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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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실
2022.06.20.
오후 3시. 커피를 한잔하기 적당한 시간이다.
24K, 순금 테가 둘러진 찻잔 두 개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헛기침을 한 강 비서가 이야기를 마저 이어갔다. 티 나지 않게 상사 권재하의 눈치를 살피면서.
“결론적으로 JS가 개발 중이던 항 스트레스 관련 천연물소재인 ‘CPS-270’이 문젭니다. 특허등록이 보류된데 대한 실망감에 매도세가 이어진 것이니까요.”
“전일보다 1.89% 하락이라…….”
팔짱을 낀 채 뽀얀 김이 올라오는 커피 잔을 쏘아보는 권재하는 분명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
“오후 2시 40분 기준 8만 6300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외국계창구는 10117주를 팔아치웠고요.”
“…….”
집중은커녕 이미 좁아진 미간을 더욱 일그러뜨렸다.
아! 오후의 약속을 떠올린 강 비서는 뒷머리를 쓸었다. 전화를 받은 상대방, 그러니까 윤은조의 목소리는 또 얼마나 어두웠던가.
뜬금없이 뉴욕에서 즐겨먹던 크레이프 케이크가 뇌리를 스쳤다.
증오와 애정, 다시 애정과 증오. 중간 중간에 끼어 있는…… 추억 또는 오해?
권재하와 윤은조가 켜켜이 쌓아 만든 케이크는 분명 쓴맛이다. 쓰레기는 버리고 새로 만드는데 정답인데.
문제는 당사자가 제 감정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표님. 개인적으로 솔직하게 한 말씀…….”
“아니. 솔직하지 마.”
관두라는 눈빛의 재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윤길은 아직 대답 없나.”
그러고는, 큰 손을 넓게 벌려 엄지와 검지로 관자놀이를 눌러댄다.
“오늘까지만 기다리지. 누구에게 관심을 몰아 줄 생각 없어. 길에 깔린 게 애널리스트잖아.”
“이미 긍정적인 대답 얻었습니다. 여기 들어오기 직전에요. 긍정적이다 못해 매우 흥분한 상태라고 알고 있습니다.”
코웃음을 웃은 권재하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최정예 소수인원으로 만들어질 권재하의 전략부대에 대한 소문은 이미 관계자들 사이에 자자했다.
난다 긴다 하는 메이저급 금융투자 회사의 수석연구원들이 엉덩이를 들썩거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블랙스톤 파트너스에서 그것도 대표 카일 J. 알렉시스의 직속 팀으로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누가 마다하겠는가.
일시적인 조직이긴 하나 진정한 스페셜리스트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라면. 애초에 권재하의 눈에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강 비서가 따듯한 커피를 후후 불며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던 재하가 제 잔으로 손을 뻗었다.
네, 좀 마시고 가라앉히시죠. 강 비서가 엷은 미소를 머금는다.
재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행을 결심하고 나서 더욱 예민하게 군 자신을 모르지 않는다.
굳이 이유를 갖다 붙이자면.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흘렀기 때문이다.
***
4시간 후.
W호텔 38층. 레스토랑 ‘씬 오브 파라다이스’
지금. 안 그래도 느린 그 시간이. 미치고 환장할 정도로 느리다.
빈 잔을 채워주러 다가오는 웨이터를 발견한 권재하는 손을 들어 거부의 뜻을 전했다.
커피만 몇 잔을 마시라고.
세상에 어떤 남자가 여자를 기다리느라 30분이나 일찍 레스토랑에 들어온단 말인가.
물론 차가 막힌 것을 감안하면 15분.
스스로를 합리화하던 그는 뻣뻣해진 뒷목을 주물렀다.
젠장. 하루가 48시간이어도 모자랄 정도로 빠르게 흘러가 버리던 게 권재하의 시간이었는데.
왜 이렇게 매 순간이 마치 슬로모션이 걸린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는가.
겪어 본적 없는 깊은 갈증 때문에 목이 탔고, 이유 없는 조바심으로 이가 갈렸다.
소파에 깊숙이 몸을 기댄 재하는 재차 시간을 확인했다.
어떻게 알았을까. 그 웨이터가 커피 팟 대신 물이든 유리병을 들고 나타났다.
얕게 고개를 끄덕인 재하는 채워지는 물 잔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오지 않는 여자를 기다리며 애를 태우는 병신들을 얼마나 많이 보아 왔겠는가. 실소가 터졌다.
병신 되기 참 쉽네.
어느새 표면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잔을 들어 올린 재하는 단숨에 반을 비웠다.
입안을 채운 냉기가 빠르게 머리를 식혔다. 내내 보이지 않던 도시의 야경이 눈에 들어왔지만 단 몇 초가 전부였다.
***
“도착했습니다.”
그 말에 얼어붙은 은조는 뒷좌석 문이 열리고 나서야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감사합니다…… 저, 회사로 가는 게 아니었나요?”
인사는 자동차 문을 열어준 제복차림의 도어맨에게. 질문은 밖으로 나와 있던 운전자를 향한 것이었다.
고개를 뒤로 한껏 꺾은 은조는 높다란 호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저는 이곳으로 모셔오라는 내용을 전달받았습니다.”
“……아.”
“혹시 뭐 불편하신 게 있으시면 제가 강 비서님께 연락을 취해보겠습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자, 그럼 저쪽으로 가시죠.”
“아니요, 어딘지 알려주세요. 제가 혼자 갈게요.”
손을 내저은 은조는 눈을 접으며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
.
‘씬 오브 파라다이스’
몇 번 그 이름을 들어본 기억이 있다. 물론 비싼 만큼 요리가 훌륭하다는 뻔한 내용.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은조는 입술을 터트려 웃어버렸다.
지옥의 한 장면을 선물하려고 너무 좋은 곳으로 불렀다.
하지만…….
권재하가 모르는 게 있다.
윤은조는 지옥보다 더 참혹한 곳을 이미 겪었다는 사실.
6년 전, 잔인하고 무자비한 장면을 선물한 사람이 본인이라는 사실.
이제 그가 주는 건 천국이건 지옥이건. 한 장면이건 여러 장면이건, 그녀에게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
무엇보다 이 모든 걸, 그는 영원히 모를 거라는 사실.
어쨌든…….
딩- 황금색 문이 열리는 것을 바라보는 은조는 생각했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하면 그만이라고.
“…….”
제법 조용한 며칠이었다. 자매를 물고 뜯어 조각내버릴 것처럼 굴던 작자들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돈이 해결 했을 것이리라. 미루어 짐작은 했지만 먼저 어떤 반응을 내놓을 처지도 못되었다.
결정적으로 권재하의 연락처도 몰랐다.
적어도 몇 천은 들었을 텐데.
어지럽다. 안전한 지상에서 위로 붕 떠오르기 시작한 순간부터 머릿속으로 하얀 안개가 빠르게 흘러들었다.
.
.
화려한 레스토랑 입구는 역시 지옥의 문처럼 보였다.
은조의 당혹스런 표정과 사뭇 대조적인 표정의 웨이터가 다가왔다. 이제 지옥으로 끌려가는 일만 남았다.
권재하. 그 고삐를 쥔 남자의 이름을 대자 웨이터가 앞장섰다.
레스토랑의 안쪽 중심에 다다른 은조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제 집 거실인 것처럼 느긋하고 편안하게 앉아있는 재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히 주인이었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레스토랑도, 그 안을 채운 사람들도. 심지어 7시 30분, 지금 이 순간 까지도 그의 지배하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반짝이는 도심의 야경마저도 그를 완성시켜주는 들러리로 보일 뿐이다.
넥타이를 생략했지만 셔츠와 슈트는 흐트러짐이 없는 모양새였고, 창밖으로 시선을 둔 얼굴은 높은 콧대와 날렵한 턱 선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몇몇의 사람이 드디어 나타난 남자의 상대, 은조에게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만약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 의자라도 빼주었다면 탄식이 새어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은조를 발견한 권재하는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미소로 그녀를 반기지도 않았다.
고갯짓으로 빈 의자를 가리키고 꼬고 있던 다리를 바꾸었을 뿐이다.
“좀 늦었지.”
“아냐.”
잠깐 은조에게 닿았던 무심한 시선은 다시 창밖을 향해 있었다.
“내가 아직 저녁 전이라.”
저녁은 먹었니-라고 물은 것도 아닌데 먹었다고 할까 말까- 은조는 눈동자를 굴렸다.
“…….”
“혼자 먹어도 좋지만 오늘은 말상대가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아서.”
“그래, 난 괜찮아.”
“정말?”
다시 돌아와 저에게 닿은 검은 눈동자. 은조는 빠르게 고개를 끄떡였다.
“응.”
“그럼 좀 웃어 보든가.”
어색하게 웃는 은조를 본 재하는 픽 입술을 터뜨리며 웃었다.
“연기여도 예쁘네. 내가 마음대로 주문했어, 괜찮지.”
“응.”
“응응- 말고 다른 말은 못해. 예쁜 입으로 앵무새도 아니고 같은 소리만.”
“미안.”
미안? 고개를 비스듬히 꺾은 재하가 은조를 빤히 바라보았다.
“윤은조가 사과를 하네. 그것도 너무 쉽게.”
“이제 어른이잖아.”
담담하게 말한 은조는 옅게 웃었다.
어리고 자존심 강했던 윤은조는 사과해야 할 일을 애초에 만들지 않았었다. 한때는 분명히 그랬다.
하지만 달라진지 오래다. 가족이라는 게 그런 거였다.
자기 자신보다 소중한 그들을 품에 안은 날 이후 은조는 달라졌다.
세상을 상대로 언제든.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낮추고 사과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자존심 따위 개나 준지 오래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거고.
은조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양손을 꼭 쥐었을 때 웨이터가 나타났다.
“……!”
낯이 익은 병 모양을 알아본 그녀는 삽시간에 붉게 물들어버린 얼굴을 푹 숙였다.
아름다운 기쁨. ‘BEAU JOIE’였다.
그때, 오래전 그때.
재하의 취향이었던 고급 샴페인은 바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술이 되었다.
같이 영화를 보면서도, 침대에 누워서도, 새벽녘 뜨겁게 젖은 두 몸을 겹친 상태로도 달콤한 기쁨을 즐겼었다.
분홍색 라벨마저 그 향기처럼 사랑스러운 부쥬아에 취해, 다시 입을 맞추고 사랑을 나누었다.
“샴페인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재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우아한 플루트 잔에 액체가 채워졌다.
“아직 좋아하지.”
“아…… 나 이제 소주 좋아해.”
“소주 좋지. 다음엔 그거로 해.”
심드렁하게 말한 그가 황금빛 기포가 솟아오르는 잔을 들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뭐 신나게 축하할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보인다.
“저기, 혹시 그 사람들한테……”
“응, 줬어. 돈.”
가늘게 떨리는 은조의 입술을 놓치지 않은 재하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자신의 잔을 다시 채웠다.
“어, 얼마나?”
“각각 2억씩.”
“뭐? 그, 그럼…….”
“6억. 진창을 피한 대가치고는 괜찮지.”
“…….”
“마셔. 힘 좀 빼고.”
기절이라도 할 것 같은 얼굴이네. 혼잣말을 한 그가 두 번째 잔을 비웠다.
권재하의 얼굴에 번지는 상쾌한 미소를 본 은조는 아주 소심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딸꾹.
그가 지배하는 수많은 것.
그것들이 저를 끌어 잡아당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