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위이이잉
(3/100)
3. 위이이잉
(3/100)
3. 위이이잉
2022.06.09.
극성스러운 녀석.
JS PHARM. 이성춘 회장이 낮게 혀를 찼다.
늦은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비서실장을 거느리고 7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이었다.
“김 실장, 천연물 융합연구 개발본부가 디자인 팀과 같은 층을 쓰고 있지?”
“네. 7층을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흠.”
조카딸 왕나나와 먹은 점심은 입으로 들어갔는지 코로 들어갔는지 모를 지경이다.
장장 3시간. 아침 댓바람부터 예고도 없이 회사로 쳐들어와서는 고집을 부리고 우는소리를 해댔다.
[그러니까요, 네!]
[아야! 아야-! 살살 좀 해 이놈아! 이게 안마야? 늙은이 잡는 거지! 그만해!]
백발의 이성춘이 어깨에 들러붙은 우악스러운 손을 잡아떼며 앓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왕나나는 애교 섞인 콧소리까지 더하며 회장 팔에 매달렸다.
짙은 향수 냄새 때문에 후각이 마비될 지경인데. 걸치고 있는 화려한 명품 드레스를 왜 이리 풀럭이는지.
[외삼촌, 제발요!]
[아프다고 이 녀석아, 놓고 얘기해! 아니, 웬 힘이 이렇게 좋아? 너 미국서 뭐 좋은 거 먹고 왔냐?]
이성춘은 결국 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던 왕나나를 세게 밀어냈다.
[어여 앉아서 차나 마셔.]
가볍게 혀를 찬 이성춘은 자랑이라도 하듯 넓은 스커트 자락을 펼치며 자리에 앉는 조카를 바라보았다.
피땀으로 일구어온 회사의 미래를 생각하느라 골머리가 쪼개질 지경인데. 반년 만에 들이닥쳐서 겨우 한다는 소리하고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저만 아는 욕심쟁이. DL그룹의 안주인인 누나 이성자가 금이야 옥이야 키운 막내딸은 아는 것이라고는 사치와 허영뿐인 평생 어리광쟁이다.
그렇다고 영 밉지만은 않았다. 멋대가리 없는 아들만 셋을 둔 게 이유라면 이유다.
[아이고, 철딱서니 하고는……. 야, 이 녀석아- 지금 삼촌 회사가 얼마나 중대한 시점에 놓여 있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냐?]
[중요한 거 뭐요? 경영권 팔아서 현금 왕창 쥐려고 하시는 거요? 다 알아요! 칫, 제 소원 들어주실 거 아니면 그만 가보구요.]
붉게 칠해진 긴 손톱을 내려다보는 왕나나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회장 자리에 있는 작자가, 할 일이 없어서 일개 디자이너 하나 잘라라 마라, 그런 소리를 하면? 응? 아랫사람들이 날 얼마나 우습게보겠냐?]
[아랫사람이 우습게보거나 말거나. 잠깐 우습게 본다고 위아래가 바뀌나? 그냥 쭉 아랫사람이지. 그리고 어차피 회사 팔아버리실 거잖아요!]
[하이고, 조 주뎅이 하고는. 그게 그리 단순한 게 아니야. 복잡해서 골이 울린다고.]
[아니! 말이 돼요? 내가 젤 미워하는 인간 중에 하나가 삼촌 회사에 기생하는 게? 으으- 소름 끼쳐! 당장 해결해 주세요, 네?]
[그 얘긴 됐고, 왜 갑자기 들어왔어? 완전히 들어 온 거야, 아니면 잠시 들른 거야?]
[그건…… 아마, 완전히 들어온……?]
눈알을 굴리며 입술을 씰룩거리게 저도 제 일을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이성춘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아직도 누구냐, 얼굴 반반한 그놈 뒤만 따라다니냐?]
[누구요? 제 주위에 얼굴 반반한 놈이 어디 한둘이어야 말이죠.]
[말이나 못 하면…… 쯔쯔쯔. 스물아홉이면 시집갈 생각을 해야지! 철없는 짓은 이제 슬슬…….]
[아! 그래서 이러고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아홉 아니고 여덟! 스물여덟이고요!]
어른의 말을 댕강 자른 것도 모자라 꽥꽥 소리를 잘도 지른다. 제 조카를 바라보는 이성춘은 커진 눈을 껌벅거렸다.
……누가 데려갈지 그거 참.
할 말을 잃은 찰나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사들이 기다린다는 말을 전달받은 이성춘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어나, 점심이나 먹고 가. 너 장어 좋아하지? 전에 같이 갔던 그 집, 거기 가자.]
[삼촌! 내가 애예요? 얼렁뚱땅 맛있는 거나 사 먹이고 돌려보내시겠다고요?]
[얼렁뚱땅? 하이고 그게 늙은 삼촌한테 쓸 말이냐? 아, 어여 일어서!]
.
.
“……아무래도 누나가 딸을 잘못 키웠어.”
“예?”
“아냐. 그, 디자인팀부터 슬쩍 들러보자고.”
“그러시겠습니까?”
남에게 회사를 넘기는 마당에 일개 직원 하나를 자르고 말고 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 얼굴을 한번 확인하고 싶었다.
팀장인 장신애가 꽤 아끼는 디자이너라고 알고 있다. 능력 있고 조신하다고 했나.
윤은조. 연구 개발부에 데려다 놓은 아들 녀석의 입에서도 그 이름이 나온 적이 있었다.
***
새벽 2시.
택시에서 내린 은조는 급하게 경찰서 정문을 향해 뛰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왕나나는 재수가 없는 인간이다.
적어도 윤은조에게는 분명히 그렇다.
.
.
창백하게 질린 은조는 살면서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낯선 장소에 발을 디뎠다.
하지만 몇 걸음 옮기지도 못하고 자리에 얼어붙었다. 자신이 드라마 속으로 들어와 버린 건 아닌가 하는 착각에서였다.
우는 사람,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역시나 드라마에서 쉽게 보던 장면이었지만.
누가 토해놓았는지 모를 흉악망측한 것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윽.”
진작부터 울렁거리던 속이 확 뒤집어지는 느낌에 입을 막는 순간, 멀찍이 고개를 수그리고 앉아 있는 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민아야! 이민아!”
덩치가 큰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게 보였다. 후줄근한 검은색 양복을 걸치고 눈알을 번득인다.
“어이구! 여자 분이 오셨네. 가족이신가?”
은조는 남자를 지나쳐 민아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언니 왔어. 무슨 일이야?”
“언니…… 흐흑.”
잔뜩 부은 눈을 한 민아는 바로 쪼그라들어 사라져 버린대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괜찮아, 울지 말고 무슨 일인지…….”
“무슨 일은! 사람을 쳤시다! 이 쬐까난 대리기사 양반이! 내 차가- 그 부품도 국내에 없는 소중하고 귀한 찬데 가로수를 들이받았어! 이 아가씨가 울기만 하지 통 말을 안 해요! 게다가 아아아- 내 목.”
경찰서가 떠나가게 소리를 친 남자는 갑자기 뒷목까지 잡으며 앓는 소리를 보탰다.
“……민아야?”
새파랗게 질린 은조를 바라보는 민아가 더 큰 눈물방울을 떨어뜨렸다.
“아냐 언니! 흐윽…… 부, 분명히 수레만 스쳤어. 근데 할머니가 안 일어나셔…… 아까 병원으로 옮겼는…….”
“에이! 됐어! 살 만큼 산 노인네야 몇 푼 쥐여 주면 그만이고! 내 차 말이야! 내 차 어쩔…….”
쾅! 쾅!
책상을 내리치는 소리에 돌아보니 얼굴 가득 피곤함을 담은 수사관이 서 있었다. 인스턴트커피를 홀짝이며 근처 의자를 발로 민다.
“조광중 씨, 어디 대포차 가지고 큰 소리야. 제일 먼저 철창 가고 싶은 거 아님 조용히 해요.”
나도 돈 주고 샀다니까. 불량해 보이는 남자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 쪽은 누구십니까, 가족? 보호자?”
“가족입니다.”
가족이고 보호자인 은조는 동생의 손을 꼭 쥐었다.
잠깐 하는 알바 치고는 수입이 좋다며 걱정 말라고 크게 웃더니.
대포차인지 뭔지 아무튼 좋은 차가 망가졌고, 건달의 말처럼 살만큼 살았어도 사람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은조는 그저 동생 걱정에 눈앞이 캄캄했다.
공무원이 될 아이인데……. 발령이 얼마 안 남았는데.
“…….”
“가족 분, 잘 들으세요. 우선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이 병원에 실려 간 거. 다음으로 골치 아픈 건 운전자와 차량 소유주 둘 다 서로에게 책임을 넘긴다는 거. 그리고 보험이 없어요. 게다가 저기 저 양반 차는 대포차고. 듣고 있어요? 기가 막히시죠? 저도 이런 기가 막히는 경우는 처음이네요.”
억양도 감정도 일절 없는 길고도 긴 설명이었다. 애를 썼지만 겨우 반 정도만 알아들은 은조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뭐부터 해야…….”
윙- 귓속에 벌이 들어 있는 것 같다고 느낀 찰나. 경찰서가 울렸다.
“누구야! 어떤 병X이 우리 엄마를 쳤냐고! 상판대기 좀 보자!”
소리를 질러대며 등장한 남자들을 본 수사관이 이마를 짚었다.
대포차 주인만큼이나 골칫거리라는 걸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선 은조는 이후, 꿈에서도 본 적 없는 난장판을 목격했다.
듣고도 귀를 의심할 정도의 험한 욕설을 쏟아내는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엄마가 곧 죽는다며 생떼를 부리고 위협적으로 발을 굴렀다.
당장에라도 민아를 잡아먹을 것처럼 눈알을 희번덕거리는데.
“아, 씨x! 댁들 난청이야? 어? 누구 고막 터트릴 일 있냐고!”
얼이 빠진 자매를 제치고, 뜬금없이 대포차 주인이 큰 목청을 돋운 것이다.
바로 싸움판이 벌어졌고 사내들 여럿이 엉겼다.
상스러운 욕이 쏟아진다. 누군가의 목을 물어뜯을 기회만을 노리던 짐승들처럼 이빨을 드러내고 침을 튀겨댔다.
“하여간 그놈의 돈이 항상 문제죠. 두 분은 저쪽으로 가시죠.”
할 말을 잃은 자매 앞에 다른 수사관이 나타났다.
난장판을 등지고 서더니 멀찍이 다른 책상으로 자매를 이끌었다.
“자, 그쪽에 앉으세요. 이민아 씨, 아까 하신 말씀 있죠? 다리를 더듬었다는 얘기요. 블랙박스 확인해 봤더니 성추행이 있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부터 따로…….”
“잠시만요, 형사님! 이제부터 저와 말씀 나누시죠.”
“……?”
막 자리에 앉아 훌쩍이는 민아의 등을 쓸어주던 은조는 망연자실한 얼굴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웅찬 변호삽니다. 윤은조 씨, 이민아 씨, 더 이상 아무 말 하실 필요 없습니다. 우실 필요는 더욱 없고요.”
깔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은조는 명함을 받아들면서도 얼떨떨했다. 정말로 꿈속을 헤매는 기분이 들었다.
“그…… 아니, 어떻게. 그러니까 어디서…… 저희는 변호사를 부른 적이 없는데요.”
“아, 저는 블랙스톤 파트너스의 법무팀 소속입니다. 대표님께서는 지금 주차장에 계시는데…….”
“네? 어, 어디요? 누구요?”
“블랙스톤 파트너스, 권재하 대표님이요.”
위이이잉---
귓속에 있던 벌이 머릿속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휘청- 의자 등받이를 짚은 은조는 독침에 찔린 것처럼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