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애원 (5/100)


5. 애원
2022.06.16.


새벽의 경찰서 주차장.

드문드문 주차된 자동차들이 모양이 어스레하다.

경찰서를 막 나와 주차장에 도착한 젊은 남자들 중 하나가 입을 크게 벌렸다. 사진으로만 보던 최고급 브랜드의 세단을 발견해서였다.

유독 표면이 반짝거리는 검은 세단. 남자는 그 압도적인 존재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16583998818404.jpg

“와우 씨! 메르세데스 벤츠 S 800L이잖아! 쉣! 어떤 인간이 이런 차를 여기에! 와, 이거 실화냐!”

16583998818404.jpg

“좋아 뵌다. 많이 비싼 거냐? 미끈하네.”

16583998818404.jpg

“비싸기만 병x아! 국내 출시된 SW클래스는 풀 체인지 모델 출시를 기념으로 30대 한정 생산된 거야! 뭣도 모르는 게. 헐, 대박…… 소오름.”

16583998818404.jpg

“잘났다. 그렇게 잘 아는 새끼가 경찰서나 들락거리고. 엇! 만지지 마, 새꺄! 나온 지 이틀만 다시 들어갈래?”

16583998818404.jpg

“누가 안에 있는 거 같은데…… 맞지?”

꿈에서나 가져볼 만한 자동차에 손을 대보려는 남자. 놀라서 말리는 친구. 옳으니 그르니, 서로 목청을 돋웠다.

윈도우 틴팅이 짙은 자동차 내부, 운전석에 앉아 있던 박 실장이 뒷좌석을 향해 말했다.

16583998818404.jpg

“주의를 좀 줄까요?”

태블릿에 고정되어 있던 권재하의 시선이 차창 밖으로 움직였다. 무심하기 그지없는 눈빛이다.

16583998818435.jpg

“내버려 두세요.”

허허- 수행 비서인 박 실장이 멋쩍은 웃음소리를 냈다.

16583998818404.jpg

“그냥 가네요. 어린 친구들 눈에 꽤나 근사하겠죠.”

뻐근해진 뒷목을 주무른 재하는 태블릿을 꺼버렸다.

16583998818435.jpg

“실장님 담배 가지고 계시죠.”

16583998818404.jpg

“담배 태우시겠습니까? 안 피우시는 걸로 알고 있어서 따로 준비해 둔 게 없으니 이거라도, 좋은 건 아닙니다.”

박 실장이 건넨 담뱃갑을 가지고 차 밖으로 나온 재하는 바로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어둠 가운데 붉은 불씨가 생겨나며 그의 볼이 움푹 패었다.

권재하 변태 새끼같이. 창백하게 질렸을 얼굴 좀 보자고 한달음에 여기까지.

어쨌든 꽤나 극적이고 흥미진진한 재회가 될 것은 분명하다. 기대나 예상보다 더.

공중으로 뿌연 연기를 길게 흘려보낸 재하는 픽 웃어 버렸다.

제대로, 아주 빈틈없이 제 임무를 수행한 사설탐정이 떠올라서였다.

그런데.

애초에 윤은조에게 사람을 붙인 것도 자신이고.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하라고 말한 것도 사실이지만.

어떤 놈이 24시간 그 애 곁에 붙여서 시시콜콜, 속속들이 들여다본다는 사실에 스멀스멀 불쾌한 감정이 생겨나는 건 또 뭔가.

하! 미친놈. 대체 어쩌자는 건지.

깔깔한 헛웃음을 삼키는데. 달칵- 운전석 문이 열렸다.

16583998818404.jpg

“이 의원님이십니다.”

박 실장 손의 휴대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권재하는 예의 그 무심한 목소리를 냈다.

16583998818435.jpg

“이미 처리됐다고 전해주세요.”

상대가 들었으리라. 들었으면 또 어쩌겠나.

여유작작한 비소를 흘리며 공중으로 흰 연기를 뱉어내는 순간, 여자를 발견했다.

막 경찰서 출입문에 모습을 드러낸 가녀린 그림자.

잠시 두리번거리던 여자가 멈칫, 몸을 굳혔다. 멀찍이 어둠 속에 서 있는 불편한 인연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 몸짓을 온전히 느낀 재하 역시 어금니를 지그시 물었다.

윤은조.

그녀가 지금 바람에 나부끼듯 한들한들 달려오는 중이다.

가냘픈 몸이 금방이라도 톡 쓰러져버릴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
.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여자를. 드디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진짜 윤은조를 남자는 그저 느긋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16583998835609.jpg

“하아…… 어떻게, 하아…….”

얕게 고개를 끄덕인 권재하의 얼굴에는 반가움도 놀라움도 없다.

남자다운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던 담배는 구둣발에 짓밟히는 중이다.

16583998818435.jpg

“한국은 참, 여전히 살기 좋아.”

16583998835609.jpg

“…….”

정신이 없겠지. 재하는 아직도 숨을 가다듬는 여자를 향해 살며시 눈을 접었다.

16583998818435.jpg

“오랜만이야.”

누가 들을까 염려라도 하는 것처럼 속삭인다. 기억보다 더 낮고 그윽한 목소리였다.

은조의 크고 동그란 눈동자가 길을 잃고 헤맸다. 남자의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에서 눈으로, 코에서 입술로 다시 눈으로.

정말 그다.

권재하.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하지. 마른침을 넘긴 은조는 바닥에 짓뭉개진 꽁초를 멍하니 응시했다.

16583998835609.jpg

“여기, 경찰서 앞인데…….”

넌 정말. 여전히 그 권재하구나.

16583998835609.jpg

“오랜, 만이야. 그런데 어떻게 여길. 게다가 이렇게 늦은 시간에…….”

16583998818435.jpg

“그래. 꽤 늦었지.”

부드러운 목소리. 느긋하고 나른한 눈동자.

반듯한 수트 차림으로 최고급 세단에 기대서서 비스듬한 시선을 던지는 권재하.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어이없는 그림에 은조는 웃음이 터질 지경이었다.

이런 장소. 이런 시간. 이런…… 거지같은 상황이라니.

16583998835641.jpg

 
깜박. 깜박. 고장 난 가로등이 은조의 멍한 정신을 쿡쿡 찔렀다.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16583998835609.jpg

“……그게, 뭔가 오해가 생긴 것 같아. 그러니까 우리 민아가. 아, 민아는 내 동생이야. 그, 그러니까 내 동생이 밤에 운전을 하다가. 음- 하필 차도 그렇고- 그게 보험이 없나 봐. 그런데…… 민아가. 민아는 얼마 전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거든…….”

16583998818435.jpg

“안타깝네.”

16583998835609.jpg

“응…… 그래서, 혹시 이런 일로 발령에 지장이라도 생기면…….”

16583998818435.jpg

“안 되지.”

6년 만에 만난 남자 앞에서 하는 소리가 참. 옷자락을 꽉 움켜쥔 손가락의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16583998835609.jpg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까……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아. 아, 물론 사람이 다친 건…….”

창피해. 돌덩어리같이 무거운 숨이 간신히 넘어가고 말문이 턱 막혔다.

은조는 피가 터질 정도로 세게 입술을 깨물었다.

16583998818435.jpg

“은조야.”

16583998835609.jpg

“……어?”

16583998818435.jpg

“그냥 한마디면 충분해. 도와달라고.”

16583998835609.jpg

“……도, 와줘.”

재하의 새카만 눈동자가 더욱 짙어졌다.

가련한 짐승을 보듯 한껏 눈꼬리를 내려뜨리고는, 못 들은 것처럼 그녀 쪽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16583998818435.jpg

“뭐?”

16583998835609.jpg

“도와줘, 제발. 내가…… 뭐든지 할게.”

16583998818435.jpg

“듣기 좋다.”

16583998835609.jpg

“……응?”

16583998818435.jpg

“애원하는 거 듣기 좋아.”

팅, 라이터의 경쾌한 개폐음이 귓가를 때린 순간 은조는 알았다. 그가 나타난 이유를.

파란 연기 너머로 와 닿은 눈빛, 그 안에 옅게 깔린 것은 분명. 증오였다.

16583998818435.jpg

“알지? 내가 속이 없잖아. 윤은조 한정.”

16583998835609.jpg

“…….”

16583998818435.jpg

“그래도, 뭐든지 한다니까. 구미가 확 당기네.”

차가운 달빛 아래 벌겋게 물든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는 권재하. 시린 눈빛 아래로 흘리는 목소리가 퍽 다정하다.

16583998818435.jpg

“순진한 거야, 척하는 거야. 애까지 낳고.”

16583998835609.jpg

“애? 아, 우리……?”

우리? 순간적으로 눈썹 끝을 바짝 치켜세웠던 재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엔. 그러니까 한참 전엔 그 애가 ‘우리’ 애일지도 모른다고 잠깐 착각했었다.

이별을 앞뒀던 그 새벽마저, 엇갈리는 애증으로 시트를 더럽혔던 게 바로 그 ‘우리’였기 때문이다.

16583998818435.jpg

“네, 애.”

쯧. 가볍게 혀를 찬 권재하가 고개까지 설레설레 흔든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은조는 바짝 마른 입술을 감쳐 물었다.

16583998818435.jpg

“걱정하지 말고 가 봐.”

16583998835609.jpg

“…….”

엉켜버린 두 개의 시선. 일렁이는 검푸른 눈동자 때문에 은조는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저기- 재하가 고갯짓으로 어딘가를 가리킨다.

민아였다. 경찰서 출입문 근처 기둥에 기대선 그녀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16583998835609.jpg

“아…….”

깊은 숨을 밀어낸 은조가 머뭇거렸다.

16583998818435.jpg

“기다린다.”

16583998835609.jpg

“그래, 그럼 내가…….”

16583998818435.jpg

“네가.”

뭘 어쩌겠냐는 눈빛이다.

16583998835609.jpg

“아무튼 와줘서, 고마워. 변호사도…….”

16583998818435.jpg

“가 봐. ‘뭐든지’에 대해서는 다음에 얘기하자.”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인 윤은조가 몸을 틀었다. 올 때처럼 그렇게 바람에 나부끼는 꽃잎처럼 멀어진다.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는 권재하.

뭐든지……. 그래, 전부를 가질게.

네가 내쉬는 숨 하나까지도 전부 삼켜줄게.

***

변호사는 자신이 전부 알아서 한다고 말했지만 은조와 민아는 당연히 병원으로 향했다.

이틀째 병실에서 벌을 서던 오후에는 험상궂은 두 아들들과 다시 마주쳤다.

번들거리는 눈알을 굴리는 그들은 어쩐 일인지 입을 딱 닫고 있었다.
 

16583998818435.jpg

[한국은 참, 여전히 살기 좋아.]

 
돈만 있으면 말이야. 이제야 그 뒤에 생략된 말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다.

방법이 있을 거야. 은조는 고개를 떨군 민아의 손을 꼭 쥐었다.

죽겠다는 소리를 하며 응급실을 고집하던 할머니는 vip병실로 옮기고도 감은 눈을 뜨려 하지 않았다.

재수가 없었다.

대포차나 모는 건달이 걸린 것도. 새벽에 폐지를 줍던 할머니가 하필 그곳을 지난 것도. 그 할머니에게 질 나쁜 아들이 둘씩이나 있는 것도.

16583998835609.jpg

“…….”

16583998818404.jpg

“검사는 전부했어요. 결과적으로는 깨끗한데 본인이 고통을 호소하는 이상 더 두고 보는 수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상세한 설명을 한 담당 의사는 제 입으로 환자가 엄살을 부린다는 소리는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허리가 부러졌다며 우는 소리를 하던 할머니는 입맛이 꽤 좋은 모양이었다.

vip병실, 특식으로 채워졌던 식판은 매번 깔끔하게 비워졌다.

은조는 더 이상 병원에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

이틀 뒤.

낯선 번호의 전화를 받은 것은 빌딩 사이로 해가 막 숨어드는 오후였다.

‘에드워드 강’이라고 자신을 밝힌 남자는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상냥하지 않은 내용도 전했다. 대표님이, 즉 권재하가 그녀를 호출했다는.

16583998898798.jpg

[퇴근 후에 시간 되시면 차를 보내겠습니다.]

16583998835609.jpg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알려 주세요. 제가 직접 찾아가겠습니다.”

16583998898798.jpg

[아닙니다. 부담 가지실 것 없어요. 6시 30분 회사 정문, 괜찮으십니까?]

16583998835609.jpg

“네? ……네. 알겠습니다.”

이후 2시간 가까이 두근거리는 가슴 때문에 호흡이 다 불편할 정도였다.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고 평소처럼 입고 나온 옷도 왠지 거북하게 느껴졌다.

블라우스는 너무 하얗고 얇아 속이 비치는 것 같았고, 스커트는 유독 타이트하게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
.

오후 6시 20분.

1층으로 내려가기 전 화장실에 들른 은조는 등허리 위에서 풍성하게 물결치던 머리를 하나로 단정하게 묶었다.

도톰한 입술을 핑크 빛으로 물들인 립스틱은 티슈로 문질렀다.

이제 거울속의 그녀는 밋밋하고 창백한 얼굴이다.
 

16583998835609.jpg

[그저 재수가 없었어. 절대 네 잘못이 아니야.]

 
내내 민아에게 하던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정말 재수가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은 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6583998898821.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