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알레그로의 소멸
“그리고 시간이 흘러 결국 전부 덧없는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지. 이 모든 것이 이 세이온 밖의 존재들에게는 유희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말이야.”
“…그걸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내 물음에 알레그로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느 날 GM이라는 놈이 찾아와 내게 경고했지. 좀 더 헤븐을 자극했다가는 단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고. 그가 나를 소멸시키지 않은 건 내가 가진 특이점 때문일 뿐 마음만 먹는다면 한순간 사라진다고. 믿고 싶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믿지 않을 수 없었지. 그의 힘을 알고 있었으니까.”
“…….”
뭔가가 목 안쪽에 걸려 답답하고, 간질간질하다.
NPC는 실체가 없다. 아무리 인간에 가까운 감정과 지능을 지녔다고 해도 냉정히 말해 데이터 덩어리일 뿐이다. 헤븐은 그야말로 세이온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존재. 내가 알기로 슈퍼양자컴퓨터인 헤븐은 헤븐즈게이트사조차도 쉽게 건드리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세이온이라는 게임 자체가 헤븐의 주도로 만들어진 사이버 지구였기에 마음만 먹으면 모조리 밀어버리고 구석기 시대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유저들은 다 떨어져 나가고 게임사는 천문학적인 피해배상이 걸린 소송에 휘말리겠지만……. 아무튼 그가 그것까지 알았다면 결말이 이리 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자네 같은 유저에게는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칼을 완성했으나 휘두를 수 없다는 뜻이었어.”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갈아 온 무기를 휘두를 기회조차 없다는 그의 말에 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웃기게도 난 그에게 어떤 위로도 할 처지가 아니다.
‘난 유저니까.’
지금도 내 마음 한구석에는 그가 NPC라는 관념이 깊게 뿌리박혀 있다. 세이온이라는 게임에서 벗어나면 한낱 허깨비로 치부할 수도 있는 그런 존재라는 뜻. 물론 사람 중에는 게임에 완전히 몰입하여 현실에서의 가정을 버리고 NPC를 선택한다든가 사랑하던 NPC가 죽은 것에 비관하여 자살을 선택하는 일이 가끔 인터넷 기사에 뜨기는 하지만 난 그 정도로 몰입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역할극이라는 게임에서 벗어난 유저와 NPC와의 거리다.
그렇기에 한편으로는 참 미안하다. 난 이 세이온이라는 게임을 창조한 이들과 같은 인간이었으니까. 우리에게는 그냥 신기하네 하고 지나칠 일도 이들에게는 뼈에 사무쳐 수만 년을 기억하는 일이 될 수 있음을 이제야 알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우우우우…….
다음 순간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마치 전원을 내린 것처럼 완전히 검게 변해 버린 시야로 인해 머릿속이 당황으로 가득 차 버렸을 때 알레그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기에 이제 자네에게 내 모든 것을 넘기려 하네.”
“예?”
“미안하네.”
우우우우…….
[고대 엘프제국 인데그라시아의 전승의 법술이 시작됩니다.]
지이이잉!
낮게 울리던 진동이 점차 강해지더니 알레그로의 작은 방에 여섯 가지 색의 크고 작은 도형들이 나타나 거미줄처럼 얽히기 시작했다.
“윽…….”
움직일 수가 없다. 전신을 거대한 압력이 옥죄어 오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눈앞의 알레그로를 노려보는 것뿐이다.
“이, 이게 뭡니까!”
“이것은 고대의 엘프제국 인데그라시아의 황실 비전으로, 제국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단 일인의 초인을 만들기 위한 비술일세. 자네에게 해될 것 없으니 저항하지 말게.”
해가 되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비술을 왜 제게……!”
“말하지 않았나. NPC로는 놈을 공격할 수 없다고. 그러니 공격할 수 있는 이에게 건네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저는 세이온을 부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나도 자네에게 그것을 강요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네.”
“그럼 어째서…….”
“하하, 그건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 보게. 아무튼 입을 다무는 게 좋을 거야. 비술이 실패한다면 자네의 아바타가 죽는 것에서 끝나지 않을 비술이니…….”
“끙…….”
초탈한 듯 얄밉게 웃는 알레그로의 면상을 한 대 때려 주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게다가 비술을 시행하는 그의 눈빛이 뭔가 아련하기도 하고.
강제 종료라는 방법도 있지만 해 봤자 아바타는 이곳에 남기에 차라리 비술에 협조하는 게 더 나으리라는 판단에 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잘 생각했네. 엘크세지… 티르라굴… 아크프로오노… 가베릭…….”
츠츠츳…….
비술이 진행됨에 따라 빛은 더욱 강렬해졌고, 알레그로의 얼굴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윽고 나를 중심으로 한 거대한 양팔 저울이 나타났다.
[인과율의 천추로 인하여 사방 10m가 재설정 지역으로 변합니다.]
“니아드… 카룸… 르이프 스팅그…….”
알레그로의 손에 쥐어져 있던 현자의 돌이 양팔 저울의 한쪽 접시에 놓이자 저울이 현자의 돌쪽으로 쿵 하고 기울어졌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친다. 현자의 돌이 저울의 한쪽을 차지했다. 그 말은 다른 한쪽에 뭔가가 놓여야 한다는 것이고 지금까지 알레그로가 한 말을 미루어보아 그것은…….
“멈추세요!”
“니아드… 나카룸… 르이프 스팅그 알레그로 론 인데그라시아…….”
알레그로의 몸에서 투명한 기운이 피어올라 현자의 돌의 반대편 저울접시에 뭉치는가 싶더니 이내 저울의 팔을 타고 나를 향해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반대편의 현자의 돌에서도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와 내게 흘러 들어온다. 그리고 눈앞에 메시지가 연이어 떠올랐다.
[제국 비술 ‘용사의 계승’이 시작됩니다.]
[계승자 케이 아이언우드]
-계승자의 격이 현격히 낮아 계승의 효율이 제한됩니다.
-계승을 시작합니다.
-경험치의 계승이 시작됩니다.
-1%… 3%… 11%…….
스킬 경험치의 계승이 시작됩니다.
-1%… 2%… 5%…….
이런 것도 가능한가에 대한 궁금증을 떠나 어서 빨리 이 비술을 멈추고 싶다.
“제길…….”
처음 퀘스트를 받을 때는 이전에 가르침을 받을 때처럼 그에게 훈련받아 오러 블레이드를 개화하게 될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알레그로가 하는 것은 그런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내 외침에 알레그로가 희미하게 웃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그 웃음이 불길하게 다가온다.
“사실 이제는 복수하고자 하는 의지조차도 흐릿해져 버렸네. 바라는 건 저들에게 휘둘리는 이 삶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것인데 참오(懺悟)해 보니 결국에 그것은 내가 가진 힘 때문이더군. 그러니 닥치고 받기나 하게.”
“그 대상이 왜 나냐는 겁니다!”
“하하. 자네 멸신검의 진정한 오의를 얻으러 온 거 아니었나?”
“그… 그건…….”
“닥치고 받아라.”
그의 몸에서 뽑혀 나오는 투명한 기운이 더 거세어졌다.
“아나크. 니아 둠… 라간가… 끄으으…….”
뽑혀 나오는 투명한 기운이 강해질수록 알레그로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고, 종국에는 한 줄기 피가 주르륵 흘렀다. 명백히 그의 생명력을 소모하고 있는 것.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비술을 외우는 목소리가 더욱 커졌고 그때마다 투명한 기운은 폭발하듯 뿜어져 저울의 반대편에 쌓여 내게 흘러 들어왔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끼이익…….
현자의 돌이 담겨 있던 저울접시가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작아진 현자의 돌이지만 가진 바 인과율의 한계에 수렴하는 알레그로의 힘이 반대편에 충분히 쌓인 것. 그리고 그 저울의 중심이 온전한 평행을 이룰 때 비술이 끝나는 것 같다.
“후…….”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술을 진행하는 알레그로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파랗게 물들어 가는 중이었으니까.
내 허락도 없이 이런 짓을 하는 것이 정말 싫었지만, 그런 것으로 알레그로를 미워하기에 난 그를 더 좋아하고 또 배우고 싶은 것도 많다.
그러나… 알레그로의 생각은 나와는 다른 모양이다.
“니아세 르이… 크흑… 카룸… 반… 쿨럭…….”
츠츠츠츳…….
알레그로의 몸으로부터 뿜어지던 투명한 기운이 하얀색으로 변했다.
그 기운은 저울 전체를 감싸더니 이제는 거의 다 사라진 현자의 돌이 있던 저울접시가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고 알레그로는 연신 피를 토하면서도 주문을 멈추지 않았다.
[경험치 계승]
81%… 86%… 92%…….
[스킬 경험치 계승]
89%… 92%… 95%…….
[‘용사의 계승’이 완료되었습니다.]
[모든 경험치와 스킬 경험치의 계승이 완료되었습니다.]
[29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한계 레벨에 도달하였습니다.]
[미사용된 경험치 214,182,091이 남았습니다.]
[모든 보유 스킬들의 스킬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푸른바람 일족 연공술]이 더 나은 스킬로 진화합니다.]
[[푸른 폭풍 연공술][전설]을 습득하였습니다.]
[[푸른 폭풍 연공술]의 스킬 경험치가 [MAX]에 도달하였습니다.]
[[산들바람 걷기]가 더 나은 스킬로 진화합니다.]
[[폭풍 걷기][전설]을 습득합니다.]
[[폭풍 걷기]의 스킬 경험치가 [MAX]에 도달했습니다.]
-스킬이터의 스킬 경험치가 [MAX]에 도달하였습니다.
-보유한 모든 스킬 사용 시 레벨+5 가 상승합니다.
[[멸신검] 스킬이 진(眞) 멸신검으로 진화합니다.]
-멸신의 오러: 베어 내는 모든 것의 근원을 소멸시킵니다.
-공격 속도 300%상승
-반응 속도 300%상승
-오러 블레이드 사용 가능
-사용 시 10초당 오러 1 소모합니다.
-직업이 [기사][레인저]에서 [고대 용사]로 변합니다.
[기사의 직업 스킬이 삭제됩니다.]
[레인저의 직업 스킬이 삭제됩니다.]
-고대 용사의 직업 스킬 [불굴의 가호]를 획득하였습니다.
[용사 직업 스킬] [불굴의 가호] [신화 등급] [패시브]
-오러 능력치가 100 상승합니다.
-의지 능력치가 100 상승합니다.
-모든 공격에 100% 저항합니다.
-모든 재생력이 100% 상승합니다.
[업적] [전설의 용사]를 획득하였습니다.
-신화 이상의 무기 착용 시 공격력 100% 상승
-신화 이상의 방어구 착용 시 방어력 100% 상승
-용사의 명예 점수가 +일 경우 하루 한 번 완전 회복 사용 가능
-용사의 명예 점수가 –일 경우 하루 한 번 멸망의 저주 사용 가능
“으아아!”
엄청난 메시지들이 눈앞을 가득 매웠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 건 알레그로가 내게 모든 것을 넘겨줬다는 것이다.
“안 돼!”
알레그로의 몸이 회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풍경화에 흑백의 블러를 끼운 것처럼 색을 잃어 간다. 그리고 이제는 알 것 같다. 알레그로가 원하는 것이 뭔지…….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게 넘기고 이 세계에서 영원히 퇴장하려는 것이다.
“후후, 지금의 무력함을 거름 삼아 넌 나처럼 후회하지 말거라.”
알레그로가 손을 까딱이며 말했다. 얼굴 가득 쓴웃음을 지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