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불쾌한 결론
(9/100)
9. 불쾌한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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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불쾌한 결론
2022.06.30.
은조에게 선물을 주려던 것뿐이다.
남들 다 들고 다니는 그 잘난 명품 백 하나 없는 언니가 안쓰러워서 대리 운전을 했다.
새침한 윤은조에게 잘 어울릴 게 분명한 세련된 블랙. 금장으로 된 로고와 체인 스트랩이 너무나 고급스러운.
“망할 챠넬!”
민아는 애꿎은 건조기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자꾸 나가는데? 세상 험한 거 몰라? 집에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내가 대리 알바만 얼마를 했는데, 걱정도 팔자다.]
[다온이나 좀 더 챙겨, 맛있는 간식도 만들어 주고. 집에도 할 일이 얼마나 많아. 베란다 청소라도 하든가!]
[깨끗한 베란다는 왜 자꾸 닦으래? 누가 핥으러 온대? 아무튼 언니는…… 으- 잔소리쟁이.]
띠로로- 띠로로-
건조가 끝났다는 알림음이 울렸지만 민아는 한동안 베란다 내부를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었다. 깔끔하기 그지없다.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입양이 된 갓난아이. 이민아.
그래서 부모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저를 입양해준 양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부였다.
뒤늦게 자신들의 아이가 생기자 찬밥 취급했지만…… 다 지난 일이고 괜찮다.
이미 언니를 키우고 있었던 친엄마는 어쩌다가 나까지 가지게 되었을까.
“그냥 낳지를 말았어야지. 언니나 잘 키웠음 좀 좋아.”
건조기의 뚜껑을 연 민아는 본 적도 없는 엄마를 원망하고 있었다.
밤낮으로 일을 하는 엄마 때문에 은조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고 기억했다.
그리고 갑자기 많은 약을 먹었다는 것.
대충 짐작이 가는 상황이다.
그래도 민아는 친부모 못지않은 언니를 만난 사실에 그저 감사하고 있다.
출산예정일을 겨우 2주 앞둔 상태에서 기적처럼 은조를 만났다.
아이 아빠에 대해 굳게 입을 다물어서였을까. 민아는 꽤 긴 날들을 소리 없는 눈물로 적시는 은조를 지켜봐야 했다.
처음에는 어린 동생의 사정이 딱하고 답답해서인 줄만 알았는데.
그 가슴을 저미는, 소리 없는 눈물의 이유를, 같이 살고 3년이 흐른 후에나 들었다.
절대 안 된다는 민아를 어르고 달래, 다온이를 제 호적에 넣은 지 3년 만에 말이다.
그것도 아주 살짝만 알려준 정도였다. 누군가를 많이 좋아했고. 지독하게 아팠고. 다 잊었다고.
그 분야라면 이민아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텐데. 애까지 낳았으니.
그건…… 몇 줄 설명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초긍정적인 성격의 이민아도 ‘다 잊었다’는 부분은 특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눈을 피하며 하는 말이라면 더욱.
지독하게 아팠던 일을 어떻게 다 잊는단 말인가. 무뎌지는데도 지독하게 오랜 시간이 걸릴 텐데.
아무튼 윤은조는 그때 이후로 운 적도 없고 얼굴을 찌푸린 적도 없다.
다온이가 세상에 나온 날 딱 하루는 왠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지만…… . 이후로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내내 씩씩함 그 자체였다.
“자매가 쌍으로 아주 바보 멍충이지, 뭐!”
마치 이전에 아이를 키워 보기라도 한 것처럼 웬만한 일에는 놀라는 법도 당황하는 법도 없었다.
민아를 대신해 미혼모 딱지를 달고도 퍽 꿋꿋했다.
[괴로울 것도 슬플 것도 없어. 지나고 보니까 우는 것도 한가할 때 얘기 같아.]
잘 마른 빨래를 착착 접던 민아는 문득 그 이름을 입에 올려보았다.
“……권재하.”
역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집 회사 집 회사- 민아가 모르는 은조의 일상은 없었다.
과거에서 온 남자가 분명한데…….
경찰서 밖으로 뛰어나갔던 은조는 멀찍이서 봐도 꽤나 훤칠한 남자와 서 있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이었지만 두 눈을 새빨갛게 물들인 언니의 얼굴이 생생하다. 그런 눈으로 억지 미소라니.
이제 슬슬. 울지 않는 아니, 울지 못하는. 언니가 걱정이 되는 지경이다.
“어디가 고장이라도 난 건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던 민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오른쪽 허벅지를 더듬던 손이 떠올라서였다.
술에 취한 건달이 뒷자리가 아닌 조수석에 앉았을 때 바로 차에서 내렸어야 했다.
정면에서 눈을 돌린 건 찰나였다. 들러붙은 징그러운 손을 떼어낸 순간 길에 들어선 그림자를 발견했다.
다시 생각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변호사 아저씨가 괜찮다고 했지만 그래도 돈이 들겠지?]
[돈이라도 쥐여주고 끝나면 다행이야. 너 임용에 지장이라도 생기면 내가 못 살아. 걱정 마, 언니가 해결할 거야.]
[뭘 언니가 해결해? 엄마 같은 소리 좀 이제 그만해! 재판이라도 해야 된다면 할 거야! 나 억울하다고!]
[재판 같은 소리 입에 담지도 마. 그 사람들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이긴다고 해도 너한테 좋을 게 없어.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고.]
“흐…… 미치겠다.”
민아는 아담하지만 예쁘게 정리되어 있는 집 안을 둘러보았다.
오래된 작은 아파트가 새삼 소중하게 느껴졌다. 은조가 왜 그렇게 금이야 옥이야 문지르고 광을 냈는지, 사라질지도 모를 판국이 되니 이해가 간다.
제길! 이민아! 어쩔 거냐고!
***
집/절대 안 돼. 통장/8천. 자동차/330.
은조는 메모장 위에서 깜박거리는 커서를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더 이상 적을 내용이 없다. 돈이 될 만한 것이 없다는 얘기다.
명문대를 수석으로 졸업. 든든한 직장과 커리어 보유. 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
그동안 가진 게 적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오히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이 날 정도로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민아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물론 아이가 크고 있고 앞으로 들어갈 돈이 더 많지만.
비록 대출이 반이고 작긴 해도 내 집이 있다. 아이는 건강하고 똑똑한 데다 밝고. 든든한 직장을 얻으면 민아는 좋은 남자를 만나서 더 행복해 질 수도 있다.
“하…….”
어떻게 이래! 어떻게 이렇게 스위치를 딱, 누른 것처럼 한방에 깜깜해질 수가 있지.
1억이 안 되다니……. 윤은조 너 정말 가진 게 없구나. 아니, 가진 돈이 없구나.
보통 이 나이에 이 정도인가. 아니, 내가 이 정도인 거야. 나…… 되게 열심히 알뜰하게 살았는데.
잊고 있었다. 윤은조가 딛고 있는 인생은 한겨울 차디찬 맨바닥이라는걸.
아냐. 은조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밀려오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은조 씨. 어디 안 좋아?”
안경 너머로 은조를 바라보는 장신애 팀장의 눈초리가 날카롭다.
“아니에요.”
장 팀장을 바라보던 은조는 속으로 말해보았다. [팀장님, 돈 좀 빌려주실 수 있으세요?]
알고 지낸 시간도 꽤 되고. 아쉬운 소리를 할 수 있는 정도로 허물없긴 한데. 소리도 없이 해본 말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세상을 상대로 삶을 상대로, 낯이 꽤 두꺼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은조는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커피 쏠게요. 머리도 무겁고 달달한 게 당기네요. 장미 씨, 캐러멜 마끼아또 어때? 휘핑크림 듬뿍 올려서.”
“콜입니다!”
“다른 분들도 톡으로 메뉴 쏘세요.”
은조는 쫓기는 사람처럼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
.
모두가 퇴근한 디자인실에 은조가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온통 다른데 신경을 쓰느라 시간을 허비한 대가다.
역시 퇴근 전인 다른 부서의 직원들이 유리문 너머로 오고 가는 모습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
.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에 시선이 움직였다. 열려있는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본 은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원영 본부장이다. 그는 이성춘 회장의 막내아들로 1년 전 새로 개편된 부서의 책임자 자리에 앉은 인물이다.
“아직 퇴근 전이네요.”
“네.”
그는 ‘천연물융합연구 개발본부’를 만들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분리되어 있던 전략기획실과 의학연구 개발본부를 합쳐 새로운 부서를 만들었다.
유명한 글로벌 제약회사에 소속되어 있던 이원영은 스카우트 된 경우다. 회장의 아들인 건 맞지만.
“……은조 씨.”
“네, 말씀하세요.”
새삼스럽게 뜸을 들인다. 같은 층을 사용하기 때문에 거의 매일 보는 사이인데.
“저녁 약속 있어요? 아니면 할 일이 남았나요.”
“할 일이 남았었는데 이제 다 끝났어요.”
솔직하게 말한 은조는 엷게 미소 지었다.
좋은 사람이다. 능력 있고 친절한 데다 선을 지킬 줄도 아는.
“시간이 늦었는데 배고프지 않아요? 도시락이 도착했는데 여유가 있거든요. 같이하시죠.”
남자의 눈길이 은조가 입고 있는 단정한 블라우스의 리본 카라에 머물러 있었다.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집에 가서 먹으려고요.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거든요.”
“아, 기다리는 가족, 부럽네요. 그래요, 그럼 다음에.”
담백하게 인사를 마친 본부장은 바로 등을 돌렸다.
노트북의 전원을 끈 은조는 생각했다. 그런 다음은 없다고. 지금처럼 앞으로도.
더군다나 잘나고 대단하신 로열패밀리. 거저 준다 해도 관심 없었다.
서둘러 겉옷과 핸드백을 챙긴 그녀가 혼잣말을 뱉었다.
“……충분히 힘들어요. 제발 내버려 둬 주세요. 부탁입니다.”
회사 내에서 윤은조는 철벽 치는 여자로 유명하다.
예쁜 얼굴에 날씬하고, 차분한 행동거지며 예쁜 목소리까지. 첫눈에 반해 멋모르고 들이댔다가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새로운 얼굴이 등장한다는 것은 참 골치 아픈 사실이다.
지난달에도 지나치게 화려한 꽃바구니를 받았다. 어느 부서 신입이었는데 정보를 얻기도 전에 행동이 앞섰던 것이다.
윤은조는 아이가 있는 이혼녀라는 소문이 이미 돌았다. 반만 맞는 얘기지만 부정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남자를 만날 생각은 없으니까.
“……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은조는 큰 종이가방을 들고 다가오는 이원영을 발견했다.
“제일 인기 있는 메뉴로 세 개. 가족들이랑 먹어요. 돈가스는 아이가 좋아할 거예요. 나도 좋아하긴 하지만.”
멋쩍게 웃는 그가 얼른 받으라는 듯 가방을 살짝 흔들었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이미 등을 돌린 그가 손을 흔들었다.
.
.
[그렇잖아, 그 예쁜 얼굴이면 돈 6억쯤 내어줄 놈들이 줄을 서야 맞지.]
……본부장 정도의 남자가 연인이었다면.
핸들을 잡은 은조는 고개를 세게 가로저었다. 하다하다 별.
하지만…… 불편하고 불쾌한 결론이 손짓하는 게 보였다.
어서 오라고.
쓸데없는 생각은 넘치도록 충분히 했으니 집어치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