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결정적인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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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결정적인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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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결정적인 시기
2022.07.04.
블랙스톤 파트너스 빌딩 6층 D회의실.
새 대표가 선임되고 첫 번째 임원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송 부회장과 차남 송남준이 힘을 합쳤습니다. 엊그제 임시 주주총회 소집을 요구했다고 하니까 결국 경영권 분쟁이 재점화 된 겁니다.”
넓고 긴 테이블 상석에 앉아 있는 권재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듣고 있고 동의한다는 듯.
블랙스톤에서 관심을 갖고 있는 신선식품 배송 전문 업체 ‘온테이블’에 대한 이슈에 갑론을박이 펼쳐지고 있는 중이다.
“그거야 지분 매각에 필수적인 기업 실사 등 협조를 요구했지만 협조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죠. 송 부회장 측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지분 매각에 긍정적인 의사를 보인 이사진을 모아서 경영권 매각을 추진할 겁니다.”
노트북 모니터에 시선을 둔 재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 시작과 동시에 정확한 한국어로 짧은 인사를 했을 뿐 내내 논의 내용과 관련해 별다른 의사 표현도 없다.
왜냐하면, 다 알고 있으니까.
출근하는 자동차 안에서 오늘 회의와 관련된 서류를 전부 읽었다.
연관이 있는 정보를 전부 찾아보고 결론을 내리는데 시간이 얼마 들지도 않았다.
이렇게 여럿이 둘러앉아 시간만 까먹을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맛있는 먹잇감인 걸 뻔히 알면서.
잡아먹을지 말지 망설이며 영양가 없이 침을 튀기는 꼴이다. 차라리 경쟁사에서 물어가 버릴 확률을 계산하는 게 빠를지도 모르겠다.
“일부에선 매각 추진설을 아예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송 부회장의 행태를 보자면 경영권을 확보하고 나면 언제 매각 얘기를 했냐는 식으로 경영 복귀를 추진할 가능성이 높아요. 송남준이 지분 17.42%가 결국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겁니다. 송 부회장이 올해 초 무배당에 대한…….”
그래도 다시 고개를 끄덕여 준다.
마치 나름대로 노력하는 자식들을 쉽게 나무라지 않는 부모 같은 심정이랄까.
그래.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내용이라는 사실 만으로도 칭찬을 해줘야 할지도 모른다. 아예 틀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면 벌써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테니까.
마음도 이미 딴 데 가 있는지 오래고.
큽.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린 권재하. 모든 시선이 일시에 그에게 쏠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계속하시죠.”
50대 중후반 임원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같은 표정이다. 진땀을 흘리는 그들을 향해 새 대표는 손짓을 해 보였다.
계속해.
어차피 얼굴이나 익히려고 모인 형식적이 자리였다.
한국식으로 술판이나 벌이자는 속뜻이 뻔한 환영회도 보류해 놓은 상태였으니.
전임인 햄프턴을 따라 미국으로 돌아간 1명, 비슷한 시기에 퇴직을 한 임원 2명을 제외하고 18명.
강 비서를 통해 모여 있는 18명의 업무성과와 능력, 특별히 알아야 할 개인적인 이슈를 보고 받았다.
지금 열성적으로 발언을 하는 김 이사는 유학파로 추진력이 뛰어나다. 저만의 노하우로 꽤 그럴듯한 업무성과를 만들어 놓았다.
제 아래 있던 나이 어린 비서를 꼬드겨 두 집 살림을 하고 있다는 게 흠이라면 흠일까.
[입사 전에 배우를 지망했을 정도로 꽤 이목을 끄는 외모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 여기…….]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는 여자의 사진이었다.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 수컷들이다. 본능에 충실한 반응이니 무조건 비난을 할 일은 아니지만.
가정에 충실한 아내와 자식들을 두고.
권재하의 시선이 제 의사를 피력 중인 김 이사에게 가 닿았다.
만삭의 몸으로 카트를 밀고 있던 여자. 그 얼굴 위로 갑자기 윤은조의 얼굴이 겹쳐졌다.
“It was super boring.”
40분.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 재하는 쥐고 있던 만년필을 안주머니에 넣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뻔한 결론을 두고 하는 병신 짓에 장단을 맞추어 주는 것은.
내내 잘 듣고 있던 신임 대표가 ‘정말, 최고로 지루했다’고 혼잣말을 했다. 근처에 앉았다는 죄로 알아들은 이들은 반쯤 사색이다. 바로 입을 닫은 김 이사도 대표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저는 이만 일어서겠습니다. 더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면 계속하시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가 회의실 문을 닫기 직전이었다.
재하와 움직임을 같이한 강 비서가 옆으로 바짝 붙으며 말했다.
“여전히 매너가 없으십니다.”
“여전히 돌직구십니다. 짜식.”
“짜식이라뇨. 여긴 회삽니다. 대표님.”
“놀고 있네. 강 비서님, 이연경이한테 전화 좀 연결해 봐요.”
“한창 바쁠 텐데요.”
“그건 걔 사정이고 난 하루라도 빨리 내 집에 들어가고 싶거든. 어서.”
집에 들어가야. 뭘 어떻게 해도 하지. 망할 호텔 생활이 지겹기도 하고.
대체 무슨 생각인지 고집쟁이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애원이 벌써 끝난 건가. 어쩌려고.
강 비서가 들고 있는 휴대폰을 통해 뚜르르- 뚜르르- 신호가 가는 소리가 재하에게까지 들렸다.
이내 왜, 하는 퉁명스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잠깐만. 네 클라이언트께서 통화를…….”
[네? 네라니? 너 자꾸 맞먹을…….]
과장되게 몸서리를 치며 휴대폰을 건네는 강 비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재하가 피식 웃었다.
“너희들 그냥 사귀는 건 어때? 괜히 진 빼지 말고.”
재하의 말에 강 비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지, 또 부정도 하지 않는다.
상대도 마찬가지다.
[뭡니까? 바빠 죽겠는데. 뭐가 궁금하신 건지 빨리 말하세요.]
“뭐겠어. 진짜 몰라서 묻는 건가.”
[아니, 권재하 씨. 저거 다 옷 맞죠? 무슨 옷이 저렇게 많아요? 대체 상자가 몇 개야? 내일까지 마친다는 말 취솝니다.]
권재하는 저를 허물없이 대하는 몇 안 되는 인물들 중 하나. 곁에 있는 에드워드 강을 먼저 쏘아 보았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 수화기 너머의 이연경을 향해 으르듯 말했다.
“기한을 미룬 게 이미 세 번째야. 더는 안 돼.”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자재를 골고루 원한 건 님이세요! 이 집은 원래도 건축가가 지은 집이라서 굳이…….]
“그게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할 소린가. 그래서.”
[오늘 다 마칠 생각이었는데 드레스 룸에 들어갈 내용을 보니 빡쳐서 그러지. 이럴 줄 알았으면 사람을 더 불렀잖아.]
“사람 더 붙여줄게.”
[뭐? 그래 그럼. 이왕이면 힘 좀 쓰는 사람 둘 이상. 그래도 내일까지라는 보장은 없어.]
.
.
[이제 어른이잖아.]
담담하게 말하고 어색하고도 예쁜 미소를 만들던 윤은조.
잘난 자존심 하나로 버티던 윤은조.
21살에도 충동적이란 단어와 거리가 멀었던 그녀다. 신중하고 매사에 모든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
특히 부정적이고 불미스러운 상황을 피하기 위해 두 번, 세 번 아니, 수십 번 생각하고 결정한다.
실수를 할 확률이 상대적으로 적다고 볼 수 있지만. 결정적인 시기를 놓칠 수 있다는 큰 단점이 있다.
매사에 빠르게 판단하고 결정하는 권재하와 아주 반대되는 스타일이다.
어른이 됐어? 달라졌다고? 애하나 낳아서 키운다고 얼마나 달라졌을 건가.
뭐든 한다고 했지만 부러지면 부러졌지 휘지 않을 윤은조다.
이건 뭐 연락도 없고. 예상 밖의 엉뚱한 짓을 하는 건 아닌가, 신경이 쓰인다.
예를 들자면 돈 때문에 아이 아빠에게 연락을 한다든가.
내내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던 재하는 결국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
[오늘 너의 ‘순수한 도움’이 꼭 필요해. 주소 보낼게. 잘 부탁해.]
막 회사 정문을 빠져나온 순간 메시지를 받았다.
이대로의 상황이라면 성미가 까다롭고 괴팍한 고용주가 될 수도 있는 인물이 보낸 것이었다.
걸음을 멈춘 은조는 ‘잘 부탁해’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분명 ‘잘 해봐’의 뜻이다.
“…….”
얼마 전 막장으로 유명한 드라마에서 여배우의 대사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맥락도 없고 웃긴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냥 널 죽이고 나도 죽을래. 방법이 없다.]
지금 그 대사가 은조의 머릿속에 꽉 들어찼다. 눈물을 흘려도 부족한 판국에 웃음이 터질 것도 같고.
“하…….”
차도 안가지고 왔는데. 어깨를 늘어뜨린 은조는 택시 승강장으로 향했다.
***
“도착했습니다. 저 건물인데 택시는 여기까지만 가능합니다.”
“네, 감사해요.”
브리티시 헤리티지(British Heritage).
택시에서 내린 은조는 꽤 넓고 멋진 건물 입구를 바라보았다.
검색해 본 결과, 미국 아키텍처 커뮤니티(TAC)에서 건축가 상을 수상한적 있는 홍규원 교수의 작품이라고 소개가 되어있었다.
타운하우스라고 해야 하나. 4개동 8세대가 전부인 공동 주택 형 고급 주거공간이다.
‘공동’이라는 말이 들어가 봤댔자 출입문도 다르고 정확하게 분리된 공간이다. 누가 이웃인지 서로 얼굴 볼일도 없는 구조.
바로 그거다. 특급 부자들이 필요로 하는 건 이웃이 아니라 고용인이라는 것.
“…….”
널찍한 관리실 앞에 서 있는 두 명의 남성은 흡사 특급호텔의 입구를 담당하는 도어맨처럼 보였다.
단정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깔끔하게 머리를 넘긴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은조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오크트리(oak tree)하우스 방문잔데요. 윤은조라고 합니다.”
“어서 오세요. 오크트리면, 권 대표님을 말씀하시는군요. 어디 보자…… 네, 윤은조 씨.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바로 저깁니다. 좌측 첫 번째 건물, 붉은색 벽돌 보이시죠?”
“아, 네.”
거대한 상수리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건물마다 상징적인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그래도 넓은 대지에 수령(樹齡)이 꽤 있어 보이는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래서인지 도시의 한가운데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바람이 상쾌했다.
모양이 다른 현무암 디딤돌을 모아 만들 길은 자연스러우면서도 아름답다.
넓은 현관문 앞에 도착한 은조는 저도 모르게 작은 한숨을 터트렸다.
커다란 상자가 여러 개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이 한 뼘 정도 열려 있다.
누가 있구나. 집 앞에 세워진 하얀색 SUV를 바라보던 그녀는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만요! 갑니다!”
누군가 소리를 질렀고 이내 현관문이 크게 열렸다.
똑 떨어지는 단발을 한, 세련된 옷차림의 여자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누구세요?”
분명 한국말인데. 억양이 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