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보스 스킬 쓴다-131화 (131/154)

131. 그가 왔다

창문 안으로 들어가니 긴 복도가 나왔다.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처리하며 복도 끝 코너를 돌자 장정 100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도 남을 정도의 커다란 홀이 눈에 들어왔는데 홀 중앙에 선 네 명의 남녀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중앙에 서 있던 리더로 보이는 화려한 중장갑의 사내가 턱짓을 하며 말했다.

“늦었군. 버러지.”

왜 버러지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중장갑의 사내의 오른쪽에 서 있던 헐벗은 차림의 여자가 입을 열었다. 으음, 저런 걸 언더붑 비키니라고 하던가.

“어리석은 놈! 이곳이 네 무덤이다.”

“…….”

무덤으로 만들어 줄 자리에 수영복은 좀 너무한 거 아니냐고 한마디 싶은데 이번에는 중장갑 사내의 왼쪽에 서 있는 활을 든 가슴만 큰 꼬맹이가 또다시 내 말을 끊었다.

“레드 드래곤을 수호하는 우리 사황에게 걸린 것은 당신의 실수야!”

브이자를 볼에 대며 윙크를 했다.

“…….”

“크하하! 나 순황 단천이 네놈을 단숨에 묵사발을 커억!”

삐이이이이익!

넷 중 가장 덩치가 커서 포즈 상 뒤에 밀려 있던 순황 단천이라는 놈이 자신의 차례라는 듯 껄껄 웃으며 입을 열려 했지만, 그 전에 내 데스레이가 녀석의 목젖에 바람구멍을 만들어 줬다.

“크헉… 왜 나만…….”

“이유는…….”

쓸데없이 시간만 축내는 녀석들의 등장 신의 약속의 언어 따위를 신경 써 주기에는 내 감성은 메마르디메마른 사막과 같다. 물론 그 이유가 다는 아니지만.

“감히! 데들리 스트라이크 챠지!”

츠츠츠츠츠츠츳!

가슴 큰 꼬맹이가 활의 시위를 당기자 검은 오러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온다. 대인 전용 챠지 계열의 원거리 저격 스킬! 나름 칭찬해 줄만한 반응 속도기는 하지만…….

“너희는 시작부터 글러 먹었다는 거지.”

애초에 탱커이면서 가장 덩치 큰 놈을 후방에 둔 것 자체가 넌센스다. 나를 조금이라도 아는 한국 쪽 유저들이라면 저렇게 뭉쳐서 헛소리 지껄일 시간에 탱커를 앞세우고 내 발부터 묶으려고 온갖 저주를 퍼붓고 있었겠지만, 저것들은 적을 대하는 기본이 안 됐다.

‘광역 매혹.’

“큭……!”

“으윽!”

셋의 몸이 순간 움찔하고 떨렸다. 광역 매혹이 20%의 낮은 확률을 지닌 스킬이지만, 이 스킬의 진짜 좋은 점은 실패하더라도 아주 찰나의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특히 의지 관련 능력치로 공격 속성의 저항 굴림이 들어가는데 타인보다 월등히 높은 의지 능력치에 치나 제국 것들에게 증폭 데미지를 먹이는 업적을 지닌 나에게는 믿고 쓸 수 있는 광역 CC기가 된다.

더군다나 고수의 싸움에서는 잠깐의 움찔거림도 대참사가 벌어질 수 있다는 소리.

쫘아아아아악!

빠르게 접근하며 뽑은 빙룡도가 가슴만 큰 꼬맹이의 활과 가슴을 통째로 베고 지나갔다. 미친 중국 갑부가 술에 꼴아서 만들어 냈다는 전설을 지닌 희대의 괴물 신화급의 +5 빙룡도의 깡뎀은 하급 신화급 이하는 대부분 공평하게 한 방으로 박살 내 버린다.

“꺄악!”

상반신이 반 토막이 난 꼬맹이의 어깨를 붙잡고 빙글 돌았다.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방패이자 벽. 매번 써먹는 좋은 기술이었고 이에 대처하는 상대의 반응도 가지각색이다.

푸슉!

오러를 가득 품은 거검 한 자루가 꼬맹이의 가슴을 비집고 찔러 들어온다. 프랜드 쉴드에 흔들리지 않는, 열 중 한 명이 보일 법한 바람직한 대응! 칭찬해 주고 싶지만, 적으로 만난 몸. 난 거검의 끝에 빙룡도를 슬쩍 가져다 댔다.

[빙룡지력]

퍼어엉!

찔러오던 오러가 반사되며 그 중간에 걸려 있던 시체가 폭발했다.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사내. 흩어지는 육편 속으로 한줄기 채찍이 뱀처럼 내 머리를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헐벗은 여자의 요요하게 빛나는 눈빛이 그 너머에 있다.

“칭찬해 주지.”

붉은 입술 사이로 날름거리는 혀가 채찍의 손맛을 잔뜩 기대한 것처럼 보이지만 난 그 기대를 받아줄 생각이 없다.

산들바람 걷기로 그것을 흘리며 충격으로 물러나는 거검의 사내에게 우직하게 밀고 들어갔다.

“비겁한 놈! 낙월참도!”

거검의 끝을 하늘로 향한 채 땅을 박차며 밀고 들어오는 사내의 등 뒤로 만월이 그려졌다. 이펙트로 봐서는 최소 전설급 스킬! 공격은 그뿐만이 아니다.

“삼두교룡으로 갈기갈기 찢어 주마!”

파파! 팡!

헐벗은 여자의 오러를 머금은 세 줄기 채찍이 벼락처럼 쏘아져 들어왔다. 실로 손뼉을 칠만한 합공! 음… 나도 그에 걸맞은 걸 꺼내야겠네.

‘마나 컨퓨즈.’

화아악!

나를 중심으로 무형의 원이 퍼져 나갔고 남은 건 스킬이 취소된 여파로 비틀거리는 두 바보뿐이다.

“헉…….”

등 뒤의 만월이 사라지며 비틀하고 주저앉는 거검의 사내와 힘을 잃은 듯 바닥으로 떨어지는 채찍이 있다. 마나 컨퓨즈는 역시 전설급 이하 모든 스킬을 무효화시키는 사기 스킬이다. 음… 역시 이걸 키울 걸 그랬나. 그렇지만 마나 컨퓨즈는 너무 사기성이 짙어 전투의 맛이 떨어진다.

“무… 무슨…….”

“흐윽…….”

비틀거리는 둘이 의문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지만 내게 그 의문에 답해 줄 의무는 없다.

쫘아악! 쫙!

“컥!”

“커흑!”

숨통이 끊어진 시체 네 구가 바닥을 뒹굴었다.

기분 좋은 루팅의 시간이다.

* * *

-기, 길드마스터!

-나도 안다.”

분노에 찬 레드 드래곤이 이를 악물었다. 영주 권한 중에는 성내에서만 작동하는 미니맵 기능이 있었다.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헤븐즈게이트사의 기조와는 어울리지 않는 기능이지만, 혼자 힘으로 웬만한 길드와 견줄 수 있는 네임드들로 인한 영지의 피해가 만연해지자 생긴 기능이었다. 그리고 현재 미니맵에서 사황이 하나하나 사라지고 있었다. 길드창에도 사망 메시지가 주르륵 올라오고 있으니 숨길 수도 없다.

‘천황, 암황, 순황, 궁황.’

워낙에 지닌 바 능력이 뛰어나 길드마스터인 그의 명령도 잘 듣지 않는 사황이었다.

레드가드가 나타나기 전까지 시간을 끌라 했더니 자신들 선에서 처리하겠다며 의기양양하게 나서기에 믿었다. 어쩌면 넷이 놈을 죽일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말이다.

그들의 합공이라면 웬만한 네임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것을 아니까. 그런데 그들이 당했다. 그것도 단 2분 사이에 말이다.

“도대체 정체가 뭐냐.”

평범한 네임드 절대 아니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위기감이 등골을 타고 흐른다.

더 큰 문제는 이곳에 그만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내 말이 안 들리나? 현재 상황은?”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진 길드마스터홀 중앙에 선 붉은 후드를 눌러쓴 눈만을 드러낸 사내가 오만하게 말했다. 길드마스터홀에 있는 포탈에서 막 넘어온 레드가드 54번대의 대장이다. 경멸을 가득 담은 눈빛에 레드 드래곤이 서둘러 시선을 깔았다. 그의 등 뒤로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100명의 레드가드들. 작업장 관리나 하는 자신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지위의 이들이다. 개개인의 실력이야 자신과 엇비슷하겠지만 그들은 하나가 백이며 백이 하나인 광전총국 최정예 군대였다.

“놈이… 내성으로 침입했습니다..”

“그런가. 내성을 침략당했다라… 끝났군.”

“제 불찰입니다!”

사내의 말에 레드 드래곤은 허리가 부러지도록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눈앞의 남자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은 단숨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 훌륭한 직장은 물론이고 세이온에서 쌓은 힘 또한 모래성처럼 흩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를 내려다보는 사내의 눈은 싸늘하기만 했다.

“버러지 같은 놈들… 대중화민족의 첨병이 쫓기는 짐승으로 전락하다니…….”

퉁!

“컥!”

레드 드래곤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바닥에 나뒹굴었고 중국 랭킹 1,167위라고 말하기에는 어이없는 정도로 쓰레기처럼 구석에 처박혔다. 그리고 침묵.

“네놈에 대한 처분은 다녀와서 내리겠다. 레드가드 54번단.”

“예!”

처척! 척!

사내의 조용한 외침에 일백의 레드가드가 마치 한 몸처럼 차렷 자세를 취했다.

“가자!”

“예!”

척! 척! 척!

사내를 따라 일백의 레드가드가 길드마스터홀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그들의 기척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레드 드래곤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레드가드들이 사라진 곳을 노려봤다.

“빌어먹을 새끼들…….”

이 꼴이 날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되도록 저들의 손을 빌리지 않으려 했던 것이고…….

다행이라면 54번대의 대장이 여지를 줬다는 것이다. 그동안 빼돌린 대부분을 토해 내야 할 테지만 지금의 자리는 유지할 수 있으리라.

“후… 놈… 네가 어떻게 죽는지 지켜봐 주마.”

레드 드래곤은 미니맵을 활성화시켰다. 성의 내부가 활성화되면서 전진하고 있는 레드가드들이 보인다. 맞은편에서 접근해 오는 붉은 점.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보도임에도 방마다 샅샅이 훑으며 접근해 오는 모습에서 놈의 신중함이 느껴진다.

으득…….

“그러나 여기가 네 끝이다.”

자신이 수모를 당한 원흉을 바라보며 레드 드래곤이 이를 뿌득 갈았다.

이제 곧 레드가드와 놈이 조우한다. 그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대하고 있을 때였다.

띠띠띠-

“음?”

외부에서부터 연락이 들어왔다. 상대는 사황 중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천황.

-무슨 일이지?

-놈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믿도 끝도 없이 놈이라니. 그러나 이어진 천황의 말에 레드 드래곤은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카… 카타리나의 대참사를 일으킨 그 괴물 말입니다!

-뭐?

카타리나의 대참사. 최근 치나 제국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준 전쟁이었다.

무려 다섯 개 영지가 연합하여 침공했건만 그 대부분이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것도 모자라 그 시발점이 된 것이 단 일인으로 야기되었다는 것으로 한동안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었을 정도로 치욕적인 패배를 준 전쟁이었다.

그나마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국가간의 전쟁이 아닌 영지전으로 여론을 조작했지만, 실상을 아는 이들은 치나제국 전부가 수모를 당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그 대참사의 주인공이라니…….

-똑바로 말해 봐! 확실한 거야?

-확실합니다.

-근거는?

-그게… 암황과 궁황이 놈의 팬이라 놈에 대해서 아주 잘 안다고 하더군요. 얼굴만 다르지, 사용하는 장비와 스킬이 판박이랍니다.

-끙…….

아군이 치나 제국의 악몽 같은 놈의 팬이라는 것에 골이 지끈거렸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만 대 일의 신화를 쓴 괴물. 게다가 그 당시 그 전장에는 무려 일천의 레드가드가 있었다. 비록 또 다른 악몽인 학살공주가 그 대부분을 전멸시켰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놈이 괴물인 건 사실이다.

레드 드래곤은 서둘러 미니맵을 확인했다. 드디어 백여 개의 파란 점과 하나의 붉은 점이 만났다. 그리고…….

“헉……!”

백여 개의 점 중 서른 개가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졌다.

시스템에 버그라도 걸린 건가 하고 의심이 들 지경이지만 이어진 광경에 그는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스무 개가 동시에…….’

레드 가드는 동네 자경단 NPC 따위가 아니다. 정예 중에 정예. 그리고 그 정예 중에서 다시금 특출난 재능만을 엄격히 선별하여 국가 지원으로 키워 낸 이들이다. 그리고 지금 미니맵에서는 그들이 추수하듯 쓸려나가는 중이다.

“보… 본부에 지원요청을 해야 해.”

“예? 설마…….”

부하의 눈이 흔들린다. 본부에 지원 요청을 한다는 건 지부 수준이 아닌 현재 광전총국이 가용 가능한 모든 병력이 이곳으로 몰려온다는 소리였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일. 만약 상대가 싱겁게 끝난다면? 쓸데없는 지원을 요청한 길드마스터 이하 모든 길드원은 그 책임을 져야 한다.

“좀 더 신중히 생각을…….”

“닥쳐!”

정신이 반쯤 가출한 레드 드래곤이 광전총국의 비선(秘線)을 개방했다. 가급적 쓰지 않기를 바랐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본부의 직통 채널을 연결하지 못했다.

파팟!

그가 서 있는 광장 중앙의 포탈이 환하게 빛나며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무복에 검집 없는 검을 든 화려함이라고는 일절 보이지 않는 가무잡잡한 피부의 평범한 얼굴을 한 사내다. 사내는 한차례 주위를 쓸어보더니 이내 레드 드래곤을 발견하고는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헉!”

사내의 말에 레드 드래곤이 비선을 개방한 것조차 잊은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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