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어둠을 가르고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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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어둠을 가르고 너에게
2022.06.13.
W호텔 코리아.
급하게 회전문을 통과한 중년남성 둘의 발걸음이 분주했다.
둘 중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쪽은 손수건으로 연신 이마를 문질렀다.
“아니, 이번 달 말에나 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언제 소리 소문도 없이 와서 사람을 이렇게 당황스럽게 만드는지 모르겠네요.”
“원래 성격이 그렇대요. 성가시고 귀찮다는 이유로 최소한의 의전도 생략하라고 지시했다는데, 이렇게 불쑥 들이닥친 게 더 사람 엿 먹이는 거 아닌가. 새파랗게 어린 게 시작부터 군기를 잡겠다는 얘긴지 뭔지.”
“창업주의 유일한 손잔데 군기라는 단어는 왠지 좀, 허허.”
“내용은 토종 한국인인데 어떻습니까?”
프런트 데스크 앞에 다다른 두 사람에게 직원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어서 오십시오.”
“어이쿠, 마침 김 지배인님이 계셨구먼. 긴 얘기할 필요 없어서 다행입니다. VIP 스위트에 카일 알렉시스라고 계시지요? 우리 그분 만나러 왔어요. 연락 좀 해 줘요.”
“아, 새 대표님을 뵈러 오셨군요. 잠시만요.”
직원이 객실과 통화를 시도하는 동안 내내 땀을 흘리던 쪽이 작게 구시렁거렸다.
“호텔 직원이 우리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니 기가 막히는군요.”
“아, 이걸 어쩌죠. 대표님께서 전화를 안 받으십니다.”
“김 지배인, 승강기 카드키 줘요. 올라간다고 이미 연락을 넣어 뒀으니 걱정 마시고.”
고압적인 태도로 원하는 것을 얻어낸 그들은 이내 36층에 도착했다.
“참, 한국말을 잘 못한다던데. 영어로 대화를 해야 하나? 김 이사님 잘하시죠? 믿겠습니다.”
“예? 그럴 리가요! 머리가 빛보다 빠르게 회전한다느니, 몇 개 국어를 네이티브처럼 할 줄 안다느니…… 아이고 머리야. 구관이 명관이라고, 햄프턴 대표가 같이 일하기는 딱 좋았는데 말이죠.”
“아무래도 서일은행 매각 건으로 회사 이미지에 먹칠을 한 게 자충수였어요.”
“맞아요. 막대한 차익을 남기면 뭐합니까. 결과적으로 영 찝찝하게 됐는데. 엇, 여깁니다!”
3601.
그들의 새로운 상관 ‘카일 J. 알렉시스’가 머물고 있는 룸이었다.
***
막 욕실에서 나온 재하는 허리에 타월만 두른 상태였다.
평소보다 뜨겁고 길어진 샤워 덕분에 목이 탔다.
가져다 두었을 텐데.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그는 푹신한 카펫을 밟았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몸에 매달린 물방울들이 반짝였다. 덕분에 움직임마다 고르게 갈라지는 근육의 모양이 선명하다.
냉장고 안에는 컨시어지에서 준비해둔 맥주가 가득했다.
치익- 시원한 소리에 이어 날카롭게 솟은 남자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부드럽게 움직인다.
그야말로 정신없이 바빴다. 눈 깜짝할 사이에 3주가 지나갔다.
중차대한 업무가 이만저만 밀려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한국의 상황은 예상보다 훨씬 나빴고 기본적으로 잘못된 부분부터 찾아내고 바로잡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다.
내내 일에 파묻혀 지냈다. 잠자고 운동하는 몇 시간을 제외하고는 식사도 대충 때웠다.
겨우 짬이 생긴 오늘은 강 비서가 골라놓은 집 중에서 최종 후보를 골랐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빌라는. 손등으로 입가를 문지른 재하는 진한 눈썹의 끝을 바짝 치켜 올렸다.
당연히 가까이 둬야겠지. 생각의 마침 끝에 번쩍이는 휴대폰 화면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호칭을 생략한 상대가 깍듯하게 인사했다. 권재하도 마찬가지다. 본론만.
“알아보셨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세부적인 내용은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확인하시고…….]
딩동.
“잠시만요.”
전화기를 든 채 움직인 재하는 주저 없이 출입문을 열었다. 그리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 둘과 마주했다.
눈만 껌벅거리는 남자들을 향해 거의 알몸인 재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What's the matter? I never invited guests.”
묘하게 영국 발음이 섞인 유려한 영어였다.
“아, 미스터 알렉시스. 위 원투 투 웰컴 유. 쏘, 그러니까 저희는…….”
한국말 정말 못하나. 얼이 빠진 두 남자가 서로를 바라보는 사이 재하는 어깨를 한번 들썩였을 뿐이다.
“so, anything more?”
싸늘한 눈빛은 안 그래도 주눅 든 두 남자를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하지만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멍하니 서 있던 두 사람은 결국 들었다. 정확한 한국어를.
“말씀하시죠.”
.
.
간략한 추가 설명을 듣고 종료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다른 전화가 들어왔다.
쉴 틈을 안주는군. 강 비서였다.
“응.”
[호텔에 계신 거 맞죠?]
“아니면.”
[근데 왜 그냥 돌려보내셨어요? 설마 누구랑 같이 계신 건 아니시죠?]
“왜, 여자라도 봤다고 그러던가.”
[그건 아닌데, 아주 홀딱…….]
“벗고 있긴 했어.”
[네에?]
스피커 버튼을 누른 재하는 본인의 실크 가운을 집었다. 허리에 둘러져 있던 던 타월을 치워버리더니 산뜻한 목소리를 냈다.
“운동하고 막 씻고 나왔었거든. 내가 분명히 안 만나겠다고 말한 것 같은데.”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펼친 재하는 남은 맥주를 들이켰다.
[미국 스타일로 계속 이러심 앞으로 곤란한 일이 많으실 겁니다. 당연히 제 입장도 난처해지고요.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셔야죠.]
“알잖아, 난 내 법을 따라.”
[알죠, 압니다! 하…… 아무리 그래도 인사차 굳이 들르신 분들을 그렇게 돌려보내신 건 좀 너무하셨어요. 보셔서 아시겠지만 나이도 대표님보다 훨씬 많으시잖습니까.]
“그렇게 보이더라고.”
그저 건성으로 대꾸하는 상사 때문에 강 비서는 한 번 더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메리칸 마인드로 보시면 좀 갑갑하시겠지만 한국에서는 아직도 처음 만나면 나이부터 묻는 게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그리고 대표님이 왜 한국에 오셨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부터 생각해보시면…… 여보세요? 듣고 계세요? 대표님?]
“그 마지막에 본 집 말이야.”
[네, 테라스 맘에 든다고 하신 집이요.]
“계약해, 당장.”
[당장이요? 좀 생각해 보시겠다고…….]
“생각 아까 끝났어, 계약하고 다시 연락 줘. 주말 잘 쉬고.”
전화기를 옆으로 던져버린 재하는 화면을 가득 채운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근처에 산다고 당장 뭘 어쩌겠다는 것은 아니니까-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했지만.
어느새 핏대가 선 관자놀이가 파르르 떨렸다.
크리스마스 로즈.
양아버지 숀의 정원에서 보았던 희고 가녀린 꽃이 떠올랐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고 이렇게 사랑스럽게 꽃을 피우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니?]
사진 속의 윤은조는 단정하고 청초하다. 차갑고 시린 겨울바람이 동그란 눈 안에 가득 담겨 있었다.
시퍼렇고 날카로운 무엇이 재하의 가슴을 찌르고 지나갔다.
“하…….”
짜증이 날 정도로 깨끗해서 더럽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녀린 줄기를 꺾어버리면 왠지 후련할 것 같았다.
그리고 궁금했다.
여전히 감각의 정점에 다다르면. 저도 모르게 사랑한다는 말을 쉴 새 없이 뱉어내는지.
권재하는 빌어먹게도. 모든 순간, 모든 장면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끊어질 듯 가쁘게 몰아쉬던 뜨거운 숨소리.
감당할 수 없는 희열을 감추려고 애쓰던 하얀 손. 끝내 터뜨리던 흐느낌.
“씨X.”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기껏 사진 한 장에 등신같이. 한심한 꼬락서니하고는.
지독하고 익숙한 갈증이지만 마찬가지로 지독하게 불쾌하다.
하지만 갑작스럽고 강렬한 감정은 다음 사진을 보자마자 차갑게 굳었다.
아이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또 다른 동거인이.
……여자라니.
손에 쥐여 있던 알루미늄 캔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오래전, 상황을 보고하던 강 비서의 입을 다물게 한 것은 자신이었다. 물러서던 그가 두고 간 USB도 미련 없이 휴지통에 던져버렸었다.
아이와 동거인이라는 두 단어만으로도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뒤통수가 얼얼해서. 시시콜콜 알고 싶지 않아서였다.
“Fucking idiot!”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가. 무슨 이유로 누구를. 왜. 그게 이치에는 맞고?
날카로운 부분에 베인 손가락 끝에 붉은 방울이 맺히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민아. 26세, 윤은조의 친동생.
서랑 간호대 졸업, 현재 공무원시험 통과 후 발령 대기 중. 태어난 지 1개월 만에 입양.
윤다온. 만 6세. 윤은조의 아들.
꽤나 대가족이군. 미간을 잔뜩 찌푸린 재하는 소파 끝에 처박혀 있던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톡톡, 화면을 건드리자마자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즉각적인 반응이 왔다.
[네, 말씀하십시오.]
“메일 확인했습니다. 이민아라는 여자, 친동생인 게 확실합니까.”
일그러진 표정과 다르게 차분한 목소리는 우아하기까지 하다.
[네, 유전자 검사를 통해 만나게 된 친동생 맞습니다. 성은 입양했던 부모 쪽 성을 아직도 쓰고 있습니다.]
“아이에 대한 다른 사항은요.”
[다른, 사항이라고 하시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일단 결혼했었던 기록은 없지만 보신대로 윤은조 씨 호적에 올라 있습니다.]
“더 알아봐 주세요. 애 아버지는 누구인지, 생사 여부, 살아 있으면 어디서 뭘 하는지요. 그리고 뭐든 알아야 할 게 생기면 바로 연락 주세요. 시간 가리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어떤 개자식이 무책임하게.
밑도 끝도 없는 욕설을 내뱉은 재하는 소파에 몸을 묻으며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바보 같으니라고. 애를 왜.
.
.
흐트러진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 권재하가 선택한 것은 일이었다.
소파 위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발견한 건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 맥주를 찾으러 나왔을 때였다.
[010-7206-xxxx 윤은조 씨와 이민아 씨가 현재 서초경찰서 교통과에 있습니다.]
참 정확하고 간결해. 피식 웃은 재하는 들고 있던 차가운 맥주캔을 내려놓았다.
먼저 수행 비서를 호출했고 느긋하게 옷을 입었다.
경찰서로 향하는 길에는 사건의 내용을 파악했고. 당연히 입김이 작용할 만한 지인과의 통화도 마쳤다.
……윤은조.
가만히 그 이름을 입안에서 굴리는 것만으로도 짜릿한 전율이 일었다.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훨씬 쉽게, 그녀를 손아귀에 넣게 되었다.
이렇게까지 최악의 재회라니. 비소를 머금은 권재하는 검은 차창 밖을 응시했다.
최고급 세단이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