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부드럽고 아주 달다 (7/100)


7. 부드럽고 아주 달다
2022.06.23.



 
4일 전.

밤 9시.

블랙스톤 파트너스(Blackstone Partners) 한국지사.

8층에 위치한 넓은 집무실은 휑했다.

전임 대표가 사용하던 책상과 의자. 가져가지 않은 책들과 장식품이 몇 개.

주인이 떠난 그 방으로 안내 된 세 명의 사나이는 어색한 침묵 속에서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여차하면 경찰서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유도 없이 싸움질부터 할 것 같은 분위기다.


“형은 여기가 뭐하는 회산지 알아?”

먼저 입을 연 건 기진수. 아직도 병원 vip 특실에 누워있는 이광자 할머니의 두 아들중 하나다.


“내가 어떻게 알어, 새X야. 영어로 뭐라뭐라 써 있더만 넌 모르냐?”

다른 아들 기철수가 제 동생에게 핀잔을 놓더니 벽에 기대서있던 사나이를 힐끔거렸다.

대포차의 주인, 손버릇이 더러운 건달 조광중이었다.


“아, 뭘 야려? 한판 또 뜨자고?”

“에이 씨x 저 아가리를 확 그냥!”

기진수가 조광중에게 다가가며 주먹을 쥐었지만 형인 기철수가 사이를 가로 막았다.


“가만히 좀 있어봐! 얼마 불러야 할지 고민돼 죽겠단 말야!”

“…….”

경찰서에서의 장면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그들은 입고 있는 옷도, 하는 짓도 똑같았다.


“뭘 얼마를 불러. 지금쯤 짝퉁 환잔 거 다 뽀록났을 건데.”

조광중이 코를 후비적거리며 낄낄거리자 기철수가 눈을 부라리며 목청을 높였다.


“너는 도대체 왜 온 거야? 벌써 철창에 들어가 있어야 할 새끼가.”

“뭐어? 새끼이? 하! 이 형씨가 말을 참 곱게 쳐 바르시네! 내가 철장엔 왜? 뭣 하러? 댁들하고 놀아주러?”

얄밉게 빈정거리는 조광중에게 달려드는 기철수의 허리춤을, 이번에는 기진수가 냉큼 붙들었다.


“형, 참어. 근데 우리 돈 주려고 여기로 부른 거는 확실해? 누가? 그 안경잡이 변호사?”

“돈이라두 쥐여 줄 거 아니구선 이 야밤에, 뭐 하러?”

씩씩거리는 기철수의 눈이 불량하게 쭉 찢어졌다.


“그래, 그 여자들이 빽이 좀 있나 봐? 그건 그렇고, 저 문 밖에 서있는 애들 말야. 우리 이리로 데리고 온 쟤들, 깡패야?”

햐!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조광중이 중얼거리자, 화를 참는 형제가 동시에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
.

같은 건물 12층.

이제 막 새로 꾸며진 집무실에 권재하와 강비서가 있다.


“블라인드 좀 더 무거운 컬러로 바꾸고, 화분 같은 거 절대 들이지마. 귀찮아.”

“대표님이 키우실 것도 아닌데 뭐가 귀찮으십니까?”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귀찮아. 누가 굳이 보내겠다면 차라리 집으로 보내게 해.”

“아! 안 보이는데서 조금씩 말려 죽이시겠다, 그 말씀이시죠?”

“너.”

재하가 몸을 휙 틀자 강비서가 손바닥을 펴 입구 쪽을 가리켰다.


“이제 내려가시죠.”

 

.
.

딩, 엘리베이터가 8층에서 멈추었다. 재하를 따라 내린 강 비서가 속삭이듯 물었다.


“굳이 그리 부르신 이유가 뭡니까?”

멀쩡한 제 방 놔두고. 상사에게 조금 더 다가선 그는 귀를 쫑긋 세웠다.


“내 방 버리기 싫어서. 당연한 걸 묻고 그래.”

눈썹 끝을 한껏 추켜세우는 걸 보니 진심이다. 역시나 권재하답다.


“설마 주먹다짐이라도 하실 건 아니시죠? 추하게.”

“진짜 추한 게 뭔지 아직 모르나 본데. 오늘 잘 봐둬.”

모두가 퇴근해 조명의 반이 꺼진, 어두침침한 복도. 그 안으로 낮은 휘파람 소리가 번졌다.

마치 망자를 부르는 저승사자의 속삭임 같았다.

서울은 정말이지 매일이 위태롭다. 숨죽이고 살얼음판 위를 걷는 심정이랄까.

안경을 고쳐 쓰는 강비서의 시야 안으로 경호원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니, 저 분들은 뭐하게 부르셨어요? 주먹은 아니라고 하시더니.”

“쥐새끼들이 내 빌딩을 휘젓고 다니면 어쩌려고.”

이게 나빠서 길을 잃지 않겠어? 재하가 검지로 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허리를 숙였던 경호원들이 문을 열어 주었고, 빌딩 주인의 발걸음은 거침없다.

.
.



“가까이 와서 보시죠.”

육중한 나무 책상 위에 작은 종이 세 장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수표가 정확했지만 세 명의 사나이 중 누구도 쉽게 책상 앞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일단 책상에 앉아 있는 남자는 안경잡이 변호사가 아니었고.

키가 크고 늘씬했지만 단단하고 넓은 어깨가 운동 꽤나 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걸친 옷이며 구두까지. 사는 세상이 다른 남자였다.

게다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옆에 서있는 남자와 영어로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초장부터 기 빨리게.


[쥐들이 꽤 부끄러움을 타는군요.]

강 비서가 메모를 하는척하며 영어로 제 소감을 밝혔다.

톡. 톡. 톡. 긴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던 재하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저는 앞으로 10분 이상 시간을 쓸 생각이 없습니다.”

냉기가 감도는, 고저 없는 단조로운 목소리였다.

다짐한 듯 입을 앙다문 기철수. 튕기듯 제자리를 벗어나더니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일, 십, 백, 천, 만…… 억?”

그 소리에 기진수와 조광중도 득달같이 달려왔다.


“정말이네. 이, 이거 우- 아니, 저희 주시는 겁니까?”

“네. 그런데 제가 일단 사과부터 받아야겠습니다.”

권재하가 잔잔하게 웃는다.


“사과요? 어떤……?”

“사과가 뭔 줄 모르십니까.”

“아, 죄송합니다. 사과드립니다!”

“저도 사과드립니다!”

“이런 병신들. 뭔 줄 알고 사과부터 넙죽.”

지체 없이 달려와 놓고, 꼴에. 권재하의 쓴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조광중 씨, 그 쥐구멍만한 가게. [에디, 뭐더라?]”

[보통 pc방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pc방. 적자도 그런 적자가 없더군요.”

“뭐, 뭐요? 뒷조사 했어요?”

“딸까지 둔 양반이 그런 파렴치한 짓까지 저지르고.”

“그, 그건 내가 술에 취해서…….”

“그래요, 술.”

수표하나를 집어든 긴 손가락이 죽- 반으로 종이를 가르기 시작했다.

거의 두 조각이 나기 일보직전.


“아악! 그만! 자,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십쇼!”

허리를 숙인 조광중이 손바닥을 마주 비벼댔고, 그 모습을 본 형제들은 물색없이 낄낄거렸다.

무감한 얼굴의 재하는 의자에 깊게 몸을 묻었다.

삐걱- 끼이익- 생명을 다한 금속이 내는 기분 나쁜 소리가 넓은 공간에 울렸다.


“꿇어요.”

낮고 은근한 목소리였지만 분명 쇳소리만큼이나 차갑고 소름끼쳤다.


“……네?”

“안 들립니까, 꿇. 으. 라. 고. 했습니다.”

재하가 다시 시간을 확인하는 순간.

조광중의 무릎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뼈가 깨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지만.

두형제의 무릎도 빠르게 먼지 쌓인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후 정확하게 7분 동안 재하는 의자를 삐걱거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무릎이 꺾인 자들 중 누구도 감히 일어설 생각은 없어 보였다. 간간이 얕은 신음 소리가 들렸을 뿐이다.

***

딸꾹질 덕분에 물로 배를 채운 은조 앞에 에피타이저가 놓여졌다.

근사한 모양의 접시 가운데 한 입 거리밖에 안 될 것 같은 요리. 가리비 세비체였다.

상큼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지만 은조의 입안은 타들어 가는 듯 침 한 방울 고이지 않았다.


“먹어. 해산물 좋아하잖아.”

“……응.”

먼저 포크를 든 재하가 작은 조각 하나를 입으로 가져갔다.


“부드럽고 아주 달다.”

"……."

고개를 끄덕이는 은조의 낯은 더 이상 창백해질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질려있었다.


“고마워. 도와줄 수 있는 기회를 줘서.”

“응? 아냐! 내, 내가 고맙지. 그, 근데 6천도 아니고 6어-ㄱ 딸꾹-.”

제 물 잔을 밀어주는 재하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그득했다.


“생각 보다 좀 들긴 했지.”

은조는 냉수를 들이켜느라 고개도 끄덕이지 못했다.


“…….”

“그래도 입도 뻥긋 못하게 단속해 놓았으니 잘 된 거 아니겠어.”

정말 잘 된 걸까. 은조는 열감이 번진 손바닥을 차가운 유리잔에서 떼지 못했다.


“음, 살살 녹는다.”

작게 잘라져 들어간 사과가 아삭거렸다. 좋은 식감은 물론 상큼함을 더해준다. 은은하면서도 깊은 잣의 고소함은 풍미를 더했다.

그래도 입안으로 침이 고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 아래로 하얗게 드러나 있는 솜털 보얀 목덜미.

놀란 숨을 몰아쉬느라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두 개의 예쁜 둔덕.

테이블 아래로 얌전히 모아 놓았을 게 뻔한 날씬하고 가는 다리.

당장 이빨을 박아 넣어도 부족할 판에 보고만 있자니. 사실,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입술 끝에 매단 가식적인 미소가 얼마나 유지될지 의문이다.

재하는 은조의 하얀 손을 눈으로 천천히 쓸었다. 어쩔 수 없이 집은 작은 포크를 들고만 있는 모습이다.


“……내가 되도록 빨리.”

“빨리 뭐. 내줄 놈이 있는데 내가 끼어든 건가.”

느릿하게 냅킨으로 입가를 문지른 재하가 미간을 좁혔다.

알량한 인내심은 참 쉽게도 사라진다. 그저 다른 새X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역시 눈살을 찌푸린 은조가 포크를 내려놓자, 재하의 손안에서 냅킨이 구겨졌다.


“그렇잖아, 그 예쁜 얼굴이면 돈 6억쯤 내어줄 놈들이 줄을 서야 맞지.”

은조는 재하의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릴 적, 같이 사는 동안에도 그는 종종 이랬다.

잘해주다가도 심사가 꼬이면 어깃장을 놓기 일쑤였다.

그게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덩치만 큰, 애정을 갈구하는 어린애 같아서.

하지만 지금은 그저 얄밉다.

6억이라니…… 어떻게 갑자기 나타나서는.

아……. 은조의 눈빛에 엷은 의심이 고였다. 몇 개의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섞였지만.

지금은 끼워 맞출 여력이 없다.


“……시간을 좀 줘. 방법이 있을 거야.”

“없어.”

“…….”

“너, 방법 없다고.”

“없길 바라는 건 아니고?”

“아마.”

건성으로 대답한 재하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재킷의 단추를 잠갔다.


“나가자. 입맛 가셨어.”

어차피 있지도 않았던 입맛. 은조는 냉큼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내가 알아서 갈게. 아무튼 잘 먹었고 내가 조만간…….”

이미 성큼성큼 앞장서서 걷기 시작한 재하는 그녀의 말을 들을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레스토랑을 벗어나 엘리베이터 앞에서 멈춰선 그가 문득 몸을 돌렸다.


“단번에 갚을 방법이 있는데.”

“……?”

놀라기도 전에 뜨거운 숨이 귓가를 스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