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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감히 (13/100)


13. 감히
2022.07.14.


하나, 둘, 셋, 넷, 다섯…….

주먹을 꽉 쥐고 눈을 꾹 감은 은조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가녀린 어깨가 돌처럼 굳어 있었지만 제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한 재하는 깊은 숨을 수차례 들이마셨다.

따듯하고 달콤한 살내음 때문에 취한 것처럼 몽롱하다. 심장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낸다고 느낀 그는 두른 팔에 힘을 실었다.

당장 보드라운 귓불과 그 아래 팔딱이는 맥박 위에 입술을 부비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인내가 바닥나고, 희고 투명한 피부 위에 입술을 누른 순간.

품 안에 갇혀 있던 은조가 바르작거리며 재하의 가슴을 밀어내려 애썼다.


“인사, 이 정도면 충분해. 나도 너무, 반가워.”

“…….”

“안 들려? 그만해! 정신 차려!”

“들켰네. 정신 나간 거.”

재하가 저를 밀어내는 작은 손을 움켜잡은 순간 은조가 움찔하며 신음소리를 냈다.


“아아……!”

“손이 왜 이래? 빨갛잖아. 어디 봐.”

“별거 아냐, 괜찮아.”

“바보같이 데었어?”

“그래! 바보라 데었어! 이만하면 대충 끝난 것 같은데 나 집에 가도 되지? 쉽게 번 500만 원도 큰 도움이 된 거 같아. 원금에서 제해 줘.”

야무진 척 소리치고는. 원금. 제 입에서 나온 단어 때문에 멈칫했다.

눈살을 찌푸린 은조는 입을 굳게 닫아버렸다.

대신 근처에 둔 블라우스를 집으려고 손을 내밀었는데 재하가 먼저 낚아채버렸다.

코앞에 딱 버티고 서서는 이글이글 눈에 불을 지피고는 있는 모양이……. 한껏 골이 난 다온이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이럴 땐. 일단 달래고 보는 게 상책이다.


“모르겠지만 원래 다림질이 이래. 이 정도는 데었다고 말할 수도 없어. 그냥 아주 약간 쓰라려”

“……따라와.”

한 손으로 제 얼굴에 문지른 재하는 풀이 죽은 목소리를 내더니 등을 돌렸다.


 

.
.

구급상자가 있었다니. 재하에게 손을 맡긴 은조는 느릿하게 눈만 껌벅거렸다.

살살, 아주 얇게. 연고를 녹이기라도 하듯 펴 발라주는 모습도 꾹 참고 지켜보았다.


“하…… 이제 가도 될까? 블라우스 좀…….”

“괜찮아? 아직도 아파?”

“안 아파. 고마워.”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려 일부러 로봇처럼 말했지만 신경도 쓰지 않는다. 오히려 한쪽 눈을 찡긋거리는 게 재미있어하는 눈치다.

입술을 앙다문 은조는 작은 연고의 뚜껑을 닫고 상자에 넣는 권재하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해야 할지 고민하는 와중에도 드레스 셔츠를 팽팽하게 당기고 있는 넓은 어깨와 단단한 가슴팍이 눈에 들어왔다.


“그럼, 이제 밥 먹을까. 내가 아직 저녁 전이야.”

또? 설마- 은조의 눈이 커졌다. 역시 전혀 개의치 않는 권재하는 빙긋 웃으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당겼다.


“너무 조용하면 맛이 없을 것 같아서.”

“나더러 떠들기도 하라는 거야?”

“응. 밥 시중.”

“좋아, 그럼 그전에 알려줘.”

“뭐가 궁금한데.”

도둑고양이 주제에. 작게 중얼거린 재하는 식탁 위에 있던 종이 상자들을 열었다.

하나둘 포장이 풀어지자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얼마야. 내 1분, 1시간이 얼마냐고.”

“글쎄, 얼말까.”

“…….”

“이리 와.”

의자를 가리키는 고갯짓에 은조는 분한 듯 큰 눈을 끔벅였지만 천천히 식탁으로 다가가 그가 내민 냅킨을 받았다.


“네가 나한테 가치가 있는 부분은…….”

말끝을 흐린 재하가 그녀의 가치를 가늠하는 것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슥 훑었다.

가녀린 어깨와 살짝 솟은 두 개의 둔덕을 가리고 있는 제 회색 티셔츠를 보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왕이면 예전처럼 스커트를 생략한 모양이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계약서를 고쳐야 하나. 내 앞에서는 항상 내 티셔츠만 걸치고 있어야 한다?

나쁘지 않군.


“그런 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아.”

“어떤? 정신 나간 눈? 계속 들키네.”

“…….”

꼭 말아 쥔 작은 주먹을 응시하는 재하는 담담하다.


“네가 나한테 가치가 있는 부분은 하나뿐이지만 꽤 대단하지.”

인정. 심드렁한 표정으로 어깨를 한번 들었다 내린 그가 포크를 내밀었다.


“난 진지해. 최소한 몸으로 때우는 입장이라면 노동의 대가 정도는 알아야 하잖아.”

미치겠다.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은 재하가 넥타이를 더 잡아당기더니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진짜 몸으로 때우는 게 뭔지 모르고 저러지.


“밥 생각 없으면 내 방 구경할래?”

“뭐?”

“자고 가.”

“나머지는 내일 마저 할게. 이만 가는 게 좋겠…….”

“내일이건 모레건 계속 해야 될 거라고 이미 말했는데.”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만 역시 넌 나쁜 놈이야. 은조가 눈을 뾰족하게 떴지만.

알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재하는 은조를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다.


“자고 가기 싫으면, 이 집으로 들어와.”

“대체…… 무슨 차이야?”

“굳이 따지자면 당장이냐, 나중이냐의 차이.”

“…….”

“밥 먹을래, 올라갈래?”

 

***

회식이면 미리 말을 했을 텐데. 대체 누구랑 이 시간에.

은조는 저녁을 집에서 먹지 못하면 반드시 전화로 사정을 알렸다. 다온이와 짧은 통화도 있지 않았고.

당연히 민아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이름은 권재하였다.

언니의 마음을 꽁꽁 얼려버린 남자가- 혹시 그 사람이 아닐까.

눈물조차 마르게 만들어 버린 그 슬픈 기억 속의 남자.

물어본다고 바로 이실직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윤은조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 답답했다.

내가 한번 찾아가 봐?

그래…… 어쨌든 도움을 받았으니 인사차 한번 만나도 나쁠 건 없잖아.

언니 모르게.

민아는 곁에 딱 붙어 앉아 TV를 보고 있는 다온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온아.”

“웅.”

“채린이는 아빠가 둘이라고 했잖아? 엄마가 두 번 결혼해서.”

“……응.”

노랗고 네모난 캐릭터가 나오는 만화에 빠져 있는 아이는 잠이 오는지 눈을 느리게 끔벅거렸다.


“그, 채린이는 뭐래? 아빠가 둘인 거에 대해서 말이야.”

“나도 아빠가 둘이었음 좋겠다.”

끙. 자세를 고쳐 앉은 민아는 통통하고 귀여운 뺨에 입술을 눌렀다.


“넌 ……마가 둘이잖아.”

“맞아. 근데 이모한테 엄마 붙이면 엄마가 화내! 이제 안 할래. 하아…….”

귀찮은지 제게 들러붙은 얼굴을 밀어낸 다온이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작은 몸을 늘렸다.

하지만 바닥으로 떨어져 있던 담요를 끌어 올린 민아는 집요하다.


“은조 엄마가 더 좋아, 내가…… 더 좋아?”

“엄마! 엄마한테 전화할래! 왜 안 와?”

엄마를 찾으면서도 제 품을 파고드는 아이를 내려다보는 민아는 이내 울상을 짓고 말았다.

더 늦어지면 정말 안 되는데. 너를 빨리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되는데. 어쩌지.


“……내가 너무 바보 같았어. 이건 모두를 위해서 결코 좋은 게 아니야.”

아이와 언니한테 못할 짓을 한 거야. 예전 자신이 내렸던 결정을 후회하는 민아가 혼잣말을 흘렸다.

어떻게 알았는지 기특한 아이가 민아의 뺨에 작은 손을 올렸다.


“물론 이모 엄마도 좋아. 썬샤인 만큼은 아니어도 사랑해.”

“치, 몰라. 이미 삐쳤거든.”

그러거나 말거나 담요 아래를 뒤적거린 다온이가 리모컨을 찾아 쥐었다.

미워하는 척조차 할 수 없는 귀여움 덩어리. 민아는 다시 쪽쪽거리며 사랑을 고백할 뿐이다.


“나한텐 네가 썬샤인이야. 내 강아지.”

“그래? 고마워. 그럼 같이 도라에몽 우주 표류기 좀 볼까?”

“또? 그, 그래…….”

 

***

누구에게나 그런 사람이 있을까.

왕나나처럼 만나면 100퍼센트 재수 없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처음 본 그날부터 만날 때마다 위로와 희망을 주는 사람. 따듯한 사람, 진짜 행운 같은 사람 말이다.

우울하고 고민이 깊은 며칠을 보낸 은조는 반가운 연락을 받았다.

인연이라는 게 정말 존재한다는 걸 믿고 싶게 만드는 남자.

최선우.


“여보세요!”

[헤이, 은조! 잘 지냈어요?]

“최선우? 선우 씨?”

[네, 최선웁니다! 나, 서울이에요. 은조 씨는 어디에요? 일하고 있죠?]

“서울이요? 언제 왔어요? 지금은 어디에요?”

의자를 밀어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은조를 바라보는 장 팀장이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아해하는 디자인팀 직원들을 향해서는 모두가 들으라는 듯 크게 말했다.


“그 애인. 2, 3년에 한 번씩 만날까 말까하는, 명절에나 연락 주고받는 미국 애인.”

다시 고개를 흔드는 팀장을 바라보는 은조는 활짝 웃고 있었다.

.
.

퇴근 시간 정각에 맞춰 핸드백을 집은 은조는 금세 1층 로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빠르게 회전문을 통과해 주위를 둘러보는데 누군가 어깨를 두드렸다.


“안녕.”

“선우 씨!”

잠시 망설이는 얼굴로 머뭇거리는 은조를 선우가 스스럼없이 덥석 끌어안았다.


“잘 지냈어요?”

은조도 팔을 들어 반가운 친구의 등을 두드렸다.


“그럼요, 너무 반가워요.”

“어디, 어디 좀 봐요. 와- 더 예뻐졌네요. 건강해 보이고.”

“선우 씨도 좋아 보여요. 아직 저녁 전이죠?”

“물롤이죠. 뭐 먹을까요?”

“물, 론. 아직도 그 발음이 어려워요?”

“물- 론. 됐죠?”

하하하- 둘은 서로를 마주 보고 웃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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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흠. 모처럼 운전석에 앉은 강 비서가 헛기침을 했다. 날을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다.

두 사람을 한데서 보면 뭔가 정확한, 어떤 정보를 확보할 줄 알았는데. 그냥 망했다.


“대표님 얼굴색이 흙빛입니다. 차, 돌릴까요.”

“…….”

재하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이것이었나. 물러설 곳이 없는 은조의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애가 타고 마음이 어수선하던 이유가.

코끝에 맴도는 달큰한 살냄새를 지우지 못해 며칠 밤잠을 설치다 결국 찾아온 것이다.

달아날 곳도 없는 주제에 언제까지 뻗댈 건지. 밥이라도 먹이며 구슬려볼까 했는데.

하! 기가 막히네.

한국도 그렇겠지만 미국에는 여러 부류의 부자들이 있다.

권재하처럼 돈을 쓰는 게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부류.

또는, 저 새X처럼 있는데도 수수한 척 검소한 척 같잖은 고상을 떠는 부류.


“시X. 그럼 퍼스트 클래스는 왜? 기어서 오지.”

“네?”

“아냐. 차 돌려.”

그날, 비행기에서 처음 본 순간부터 알았다.

가지고 태어난 것에 비해 꽤 겸손한 인간이라는 것을.

그 잘난 새끼가 지금 윤은조와 함께 있다.

꽃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를 안았다. 감히.

재하는 핏대가 선 관자놀이를 손가락 끝으로 꾹꾹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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