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보스 스킬 쓴다-135화 (135/154)

135. 제4의 벽을 관조하다

모든 준비가 끝난 다음 날 만반의 준비를 마친 난 푸른바람 엘프족이 사는 땅으로 향하는 포탈을 탔다.

“여긴 바뀐 게 없네.”

처음 왔을 때가 기억난다. 아직 세이온이 보여 주는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허우적거리던 초보 시절에 하늘로 꿰뚫을 듯 높이 솟은 대수림의 위용은 내게 큰 감동을 줬었다. 그러나 이제 나도 웬만큼 경험이 쌓인 터라 큰 감흥은 없다. 어쩌라고… 큰 나무면 그냥 큰 나무지. 흠흠……. 게다가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포탈에서 푸른바람 엘프들이 사는 곳으로 얼마나 걸었을까.

쉬이이익!

쉬익!

퍼억! 퍼퍽!

내 발 앞으로 두 발의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처음 오는 사람이라면 당황할 법도 하지만 난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이건 일종의 환영 인사 같은 거니까.

“얘들은 아직도 이러네.”

무슨 전통 국룰인지 그냥 와서 물어봐도 되는 걸 꼭 이렇게 활을 먼저 쏜다. 맞추지도 않을 거면서.

내가 고개를 들어 화살이 날아온 곳을 바라보자 얼마 되지 않아 앗 하는 소리와 함께 엘프들이 우르르 떨어져 내렸다. 근데 뭐가 이렇게 많아?

“진짜 케이 님이 오셨다!”

“케이 님!”

“어… 안녕.”

“꺄아아! 케이 님이다!”

찰랑거리는 파란 머리의 엘프 처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름은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얼굴이 낯익다. 예전에 그 웃기지도 않은 ‘엘프의 악몽’이라는 이명을 달고 베소 왕국 녀석들이랑 싸울 때랑 치나 제국에서 쳐들어왔을 때, 포디나 지원군으로 와 줬을 때 안면을 익혔다.

“웬일로 여기 다 모여 있었던 거야?”

“카렌 님이 전령을 보내셨어요. 케이 님이 방문할 거라고!”

“아하.”

내 딴에는 몰래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 나에 대한 정보가 포디나에 알려졌다 보다. 레인저 스트라이더인 카렌 씨는 푸른바람 엘프족과 연이 있으니 먼저 알렸을 법도 하고.

“케이 님! 우리 보고 싶으셨죠?”

“케이 님 가고서 너무 심심했어요!”

“케이 님! 케이 님! 우리 많이 보고 싶으셨죠?”

“꺄아아!”

과거 처음 만났을 때는 그렇게 경계를 하더니 이제는 너무 달라붙는다.

“케이 님!”

그리고 나를 애타게 부르는 또 하나의 목소리.

그녀의 이름은 바로 라리엘. 인간 남자에게 뒤통수를 맞아 몹쓸 짓을 당할 처지에서 구해줬더니 남자를 죽였다며 오히려 나를 미워했던 광년이 엘프. 웃기는 건 뭔 마음에 변화인지 나중에는 나를 껌딱지처럼 쫓아다니며 좋아한다고 고백하던 미저리. 그렇지만 미워할 수 없는 건 그 마음만은 모두 진심이었다는 것이다.

“으으음… 안녕.”

“보고 싶었어요!”

일단은 뭐 대충 장단은 맞춰 줘야지.

* * *

“그랬군.”

“네네. 괘씸하기는 하지만 장로회의 결정이니까요.”

나는 엘프들에게 안내를 받으며 그동안 푸른바람 엘프족에 있었던 일에 대해 들을 수 있었는데 일단 가장 큰 건 베소 왕국과 푸른바람 엘프족이 교류를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이전에 하던 꼬라지를 보면 어느 한쪽이 멸망하던 결판을 낼 거 같더니 어찌 화해한 모양이다.

그런데 그 속사정을 들어보면 또 이해가 가는 게 일단 베소 왕국 쪽에서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완전히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단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천황 길드가 완전히 와해되면서 그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있던 국왕까지 함께 허수아비가 되어 버렸고, 거기에 예전에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엘프족 장로의 딸과 왕자가 쿵짝쿵짝 하여 속도위반을 했는데 그 왕자가 국왕으로 등극을 하면서 장로의 딸이 왕비가 되어 버린 것.

결정적으로 엘프들과의 평화(로맨스)를 주장(원)하는 수많은 이(엘프씹덕)들이 소속된 길드를 초월한 대통합으로 평화회담을 이끌었단다.

현재는 베소 왕국과 푸른바람 엘프족이 제대로 된 교류를 시작했다는 것인데……. 뭐, 푸른바람 엘프족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이야기다. 폐쇄적인 입장만 고수하는 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봤으니까. 작은 문제라면 아무리 나라의 결정이라도 그게 유저들의 이 엘프 아가씨들이 베소 왕국의 인간 사내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보인다는 거고.

“난 장로회의 결정이든 뭐든 절대 싫어.”

“맞아. 맞아. 엘프 사냥꾼이니 뭐니 하면서 그동안 해 온 짓만 생각하면 절대 숲에 발을 못 들이게 해야 하는데.”

“저번에 어떤 놈이 자기한테 속옷 팔라고 했다니까?”

“어머? 너한테도? 나한테도 무슨 속옷 주는 퀘스트 없냐고 막 물어보던데.”

“정말 소름 끼치는 것들이야.”

“얼른 마을에서 쫓아냈으면 좋겠어.”

“맞아맞아.”

뭔가 같은 인간 남성이라는 입장에서 조금 두둔이라도 해 주고 싶지만 하는 짓을 들어보면 욕 먹어도 싸 보인다. 아니, 대체 게임 들어와서 NPC 속옷을 노리나. 엘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알레그로가 사는 마을에 들어섰다.

뾰로로롱.

가장 먼저 나를 반겨 준 건 정령들이었다. 바람의 정령들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고는 웃으며 도망치고 빛의 정령들이 반갑다고 내 주위를 맴돈다.

끼르륵! 끼륵!

정령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드니 거대한 나무의 가지 곳곳에 지어진 집들과 그 집들을 잇는 다리가 보인다. 난 마을 가장 꼭대기에 있는 알레그로의 집으로 향했다.

끼이익-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청량한 마나가 나를 감싼다.

마치 익숙하다는 듯 반기는 그 마나를 즐기고 있자니 정좌를 한 채 공중에 떠 있던 알레그로가 눈을 반개하며 나를 바라본다.

“왔느냐.”

“예.”

난 그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게임의 NPC에게 이런 말을 하면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는 내가 진정으로 존경하고 추종하는 스승이었다. 단순히 검이 빠르거나 힘이 강한 게 아니었다. 중국 애들이 사용하는 쓸데없는 초식이니 뭐니 같은 것도 아니다. 마치 자연의 한 부분인 것처럼 검이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속도가 빠른 것도 아닌데 그 검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의 검은 내 목 위에 걸쳐져 있었다.

“호오…….”

내 위아래를 살피던 알레그로의 눈과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녀석 강해졌구나.”

“음. 예. 많이 강해졌습니다.”

예전 그에게 두들겨 맞던 내가 아니다. 내 대답에 알레그로가 입을 삐죽였다.

“쯧쯔, 이럴 때는 겸손하게 아닙니다, 라고 하는 거다. 누가 스승인지 원……. 쯧쯔…….”

“제게 스승이라고 할 만한 분은 알레그로 님밖에 없는데요.”

“풋.”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자 알레그로가 실소를 터뜨리더니 이내 표정을 정리하고는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가르치기는 했으나 난 널 제자라 생각한 적 없다.”

“저는 스승이라고 할 만한 분이라고 했지 스승이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말솜씨만 좋아진 거 같구나.”

“어디 가서 뭐든 지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스승이라고 할 만한 분이…….”

“풋… 흠흠…….”

다시금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진정시킨 알레그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쉰 소리는 그만하고 무슨 일로 온 게냐.”

“이것 때문입니다.”

난 인벤토리에서 보라색의 신비한 빛을 뿜어내는 작은 돌 조각을 꺼내 알레그로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그 돌 조각을 본 순간 알레그로의 두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었다.

“이, 이건……!”

디링-

-레벨 60 이상 [달성]

-오러 능력치 200 [달성]

-푸른바람 일족 오러 연공술 10티어 [달성]

-산들바람 걷기 10티어 [달성]

-업적: [신화 등급] 폭풍 학살자 [습득]

-소드마스터 알레그로의 가르침- 현자의 돌 필요(1/1)

[멸신검의 최종 오의 ‘오러블레이드’를 얻기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파파팟!

알람음과 함께 내 손 위에 들려 있던 현자의 돌이 알레그로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난 현자의 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알레그로에게 말했다.

“멸신검의 최종 오의를 가르쳐 주십시오.”

* * *

“이 현자의 돌이 어떤 것인 줄 아느냐.”

“인과율에 연관되었다는 것 외에는 알지 못합니다.”

내 대답에 알레그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현자의 돌은 자신이 가진 바 카르마를 모두 포기하여 더 이상 이 세상의 인과율에 끼어들 수 없는 절대자들에게 잠시나마 그것에 끼어들 수 있도록 해 주는 물건이다.”

타탁.

알레그로가 바닥에 내려서더니 천천히 걸어가 문을 열어 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어쩌면 그에게는 수백 년을 봤을 수도 있는 그런 풍경이건만 알레그로의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수천 년이 지난 고목의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지듯.

“과거 난 검의 끝에 도달하고자 엘프로써의 모든 것을 버렸다. 사랑도… 미움도… 기쁨도… 고통도……. 모두 버렸다. 아니, 버렸다고 생각했지.”

위이이잉-

그의 손으로부터 푸른빛의 오러가 길게 뻗어 나왔다.

‘오러 블레이드.’

검사의 끝에 도달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궁극의 스킬.

그러나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건 오러 블레이드이되 오러 블레이드가 아니다.

위이이이이-

오러 블레이드가 서서히 커지더니 알레그로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를 감싼 오러 블레이드가 다시금 뭉치기 시작한다.

파팟! 파파파팟!

알레그로의 손에 푸른빛의 번개가 어리더니 어느 순간 회전하기 시작했다. 주위의 마나를 무지막지하게 빨아 들이던 그것은 마침내 하나의 완전한 검으로 변했다.

“난 신조차 베어 버릴 수 있는 그런 힘을 원했다. 자연을 사랑하는 조화의 종족인 엘프가 가져서는 안 될 그것을…….”

파파파팟!

“비우고 비워 그 모든 것을 버렸을 때 세상을 얻을 수 있다는 그 한마디에. 난 미쳐 있었다. 진정한 버린다는 것의 의미를 알았다면. 절대 선택하지 않았겠지.”

슈아아앙!

“이것이 내가 얻은 마지막이다.”

검을 손에 든 알레그로가 나를 돌아봤다. 이전의 그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지막지하고 강렬한 기파가 내 전부를 두들긴다. 마주 서 있는 것만으로 몸이 뒤흔들리고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이것이 진정 게임인가? 아니면 게임 속에서 진정한 끝을 본 절대자의 기도인가.

그의 모든 것이 나를 압박한다.

“으으음…….”

모든 것이 뒤흔들린다. 저절로 고개를 꺾이고 무릎이 굽혀진다.

이제야 알겠다. 알레그로를 처음 만났을 때 위화감의 정체를…….

낮은 곳에 사는 사람이 그 눈높이에 맞춰 주위를 볼 수 있는 것처럼 어느 정도 위에 올라서서야 알레그로가 가진 광활함이 눈에 들어왔다. 이전에 그는 정말 나를 봐주고 있었다.

한 달 가까이 칼을 맞대었지만 사실 그가 마음만 먹었으면 난 그의 단 일 검조차 감당하지 못했으리라.

이전에는 몰랐다. 그러나 이제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알레그로는… 소드마스터 따위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위에 서 있는 진정한 절대자다.

그리고 그런 그가 내게 말하고 있다.

“네가 얻으려는 건 단순히 게임의 스킬 따위가 아니란다. 케이.”

“에…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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