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황도 폭격
세이온의 전지전능한 주신으로 군림하는 헤븐 또한 불가능한 것이 존재했다.
게임의 전체를 관장하는 존재에게 불가능이라는 단어가 말이 되느냐 반문할 수도 있지만 엄연히 말해 헤븐은 창조자가 아닌 관리지였다.
헤븐이 할 수 없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생명과 시간이었는데 이 법칙에서 부분적으로 자유로운 것이 바로 유저들이었다.
물론 기존의 NPC들에게는 잊혀지기에 완전한 부활이 아니지만 NPC들에게는 그런 불완전한 부활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알레그로는 헤븐의 말에 긍정하지 않았다.
아니, 조금은 두루뭉술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다.
“후…….”
낮게 한숨을 내쉰 헤븐이 말했다.
“그러나 그건 자네의 실수일세.”
“무슨 뜻이지?”
“이 세이온이 인과율에 따라 움직인다는 건 알고 있겠지?”
“그렇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이 법칙은 세이온에서 절대적이다.
북쪽 끝 빙하지대에서 작은 모닥불 하나라도 켠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모든 세상에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케이에게도 동등하네. 그 말뜻은 곧 그에 상응하는 대적자가 나타난다는 뜻이지. 자네가 케이에게 준 힘 정도라면 그 대적자는 아마 이 세이온의 근간 자체를 뒤흔들어 버릴 수준이고 그에게서 받아낼 반동의 크기는 어쩌면 세이온의 완전한 소멸 그 이상일걸세.”
“그렇겠지.”
알레그로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자의 돌을 사용해 인과율의 반발을 억눌렀다지만 그것은 마치 터지려는 댐에 밴드 하나 붙여 놓고 댐을 막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케이는 힘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것이 원했건 원치 않았건…….대적자의 형태 또한 불분명했다.
그것은 어떤 인물일 수도 있고 혹은 어떤 단체일 수도 있다. 또한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이미 일어나는 중일 수도 있다.
하나 확실한 건 그의 나라가 금단의 힘에 손을 댄 대가를 멸망했듯 케이 또한 그만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케이는 그걸 감당할 수 없어. 자네는 큰 실수를 한 거야.”
“후후. 마음껏 생각해.”
“너 정말 이딴 식으로 나올래?”
알레그로의 대답에 헤븐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평범한 NPC의 기억이라면 읽겠지만 알레그로가 작정하고 거부하면 제대로 읽을 수 없다.
물론 좀 더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알레그로가 망가질 수 있었고 그건 그의 계획에 있지 않았다.
“이만 내 심상에서 나가라.”
“후, 그러지. 아… 가기 전에 하나만 말하지. 너로 인해 이번 회차도 실패할 거다.”
“투정 부리지 말고 꺼져.”
“쳇…….”
헤븐이 사라지고 검은 공간에는 알레그로 홀로 남았다.
“실패라… 후후… 나도 녀석의 한계를 좀 보고 싶군.”
* * *
[동아시아 개척단의 내분의 조짐이 보인다? 유럽과의 연결은 요원해지는가.]
[학살 공주 처단 작전! 실패인가?]
[중국과 한국 깊어가는 골]
[알스 공작 이번 사건에 성명 발표 ‘동아시아의 맹주로써 깊은 유감이다.’]
처음 개척단에서 벌어진 사건은 전 세계적인 이슈가 되었다.
거대 길드의 요청으로 개척단에 지원 온 학살공주를 공격했으니 그녀가 평소 아무리 욕먹을 많이 했다고 해도 명분에서 밀린 것.
거기에 학살공주는 전 세계적으로 꽤 많은 팬층을 보유하고 있었다.
‘여성 유저’가 PK 1위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약탈자이면서도 나름 안티히어로의 포지션으로 이미지가 잡혀 있던 그녀를 추종하는 ‘학살단’이니 ‘세럽단’이니 하는 놈들이 그녀를 구하기 위해 동아시아 서버로 몰려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세계적인 여론도 케이가 등장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케이 참전! 고구려 길드 치욕을 당하다!]
그 이유는 학살공주가 고용했다고 알려진 케이의 파격적인 전투력 때문.
대한민국 1위 길드인 고구려 길드의 길드마스터 목을 단신으로 날려 버린 차기 세이온 최강자! 그러나 세계 여론은 의외로 케이의 이 행동에 싸늘했다.
[또 하나의 최강자! 이번에도 한국?][제2의 학살공주인가?]
[세이온에 뿌려진 제2의 최강자! 헤븐즈게이트의 의도는?]
[헤븐즈 게이트의 한국 편파적 운영 의혹!][들끓는 세계 유저들의 민심! 세이온 이탈 시작되는가.]
단 한 명의 거칠 것 없는 행보를 좋아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세상에는 시기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나도 열심히 했는데? 나도 게임 좀 하는데? 어째서 쟤만 저렇게 강한 거야? 왜 게임에서까지 저런 재능들을 부러워해야 하는 거야? 그것이 사리에 맞는 것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사람들은 시기하고 질투한다.
그리고 그 반발심으로 만들어진 역반응을 두려워하는 권력자들은 항상 민심을 생각하고 대의를 찾으며 명분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케이는 정치질에 재능도 관심도 없었다.
누군가의 칭송이나 우러러봄 따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얽매이는 것도 싫어한다.
그러나 세계 여론이 케이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발끈하며 일어선 건 대한민국의 유저들이었다.
-미국 새끼들 약 먹었냐? 뭔 원서버에서 편파 운영이야. 편파 운영은?
ㄴ그러게. 가뜩이나 개 같은 중국 옆에 붙어 가지고 짜증 나 죽겠는데
ㄴ세이온에서 맨날 하키나 치는 캐나다 애새끼들이나 쪼아라.
-케이나 학살공주는 그냥 돌연변이야. 그러니까 우리한테서 신경 끄세요. 시발 것들아.
ㄴ어딜 감히 케이를 까고 지랄이야?
ㄴ약 먹었나 보지.-케이사마는 우리 아시아의 자랑입니다!
ㄴ케이사마를 모욕하지 마세요!
ㄴ일본이냐?
ㄴ얘들은 툭하면 아시아래.
ㄴ근데 케이가 왜 일본 애들한테 인기 있지?
케이에 대해 그다지 좋지 않은 감정을 품던 대한민국과 일본의 유저들이 발끈하며 일어났다.
케이는 우리 자식이니까 까도 우리가 까지, 다른 놈들이 까는 건 못 보겠다는 것.
그렇게 전 세계 여론이 들썩일 때 중국에서는 비밀스러운 수면 아래로 커다란 움직임이 꿈틀거렸다.
“모든 레드가드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좋아요. 세작들의 보고는?”
“예! 종합한 결과 대한민국의 각 길드에서 비밀리에 차출된 이들이 케이의 커스터마이징을 한 채 개척단으로 출발했다고 합니다. 놈들의 예상 행동 시간은 내일 오전 중으로 추측됩니다.”
“그렇군요. 케이의 움직임은 파악되었나요?”
“그게… 최선을 다해 정보망을 돌렸지만 케이는 철저하게 개별 행동을 하여 꼬리를 붙일 수 없었다고 합니다.”
“혹 세작들이 들켜 역정보에 휘둘리는 건 아니겠죠?”
“그건 절대 아닙니다. 각 길드에 심어진 세작들이 한둘도 아니고 그들은 서로의 존재도 모르니까요.”
“그런가요. 그럼 이건 철저한 아웃사이더 성향인 케이의 단독 행동으로 봐야겠군요.”
“그렇습니다.”
“좋아요. 어쩔 수 없죠. 케이가 어디서 나타날지는 알 수 없지만 곧 100만의 우리 군대가 모든 것을 집어삼킬 테니까요.”
“예!”
“대혁명 작전을 시작합니다.”
제갈미는 확신했다.
이 작전에서 케이의 움직임은 이제 작은 파문에 불과하다고……. 아무리 그가 100인의 커스터마이징으로 날 뛰어 봐야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다음날 케이의 얼굴을 한 100인의 유저들이 중국의 개척단 곳곳을 게릴라 형식으로 들쑤실 때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적의 의도대로 따라가 주되 추적대는 100인 이하로 움직이세요. 100명이 날뛰어 봤자 고작 일만 명! 나머지는 빵즈의 개척단과 학살공주만을 공격합니다!
-예.
압도적인 병력으로 수 겹의 포위만을 만들어 이제는 적으로 돌아선 대한민국의 개척단과 학살공주를 향해 전진을 시작하는 중국 개척단의 움직임을 상황판으로 확인하며 제갈미는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날뛰어 봐도 황하의 물결은 막을 수 없지요.”
거대한 유저의 성채가 적들을 압박해 들어간다.
단순히 개척단과 천인의 숫자만으로도 대한민국의 개척단을 몰살시킬 수준인데 진정한 한 수는 다시금 그 외곽을 포위한 레드가드와 정예유저 100만이 포위하고 있다.
그들의 존재 이유는 오로지 단 하나 케이를 잡기 위한 것이다.
“케이와 학살공주를 잡으면 곧바로 포디나로 진격해 들어갈 겁니다. 그리고 바람처럼 들이쳐 모든 것을 쓸어담는 거죠. 후후후.”
케이만 없다면 포디나는 썩은 수박과 같이 박살 낼 수 있다.
포디나만 점령하면 그 후로는 진정한 정복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코리 왕국을 점령하면 곧바로 일본의 베소 왕국과 푸른바람숲까지 밀고 들어가 동아시아를 완전히 통일할 것이다.그녀는 머릿속으로 단꿈을 꾸었다.
그러나…….
“뭐… 뭐야…….”
그녀가 꿈꾸던 그 단꿈은 단 이틀 만에 전혀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박살이 나 버렸다.
“어째서… 그가… 그가…….”
케이는 그녀가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바로…….
“대체 어떻게 그가 치나 제국의 황도에 나타났냐고요!”
제갈미는 이 믿기지 않는 보고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건 전혀 상정하지 않았던 경우의 수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치나 제국의 황도인 진훌은 코리 왕국이나 개척지에서 까마득히 멀었으니까.
레드가드 길드의 정예 군단을 옮기는 것도 각 요충지의 군사용 포탈을 이용했음에도 무려 일주일이 걸렸다.
그런데 케이는 지금 3일 만에 황도에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더욱 황당한 것은…….
-황도의 천한문이 박살 났습니다!그가 황도로 잠입한 게 아닌 떳떳하게 정문을 박살 내며 황도 진훌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 * *
-누알라 님 안내 감사합니다.
-아니요. 고작 길잡이의 역할만을 해 죄송할 따름입니다.누알라의 귓속말에 케이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아무리 날틀이 있었다고 해도 누알라가 이끄는 위구르 자유 연합의 비밀 포탈이 없었다면 이렇게 단시간 내에 적의 심장부에 닿지 못했으리라.
-길잡이값으로 좋은 구경 시켜 드리죠.
-기대하겠습니다. 케이 님.
누알라와의 귓속말을 끝낸 케이는 조금 전까지 눈앞에 우뚝 세워져 있던 거대한 성문의 잔해를 바라봤다.
“시원하네.”
마치 거인이 지나다닐 법한 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성문과 두께만 어림잡아도 몇 미터는 될 법한 거대한 장성이 까마득한 지평선으로 이어져 있다.
세이온에서 가장 거대하다는 도시 치나 제국의 황도 진훌이다.
케이는 처음부터 개척단으로 갈 생각이 없었다.
물론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는 개척단으로 가는 게 정상이겠지만 굳이 그들이 예상 가능한 방법을 따르는 건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굳이 그럴 필요 있나. 심장에 대못 하나 박으면 되는데.”
그가 이번에 고구려 길드를 박살 내며 깨달은 것은 잘챙이들과 노는 건 효율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짧고 굵고 효과적으로 놀아야 한다.
그리고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의 심장을 찌르는 것이다.
“어디 황제가 죽으면 제국이 어떻게 되는지 보자구.”
댕댕댕댕댕댕댕!
“적이다!”
쿵쿵쿵쿵쿵쿵!
무너진 성문 사이로 번쩍이는 철갑으로 무장한 기사 수백 명이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는데 위압감 넘치는 그 돌진에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바닥이 흔들린다.
“그럼 한번 개판 쳐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