 인기 좀 있다는 여캠들은 다 몰려온 것 같다.

“케이 니이임~ 저 생글이 왔어요오오~”

입은 옷보다 벗은 부위가 더 많아 보이는 금발의 미녀가 저 멀리서 손을 흔든다. 물론 난 전혀 모른다. 그냥 아는 체하면서 육탄공격해 대는 것. 현재 가장 인방계에서 내가 가장 핫하다는데 정식으로 오퍼를 넣어도 전부 거절하니 이렇게 육탄공격을 해 대는 것이다. 게다가 난 여자에 내성이 부족해서 매정하게 내치지를 못한다.

“하아, 귀찮군.”

여캠이 아니더라도 전부터 합방 제의는 꾸준히 들어왔다. 방송인이라면 누구나 하는 레이드 콘텐츠에서부터 길드전, 여행, 탐사, 개척, 모험 등등 종류도 많다. 그러나 난 그것들을 모두 거절했다. 콧대가 너무 높다는 비난도 받았지만 재미없는 걸 억지로 하는 건 싫었으니까.

들리는 말로는 한번 제대로 손봐주겠다며 방송으로 공공연하게 벼르던 놈들이 있었다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전부 지웠다더라. 한번 전부 모아서 업보 청산 콘텐츠 하고 싶었는데 참 아쉬운 일이다.

“여기 한번 봐주시지. 흐아앙…….”

생글이라는 여캠이 내가 눈길조차 주지 않자 바닥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의 추종자들이 골목 여기저기에 숨어 이쪽을 미움과 시기가 점철된 눈빛으로 노려본다.

‘차라리 덤벼라. 새끼들아.’

내가 쌓여 가는 스트레스에 인상 팍팍 쓰며 대로를 걷고 있을 때였다.

띠링~

투덜거리며 걷는데 시야 한쪽에 알람이 깜빡인다. 외부 메신저 알람으로 보통 편집을 하는 광수 형이랑 소통할 때 쓰인다. 클릭을 하자 대화창이 뜨는데 조금은 뜻밖의 인물이다.

-안녕하세요.

알람의 주인은 세스였다. 저번에 번호를 교환하고 몇 번 짧게 대화를 나누고는 뜸하더니 갑자기 연락이 왔다.

-바쁘신가요?

-아뇨.

-바빠 보이시는데…….

뭔가 기분이 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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