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아주 못쓰겠어 (8/100)


8. 아주 못쓰겠어
2022.06.27.



“내 방, 바로 아래층이야.”

귓가를 간질이는 숨결에 온몸의 솜털이 바짝 일어섰다.

잊은 줄 알았던 남자의 관능적인 체취가 단숨에 은조를 얽어맸다.

역시 완전히 잊혔다고 믿었던 느낌. 가슴이 떨리고 뱃속에서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야릇한 감각에 숨이 막힌다.


“……적당히 해.”

동그란 눈을 치켜뜬 은조는 있는 힘껏, 눈앞에 있는 단단한 가슴을 밀쳐냈다.


“너한테 그런 게 됐으면.”

밀려나기는커녕 더욱 바짝 다가온 재하가 고개까지 비스듬히 숙였다.


“좋게.”

“…….”

“그런 게 가능했으면 여기 있지도 않아.”

코끝이 닿을 듯 말 듯 위태로웠지만 은조 또한 물러서지 않았다.


“……내 동생 사고, 우연 맞아?”

“뭐?”

“이제 보니, 정말 이상하잖아!”

하! 깜찍하긴. 재하의 진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표정. 뭐야? 뭔가 있어! 안 그래? 설마 나를, 나를…….”

딸꾹거리던 윤은조는 어디로 갔는지 당장 달려들 것 같은 표정으로 씩씩 거린다. 깊고도 먼 기억. 그 안에 있는 그 모양 그대로였다.


“너를 엿 먹이려고 미국에서 왔을까, 내가?”

“더한 것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 알아.”

“취미로 소설 같은 거 쓰나보다.”

“아니! 말 돌리지 마.”

“알아봤어.”

“이것 봐!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 비열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아본 게 비열하다면, 할 말 없고.”

“……뭐?”

“납골당이 아니고 경찰서여서 좋았는데, 나는. 재회의 장소로 말이야.”

역시. 경찰서라는 소리에 눈동자가 흔들린다. 픽 웃은 재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은조의 볼을 톡 건드렸다.


“어른이라더니 아직 애네.”

“……누가 누구더러 애래.”

“엄밀히 따지면 내가 오빠 맞잖아.”

“…….”

말문이 막힌 은조는 남자의 손가락이 스친 뺨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10살에도. 22살에도. 짓궂은 권재하는 날짜까지 일일이 계산하며 제가 오빠라고 고집했다.

마주 닿아 있는 두 시선이 여리게 진동했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고, 부드러워진 공기는 폭신하다.

오빠가 아니라 하느님이라고 불러야 할 상황인가. 은조의 눈꼬리가 힘없이 쳐졌다.


“오, 오…….”

“됐어.”

이제야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재하가 사양하겠다는 식으로 커다란 손을 내저었다.


“뭐가?”

“억지로 오빠소리라도 하게? 그깟 3 아니, 6억 때문에?”

억지로라도 듣고 싶은 것처럼 군 게 누군데. 그놈의 오빠 타령은 미국물을 잔뜩 먹어도 절대 고쳐지지 않는 고질병이다.


“아니, 오. 늘 저녁 잘 먹었다고 말하려던 건데.”

“뭘 먹었는데. 아, 냉수!”

근처로 다가온 사람들 때문에 입을 다문 은조는 시선을 발끝으로 내렸다.


“아이, 부럽다. 그쵸, 여보. 우리도 사랑싸움 많이 했잖아. 당신이 좀 질투가 많았어야지.”

남편에게 속삭인 중년 여성은 은조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기까지 했다. 이해한다는 식으로.

허허, 웃은 노신사가 재하를 향해 눈인사를 건넸다.

역시 점잖은 눈빛을 건넨 재하는 은조의 팔꿈치를 잡더니 제 쪽으로 바짝 끌어 당겼다.


“돈도 명예도 다 필요 없는데. 젊었을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말이에요.”

“그럼, 핸드백 주문해 놓은 것부터 취소합시다.”

“어머! 이 양반이.”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속살거리는 그들은 꽤 다정해 보였다.

구석에 박혀 너른 등만 바라보는 은조는 이유 없이 저릿해진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이유는……. 당연히 6억이다.

왜! 남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왜 신경 써! 왜, 제 기준을 적용하는데! 6억이라니. 도와 달라고 하는 게 아니었어.

하지만, 후회와 동시에 떠오르는 험상궂은 얼굴들…….

딩.

작은 소리에 놀란 은조는 지하 3층에 도착한 것을 알았다.

재하가 열림 버튼을 누른 채 그녀가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나 그냥 전철 타면 되는데. 얼마 안 걸려.”

“잔말 말고 내리자.”

입술을 감쳐 문 은조는 무거운 발을 움직였다.

목소리는 제법 나긋했지만 내려다보는 눈빛에 여전히 열기가 그득했기 때문이다.


 

.
.



“……그분은 가셨구나. 나 여기 데려다주신 박 실장님.”

호텔에 올 때 탔던 차가 아닌 다른 차의 보조석에 앉은 은조는 어색하게 안전벨트의 버클을 쥐었다.


“왜, 있었으면 좋겠어. 부를까 퇴근한 사람.”

“…….”

더 괴팍해졌어. 아주 못쓰겠어. 입을 꼭 다문 은조는 눈을 내리깔았다.

주소도 묻지 않고 차를 출발시키는 걸 보니 채무자의 주소 정도는 이미 파악했나 보다.

차가 막히지 않으면 30분.

음악을 감상할 처지는 아니지만 라디오라도 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애꿎은 입술만 잘근거리는 은조는 그저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를 응시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미간을 좁힌 그는 다른 생각에 빠진 듯 보였다. 차가 움직이는 내내 별말이 없었다.

***

김남희의 커진 눈이 운전 중인 남편 최병현에게 향했다.


“블랙스톤 파트너스요? 아, 햄프턴 대신.”

“응. 실물이 낫더군. 긴가민가했는데.”

“세상에, 너무 젊던데. 물론 나이랑 실력은 상관없지만. 그나저나 진짜 보기 좋았어요. 부럽고.”

“연애하고 싶다고? 나랑 하는 거 아니었나?”

“아휴, 주책은. 선우 말이에요. 당신 보기에는 어때요? 내 느낌에는 아무래도 누가 있어.”

“있으면 경사지.”

“선우가 돌잡이로 당신 안경 잡은 게 엊그제 같아요. 그런데 우리 선우한테 아이가 생긴다고 생각하면.”

“울겠어요. 김남희 여사.”

곱게 눈을 흘기는 아내를 본 최병현이 따듯하고 듣기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아들 최선우가 그대로 물려받은 그것이었다.

***



“어! 저기, 저 흰 차 뒤에서 내려주면 돼.”

누르고 눌렸던 숨을 터트린 은조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재하의 검은색 세단은 우아하게 그녀가 원한 자리에 멈추어 섰다.

안전벨트를 푼 은조는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보일 듯 말 듯 작은 미소도 만들었다.


“있잖아. 나 진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아무리 친구 사이어도 그렇게 큰…….”

“누가.”

“어?”

“우리가 친구였나.”

정면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재하는 마치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래, 그럼 옛정을 생각…….”

“한 번도 친구인 적 없었어. 앞으로도 친구 같은 거 아냐.”

“…….”

“nothing. 아무것도 아니지.”

이제야 은조에게로 돌아온 시선은 마른 낙엽처럼 서걱거렸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길가에 뒹구는 돌멩이를 바라보는 그런 무심한 눈빛이다.


“그, 그래. 편할 대로 아무렇게 생각해도 상관없어. 음……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니, 부탁은 시간을 좀 달라는 거야.”

재하가 코웃음을 웃었다.


“너 내가 시간당 얼마를 버는 놈인지 알기나 해. 내 1분 1초는 남들의 그것과 달라.”

남보다 못한 ‘낫띵’. 은조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너무 잘 알아. 그래서 부탁하는 거야.”

느긋하게 핸들 위에 올려진 커다란 손을 바라보고 있자니 바보같이 또 딸꾹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부탁이라…… 좋아.”

“좋아? 시간을 줄 수 있다는 거야?”

“아니.”

“……그럼, 뭐가.”

“고용할게.”

“……뭐?”

내가 너를. 재하는 당황해서 점점 크게 벌어지는 은조의 눈을 재미있는 구경거리 보듯 바라보았다.


“난 하루에 셔츠를 두세 번 갈아입을 때도 있어.”

조금이라도 찝찝한 거 딱 질색이야. 남자의 상체가 은조에게로 기울었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

“그런데 마침 마음에 드는 사람을 아직 못 구했어. 너는 운이 좋다.”

“세, 세탁 같은 거 하면 되는 거야?”

“가사 도우미라고 하던가. 집안일 이것저것. 잡일.”

아아. 잡일. 명문대 졸업해서 전문직에 있는 윤은조를 잡부로 쓰겠다는 소리였다.

아무 일이나.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아옹다옹 투덕대는 다온이와 민아의 모습에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겹쳐졌다.

아, 지금도 집에서 나를 기다리겠네. 은조는 잠깐 아파트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당연히.


“할 수 있어. 할게.”

“그럼. ‘뭐든지’라고 네 입에서 나온 말이 있는데.”

“……맞아. 그런데 마음에 드는 사람을 구하기 전까지 순수하게 내가 도와주겠다는 거야.”

“도와줘? 네가 나를? 그것도 순수하게.”

순수하게. 되뇐 그는 당장 터질 것 같은 웃음을 간신히 누르는 얼굴이다.

은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래, 나의 1분 1초는 그리 대단하지 않아. 네 그것과는 다르겠지. 하지만 잡역부 노릇으로 6억 빚을 갚을 수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어. 돈은 돈으로 갚을게.”

“잘 들었어.”

“……뭐?”

“그만 가봐.”

따로 연락할게. 이미 고용주 노릇을 시작한 그의 목소리는 꽤 냉랭했다.

돌아가는 상황이 매우 애매했지만 ‘아니!’를 외칠 배짱도, 돈도 없는 것은 확실하다.


“……아무튼 고마워.”

금세라도 부서질 것 같은 여린 목소리로 감사를 전한 은조는 얌전히 차에서 내렸다.

쯧- 누가 당장 잡아먹겠대.

혀를 찬 재하는 저만치 멀어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가는 어깨가 축 처진 처량한 모양이다.

이미 죽은 목숨 맘대로 밟아보라는 건가. 그녀의 반응이 영 마땅찮다.

재미없게. 21살 윤은조였다면 쌍심지부터 켜고 같잖은 발톱이라도 드러내고 보았을 텐데.


“…….”

아마 아이 때문이리라.

동생 문제로 회사에 휴가를 낸 것을 알았다. 쓸데없이 병원에 들락거린다는 얘기도 들었고.

그래서 그저 충동적으로 윤은조가 사는 곳이 궁금해서 왔다가, 보고 말았다.

그러니까 며칠 전. 재하는 지금 이 자리에 멈추어 선 유치원 차량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엄마!]

 
노란 차에서 내린 녀석은 우렁차게 소리를 지르더니 팔을 벌린 윤은조의 품으로 쏙 들어갔다.
 


[썬샤인, 마이 썬샤인! 뽀뽀해줄래요, 뽀뽀해줄까요?]

 
참새처럼 높은 소리로 쉴 새 없이 지껄이는 아이와 입을 맞추고 뺨을 부비는 그녀의 모습은 가히 충격 그 자체였다.

그렇게 행복하게 웃는 모습은 제 기억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권재하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다른 빛깔의 만족과 기쁨이었다.

무슨 짓을 해도. 결코 바랠 것 같지 않은 찬란한 빛이었다.

확 치솟는 조바심 때문에 내장이 뒤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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