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뜻밖의 선물
-예. 그게 무슨…….
-잠시만요.
아주 가까이 있을 것 같은 이 꺼림칙한 기분은 뭘까.
우오오오-
“음?”
싸늘한 바람이 느껴진다.
분명 조금 전까지 낮이었는데 주위가 어두컴컴해졌다. 이 이상 현상을 알아보기 위해 하늘로 고개를 들어보니 시야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눈이었다. 괴기 오컬트 영화의 그것처럼 하늘 높은 곳에 유유히 떠 있는…….
“어…….”
저것이 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세스의 상징과도 같은 달의 눈이었으니까.
문제는 지금 왜 저게 떠올랐느냐는 것. 내가 알기로 저것은 보통 적에게 예비 사형 선고를 내릴 때 쓴다고 알고 있다. 고유 업적인 ‘학살공주’와 시너지를 일으켜 그 달의 눈 아래에서는 무적의 신위를 보인다는 건데……. 왜 저게 내 영지 위에 떠 있는 걸까?
그렇게 내가 멍하니 달의 눈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하… 학살공주?”
“꺄아악!”
“도망쳐!”
비명과 함께 사람들이 달리기 시작했고, 거리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나를 쫓던 팬들도 징그럽게 달라붙던 여캠들도 도망치기 바쁘다.
히히힝!
내가 탄 말도 앞발을 들며 거칠게 투레질을 했고 호위하던 기사와 병사들 또한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경계하고 있다.
이건 뭐 숫제 영지에 악마가 강림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풍경이네.
슈슉…….
그때 내 앞에 한 인영이 내려섰다. 폭포수 같은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옆구리가 시원하게 트인 검은색의 오픈숄더 드레스를 입은 미녀다. 한순간 성스럽다라고 느낄 정도로 아름다움이지만, 내려선 여인의 눈빛은 외모와는 다르게 살벌하기 그지없다.
스으으으으으-
그녀는 냉기가 풀풀 날리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훑었다. 마치 물어뜯고 찢어발길 뭔가를 찾는 호랑이의 그것 같다. 그녀에게서 점점이 묻어나는 난폭한 광기와 살기가 나조차도 몸이 움찔거린다.
‘뭔가 오기 전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나.
그다지 알고 싶지는 않지만 이대로 뒀다가는 영지에 유저들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
“저기 세스 님?”
“아… 네?”
주위를 훑던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사나운 표정은 삽시간에 풀리고 볼이 빨갛게 물든다.
뭐지. 이 참신한 리액션은.
“안녕하셨어요?”
“네? 네!”
내 물음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세스다. 그 모습이 꽤 귀엽기는 하지만 본질을 잊으면 안 되겠지.
“여긴 어쩔 일로 오셨는지…….”
“아, 그게… 케이 님을…….”
대답하려던 그녀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결심한 듯 말했다.
“케이 님이 보고 싶어서요.”
“네?”
“보고 싶어서 왔다고요.”
뭐지.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말하는데 딱히 대꾸가 떠오르지 않는다.
팬으로써 보고 싶어서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왠지 그 의미만이 아니라는 눈빛이다. 잠시 말을 잊은 채 마주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실 케이 님한테 선물 하나 가져왔어요.”
“예. 예? 선물이요?”
“아, 그… 룰러 채널의 회장으로서 후원 같은 거죠.”
뜬금없는 선물이라는 말에 어리둥절하다. 기실 이전에도 그녀에게 이런 식의 후원을 받기는 했지만 뭔가 맥락이 전혀 안 맞는 대화 흐름이다. 갑자기 연락해 오지 않나. 대뜸 하늘에 ‘달의 눈’을 띄워 영지에 공포 분위기를 뿌리지 않나.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지 않나.
“그런… 가요.”
“그런… 음음… 거죠.”
세스가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자색의 은은한 오오라가 피어오르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돌멩이 조각이다.
“여기요.”
“네? 네.”
그녀는 별거 아니라는 듯 내게 그것을 건넸다. 전혀 선물 같지 않은 거라 고개를 갸웃했지만 주기에 엉겁결에 받아 들었지만 잠시 후 아이템에 떠오른 상세 내역을 읽는 순간 하마터면 그것을 놓칠 뻔했다.
[현자의 돌] [신화 등급]
-정체를 알 수 없는 돌이다.
“어?”
“필요하신 물건이었죠?”
세스가 조심스럽게 물어온다.
필요한 물건이냐고? 당연하다. 무려 멸신검을 사용하기 위한 필요 조건 중 가장 난이도 높은 두 가지 조건 중 하나였으니까. 그렇지만 이것을 여기서 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오러 블레이드 [신화등급] [사용 불가]
사용 필요조건
-레벨 60이상 [달성]
-오러 능력치 200 [달성]
-푸른바람 일족 오러 연공술 10티어 [달성]
-산들바람 걷기 10티어 [달성]
-업적: [신화 등급] 폭풍 학살자 [미습득]
-소드마스터 알레그로의 가르침- 현자의 돌 필요(1/1)
확인 차원에서 퀘스트 창을 열어 보니 과연 현자의 돌 항목이 변해 있었다. 이제 이걸 가지고 알레그로에게 가기만 하면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 그러나 이 물건은 그냥 맨입으로 받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비싼 걸 떠나서 누나 말로는 구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재료인데 그걸 가져왔다.
“저… 음…….”
“혹 제가 잘못 가져온 건가요?”
“아니요?! 전혀 아닙니다. 단지 제가 알기로 이게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고, 또 이쪽 대륙에서는 아예 나오지도 않은 그런 류의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선물로 주시니 너무 뜻밖이라 그랬습니다.”
내가 현자의 돌을 찾고 있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도 궁금하기는 하지만 이런 걸 선물로 가져온 사람에게 그런 추궁하는 듯한 질문을 하기도 미안하다.
“아. 이건 그냥 어쩌다가 얻은 건데… 그 케이 님 상단에서 현자의 돌 찾는다는 소리가 들려서.”
“이거 엄청 비싸다고 알고 있는데…….”
누나 말로는 프리미엄까지 합쳐서 20억은 넘을 거라고 했다. 너무 비싸서 내가 가진 현금 자산의 상당 부분을 유보금으로 둘 정도고 돈이 있어도 못 사는 물건이라고 했다.
“신경을 쓰지 않아도 돼요. 돈 주고 얻은 게 아니니까. 호호.”
돈 준 게 아니라니까 더 신경이 쓰이는데요.
어떻게 구했는지 궁금하지만, 함부로 물어보기도 꺼림칙하다.
냉큼 꿀꺽하고 싶지만 내 양심에 난 털이 그 정도로 길지는 않다.
“저기 그렇지만 제가 알기로 이거 일이십 억은 넘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케이 님 방송의 회장으로서 하는 후원이에요.”
“아. 네.”
개인 방송 초짜라 이런 걸 받는 게 맞는지도 헷갈린다. 단순한 팬심에 일이 십억 하는 물건을 줄 수도 있다고?
“후우, 이럴 때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정말 필요한 물건이기는 한데 이렇게 비싼 걸 후원으로 받아 본 적이 없어서… 음… 무슨 리액션 같은 거 해야 하나요?”
“호호, 아뇨.”
“그렇지만 제가 맨입으로 받기에는 너무 감사해서요. 뭐라도 답례로 드리고 싶은데 마땅한 것도 없고…….”
“바라는 게 하나 있긴 한데…….”
“어떤 거죠?”
“소원권 하나만 주실 수 있나요?”
“소원권이요?”
“예. 나중에. 아주 나중에 혹 제가 필요하면 쓸 수 있는 소원권이요.”
“음…….”
소원권이라……. 뭔가 두루뭉술한 요구이기는 하지만 부담스러운 건 아니다.
“그러죠. 제 능력이 되는 한도 내에서 세스 님이 바라시는 거 하나 들어드리는 걸로……. 괜찮은가요?”
“네!”
내 대답에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그녀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으니 주위도 밝아지는 것 같다. 이상한 건 그런 그녀의 모습이 이상하게 낯설지 않다는 것. 마치 어디선가 겪었던 느낌이다.
“케이 님.”
“예.”
“케이 님이 영지 구경 좀 시켜 주세요.”
초롱초롱한 그녀의 눈빛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가씨… 돌발 행동은…….”
“알아. 나도 내가 미친 짓 했다는 거. 그렇지만… 그렇지만… 좋았다구.”
“끙… 예.”
좋았다니까 또 할 말이 없다. 그와 있는 것이 긍정적 감정이 뿜어지는 유일한 시간이니까. 단지 그 이유가 너무 하찮기에 이해가 안 될 뿐이다. 잘생긴 건 인정한다. 관리를 안 받아서 그렇지 작정하고 관리하면 웬만한 연예인 뺨칠 수준이다. 그렇지만 외모에서는 이수정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제외하면 딱히 대단한 게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와 이수정 사이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고 있기에 어린 날에 치기 같은 첫사랑을 응원해 주는 편이지만 이수정은 그 정도가 많이 심했다.
“너무 행복해.”
“…….”
이수정의 눈빛이 몽롱하게 변했다.
손바닥만 한 영지를 소개받는 건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녀 소유의 영지가 웬만한 대도시 뺨치는 크기인 것을 생각하면 그냥 동네 순찰과 마찬가지였지만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니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 말도 제대로 못 했다. 생소한 몸의 반응이지만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그냥 행복했을 뿐이다. 단지 만남이라는 첫 장면이 좀 에러이긴 하지만 말이다.
사실 그건 사고와 같은 것이었다. 그에게 달라붙은 요망한 것들을 보자 머리에 스파크가 튀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와 마주 본 상태였다.
비록 아바타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그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가슴이 사정없이 두방망이질 치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언제 어디서건 그 누구보다 차가운 이성을 유지할 수 있지만 그 앞에서는 그게 힘들다. 오직 그만이 그녀의 심장을 뛰게 만든다고나 할까?
“후우…….”
유 비서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는 꼴을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니 이해는 가지만 이 어리지만 조숙한 황녀께서는 날이 갈수록 증상이 심해지신다.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좋으세요?’ 하고 묻고 싶지만 그건 그녀를 보좌하는 처지에서는 입에 담아서는 안 될 금기의 한마디와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이걸 묻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소원권은 뭡니까?”
무슨 어린애 장난도 아니고 수십억짜리 물건이 오가는데 고작 소원권이라니. 만약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면 케이와 변호사를 통한 정식 계약서를 따로 작성해도 모자랄 일이다. 그렇지만 이수정에게 그 소원권은 ‘고작’ 수십억보다 더 가치 있는 물건이었다.
“나중에 꼭 필요한 물건이야.”
“……?”
“그렇게만 알아 둬.”
“예.”
칼같이 자르는 걸 보면 본래의 주인으로 돌아왔다.
“그보다 게임사 반응이 어때?”
“심각합니다.”
“따로 항의가 들어왔나?”
“아뇨, 취합된 정보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가뜩이나 정정이 분분한 베소 왕국이랑 천황 길드인데 박살을 내놨으니. 헤븐즈게이트사에서 조만간 무슨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예상입니다.”
“솔직히 박살까지는 아니지.”
“그 정도면 박살입니다.”
“그렇지만 협상에 불응한 건 걔네들이야.”
“타협의 여지가 있었죠.”
말 안 듣는다고 협상 자리에 있던 이들의 목을 천천히 하나하나 분질러 버리면 상대 체면은 뭐가 되는가.
“뭐, 어쩔 수 없지. 정 안 될 거 같으면 참가한다고 전해.”
“참가라면…….”
“개척단.”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유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헤븐즈게이트사의 목표는 동서양을 잇는 것이었다. 그것을 조건으로 건다면 헤븐즈게이트사도 아무 말 못하리라.
“나가 봐.”
“예.”
어깨를 으쓱한 이수정이 쇼파에 몸을 누이고는 손을 휘적휘적 저으며 말했다. 오늘 새로 얻은 영상을 감상할 혼자만의 시간이다.
* * *
“와…….”
혜미 누나는 내가 내민 현자의 돌을 받아 들고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걸 그냥 줬다고? 그 세스가?”
“응. 후원이래.”
“공짜로?”
“공짜는 아니고…….”
“그럼?”
“소원권 하나.”
“…장난쳐?”
“장난 아닌데?”
“…….”
내 대답에 현자의 돌과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는 혜미 누나가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뭔가 내가 모르는 엄청난 세상이 있는 거 아닐까.”
“그게 무슨 말이야?”
“넌 지금, 이 순간에도 만 원 도네에 허리가 부러져라 춤을 추는 여캠들을 알고 있니? 십만 원이라도 받으면 머리를 박고 그랜절을 하는 애들은?”
“음… 관심 없는데…….”
“오만한 것!”
“어쩌라구.”
난 아직도 이 후원을 하는 사람들의 마인드를 전부 이해할 수 없다. 물론 만 원이나 십만 원 정도는 좋아하는 개인 방송인을 위해 쏠 수 있다지만 수백, 수천만 원을 후원으로 쏘거나 수십, 수백만 원을 들여서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앨범을 산다던가 하는 건 스무 살 평생을 허리띠 졸라매며 살았던 내게는 먼 세상 이야기인 것이다.
누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하긴 내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세상은 돌아가는 거니까. 잘됐네. 상도 오빠가 좋아하겠다.”
“상도 형이 왜?”
“새로 스튜디오 구하고 있는데 돈이 좀 부족해서 대출 생각하고 있었거든.”
“얼마짜리를 구하는데?”
“수도권 쪽에 새로 지어진 5층짜리 신축 건물인데 원래 캡슐방 용도로 계획된 거라 상당히 좋다고 하더라고. 나도 얼마간 보태기는 했는데 워낙 덩어리가 커서 주인이랑 조율하는 중이래.”
그러면서 누나가 스마트폰에서 사진 하나를 띄워 내게 보여 줬다.
“와…….”
보정이 1g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포스를 뿜는 건물이다.
“여기가 우리 아지트가 될 거란 말이야?”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