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침투
“사실 싸울 일 없으면 난 그다지 필요가 없는 것 같아.”
“그렇기야 하지.”
“그래서 그런데 그냥 누나가 자작 하면 안 되나? 어차피 누나가 다 하잖아.”
내 말에 누나의 눈이 세모꼴이 되었다.
“너, 나를 너무 공짜로 부려 먹는다고 생각하지 않니?”
“부려 먹다니… 대 아이언우드 자작 부인을!”
“염병! 눈에 부려 먹을 생각만 가득한 놈이!!”
음… 역시 안 속네. 이건 역시 무린가. 그렇지만 나도 변명거리는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영지 경영에는 잼병이라는 것. 영지민들의 간단한 소사에서부터 새로 확장되는 생활 지구에 투입되어야 하는 자금을 산출하거나 몬스터 토벌에 고용할 용병들과 그들에게 줄 영지 퀘스트 따위를 작성하고 향후 경비대의 규모를 얼마나 늘려야 하는지 따위는 도통 골치 아픈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나에 비해 누나는 영지 경영을 정말 잘했다. 포디나에 있는 ‘백화점’을 통해 싼값에 생필품을 수급하고 쥐꼬리만 한 마을의 특산품을 개발해 수익까지 내고 있다. 본래라면 우리 측에서 감당해야 할 가도의 치안 유지와 정비도 일렌 자작과 포디나 레인저 스트라이더인 카렌 씨를 구워삶아 거의 공짜에 부려 먹는다. 그뿐인가. 금광에서는 벌써 금맥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전부 누나가 한 것. 그런데 명예 점수는 내가 다 먹었다.
“흠흠, 미안해서 그렇지.”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해.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영지 퀘스트 덕분에 나도 레벨 업은 잘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걱정 말고 다녀와.”
“그게…….”
“오래 걸릴 수도 있다고?”
“어, 어떻게 알았어?”
“척하면 척이지. 대신 오래 걸리면 내가 진짜 영주 직인 마음대로 휘두를 거야.”
영주 직인을 마음대로 휘두른다는 건 영지에 전권을 행사하겠다는 뜻과 같다.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그걸로 실제 소송까지 가는 일이 부지기수라던가. 그건 그렇고 정말 어떻게 알았을까?
“척 보니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인데… 세스 한테 현자의 돌 받았으니 이제 남은 건 그 폭풍 학살자라는 신화급 업적뿐인데 폭풍 학살자라면 누적 PK 수치 10,000명 달성해야 받는 거니까 보나마나 만만한 치나 제국 쳐들어가서 미친 듯이 썰고 다니는 게 제일 빠르겠지. 며칠 전에 포디나 정보 길드에 오천 골드 정도 쓴 걸 보면 위장 신분 같은 거 구했을 테고?”
“와…….”
할 말이 없다. 돈 빠져나간 거야 살림을 책임지고 있으니 알 수 있는 거라지만 어떻게 내 머릿속에 들어앉은 것처럼 정확히 알 수 있지? 독심술 스킬이라도 있나?
“독심술 아니거든.”
“…….”
“아무튼 너, 치나 제국 가는 거 비밀로 하면 한동안 위튜브 영상 빌 테니까 그사이에 영지 운영으로 내가 메인으로 위튜브 영상 올릴 거야.”
“누나가?”
“응, 신랑이 바람나서 싸돌아 다니고 혼자 남은 영주 부인이 영지 꾸린다는 컨셉이야. 영지 가진 유저가 얼마 없으니 세이온 위튜브로는 블루오션이지.”
“그럼 바람난 신랑이 나겠네?”
“잘 아네. 영지 경영에는 전혀 관심 없고 치고받고 싸우는 거에 환장한 신랑 놈아.”
“흠흠…….”
“꽃미남 시종 들여서 하렘 만들 거야. 나중에 돌아와서 놀라지 마.”
입꼬리가 삐죽하고 올라가는 걸 보면 진짜 해 볼 참인가 보다. 왠지 불안하네.
“알았어. 노딱만 받지 마.”
“흐흐흐. 모자이크 잘할게.”
불안해서라도 빨리 다녀와야겠다.
“아무튼 난 다녀온다.”
“옹야.”
영지를 나선 난 곧장 포디나의 정보 길드로 향했다. 변장을 한 상태였기에 나를 알아보는 이는 없다.
“오셨습니까, 아이언우드 자작님.”
포디나의 정보 길드 부엉이굴의 지부장인 조니가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암흑가에서 중국 놈들을 모조리 몰아낸 덕분인지 요즘 얼굴이 피었다.
“말했던 건?”
“전부 준비되었습니다.”
조니가 세 개의 물건을 내게 내밀었다.
[치나 제국 시민권] [희귀 등급]
[최상급 인피 면구] [희귀 등급]
내구도:32/32
[D급 용병패] [희귀 등급]
[치나 제국 지도]
“나이 32세로 방랑 용병에 이름은 로헨입니다.”
“가짜라는 걸 들킬 가능성은?”
“로헨의 지인이 아닌 바에야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또한 지금 드린 희귀 등급 인피 면구는 명인급 장인이 만든 것으로 웬만한 타격에는 절대 찢어지는 일도 없을 겁니다.”
“그렇군. 그럼 이 신분의 주인인 로헨이라는 방랑 기사는 죽은 건가?”
“예. 그러니 그 얼굴 가죽이 여기 있겠죠. 하하…….”
인피 면구라고 해서 사람 피부처럼 만드는 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진짜 얼굴 가죽으로 만드나 보다. 왠지 좀 꺼림칙하지만 치나 제국에 들어가 마음껏 난리를 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거라 어쩔 수 없다.
“흠흠, 주의 사항은?”
“일단 한번 착용하면 다시 벗었다가 쓰는 건 불가능합니다. 최상급이라 웬만한 충격에는 찢어지지 않겠지만 한계 이상의 충격에는 찢어집니다. 찢어지면 복구할 수 없으니 가리고 다녀야 하고 실제 인피(人皮)로 만든 거라 한 달 정도 쓰면 피부가 변색이 됩니다. 화장으로 어느 정도 가리는 건 가능하지만 썩기 시작하면 답이 없으니 그 전에 일을 끝내셔야 하고요. 아, 한 달 정도 지나면 털도 빠지니까 주의하셔야 합니다.”
“음, 명심하지.”
뭐, 어차피 한 달까지 보낼 생각은 없다. 현재 내 PK 숫자는 6,981명으로 대략 3,000명 정도만 더 죽이면 신화 등급 업적을 달성할 수 있는데 그 정도면 한 달 안에 끝낼 자신 있다.
“시민권이랑 호패가 있지만 되도록 암흑가 쪽 상점을 이용하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바가지는 씌워도 추적은 피할 수 있을 겁니다. 포탈은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 마법사들은 디텍트 마법으로 변장을 감별할 수 있거든요.”
“알겠네.”
“마지막으로 혹 현상금이 걸리셨다면 최대한 빠르게 탈출하는 걸 추천드립니다. 치나 제국 유저 놈들은 집요하거든요.”
“그건 바라던 바군.”
“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조니를 뒤로 한 채 인피 면구를 얼굴에 뒤집어 쓰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인피 면구를 착용하시겠습니까? Y/N]
예쓰를 선택하자 인피 면구가 내 얼굴을 꽉 하고 조이는 느낌이 든다. 어느 정도 느낌이 사라진 후 얼굴을 만지자 조금은 둔감한 촉감이 느껴졌다.
“여기…….”
조니가 거울을 내밀었다. 전혀 낯선 갈색 수염의 사내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
“감쪽같네.”
“오천 골드짜리인데 그 정도는 되어야죠.”
“그것도 그렇군.”
이 위장 신분을 사는 데 돈을 너무 많이 써서 누나한테 들켰다. 치나 제국에 가면 본전을 뽑아야지.
* * *
비가 와 엉망이 된 가도를 한 남자가 걷고 있다. 장화는 이미 너덜너덜해진 지 오래고 진흙으로 누더기가 된 로브를 걸친 사내의 허리춤에 걸린 원핸드 해머는 사내가 걸을 때마다 덜그럭거리며 흔들린다.
“후우…….”
머리에 쓰고 있던 로브를 벗겨 내자 갈색 머리카락의 얼굴이 드러났다. 부리부리한 눈에 덥수룩한 수염의 사내가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주위를 훑어보더니 가방에서 지도를 꺼내 이리저리 돌려본다.
“씨발, 대체 여기가 어디야.”
비밀리에 국경을 넘은 것까지는 좋았다. 다른 거 볼 필요 없이 쭉 직진하면 되었으니까. 간간이 길을 찾기 힘들면 주변에 돌아다니는 길 잘 아는 NPC들을 붙잡아 족치는 것으로 길을 잡았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작은 실수가 있었으니 세이온은 원체 더럽게 넓어서 지금처럼 하루 종일 걸어도 사람 하나 만나기 힘든 때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참 지도를 돌리며 방향을 찾고 있는데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크라라락!
크앙!
털 하나 없는 몸뚱이에 대형견 두 배 정도 크기의 몬스터 10마리가 앞을 가로막았다. 저글랑이라는 몬스터인데 워낙 속도가 빨라서 말을 타고 도망쳐도 소용 없다고 알려졌다.
“치나 제국 새끼들은 진짜 가도를 어떻게 관리하기에…….”
몬스터를 발견한 케이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가도라는 건 일반 NPC도 이용하는 것이기에 항상 레인저들이 돌아다니며 몬스터 청소를 해야 한다. 그러라고 영주한테 세금을 내는 거니까. 그런데 이 동네 영주들은 마인드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가도에는 사람보다 몬스터가 더 많았다.
파파파팍!
커커컹!
케이는 간단히 몬스터를 퇴치한 후 다시금 가도를 걷기 시작했다.
지도에서 위치를 찾는 건 실패했지만 어차피 가도를 따라가다 보면 마을이든 영지든 나타나기 마련이니까.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다그닥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 보니 십여 기의 인마가 기도를 따라 달려오는데 너무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라 반가운 마음조차 들 지경이다. 복장을 보니 척 봐도 레인저들. 케이가 가도 가장자리로 비켜서자 잠시 후 레인저들이 그의 앞에 멈춰 섰다.
히히힝… 푸르륵
살짝 숙인 얼굴로 말의 후끈한 콧김이 느껴진다.
“어디서 온 뭐 하는 놈이냐!”
“D급 용병인 로헨이라고 합니다. 의뢰를 마치고 레우겐 마을에서 오는 길입니다.”
“레우겐? 설마 거기서 여기까지 혼자 온 것인가?”
“그렇습니다요, 나으리…….”
케이가 허리를 굽실거리며 대답했다. 단칼에 죽여 버릴 수 있지만, 이들에게서 정보를 뽑아내야 하니 일단은 수그리는 것이다. 의심받을 정황도 없으니 간단한 용병패 검사만 하면 완벽할 것. 그러나 이 레인저 놈들은 케이의 예상을 확연히 뛰어넘었다.
“의뢰를 마치고 오는 길이라… 그럼 주머니가 두둑하겠군.”
“예?”
“죽어라.”
챙!
레인저는 다짜고짜 검을 뽑아 케이의 목을 내리쳤다.
황당함에 공격을 막고 멍하니 서 있으니 뒤에 있던 레인저 놈들이 어느새 사방을 포위하고 서 있다.
“나으리, 이게 무슨…….”
“한 수가 있는 놈이군. 모두 공격!!”
“와아아아!”
챙! 채챙!
레인저들의 공격을 피하며 케이의 표정이 소태 씹은 표정이 되었다. 되도록 죽이고 싶지는 않다. 길을 물어야 하니까. 그런데 다짜고짜 공격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아, 씨발…….”
욕이 절로 나온다. 가도에는 몬스터가 가득하고 그 몬스터를 청소해야 할 레인저들은 사람을 털어먹기 바쁘다. 치나 제국… 중국 유저들에게 점령당했다더니 아주 그냥 자기 나라에서 하던 짓을 그대로 하고 있다.
“어쩔 수 없지.”
좀 더 강압적인 수단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케이가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원핸드 해머의 묵직한 무게가 손에 느껴진다. 특별히 손맛이 좋다고 하여 마련한 장비다.
“너희는 좀 맞자.”
* * *
“으, 으어어…….”
요리스 영지의 레인저인 장후안은 눈앞에 벌어진 참담한 광경에 연신 입을 뻐끔거렸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이런 것일까? 자신들은 단지 평소 하던 대로 길을 걷던 용병 나부랭이 하나를 털려 했을 뿐이었다. 보급이 끊긴 지 오래라 거의 관행처럼 하던 짓이다. 영지민이라면 대충 뇌물 조금 받고 끝내지만, 지금처럼 아예 처음 보는 놈은 털어 버린다. 어차피 뒷수습은 몬스터가 해 줄 테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지금은 그 반대의 상황이 된 것 같다. 고작 용병 나부랭이인 줄 알았는데 놈이 망치를 뽑아 든 순간 말과 사람이 하나가 되어 사방으로 날아갔다.
쿵쩍! 쿵쩍! 쿵쩍!
해머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무슨 떡메를 내리찍는 찰진 소리가 터졌다. 박살 나 흩어지는 동료들을 보며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도망치려 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의 애마 또한 대가리가 터져 주저 앉았다.
그리고 지금 그의 앞에는 이 일을 벌인 용병이 떡 하니 서 있다.
“야.”
“으… 응?”
“응?”
후우우…….
피가 뚝뚝 떨어지는 해머의 머리가 그의 턱을 지그시 눌러 왔다. 로브 사이로 보이는 놈의 눈이 퍼렇게 빛난다.
“예! 예! 나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