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권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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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권재하
2022.06.02.
“재미있네, 우리 은조. 정말 작정했어.”
재미있다면서 눈빛은 위험천만한 짐승의 그것이다.
먹잇감에게 시선을 꽂아둔 권재하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이제 코앞에 서 있는 그는 팬츠 주머니에 양손을 찌른 채, 지그시 내리깐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조각 같은 이목구비가 만들어 놓은 음영이 짙다.
밤의 바다 같은 눈동자.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는 검푸른 눈동자를 올려다보는 은조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아까 말했잖아. 나, 너 안고 싶어.”
같이 있고 싶다고. 나름 당차게 목소리를 높였는데.
“그냥 잠들었구나.”
“……어?”
“머리가 엉망이잖아. 귀엽게.”
불쑥 다가온 남자의 손이 헝클어진 머리카락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긴 손가락이 간질이듯 부드럽게 움직인다.
겁먹은 고양이처럼 몸을 움츠린 은조는 동그란 눈동자를 바쁘게 움직였다.
“하…… 그래, 네가 이겼다.”
“……?”
“내가 졌어. 하자는 대로 할게.”
졌어? 하자는……대로? 아, 지금 상황이 그런, 거네.
은조는 패배를 인정한다는 남자의 얼굴에 번지는 미소를 바라보았다.
절대 밝히고 싶지 않은 비밀을 감추기 위해.
혹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결심했지만.
스스로를 던져 버리는 이 행동이 대담한 건지 무모한 건지 몰라서 또 흔들린다.
그저 어른스럽게 육체적 갈망에 솔직한 것도 나쁜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불안해 떠는 꼴이라니. 뭐가 무서운 거야? 달라지는 건 없어!
“작정하고 초대까지 해놓고. 머리 좀 그만 굴려. 2년 가까이 한 침대 썼던 사이잖아, 우리.”
“오래전 일이야. 난, 전부 잊었어!”
“긴장할 필요 없다는 얘기야.”
새삼스레 겁먹을 일인가. 덧붙인 재하가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푹신한 침대가 가볍게 출렁. 은조의 몸이 훅 기울어졌다.
“엇, 아니!”
반사적으로 뻗은 손은 남자의 가슴팍을 찍고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더욱 벌어진 가운 사이로 하얗고 매끈한 다리가 훤하게 드러났다.
아래에서 위로, 다시 아래로. 은조의 휘둥그런 눈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마디가 굵은 커다란 손이 그녀가 걸친 핑크색 로브의 허리끈을 만지작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긴.”
코웃음을 웃은 남자의 시선도 제 손끝에 걸려 있다.
“키스, 할까.”
장난스럽고도 유혹적인 속삭임이 은조를 가르고 들어왔다.
섬광처럼 날카로운 감각이, 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어떤 자극이 등허리를 할퀴고 발가락 끝까지 치닫는다.
“궁금하지 않아?”
서른의 권재하는 과연 어떨지. 다정한 속삭임이 끝나기 무섭게 허리끈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열기 가득한 숨결이 입술 위로 내려앉으며.
“우리 제법. 아니, 꽤나 잘 맞았잖아.”
집요하게 일깨운다.
“아, 아니 잠깐만! 저,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후회? 지금 나한테 물은 거야?”
가당치도 않다는 듯 낮은 웃음을 흘린 권재하가 은조의 작은 턱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후회라니, 차라리 다른 걸 걱정해.”
제멋대로 날뛰는 심장이 온몸을 쥐고 흔든다.
“다른, 거? 어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는데. 방은, 침대는 왜 흔들리지. 현기증을 느낀 은조는 시트를 세게 움켜쥐었다.
“글쎄, 뭘까.”
거칠고 뜨거운 두 개의 숨이 뒤엉킨다고 느낀 순간.
은조는 두 눈을 꾹 감아 버렸다.
벼랑 끝으로 내몰듯 사납게 헤집던 입술이 문득 부드럽게 멀어진다. 아득해지는 의식 사이로 옅은 웃음소리가 흘러들었다.
“……은조야.”
힘 빼야지. 여전히 맞닿아 있는 입술이 나긋하게 속삭였다.
죽음보다 처참했던 첫사랑.
그 첫사랑과의 두 번째 동거.
그래…… 달라지는 건 없어.
고단한 운명에게, 은조는 다시 입술을 열었다.
***
3개월 전.
뉴욕 J.F.K 국제공항 U-airline VIP 라운지.
이른 시간의 특정 장소는 매우 고요했다.
드문드문 자리한 크고 넓은 가죽 소파. 우드 테이블과 은은한 빛을 더하는 램프.
이용객이라고는 단 두 명이 전부인 공간은 공기조차 잠잠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서일까.
내심이야 어떻든, 권재하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차분했다. 마치 골이 난 연인을 달래는 것처럼.
[피에르, 계속 이렇게 우는 소리를 하면 곤란해.]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 권재하는 긴 손가락 끝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움직이는 것이 원래 목적이었다.
그런데 시작부터 영 삐거덕거린다.
어떻게 알고 귀신같이 전화를 걸어온 놈이 있질 않나.
“여러 가지로 성가시네.”
건조하고 비스듬한 시선이 멀찍이 마주 앉아 있는 금발의 여성에게로 향했다.
내내 힐끗거리던 여자가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괜스레 얼굴까지 붉히면서.
낮게 혀를 찬 권재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 보통의 사람들처럼, 또는 그들의 방식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뭐라고? 카일?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야?]
[듣고 있어. 아주 잘, 10분도 넘게.]
[슈나이더 회장은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아! 우리 중 누구와도 상대하지 않겠다는 식이란 말이야! 망할 노인네! 네가 파리가 아니고 서울로 갔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떻게 나올지 뻔해! 아마, 전화도 받지 않을걸!]
[피에르, 네가 받는 연봉을 생각해 봐. 슈나이더같이 깐깐한 노인네들을 한 번에 서넛은 감당해야 하지 않겠어?]
[카일, 정말 너무하는군. 나는 농담할 기분이 아냐!]
[농담으로 들렸나.]
유려하게 굴러가던 프랑스어 끝에 옅은 웃음소리가 매달렸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연인과 나누는 다디단 속삭임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실상 그는 상대를 대놓고 까는 중이었다.
오랜 친구이자 블랙스톤 파트너스 파리 중앙지점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피에르 뤽송을.
꼬아 올린 다리의 끝, 반짝이는 구두를 내려다보던 권재하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언감생심 의지할 어깨를 기대했다는 건 괘씸하지만. 지금 기분이, 작은 선심 정도는 던질 수 있는 정도다.
[잠자코 느긋하게 기다려. 그게 내가 줄 수 있는 힌트야. NEM의 경영권 매각 이슈가 결국 주가에 악재로 반영될 거라는 걸 너도 알잖아. 지난 주말 홍콩 컨테이너 운임지수(HCI)가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어.]
[……그렇지.]
[그렇지? 이봐, 피에르. 잘 생각해 봐. 이런 상승 사이클이 지속될 텐데 슈나이더가 바로 CB를 매각하겠다고 나설까?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가 내후년쯤 팔아도 손해 볼 게 없다고 떠들 테지.]
[흠, 그러니까 그 말은, 가파르게 상승한 만큼 언제든 급락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아하! 그럼 결국 심리전인가?]
[아니, 착각하지 마. 분석과 통계에 의한 전략이야. 물론 지금처럼 노련한 슈나이더에게 네가 말린다면 그렇게 불러도 상관없지만.]
[오케이! 알겠어! 그런데 카일, 대체 갑자기 서울로 방향을 바꾼 이유가 뭐야?]
[파리는 9시 57분이겠군. 회의가 10시라고 했나?]
[오, 이런! 다시 전화할게!]
[됐어.]
권재하는 짧은 인사도 없이 종료 버튼을 눌러버렸다.
“공부만 할 줄 아는 병신들. 죄다 일일이 가르쳐줘야 알아 처먹지.”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던 그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순식간에 코앞으로 다가오더니 멋대로 맞은편 자리에 앉아버린 금발 때문이었다.
사실 여자는 내내 그에게 건네야 할 첫인사를 고민하며 통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훤칠한 외모가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아주 잠깐.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순간부터는 애가 탔다고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게다가 어렴풋하게 들리는 그윽한 음성이라니. 마치 부드러운 깃털이 귓가를 간질이는 느낌이었다.
그가 누구와 어떤 통화를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이 장소에 단둘뿐이라는 것이 천운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산뜻한 인사를 건넨 여자가 입꼬리를 길게 늘이며 웃었다. 반겨달라는 뜻이 분명하다.
하지만 남자는 여전히 은근한 미소만 머금은 채 입을 열지 않는다.
그 여유작작한 태도에 결국 초조해진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음…… 알렉시스 맞죠? 카일 알렉시스.]
[그런데요. 저를 아십니까.]
툭 던진 고저 없는 목소리.
어떤 의미도 담겨 있지 않은 눈빛에, 당황한 여자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졌다.
그녀는 남자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카일 J. 알렉시스. 미국 금융재벌 알렉시스가(家)의 차세대 오너.
조용하고 비밀스러운 사생활 덕분에 알려진 건 별로 없지만, 그마저도 매력이라고 여겨지는 남자.
[메건 리들. 음,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나 그쪽하고 시니어 하이 스쿨을 같이 다녔어요. AP-class 기하학 수업 같이 들었는데…… 아, 제일 먼저 하버드 조기 입학 허가받아 냈던 거 기억해요.]
오만하게 고개만 까딱인 남자 때문에 여자의 얼굴이 조금 더 붉어졌다. 하지만 기회를 쉽게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알렉시스가(家)를 만든 여왕, 제니스 알렉시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한 그녀가 서슴없이 표현했다. 카일은 ‘완벽한 피조물’이라고.
그 아름다운 피조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금발이 냉큼 제 명함을 내밀었다.
[같은 비행기는 아닌 것 같고, 나중에라도 내가 기억나면 연락 줘요.]
[저를 잘 아신다면 제게 약혼녀가 있다는 것도 아시겠군요.]
[알죠. 두 사람이 장장 6년째 약혼 중인 걸 모르는 이가 있을까요. 그건 그렇고…… 제대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서울로 가나요? 나도 가본 적이 있어요. 그곳은 정말이지…….]
흠, 직원의 헛기침 소리에 놀란 금발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실례합니다. 미스터 알렉시스, 탑승이 곧 시작될 예정입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권재하는 천천히 재킷의 단추를 채웠다.
[아뇨, 감사하지만 어딘지 압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남자의 모양 좋은 입술, 그 끝에 걸린 미소가 싱그럽다.
씁쓸한 표정의 금발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손을 내밀었다.
[기분 좋아 보여요. 행운을 빌어요.]
잠깐 여자의 손에 머물렀던 시선은 이내 통창 너머 시원하게 뻗은 활주로 옮겨졌다.
“행운 따위는 필요 없고. 기분 좋은 건 맞아.”
나지막하고도 서늘한 이국의 언어.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한 금발은 그저 어리둥절하다.
내내 무표정이던 남자가 눈매를 살짝 일그러뜨렸다.
“상상만으로도, 짜릿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