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그를 멈출 자는 없다
기습이라는 건 소수가 다수를 공격할 때 매우 유용한 전법이었다.
소수는 은밀의 이점까지 있기에 굳이 게임이 아니더라도 실제 역사의 전쟁에서도 툭하면 튀어나오는 게 전법이다. 그렇기에 누알라는 로헨이 이 기습의 전법을 사용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몰래 잠입하여 내성을 뚫은 후 천산대가 입구를 점거하여 NPC 병사들을 막는 사이 가장 강력한 로헨이 길드를 최대한 빠르게 정리한 후 합류하여 병사들을 처리하는 것이다.
간단하지만 오히려 간단하기에 믿을 만한 계획.
그러나 로헨이라는 남자는 그런 자신의 예상을 깡그리 부숴 버렸다.
“나 혼자 영지성으로 쳐들어가겠다.”
“예? 그렇지만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나요?”
“상관없다. 계획이 있으니까. 너희는 내가 영지성으로 쳐들어가며 주의를 끌면 곧장 작업장들로 가면 된다.”
무심이 말하던 로헨. 무슨 계획인지도 상세히 말해 주지 않았다.
하나 알 수 있는 건 그의 계획에서 자신들은 철저히 배제되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 보이는 광경이 그의 계획의 시작이었다. 멀리서 숨어 그 광경을 바라보는 누알라를 포함한 천산대 30인의 눈이 격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흔들렸다.
콰아아아아아앙!
요란한 폭음과 함께 높이 5미터 두께 30cm 미터는 될 법한 거대한 문이 박살이 났다.
영지의 안전을 책임지는 성문을 박살 냈다는 건 그 행위를 한 주체가 영지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습격이다!”
“적이다!”
성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안에서 달려나왔다. 영지민들은 보이지 않지만 덤비는 숫자는 십여 명이 넘는다. 나름 군사에 많은 투자를 했는지 붉은 누비 갑옷에 기다란 창을 앞세우고 돌격했지만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건 거대한 늑대인간 세 마리였다.
“모… 몬스터!”
거의 2.5m의 달하는 키에 어깨가 떡 벌어진 근육질의 늑대인간인데 웬만한 유저 빰치도록 튼실한 갑옷을 걸치고 있다.
“크르르르!”
“크앙!”
콰앙!
백구, 황구, 흑구가 병사들을 향해 곧바로 땅을 박찼다. 잔상이 일어날 정도로 엄청난 돌격!
셋의 손에 길이 30cm가량의 기다란 손톱이 번쩍하고 빛났다. 그리고.
쫘아아악! 쫘아악! 쫙!
수십 덩어리로 변해 버린 병사들이 주위로 터져 나갔다.
“으어어!”
공포에 질린 병사들과 NPC 영지민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압도적인 모습이라 전의를 상실해 버린 것! 거의 30cm에 달하는 늑대인간들의 손톱에는 피 한 방울 묻어나지 않았다. 절대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도망쳐!”
댕댕댕댕!
외성의 경계탑에 달린 비상종이 요란하게 울렸다. 성안의 모든 병력들을 불러 모으는 소리.
그의 말대로 주의는 확실히 끌었다.
“대장, 이대로 움직이면 되는 겁니까?”
“어쩔 수 없잖아. 말은 안 하지만 우릴 못 믿는 거겠지.”
딱딱한 표정의 누알라가 부하의 물음에 답했다. 케이에게 지나칠 정도로 저자세를 취하며 굽실거리던 그녀였지만 지금 그녀의 분위기는 한겨울 벌판보다 차가웠다. 그러나 그녀 주변에 있는 천산대는 그런 그녀의 분위기를 전혀 어색해하지 않았다. 이것이 천산대의 대장인 누알라의 본 모습이기 때문이다.
‘천산신녀’라는 이명을 지닌 위구르 자유 연합을 대표하는 네임드가 바로 그녀였다.
“후, 다 떠나서 정말 대단하군요. 대한민국의 네임드라는 건… 저라면 저런 미친 짓은 절대 못 할 텐데.”
“아니, 내가 아는 정보가 맞다면 저건 미친 짓 축에도 끼지 못해.”
“그 정도입니까?”
“그래. 그리고 보통의 네임드도 아냐.”
한국 유저들은 타국의 유저들에 비해 게임 내에서 실전 전투력이 약 1.5배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었다. 누구의 말마따나 혈통으로 내려오는 종특인 건지 아니면 잘하는 사람만 게임을 하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거의 대부분 전문가가 인정하는 일반적인 평가다. 마치 흑인들이 좀 더 강하고 탄력 있는 근육을 가지고 있어 모든 스포츠에 우위를 보이는 것처럼 한국 유저들은 가상 현실 게임에 강점을 지닌다.
그리고 그 평가는 최상위의 랭커들 사이에서도 비슷하게 평가되었는데 주위에 치나 제국이라는 초강대국을 두고 있음에도 전혀 밀리지 않는 건 그런 실전 전투력의 우위 때문이었다.
물론 학살공주는 워낙 논의의 존재라 친다지만 그녀가 알기로 타국의 네임드들보다 한국의 네임드들이 더 강했다. 그러나 그녀가 오늘 본 저 남자는 그런 네임드들조차도 명함을 내밀지 못할 지경이다.
‘케이.’
누알라는 자신이 그의 정체를 안다는 것을 숨겼다.
본래대로라면 몇 가지 절차를 거쳐 그를 검증해야 했다. 위구르 자유 연합에 접근하기 위해 광전총국에서 비밀리에 접근시킨 것일 수도 있기 때문. 실제로 그런 시도는 꾸준히 있어 왔고 그를 검증하기 위해 강자들을 전문적으로 상대하는 천산대가 동원되었다. 그러나 그가 보여 준 짧지만 강렬한 무위는 그런 절차를 모두 무시하게 만들었다.
상대는 적으로 돌아섰을 때 도저히 계산이 나오지 않는 괴물이었으니까.
설상가상으로 괜히 검증한다고 수작을 부리다가 미운털만 박혀 버렸다.
좋은 인상을 남겨 포섭한 후 든든한 아군으로 삼을 수도 있었는데 물 건너가 버린 것.
그 증거는 직접 공격에서 자신들이 완전히 배제된 것이다. 자신들을 믿을 수 없다는 노골적인 계획이다. 물론 실제 이유는 업적 달성을 위해 킬카운터를 채워야 하는 상황에서 먹잇감들을 양보할 생각이 없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설명할 이유가 없기에 상당히 오해해 버린 상황이었다. 어찌 되었건 그가 정문을 박살 냈으니 자신들은 본래 계획대로 움직이면 될 뿐이다.
“타 영지에서 지원이 오는 데 얼마나 걸리지?”
“언제 지원요청을 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략 여섯 시간 정도 후부터입니다.”
“음, 저런 기만전술이라면 지원 요청이 더 늦어지겠지. 좋아. 우리도 움직인다.”
“예!”
타 영지. 아니, 정확히 말해 광전총국으로부터 지원 병력이 도착하기 전까지 영지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작업장들 부지런히 돌아야 한다.
“제발 그때까지 버텨 주길…….”
* * *
“난 가 볼 테니까 셋이 신나게 날뛰어 봐.”
“컹컹!”
“크르릉!”
전투 은신을 한 내게 백구, 흑구, 황구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크릉크릉!”
“크르릉!”
셋이 서로 마주 보며 으르렁거리는데 무슨 작전 계획이라도 세우는 거 같다. 소환 스킬이 MAX를 찍으며 AI도 향상되었는지 입에 개언어 번역기라도 하나 물려주면 진짜 말도 할 기세다. 기다란 갈기를 멋들어지게 휘날리는 얘들을 여기에 박아두는 게 얼핏 보면 참 무책임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친위대 소환 [MAX레벨] 필요 마나 300
-소환자의 레벨과 1/3에 해당하는 능력치를 지닌 고대의 늑대인간 3마리를 소환한다.
-소환된 고대의 늑대인간에게 장비를 착용시키고 소환자를 위해 싸우게 할 수 있습니다.
-소환된 고대의 늑대인간에 장착한 장비는 영구 귀속되며 교체 시 기존의 장비는 소멸됩니다.
-생명력이 0이 될 시 역소환되며 쿨타임 24시간 후 재소환할 수 있습니다.
7레벨에 놀에서 늑대인간이 되더니 MAX 레벨인 10레벨이 되자 고대의 늑대인간으로 이름이 바뀌며 본디 1/5에 해당하는 능력치가 1/3으로 격상되었다. 한마디로 셋이 내가 지닌 능력치의 1/3을 계승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실제로 꺼내 보니 셋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다.
단순히 덩치만 커진 것이 아니다. 서늘하게 빛나는 저 손톱들은 척 봐도 전설급에 버금가는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눈빛에서 줄기줄기 흘러나오는 오러는 웬만한 레이드 보스 뺨을 왕복으로 후려치며 놀 것처럼 보인다. 이런 곳에 굳이 내가 끼어 있을 필요가 있을까.
“여기서 사이좋게 놀아.”
“커컹!”
타탁!
셋의 대답을 뒤로한 채 땅을 박차 근처의 지붕으로 올라선 난 본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셋이 죽인 것도 내게 킬카운트가 되는 마당에 쟤들하고 어울려 봤자 무력 과잉 현상만 두드러질 뿐. 뭐 솔직히 말해서 쟤들이랑 킬카운터 내기해서 이길 자신이 없기도 하고. 흠흠…….
“와아아아!”
경계탑의 비상종 소리에 영지민과 병사들이 사방에서 몰려든다. 구씨 삼형제도 가지고 놀 것들이 필요하겠기에 무시하고 성을 향해 달린다.
두두두두!
기사 셋이 말에 탄 채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다. 번쩍번쩍한 갑옷을 입은 척 봐도 장비에 투자 좀 한 유저 기사들이다.
“다 합치면 일만 골드는 가뿐히 넘겠네. 저건 못 참지.”
이제 눈으로 대충 훑어도 상대의 장비 견적이 나온다.
자주 대량 학살을 벌인 내 경험에서 볼 때 저런 애들은 죽인 자리에서 바로 루팅 해 주는 게 좋았다. 나중에 하면 되겠지 하고 넘기면 나중에 시체 찾느라 고달파진다. 난도질을 해 놓으면 더 힘들지!
팟!
산들바람걷기로 기척을 숨긴 채 녀석들의 위로 뛰어내린 난 +10 듀렌달로 셋의 머리를 일격에 베어 버렸다. 너무나도 어이없는 죽음이라고? 너희 +10 듀렌달 무시하심? 이거 이래 봬도 전설급에 풀강 된 양손검이다. 온갖 업적들로 펌핑된 것도 모자라 최근에 얻은 치나 제국 특화 업적에 기습 효과 + 치명타가 합쳐지면 상대가 아무리 전설급 장비로 몸을 꽁꽁 싸맸더라도 이런 짓이 가능하다.
“깔끔……!”
빙글빙글 날아오른 머리가 사이좋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10점 만점에 10점. 누나가 좋아하겠… 젠장…….”
괜한 드잡이질로 장비의 내구도가 깎이면 수리하느라 돈 많이 든다. 전에는 이런 거 신경 안 쓰고 살았는데 돈에 민감한 누나에게 상시로 금전 감각을 교육받다 보니까 저절로 그런 것을 염두에 두게 되었다. 누나가 잘했다며 엄지손가락을 드는 환영이 머릿속을 스친다.
“썩 유쾌하지는 않네.”
이것이 바깥에서 돈 벌어오는 가장의 기분일까. 게임상에서 결혼한 상태고 실제로 내 살림살이 대부분을 누나가 책임지고 있기에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고작 20살도 안된 내가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한다는 건 그다지 좋지 않다.
“적이다!”
파파파팍!
공격을 하며 전투은신이 풀리자 나를 발견한 병사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더러워진 기분은 너희들로 풀어야겠다. 다 덤벼!
* * *
길드마스터 집무실에서 한참 취미생활을 즐기던 레드드래곤은 집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부하의 외침에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채찍을 멈췄고 벽에 전신을 결박당해 있던 피투성이가 된 여인이 몸을 늘어뜨렸다.
“이 새끼야! 내가 막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
취미 생활을 방해받은 래드드래곤이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가뜩이나 저번 달에 감사관에게 이 비밀스러운 취미를 들켜서 추궁과 함께 3개월의 감봉을 당했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NPC 여자에 비해 훨씬 생동감 있게 펄떡거리고 쉽게 죽지도 않은 이것들을 고문하는 건 정말 중독적이었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걸 빼돌려 신나게 고문한 후 즐거운 짓을 할 생각에 들떠 있던 그가 부하의 난입에 분노를 참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 그러나 곧 부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그는 들고 있던 채찍을 떨어뜨렸다.
“큰일 났습니다! 왠 괴물 딱지들이 나타나 병사와 기사들을 학살하고 있습니다!”
“뭐?! 피해 상황은?”
“영지 병력의 반이 전멸했고 지금도 실시간으로 학살당하고 있습니다. 마스터! 어서 빨리 상부에 이 사실을 알리고 영지동원령을 선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