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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제대로 된 인사 (12/100)


12. 제대로 된 인사
2022.07.11.


[에디.]

휴대폰 화면에 뜬 이름을 본 연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쩜 이렇게 타이밍을 딱 맞출까.”

[내 전화 기다렸어?]

“설마! 그건 아니고 나도 너처럼 궁금한 게 있는데 지금은 바빠. 이따가, 응?”

전화를 끊은 연경은 이마를 짚었다. 2층으로 옮겨놓고 보니 상자들이 더 커 보인다.

겉면에 아무 표시가 없으니 일일이 열어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깔끔하게 마무리하려면 하루가 더 걸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 저 여자 누구야? 완전, 내 스타일인데.”

“지섭아, 너 지금 땀범벅이거든.”

“그래서 더 섹시하지 않아?”

“으- 왜 내 주위에는 죄다 이런 돌은 놈들 투성인지.”

“아, 뭘 돌았대! 누군데 저 여자.”

“누굴 것 같냐? 지금 저 목이 가냘파 슬픈 사슴이, 어떤 짐승의 영역 안에 들어와 있는데?”

“헐, 재하 형? 약혼녀 두고 바람이라도 피우는 거야? 대놓고? 아님, 몰래? 누나는 어떻게 아는데?”

“시끄럽고. 운동복이나 티셔츠 든 상자 좀 찾아봐.”

 

.
.

은조가 빈 컵을 치우고 있을 때 연경이 다시 나타났다.

상자를 따라 남자들과 함께 2층으로 사라지더니 회색 티셔츠를 하나 들고 왔다.


“입고하세요. 예쁜 블라우스 대신요.”

“이걸요? 이게 어디서…….”

“이거야말로 버려도 되는 거예요.”

“…….”

“은조 씨. 그게…… 권재하가 옷이 좀 많아요. 어디 옷만. 구두며 시계며, 지가 모델도 아니면서. 하, 아무튼 이게 그러니까…….”

내내 씩씩하더니 갑자기 말꼬리를 늘인다. 귀여운 데다가 좋은 사람이다. 은조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저 정리 잘해요. 걱정 마세요, 옷 고마워요.”

“에이, 모르겠다. 일단 맡기고 갈게요.”

뭔가 하고 싶은 말을 참는 듯 잠깐 입술을 샐룩거리던 이연경은 곧 떠났다.

.
.


 
은조는 제 아파트 거실을 여섯 개는 합쳐 놓은 듯한 크기의 드레스 룸에 서 있었다.
 


[은조 씨. 그게, 권재하가 옷이 좀 많아요. 어디 옷만, 구두며 액세서리까지.]

 


“……정말 넓다.”

그렇게 말해놓고 그녀는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정말 넓다.

21살. 대학교 2학년 여름 방학이 시작 될 즈음, 권재하의 아파트에 들어섰을 때도 같은 말을 했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

동그란 과자들이 들어 있는 상자를 내려다보는 은조의 눈이 느릿하게 깜박였다. 색깔도 향기도 없는 제 마음과 참 다르다.

급하게 다시 올라온 이연경은 사뭇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혼자서 오늘 다 못해요. 무슨 소린지 아시죠? 그리고, 이거는 완전 맛있는 건데 드리고 가려고요. 그럼…… 저는, 진짜 갑니다.]

 
내가 딱해 보였나 봐. 싱겁게 웃은 은조는 고급 과자를 진열장 위에 올려놓았다.


“하, 뭐부터 해야 하나.”

상자들은 전부 열려 있었고 그녀가 서 있는 바로 옆 수납장에는 슈트가 몇 벌 걸려 있었다.

잘 포장되어 왔지만 구김이 간 옷의 상태로 보아하니 아마 미국에서 바로 온 모양이다.

[슈트 상의, 하의.]

[드레스 셔츠.]

[고리에 넥타이를 죽 걸면 됩니다.]

[캐주얼 셔츠, 캐주얼 팬츠.]

[니트웨어, 데님팬츠.]

[보시다시피 신발 장.]

[네, 여기도 신발 자립니다. 더럽게 많아요.]

[그냥 대충하세요!]

[시계와 액세서리, 기타 귀중품이 든 캐리어 비번은 1111.]

연경이 붙여 두고 간 친절한 메모가 많았다. 은조는 손에 들고 있는 회색 반팔 티셔츠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상자에 있는 옷들을 전부 꺼내고 스팀까지.

전혀 도움이 안 되는 타이트한 스커트도 편안한 바지로 갈아입고 싶었지만. 팔이라도 자유롭게 움직이는 게 어디냐 생각하며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었다.

.
.

이후 한참을 ‘정신력 하나 끝내주는 윤은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악!”

가는 손목에서 힘이 빠지는 바람에 스팀다리미의 핸들을 놓치기 직전까지 말이다.

반사적으로 떨어지는 그것을 잡으려던 은조는 뒤로 펄쩍 물러서고 말았다.

바보같이!

뱀처럼 휘리릭 거리는 기계를 꺼버린 은조는 금세 붉어진 손등을 보며 눈살을 구겼다.

하지만 그 덕에 조금 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쉬운 거부터 할까.

은조는 맞은편으로 보이는 구두 상자 앞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또 한참 동안을 그 주인을 닮아 잘생기고 윤이 나는 고급 구두들을 하나씩 가지런히 선반에 얹었다.

이후 다시 스팀을 생략한 캐주얼한 옷들을 맞는 자리에 배치했다.


“후…….”

드디어, 마지막 캐리어.

에어캡 포장이 된 것은 비싼 물건들임이 분명하다.

은조는 그것들을 살살 꺼내서 일단 유리장 위에 올려두었다.

크기로 보니 시계와 넥타이 핀, 커프스링크- 뭐 그런 걸 텐데. 정말 내가 함부로 만져도 되나.

고민하던 은조의 눈에 마카롱 상자가 들어왔다.


“아아…… 다리야.”

바닥에 앉아버린 그녀는 한동안 알록달록 색깔이 예쁜 알맹이들을 들여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말이라도 꺼내보자…… 친구잖아. 그녀는 근처에 있던 휴대폰을 집었다.


“소라야.”

[은조야! 어디야?]

“아직…… 일하고 있어. 통화 괜찮아?”

[야, 엊그제 톡은 왜 씹었어?]

“미안, 잠시 후에 보낸다고 생각하고 깜박했다. 내가 정신이 없었어.”

[나보다 더? 그건 됐고, 이번 주말에 시간 좀 내줘. 드레스 보러 같이 가주라, 응?]

“보고 싶기는 하지만, 그거 신랑하고 가야 하는 거잖아.”

[힝, 나 요즘 기분 많이 우울해. 이게 잘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무서워서 잠도 안 와! 너는 매일 바쁘다고 하고. 마땅히 이야기할 상대도 없다고.]

결국 울고 싶은 은조를 제치고 소라가 먼저 훌쩍거렸다.

저한테 메리지 블루가 왔다나 뭐라나. 남자친구라면 죽고 못 살겠다더니 뭐가 또 불안하다는 건지.

혹시 얼마라도 돈을 빌려달라고 할까, 생각했던 은조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절친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은조는 화끈거리는 손등을 입술로 후후 불었다.


“……더 빨개졌네.”

띠링-


[언냐, 어딘데 안 들어 와. 늦으면 우리끼리 저녁 먹는다.]

-먹고 들어갈게. 맛있게 먹고 다온이 양치 잊지 마.

[어디서 누구랑 먹고 들어온다는 얘기야? 권재하라는 사람이지?]

-혼자 하게 두지 말고 네가 어금니 안쪽까지 깨끗하게, 알았지!

[그놈의 깔끔병. 애 버리는 거래도 말 안 통해. 걱정 말고 데이트 잘해라.]

“데이트는…… 저녁도 못 먹었는데.”

시간을 확인한 은조는 분홍색 마카롱을 하나 집어 베어 물었다.

빨리하고 집에 가야지. 이러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크흡-.

큭-.

야생의 장미향이 입안에 은은하게 퍼지자마자 갑자기 목이 콱 막히며 눈가가 따끔거렸다.


“…….”

부스러기를 흘리고 바닥으로 떨어진 분홍색 과자 반쪽이 왜 처량해 보이는지.

답답한 가슴을 툭툭 두드린 순간, 검은 구두를 발견했다.


“뭐를 훔쳐 먹는 거야.”

“웁! 흡-.”

“괜찮아, 천천히 씹어서 넘겨.”

한쪽 무릎을 접고 앉은 재하가 은조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가여운 동물을 바라보듯 눈썹을 한껏 내려뜨리고 지그시 바라보는가 싶더니. 불쑥 손을 내밀었다.


“……!”

찰나였다. 엄지손가락이 은조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뭉개듯 스친 것은.

그 손가락을 제 입술 안으로 슬쩍 넣었다 뺀 재하는 태연스럽게 빙긋 웃는다.


“달다.”

“뭐…… 하는 거야? 그리고 훔쳐 먹은 거 아냐! 그 누구더라- 주고 갔어. 나 먹으라고.”

입가를 문지른 은조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싶었는데. 뱃속이 간질거리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훔쳐 먹은 건 아니고, 훔쳐 입었네.”

“어?”

그거 내 건데. 따라 일어선 재하가 턱짓으로 은조의 가슴께를 가리켰다.

은조는 제가 걸치고 있는 티셔츠와 드레스셔츠 차림인 재하의 어깨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모, 몰랐어. 이연경 씨가 입고 일하라고 주길래…….”

“누가 도둑고양이 아니랄까 봐.”

“그렇게 부르지 마.”

같이 사는 동안 재하는 살금살금 저를 피해 다니는 은조를 도둑고양이라고 자주 놀렸었다.

얹혀사는 인간에게 도둑고양이라고 놀리면서 한사코 최소한의 물질적 보상은 거절한 그였다.
 


[그 돈으로 책이나 사 봐. 옷 말고 책이다.]

 
이상한 소리나 하고.


“혹시 아끼는 건 아니지? 티셔츠 굉장히 많던데. 땀은 안 흘렸지만 그래도 빨아서…….”

“은조야, 오늘 힘들었지.”

조금. 고개를 끄덕인 은조는 정말 뭐라도 훔치다 걸린 고양이처럼 뒤로 한걸음 물러서며 재하의 눈치를 살폈다.

위험하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심장이 그렇게 경고하고 있었다. 빨리 벗어나라고.


“나머지는 내일 해도 되지?”

“그래, 내일.”

후- 안도 숨을 내쉰 은조가 저도 모르게 입가에 예쁜 미소를 만든 순간, 재하가 빙긋 마주 웃었다.


“모래, 글피. 그다음 날, 다시 그다음 날.”

“…….”

금세 입술을 감쳐물며 턱을 치켜 올린 은조는 살짝 벌어져 있는 남자의 붉은 입술을 쏘아보았다.

더 시선을 들어 올리면 조롱기 가득한 검은 눈동자가 있겠지. 경찰서 주차장 회색 어스름 안에서 차갑게 빛나던 그거.

자칫하다가는 얄미운 채권자의 뺨을 후려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한 대 맞으면 열 배, 백배로 돌려주는 인간인 걸 너무 잘 알고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인 것인가.

왜 하필 우리 민아에게 그런 일이 생기고, 왜 하필 이 남자가 다시 나타난 걸까.

어느새 아래로 떨어진 시선은 반듯하면서도 타이트한 넥타이 매듭 위에 머물렀다.


“뭐든지 한다고 말한 건, 이런 일을 하는 건…… 그만큼 고맙다는 거야. 분명히 말했잖아, 돈은 돈으로 갚겠다고.”

입 밖으로 내보내면서도 말 같지 않은 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어떻게?


“은조야, 돈을 쉽게 버는 방법은 많아.”

“그런 강의를 지금 여기서 듣고 싶지 않아.”

“지금 네 1분. 아니, 30초가 100만 원이라면.”

그래도 듣지 않을 건가- 뒷짐을 지고 상체를 곧게 편 재하의 모습은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지불할 의향이 있대도.”

오만하고 무례하기 그지없는 제안이었다.


“제대로 된 인사 한 번 하는 대가로 말이야.”

그가 은조를 제 품으로 끌어당긴 것은 순식간이었다.


“……!”

“반가워, 윤은조.”

뻣뻣하게 굳은 은조를 품에 가둔 재하가 나긋하게 속삭였다.

내 집에 잘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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