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보스 스킬 쓴다-143화 (143/154)

143. 함정은 감사합니다

-정말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고작 10명의 사용자로 학살공주를 궁지에 몰아넣다니… 중국의 저력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호호, 과찬입니다.”

-현재 달의 눈을 모두 잃은 학살공주 세스를 따라 고구려, 마스터즈, 군황 길드를 포함한 일만의 추격대가 그녀를 뒤쫓고 있소. 문제가 없다면 반나절 후면 약속한 붉은 오아시스로 돌입할 거요.

“알겠습니다. 저희 레드가드와 21개 길드의 5만 유저가 붉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천라지망을 펼칠 테니 학살공주를 잡는 건 시간문제일 겁니다.”

-약속한 것을 잊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갈미 님.

“당연하죠, 마인드스톰 님. 그럼 이만…….”

통화를 끝낸, 쥐색의 제복에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올백으로 붙여 단 한 점의 흐트러짐조차 보이지 않는 날렵한 인상의 미녀가 입을 열었다.

“이 세이온에 우리 천인 계획의 위대한 첫걸음이 실현되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그녀의 말에 온몸을 검은 천으로 휘감은 채 그의 앞에 부복해 있던 10인의 남녀가 고개를 숙였다.

“이 모든 것이 제갈미 님의 업적입니다.”

“맞습니다. 학살공주는 제갈미 님의 작품인 천인 10명도 이겨 내지 못했습니다.”

“10인의 천인으로 학살공주라는 허명이 벗겨졌으니 이미 준비된 일백의 천인이라면 저 소국을 쓸어버리는 것도 부족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굳이 한국의 개척단 우두머리들과 타협할 필요 없이 한꺼번에 무너뜨려도 됐을 겁니다, 태상 무극 님.”

저마다 제갈미라 불린 여인을 금칠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만족스럽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던 그녀는, 한국과 일본의 개척단 우두머리라는 소리가 나온 순간 서릿발 날리는 준엄한 표정으로, 방금 말을 뱉은 남자를 노려보았다

“우리의 적이 학살공주 하나가 아님을 잘 알고 있을 터인데 생각이 있는 건가요?”

“죄, 죄송합니다!”

태상 무극의 말에 허리가 부러지도록 고개를 처박은 남자가 몸을 벌벌 떨자 그 모습을 벌레 보듯 바라보던 태상 무극이 입을 열었다.

“놈은 학살공주보다 위험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런 놈을 잡기 위해 우리가 만든 함정에서 한국의 개척단 우두머리들은 함정의 중추와도 같습니다. 어디 가서 그런 소리를 흘렸다가 일이 틀어진다면 지금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예!”

“목진극의 상태는 어떻지요?”

“광천제 목진극은 저번 놈과의 대결에서 패배 후 절치부심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중입니다.”

“후후, 기대되네요. 천인들 중 가장 강했던 1호가 어떻게 변신할지…….”

그때 그녀의 옆으로 그림자 하나가 내려섰다. 그녀의 호위인 흑영수라대의 우두머리다.

“제갈미 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좋아요. 그럼 제2계를 시작하세요.”

“예!”

“후후… 내 계획대로라면 놈은 분명히 옵니다. 그리고 우린 놈을 잡아 완전히 몰락시킬 겁니다.

* * *

학살공주의 구출 의뢰라니… 알레그로가 칼 휘두르다가 손 베였다는 말만큼이나 현실성 없는 말이다. 그녀가 누구던가. 세계 최강, PK 1위 1인 군단, 천이 넘는 레드가드를 단숨에 전멸시킨 유저 아니던가. 그런 그녀가 구출 의뢰를 했다?

“목표는 학살공주 세스를 구출함과 동시에 안전해질 때까지 호위하는 것. 의뢰비는 총 10억이야.”

“10억? 의뢰처가 어딘데?”

“학살공주가 데리고 다니는 친위대 달의 눈에서 의뢰했어.”

“와, 걔들 돈 많나 보네.”

후원으로 천만 원을 받아 보기도 했고 구독자들이 주는 백만 원이나 이백만 원짜리 미션도 많이 해 봤다. 그러나 학살공주 구출의 의뢰비는 내 상상을 초월했다. 10억은 절대 작은 돈이 아니었다. 평범한 서민이 1억을 벌기 위해서는 몇 년을 허리를 졸라매야 한다. 그리고 나 또한 게임을 하기 전에는 서민보다 바닥인 흙수저나 마찬가지였다.

“설명 좀 해 줘.”

“네가 게임 하는 동안 전부 정리해 놨으니 직접 읽어 보는 게 이해가 빠를 거야.”

누나도 내가 이해하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했나 보다.

누나가 건넨 태블릿에는 그 구출 의뢰와 관련된 이야기가 적혀 있었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현재 헤븐즈게이트사는 컨버젼스 데이라는 이름으로 동아시아와 유럽 대륙을 잇기 위해, 범국가적 개척단 캠페인을 퀘스트의 보상을 통해 밀고 있었다. 나 또한 예전에 성당에서 봤던 그 퀘스트로, 세이온이라는 게임 내 유저들이 하나로 이어지게 하겠다는 헤븐즈게이트사의 야망이 보이는 캠페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땅을 개척하며 다른 나라의 유저들을 만난다는 건 언뜻 보기에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로망으로 보이지만, 언제나 현실은 로망보다는 지저분한 이야기. 개척단 구성원의 절반 이상이 차이나와 러시아의 유저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머릿수에서 절대적으로 밀리다 보니 상대적으로 약소국인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군소 국가들의 유저들이 연합을 이루며 개척단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몇 달 전 한국 유저 측에 이름값으로는 세계 최강이라고 할 수 있는 학살공주가 합류하게 된다. 지금껏 무심했다가 갑자기 합류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이유가 분분했으나 확실한 것은 러시아와 차이나의 유저들이 아무리 쪽수가 많다지만 절대적 무력을 가진 네임드 중의 네임드인 학살공주에 비하면 아무래도 손색이 있었기에 무게 추는 급격히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군소 국가연합으로 기울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문제가 터졌다. 이전부터 학살공주에게 유감이 많았던 중국과 갑자기 끼어들어 자신들의 머리 위에 앉은 학살공주에 불만이 생긴 군소 국가 연합의 수뇌부들이 불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구원이 있던 중국은 돈만 주면 어디든 붙는 다수의 용병 연합으로 구성된 러시아 길드들을 끌어들여 학살공주를 잡기 위해 다분히 정치적인 합의를 통한 거대한 음모를 꾸민다.

그리고 그 음모에 휩쓸린 그녀는 지금 그녀는 큰 위기에 빠졌다.

그녀의 친위대인 달의 눈은 모두 사망했고 학살공주만이 간신히 몸을 뺀 상태이며, 동아시아의 개척단들은 ‘약탈자 1위인 학살공주’를 처단하여 질서를 어지럽히는 약탈자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겠다는 기치 아래 그녀를 쫓는 중이란다.

적힌 내용으로만 보자면 거의 동아시아 대륙의 모든 개척단 랭커들이 학살공주 하나를 몰락시키기 위해 움직인다는 소리.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들이 내민 명분에 난 코웃음을 쳤다.

학살공주가 PK 1위이기는 하지만 어디 약탈자가 그녀 하나뿐이던가? 오히려 거대 길드일수록 온갖 더러운 짓도 서슴없이 해 대는 걸 알고 있다. 겉으로는 깨끗한 척 공명정대한 척하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씨구나 하고 가면을 내려놓는 그들이다.

그리고 나 또한 많은 유저들을 베면서 실감했다. 강하면 강할수록 주위에 적이 많아지고 어쩔 수 없이 약탈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10억이나 하는 이유가 있었네.”

리스크가 큰 의뢰다. 아국을 대표하는 대한민국의 개척단과도 적이 될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난 학살공주 쪽으로 더 마음이 기울었다. 내 첫 후원자임과 동시에 누구도 날 위해 싸워 주지 않을 때 선뜻 나서서 싸워 준 사람이다. 개척단과 적이 되면? 부숴 버릴 뿐이다. 수백 수천 혹은 수만과 싸워야 한다고? 난 지금까지 싸울 때 적의 규모 같은 건 상관하지 않았다.

그때 내 눈치를 보던 혜미 누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의뢰 받을 생각이야?”

“어.”

“근데 개척단 연합에서도 의뢰가 왔어.”

“개척단에서?”

“응. 이번 일에 끼어들지 않으면 의뢰비 1억과 개척단의 지분 3%를 주고 개척단 위튜버들과의 콜라보를 추진해 준다고 하네. 그리고 만약 네가 끼어든다면 대한민국 모든 길드가 너를 무한 척살 한다고 알려 왔어.”

“에?”

누나의 말을 듣던 난 전혀 뜻밖의 제안에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누나.”

“응.”

“거기 개척단 녀석들이 혹시 전부 대가리가 텅텅 빈 머저리는 아니지?”

“절대 아니지.”

내 물음에 누나 또한 나와 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다는 건 역시…….

“덤비라는 거네?”

“응. 맞아.”

“흠…….”

누나 말대로 상대방은 바보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건 너무 노골적이다.

만약 저들이 약속한 대로 나를 적대시한다면 여론은 내게 호의적으로 흐를 것이다. 왜냐고? 개척단, 아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거대 길드들과 나 1인의 싸움이 될 테고 대중은 언더독과 소수를 더 응원하니까. 게다가 저들이 내세우는 명분도 완전 헛소리다.

학살공주가 PK 1위의 유저이긴 했지만 그만큼 인지도가 높은 대한민국의 간판 네임드였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처단한다고? 돌멩이 맞지 않으면 다행인 소리다. 마지막으로 저들이 내게 말한 불이익이라는 게 오히려 내 전투력에 불을 지르는 짓이라는 걸 나를 조금만 안다면 다 아는 사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의도한 거라면…….

“누나 생각은 어때?”

“이미 함정 다 파고 너한테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거지.”

“역시 그렇지. 너무 노골적이네.”

“응. 그래서 물어본 거야. 만약 개척단 전체가 적이라면 규모가 정말 엄청나거든.”

“얼만데?”

내 물음에 누나가 말없이 태블릿을 조작해서 내게 내밀었다.

“유저 숫자만 한국 7개 길드 16,104명, 일본 11개 길드 21,653명, 중국 28개 길드 128,592명… 다 합치면 166,349명. 거기에 NPC 까지 합치면 음…….”

“218,811명. 반만 덤벼도 십만이야.”

“많네.”

솔직히 너무 큰 단위라 얼마나 많은 건지 감이 잘 안 잡힌다.

현실에서라면 거의 국가 단위의 군대 아니던가.

“거기에 개척단은 최소 레벨이 50이야. 어지간한 랭커랑 고레벨들도 다 거기 몰려 있고…….”

50레벨이라면 기사급을 넘는 유저들이라는 소리다. NPC들도 비슷한 수준일 테니 22만 정도의 중수 이상의 유저들이 나를 공격할 수도 있다는 소리다. 보통의 경우라면 그냥 그 자리에 머리 박고 얌전히 버로우 타겠지만…….

“그거 정말 재미있겠네.”

난 왜 두려움보다 기분이 좋아지는 걸까?

의도한 거라면 정말 내 취향을 잘 분석하는 누군가가 있는 것 같다.

“누나.”

“어.”

전혀 놀랍지도 않다는 투로 대답한다.

“쟤들이 지금 가장 싫어할 행동이 뭘까?”

“가장 싫어할 행동?”

“응.”

“글쎄?”

뜻밖의 물음인지 누나가 이맛살을 찌푸린다. 그리고 잠시 후 누나가 말했다.

“일단 최대한 더럽고 질척이며 나가는 거지.”

“더럽고 질척인다구?”

“응. 더럽고 질척이는 거 네 스타일 아니잖아.”

“그렇지.”

난 화끈하게 밀고 들어가는 타입이다. 더럽고 질척인다니 벌써부터 거부감이 든다.

“이런 치졸한 수작 부리는 애들 보면 뒤에서 음모 꾸미고 상대가 자신이 생각한 대로 움직이다가 음모에 걸려드는 걸 보고 쾌락을 느끼거든.”

“그래?”

“응. 그런 애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목표가 자기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는 거야.”

“아하…….”

들어 보니 그럴싸하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다.

“그럼 어떤 걸 하면 그놈들이 가장 싫어할까?”

내 물음에 누나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구하러 안 가고 빈집 털이.”

“응?”

“빈집 털이라고…….”

뭔가 본래의 목적에서 많이 벗어난 느낌. 학살공주를 구해야 하는데 일부러 늦장을 부린다?

“학살공주는 어쩌고?”

“내 추측이지만 만약 네가 구하러 간다고 하면 걔는 꽤 많은 선택지가 생기는 거야. 그리고 그 선택지 중에서는 널 기다리면서 도망치는 길도 있을 거고…….”

“도망? 학살공주가?”

내가 아는 그녀가 도망을 친다니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누나는 뭔가 너 빼고는 다 안다는 듯한 한심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그냥 그런 게 있어. 정 그렇게 걱정되면 너 전화번호 있잖아. 전화 한번 걸어 보든가.”

“으으음… 그건 나중에…….”

왠지 그녀에게 전화를 하는 건 거부감이 느껴진다. 일단 그건 나중으로 미루고…….

“그래서, 구체적인 계획은?”

“개척단에 있는 일곱 개 길드의 본진 중에 딱 절반만… 그리고 그 절반은 풀뿌리 하나 안 나도록 짓밟는 거.”

“왜 절반만?”

“이것도 내 추측인데 이 함정을 판 주도자는 중국일 거야. 그리고 걔들이 한국 개척단에 뭔가 대가를 제시했을 테고 그 일곱은 그걸 저들끼리 나누기로 했을 거야. 물론 한국 애들도 원하는 게 있지. 예를 들면 자기들 말을 전혀 안 듣는 학살공주나 거의 동급의 예비 꿈나무인 네가 나타나 자신들의 인지도를 뭉텅이로 떼어 갈 테니 미연에 방지하자는… 그런데 네가 그들 중에 절반만 짓밟고 지나간다면?”

“본전 생각 나겠네. 어떤 놈들은 얻은 것만 있는데 밟힌 놈들은 본진이 쑥대밭이 되었으니까.”

“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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