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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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덫
2022.07.07.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윤은조라고 합니다. 권 대표님이 보내서 왔어요.”
은조는 적당한 정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베이지색 셔츠의 소매를 걷어붙인 여자의 눈이 몹시 반짝거렸다.
“아니, 일할 사람 보낸다더니. 아, 죄송해요.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요, 힘 좋은 분들이 오시는 줄 알았거든요. 일단 들어오세요.”
“네.”
구두를 벗으려던 은조가 머뭇거렸다. 슬리퍼는 보이지 않았고 앞에 서 있는 여자는 구두를 신은 모습이다.
“그냥 들어오세요. 아직 정리도 덜 됐고 상관없어요.”
“신발을 신고요?”
“괜찮아요, 이까짓 집. 청소기도 완전 좋은 거 있거든요. 누군가 또 닦겠죠.”
그 누군가가 저일 확률이 아주 높답니다. 미소를 지은 은조는 안으로 들어섰다.
블랙 프레임에 무광 골드 손잡이가 멋진 중문을 지나치자마자 그녀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천연 대리석과 훈증 무늬목으로 시공한 벽이 웅장한 분위기로 손님을 맞이한다.
“제가 신경 좀 썼어요.”
어떻게 알았는지 앞서 걷던 여자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멋있어요.”
“저는 이연경이에요. 이 어마무시한 집의 인테리어를 맡았죠.”
“……네.”
“아무리 돈이 차고 넘쳐도 그렇지. 뭐하러 이렇게 큰 집을 얻고 난린지. 누구랑 숨바꼭질이라도 할 거야 뭐야.”
은조가 듣거나 말거나 투덜거린 이연경은 바닥에 널브러진 종이 상자를 발로 툭 밀었다.
화려한 입구는 아주 작은 시작에 불과했다.
탁 트인 1층 거실을 마주한 은조는 작게 몸을 떨었다.
이제까지 이렇게 좋은 집은 인터넷에서도 본 적이 없다.
층고는 고개를 꺾고 올려다보아야 될 정도로 높았고, 주방과 거실 사이를 가로막는 것이 없다. 개방감을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산뜻하게 벽에 붙은 TV와 커다란 스피커 두 개. 크림색 러그와 같은 색의 가죽 소파.
그리고 우아하게 자리한 그랜드 피아노.
하…….
작은 우리 집도 작정하고 치우려면 한참 걸리는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조금 어수선한데 거의 완성이에요.”
“솔직히 아주 멋있어요.”
은조는 천천히 주방 쪽으로 몇 걸음 다가갔다.
키 큰 장과 우드로 마감한 아일랜드 조리대. 긴 가죽 의자와 식탁이 전부 반듯하게 일자형 레이아웃으로 세련되게 배치되어 있었다.
진한 갈색의 식탁 위에 살짝 손을 올려놓은 그때.
“2층은 다 끝났어요!”
갑자기 들려온 큰 목소리에 움찔 놀라고 말았다.
위층으로 시원하게 뻗은 대리석 계단의 맨 위. 철제 난간을 짚고 서 있는 남자 둘도 은조를 발견했는지 동시에 고개를 기울였다.
“뭘 다 끝나. 여기 저 상자, 카르텔 램프 올려야지.”
넵. 대답과 동시에 후다닥 내려온 남자들은 은조를 향해 눈을 반짝였다.
“누구셔, 이분은.”
“누군지 알 거 없고, 조명 올리고 현관문 밖에 상자들 드레스 룸으로 올려줘. 빨리! 빨리 올리고 내려오면 누군지 소개해 줄게.”
이연경보다 어려보이는 남자들은 장난스럽게 눈을 흘기면서도 군말 없이 움직였다.
“일 도와주는 후배들이에요.”
“……네.”
“그런데, 우리 처음 보죠? 내가 권재하 주변의 미인을 기억 못 하지 않는데. 처음 맞죠? 윤…….”
“윤은조요. 처음 뵙는 거 맞아요.”
“정말 권재하가 보내서 오신 거 맞아요?”
의심 짙은 눈길이 단정한 차림에 가녀린 분위기를 풍기는 은조를 대놓고 훑는다.
“네, 맞아요. 저 보기보다 힘세요. 일하러 온 거 맞습니다. 그런데 뭐부터 해야 할까요. 가보면 알 거라고만 들어서.”
“아뇨. 차부터 한잔해요. 얼그레이 어때요?”
“아녜요. 제가 지금…….”
일 분이 아쉬운데.
“제가 한잔 더 마시고 싶어서 그래요. 아직 물이 식지 않았을 거고요. 차 싫어하세요?”
“아뇨. 얼그레이 좋아해요.”
“잘됐네. 아휴, 힘들어.”
조리대 구석에 있던 전기 포트의 버튼을 누른 이연경은 서랍장에서 큰 종이컵과 티백 차를 꺼냈다.
잠시 망설이던 은조는 부드러운 가죽 의자에 앉았다.
“…….”
포트 안에서 금세 바글바글 물이 끓는 소리가 났다.
티백을 넣어둔 종이컵에 뜨거운 물을 따르는 이연경은 조심스럽고 침착하다.
“저는 미국에서 인테리어 디자인을 공부를 했어요. 서울에 온 지는 1년 정도 됐고요. 그런데 한국말 잘하죠? 망할 권재하 덕분이랍니다. 자,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잘 마실게요.”
“천만에요, 권재하 거예요. 되게 좋은 거. 잔이 좀 후졌지만.”
은조의 맞은편에 앉은 이연경이 짓궂게 찡긋 웃어 보였다.
“은조 씨는?”
아. 은조는 얼른 핸드백을 열어 명함 한 장을 꺼내 건넸다.
“디자이너세요? 오, 반갑습니다.”
은조는 제 명함을 뜯어보는 연경을 바라보며 차를 한 모금 넘겼다.
“향기가 정말 근사해요.”
“권재하가 무슨 제약회사를 샀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윤은조 씨 회사예요?”
“네?”
문득 술에 취해 원색적으로 회사 오너를 비난하던 팀장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아무래도 회사를 팔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무책임하다고 탐욕스러운 노인네. 망령이 난 게 아니면 뭐냐고!]
그즈음 여기저기서 비슷한 내용으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자신이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거야 윗사람들 비즈니스고 일개 디자이너인 자신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으니까.
만일 운이 나빠 그만둔대도 다른 회사를 알아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
차를 홀짝이던 이연경이 가는 눈으로 입을 꾹 다문 은조를 바라본다.
“아무튼, 권재하가 한국에- 뭐, 한국이건 미국이건 다를 건 없겠지만. 제가 모르는 친한 여자 분이 있는지 몰랐어요.”
“친, 한건 아닌 것 같아요.”
“아니면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이연경이 상체를 은조 쪽으로 바짝 기울였다. 눈빛이 날카롭다.
“아는, 사이?”
“둘이 그거, 했죠?”
“……네?”
“했네. 방금 망설였잖아요. 어때요, 애들도 아니고. 아무튼 대박. 잠시만요.”
“…….”
[권재하, 대체 누굴 보낸 거야? 장난해?]
“아, 오해 없으시라고 미리 말씀드리는데 저는 권재하랑 아무 사이 아닙니다. 열여섯에 고백했는데 차인 이후로 깔끔하게 남입니다. 제가 받은 게 많아서 신세 갚는 정도의 관계?”
“네…….”
띠링- [드레스 룸.] 헐, 이 인간. 이건 또 무슨 엉뚱한 짓이야.
“아, 은조 씨한테 한 소리 아니에요. 여기 전화기 너머에 있는 인간한테 한 말이에요.”
와우. 권재하가 여자를 집으로 부르고, 적어도 꼬박 하루는 걸릴 일을 맡겼다?
그러니까 이건…… 덫인가? 덫이네. 심상치 않은 낌새를 알아차린 연경의 눈 안으로 호기심으로 깃들었다.
“그 옷 일하기 불편할 텐데.”
연경의 눈짓에 은조는 제 차림을 내려다보았다.
단추가 촘촘한 블라우스는 아끼는 것이고 스커트는 타이트하다. 잡일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작업복이라도 따로 준비해 오는 건데.
“……버려도 괜찮아요.”
“예쁜 옷을 왜 버려요? 아, 몸이 예쁜 건가? 아무튼,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
.
“살살, 먼지 안 나게.”
아직 텅 비어 있지만 드레스 룸 역시 차분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블랙과 우드가 기본이고 크고 넓은 거울로 포인트를 준 공간은 남성적이면서도 우아하다.
“귀중품들 들어있는 캐리어는?”
“아까 제일 먼저 올렸잖아, 침실에 일단 뒀는데.”
“그것도 이리 가져다줘.”
“넵.”
방의 한가운데, 묵직하게 자리를 차지한 아일랜드 서랍장에 기대선 이연경. 상자를 나르는 남자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고 있다.
간만에 골 때리네.
[권재하, 대체 누굴 보낸 거야? 장난해?]
-드레스 룸.
[드레스 룸? 옷 정리를 시키라고? 미쳤어? 저 여자 죽이려고?]
-그것도 나쁘지 않고.
[왜 또 이렇게 꼬였는지 모르겠는데. 아, 됐고. 티셔츠 버릴만한 거 하나 고른다.]
-…….
[저 여자 맞지? 그 유일무이. 그럼 차라리 밥을 사줘, 엿 먹이지 말고.]
-…….
말을 들을 리 없지. 연경은 미리 준비되어 있던 스탠드형 스팀다리미에 물을 채우고 빈 수납장과 진열장을 둘러보았다.
***
같은 시간, 블랙스톤 파트너스 빌딩.
12층, 새로 부임한 대표의 집무실은 무채색 위주로 모던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풍겼다.
느긋하게 소파 상석에 자리한 권재하는 손님을 앞에 둔 채,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앉은 백발의 손님은 JS PHARM 회장 이성춘.
노인네를 앞에 두고 몇 번이나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문득문득 다른 생각에 빠지기도 하는 젊은 놈이 영 마땅치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권재하는 이제 제가 평생을 바쳐 일군 기업의 최대주주이기 때문이다.
당장 전문 경영인을 불러들이겠다거나 대규모 구조조정을 언급해도 이성춘 본인에게는 어떤 권한도 없다는 뜻이다.
크흠- 뻘쭘하게 헛기침을 한 이성춘이 뒷머리를 만졌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경영에는 최소한의 참여만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물론 현재 진행 중이 연구개발도 중단되지 않을 거고요.”
늙은 기업가의 속을 꿰뚫었는지 권재하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한마디 던졌다.
“허허, 다행입니다. 그건 그렇고 집무실을 하나 꾸며 드려야 할 텐데요.”
“꾸며, 주신다고요. 누가, 누구에게요.”
건조하게 한마디 뱉은 권재하가 휴대폰을 집어 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성춘도 냉큼 따라 일어섰다.
“아, 말을 다시 하죠. 집무실이 하나 필요하실 것 같은데, 어떠신지요.”
“네, 나쁠 건 없을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 보니 7층이 뷰가 좋더군요.”
“네네. 7층, 알겠습니다. 딱 요런 분위기로.”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권재하의 등에 인사를 한 이성춘이 도망치듯 자리를 뜨자 바로 강 비서가 그 자리로 들어섰다.
“저녁 약속까지 아직 시간이 넉넉한데 왜 또 이렇게 냉랭하게 구십니까? 이 회장님 얼굴빛이 흙빛이 되었습니다.”
“그거 취소하든가 미루든가, 네가 알아서 조정해. 난 집에 가봐야 돼.”
“네? 어디요?”
“에디, 전에 그 게살 볶음밥하고 피쉬 커틀렛 그거 어디서 산 거야.”
당장 주소 찍어. 한마디 던진 재하는 이내 바람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집, 그러니까 아직 정리도 덜 된 집. 그리고 게살 볶음밥과 피쉬 커틀렛?
눈을 가늘게 뜬 강비서는 안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