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보스 스킬 쓴다-149화 (149/154)

149. 일백의 케이

-정현아.

-응. 누나. 어떻게 됐어?

-뭐, 결과만 말하면 평화적인 방향으로 이야기 좀 하자네.

-그래? 잘됐네.

본래 계획은 순회공연 하면서 초토화를 해 버리는 것이었는데 고구려 길드 하나로 끝났다. 내가 뭐 약한 애들 괴롭히는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만족한다.

-무조건 항복이라면 의뢰는 완료된 건가?

-아니, 그건 아냐. 이야기가 좀 복잡하더라고. 음, 그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누나가 설명을 시작했다. 각 길드들의 사정과 뒷구멍으로 중국과 다른 음모를 꾸민 대박 길드 그리고 이 일의 주체라고 할 만한 중국이 아직 개척단에 10만 단위로 병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천인이라는 특이한 유저들이 아직 학살공주를 쫓고 있다는 것이다.

-단체로 공격한 게 아니라 그 천인이라는 것들한테 학살공주가 일방적으로 밀렸다고? 그렇게 강해?

-강한 것도 강한 건데 좀 특이하다고 하네.

-어떻게?

-분명히 유저인데 유저 같지가 않았대. 능력치는 비정상적으로 높은데 생각을 아예 안 하고 움직이는 것 같은……. 예를 들면 소환수? 혹은 펫처럼 명령으로만 움직이고 말이야. 쓰는 스킬도 복붙한 것처럼 똑같고.

-중국 애들이 뭔가 수상한 걸 만들었다는 거네.

-응. 그리고 자기들이 비밀리에 알아본 바로는 그런 천인이 백 명 이상은 있다는 거야.

-일백?

열 명으로도 학살공주가 밀렸는데 일백이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그런데 그런 수상쩍은 거면 헤븐즈게이트사에서 끼어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유야 알 수 없지. 솔직히 지금 네 강함도 비정상적인데 그냥 두고 있잖아. 같은 이유 아닐까?

-그런가.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이 없다. 비정상적인 강함. 확실히 내가 지금 가진 강함도 일반적인 유저 수준은 아득히 초월했다는 건 안다. 이전에 알레그로에게 물어보니 헤븐즈게이트사에서 건드리지 않는 건 내 강함이 게임 외적인 조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인과율에 따랐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비록 알레그로의 강함을 계승받은 것이지만 그 재료로 사용된 현자의 돌 자체가 ‘인과율’이 뭉쳐 만들어진 것이고, 그것을 통해 옳게 받았다는 것.

그 말뜻은 중국의 천인이라는 것도 인과율에 어긋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고민도 있다.

-유저 십만에 천인 일백이라…….

단순히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서 그 정도 숫자를 나 혼자 죽인다면?

귀찮은 일이 아주 많아질 거 같다.

-골치 아프네.

-잠깐 기다려 봐. 좀 더 정보 뽑아 볼게.

-알았어.

내가 누나에게 들은 정보를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와, 약탈자다.”

“내가 잡을까?”

“오빠가 할 수 있어?”

“저 정도는 껌이지!”

봐도 커플로 보이는 것들이 멀리 떨어진 바위 뒤에 숨어 나를 훔쳐보며 수군거리고 있다.

자기들 딴에는 나한테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레벨 99를 찍으니 굳이 능력치를 올리지 않더라도 모든 신체 능력이 상승하여 오감마저도 초인 비슷하게 되었다.

“…….”

죽여 버릴까 싶기도 하지만 그냥 귀찮다.

“그럼 오빠만 믿고 친다?”

“응. 네가 먼저 마법 센 거 하나 날려. 내가 몰래 돌아가서 합공할게.”

“응!”

오빠라는 것의 확답을 받은 여자가 기세등등하게 바위 뒤에서 나와 나를 향해 지팡이를 겨눴다.

“약탈자 새끼가 겁도 없이 마스터즈 길드 영지에 들어왔구나!”

“…….”

은신까지는 아니고 기척 줄이는 스킬을 쓰는지 몰래 살금살금 돌아 들어오는 남자와 시선을 끌겠다는 듯 내게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는 여자다.

“그냥 가라.”

“뭐?”

내가 손을 휘적휘적 젓자 무시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여자의 인상이 찡그려진다.

“너! 후회하게 해 주지!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히는 불의 마나여. 나 여기에…….”

유치한 시동어긴 하지만 꽤 길다. 길다는 건 가진 역량에 비해 강력한 주문이라는 소리.

동시에 숨어 있던 남자가 롱소드를 든 채 나를 향해 돌진해 온다.

“으아아아! 죽어!”

기습하면서 소리는 왜 지르냐.

철컥, 철컥. 철컥…….

보법도 없는지 강철 신발을 덜컥거리며 뛰어오는 폼이 애처롭다. 웃기는 건 녀석의 얼굴이.

“너도 케이 커스터마이즈냐.”

생긴 게 내 캐릭터랑 똑같다.

후웅……!

찔러 오는 롱소드를 옆으로 슬쩍 지나쳐 피했다. 그러자 피할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땅을 강하게 밟으며 찌르던 롱소드로 내 겨드랑이를 공격했다.

“연격!”

나름 회심의 이 연타 같은데…….

“더럽게 느린 게 재미있네.”

퍽!

“컥!”

훤히 드러난 옆구리에 일격을 꽂아 주자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주저앉는 남자.

“에너지 캐논~!”

그때 여자의 지팡이에서 절구공이만 한 빛의 구체가 만들어졌다. 에너지 볼트의 상위 마법으로, 속도와 파괴력이 뛰어난 대인 공격 중 하나다.

“가라!”

슈우우웅-

에너지 캐논이 날아온다. 쓰러지는 남자의 옆구리를 교묘하게 파고드는 걸 보면 둘이 꽤 오래 손발을 맞춘 것 같다. 문제는…….

“저것도 느리네.”

이 정도라면 내가 10레벨 때도 안 맞을 속도다. 하품이 나올 지경. 귀엽기도 하고 짜증도 난다. 학살공주는 매일 이런 기분일까?

“이래서 호위를 두는구나.”

학살공주의 시그니처는 당연히 달의 눈이다. 그들이 지닌 스킬이 곧 이름인 ‘달의 눈’. 평소에 그녀를 호위하는 그들이 있기에 학살공주는 어중이떠중이들의 시비에 휘말리지 않는다. 그들을 안다면 감히 덤비지 못할 테니까.

“나도 만들어 볼까.”

구독자 중에 한 열 명 정도만 추려서 대장 놀이 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귀찮다. 난 쓰러지는 남자를 붙잡아 에너지 캐논을 막았다.

콰앙!

“크엑!”

남자가 비명을 지르자 여자가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오빠를 놔줘!”

여자는 이미 마법 공격을 포기했다. 하긴 남자친구가 자신의 마법을 나 대신(?) 맞아 준 것도 모자라 나한테 멱살을 잡힌 상태니 어쩌지 못하는 거지만.

“큭… 너 새끼, 내가 누군… 쿨럭… 지 알아?”

“누군데?”

“우리… 큭… 형이 마스터즈 길드원이야.”

“아, 그래?”

“그래. 씨발, 너 감히 마스터즈 길드 앞마당에서 이런 짓… 을 하고 무사할 거 같아?”

“그건 잘 모르겠네.”

무사하길 바라는 건 아니다. 그냥 속 편하게 덤벼도 상관없을 뿐이지.

누나가 잠깐 기다리라고 해서 대기하는 것뿐이지, 다시 움직여도 된다고 하면 마스터즈 길드로 갈지 마린 길드로 갈지 결정해야 하는데 마음이 마스터즈 길드로 확 기울었다.

“그러니까 얌전히… 큭… 놔.”

“왜?”

“이런 씨발, 너 새끼 내가 우리 형 불러서 죽여 버리기 전에 얼른 놓으라고!”

“불러.”

“뭐?”

“부르라고. 기왕이면 장비 좋은 놈으로 많이 불러 봐.”

약탈자가 되는 바람에 떨어지는 전리품이 적어졌다.

누나는 기다리라고 했지, 오는 놈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니까.

“우리 오빠 놔줘! 오크 새끼야!”

그때 뒤에서 우물쭈물하고 여자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아니, 그런데 다 떠나서 오크 새끼라고? 내가?

퍽!

“꺄아악!”

쥐고 있던 남자를 툭 밀자 둘이 엉켜 넘어진다. 한참을 버둥거리는데 코미디가 따로 없다.

“…….”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꺾인다. 내가 애들 데리고 뭐 하는 거지.

“그냥, 가라.”

“너… 너…….”

여자친구 앞에서 망신당한 게 분한지 남자가 내게 손가락질을 해 댔다. 음… 많이 억울한가 보다. 이래서 사람들이 기를 쓰고 현질을 하는가 보다. 그때였다. 남자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귓속말을 받았는지 수시로 바뀌던 얼굴에 서서히 당혹감이 어린다. 이어진 건 공포. 혹은 좃 됐다는 표정.

“너 가만두지… 읍!”

한마디 하려던 여자친구의 입을 서둘러 틀어막은 남자가 내게 말했다.

“저기 혹시… 저기… 그… 케이… 님이신가요?”

귓속말로 뭔가 얻어들은 모양이다.

“그런데?”

“히이이이이익!”

내 대답에 남자의 표정이 하얗게 질리더니 여자친구의 입을 막은 채 뒤로 주춤주춤 물러난다.

“읍! 읍읍!”

너무 놀랐는지 자신이 여자친구의 입을 막고 있는 것도 잊은 모양이다. 발버둥을 쳐 남자친구에게서 벗어난 여자가 소리쳤다.

“미쳤어? 오빠? 갑자기 왜 그래!”

“그… 그게…….”

“그게 뭐! 대체… 응?”

히스테리를 부리려던 여자의 표정이 천천히 굳었다. 귓속말을 나누는 것 같다. 잠시 후 고장난 목각인형처럼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그녀도 남자친구와 같은 표정이 되었다.

“저… 저기…….”

“…내가 오크처럼 생겼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죽이지만 말아 주세요! 저희 돈도 얼마 없고 장비도 거지예요!”

곧바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싹싹 빈다.

태세전환 빠르네. 옆에서 우물쭈물하던 남자도 그 옆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누가 보면 깡패가 착한 커플 붙잡고 괴롭히는 줄 알겠네.

으음, 이게 지금 내가 가진 개떡 같은 위상의 현실이구나.

조금 남아 있던 괴롭히고 싶은 마음도 눈처럼 녹아 버렸다.

“가라.”

“예?”

“가라고.”

“가,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둘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춤주춤 물러날 때였다.

“감히 마스터즈 길드 앞마당에서 이딴 짓을 하다니! 용서 못 한다!”

하늘 높은 곳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야만전사 컨셉인지 헐벗은 가죽옷을 입은 여자가 내 머리를 향해 창을 내리꽂고 있다.

“후… 친위대 소환.”

* * *

“크르릉!”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가라.”

“죄송합니다. 흑…….”

두 동강 난 창을 가슴에 안은 채 야만전사 여자가 고개를 연신 조아리며 도망쳤다.

흑구가 도망치는 여자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침을 질질 흘린다.

팍!

“먹을 거 아냐. 새끼야.”

“끼잉…….”

뒤통수를 얻어맞은 흑구가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인다. 입에 육포를 넣어 주며 달래 주니 백구와 황구도 침을 질질 흘린다.

“그래. 너희도 먹어라.”

난 챙겨 온 육포를 셋에게 듬뿍 안겨 줬다. 어차피 챙겨 온 게 많으니까.

“크릉크릉……!”

“컹컹!”

셋이 도란도란 앉아 육포를 나눠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아직까지도 도망치지 않은 덜떨어진 커플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랑 같은 커스터마이즈를 한 남자 녀석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야.”

“예?”

“내 얼굴 커스터마이징 하고 다니는 애들 많냐?”

“케이 님… 얼굴이요?”

“그래.”

내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얼마 전 인벤트에 케이 님 커스터마이징 99프로짜리 좌표값 떠서 요즘 전부 케이 님 얼굴 하고 다니는 게 유행입니다.”

“그래?”

“네. 아마 새로 캐릭터 만들거나 커스터마이징 변경권 쓰는 애들 중에 절반은 케이님 얼굴일걸요?”

“흠, 그렇단 말이지?”

녀석의 말에 꽤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누나.

-응? 왜?

-나한테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는데 들어볼래?

-말해 봐.

-그게…….

난 방금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를 누나에게 말했다.

-오호…….

-괜찮지?

-그러게. 아주 괜찮네. 그럼 필요한 건?

-재빠른 놈들 70레벨 넘어가는 유저 일백 정도. 그리고 커스터마이징 변경권.

-70레벨 넘어가는 유저 일백이라……. 그러고 보니 아주 적당한 녀석이 있네.

-누구?

-일단 기다려 봐. 내가 제안을 해 보고 그 녀석들이 승낙하면 이야기하자고.

-알았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