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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잤니? (14/100)


14. 잤니?
2022.07.18.


참숯 고깃집.

은조는 삼겹살 맛집으로 선우를 데리고 갔다.

저녁 시간에다 인기가 있는 집이라 그런지 이미 테이블은 만석이었다.

하지만 은조가 그의 전화를 받고 바로 예약까지 한 덕분에 바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수 있었다.

정갈한 밑반찬이 차려지는 동안 두 사람은 달라진 서로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머리가 길어져서 더 예쁘다는 둥, 전문의를 참 쉽게도 땄다는 둥.

뻔하지만 그래서 편한 내용들.

차가운 사이다를 한 모금 마신 선우에게 은조는 방금 나온 계란찜을 밀어주었다.


“나 이거 한 다섯 번째 먹는 것 같아요.”

“뭐요? 계란찜? 삼겹살?”

“둘 다요.”

“그래서 싫어요? 그럼 지금이라도…….”

젓가락을 내려놓은 은조가 핸드백을 집는 시늉을 하자 놀란 선우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오, 아니에요! 너무 좋다는 얘긴데. 앉아요, 장난치지 말아요.”

씨익, 웃어 보인 은조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미안한데 내가 소주가 당겨서 선우 씨 이용하는 거예요.”

“그래요? 술 좋아하는 사람 아니라고 알고 있었는데. 바뀌었어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게, 3년 전이네요. 그 정도면 뭐, 바뀔 만도 하다. 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렇게 됐네요.”

은조는 제 술잔에 소주를 따랐고, 이어 선우의 잔도 채웠다.


“시간이 되게 빠르게 막 지나가죠?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참, 언제 돌아가요? 아니, 대체 언제 온 거예요? 왜, 이번에는 연락도 없이 갑자기 왔어요? 부모님은, 할머니는 잘 계시죠?”

“으…… 후아, 뜨, 뜨거워. 하나도 못 들었어요. 천천히 해요. 나 시간 많아요.”

뜨겁다면서도 또 계란찜을 수저로 듬뿍 퍼 올린다. 선우는 영락없는 한국 사람으로 보였다.


“선우 씨나 천천히 먹어요. 입안 다 데겠다.”

자, 이거. 여기 정말 맛있어요– 은조는 노릇하게 익은 고기를 자꾸 선우 앞으로 놓아 주었다. 정작 자신은 쓴 소주만 들이켜면서.


“다온이 많이 자랐죠? 아이들은 금세 크는데.”

“가기 전에 꼭 한번 만나고 가요. 3년 전이랑 완전 다른 아이예요.”

처음으로 작은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은 은조가 웃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선우가 그녀의 손에 들렸던 술병을 뺏어갔다.


“내가 따를게요. 그런데 좀 천천히 마셔요.”

“오케이.”

선우가 은조의 잔과 제 잔을 술로 반 정도 채웠을 때 김치찌개가 나왔다. 은조가 손뼉을 치며 소녀처럼 웃어 보였다.

고기를 구워주는 직원이 테이블에 와 있는 순간을 제외하고 둘은 대화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다.

은조가 중간중간 선우를 ‘닥터 초이’라고 놀리듯 부르면 그는 살짝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소주가 당긴 이유는 잠깐이라도 다 잊고 싶어서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술이 달았다.

살짝 취기가 오른 은조가 손바닥 위에 턱을 고이더니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닥터 초이, 부자 맞죠?”

“나? 나는 아니고 우리 부모님? 부모님도 사실 그들의 부모님에게서 받은 거지만요. 갑자기 그건 왜요.”

“그냥, 부자들은 어떤 생각으로 사나 궁금해서요.”

“나는 부자가 아니라서 모르겠지만 사람이야 다 비슷한 거 아닐까요.”

“아! 남 괴롭히는 재미! 어떻게 하면 남들을 골려줄까 뭐, 그런 생각으로 사는 게 부자 아닌가? 맞죠?”

“누구예요? 은조 씨를 괴롭히는 돈 많은 사람이.”

잘 익은 고기를 기름장에 콕콕 찍던 은조의 움직임이 문득 멈추었다. 물끄러미 선우를 바라본다.

새삼 친구도 별로 없다는 게 한심했는데.

남에게 돈 같은 거 빌려달라고 할 위인도 못 되는 자신이 답답했는데.

미국에서 온 친구에게 별 쓸데없는 소리까지 하는 모양은 정말이지. 최고로 당황스럽고 부끄러웠다.


“그런 거 없어요. 취해서 아무 말이나 막 나온 거 같아요. 실없는 소리예요. 신경 쓰지 말아요.”

“그런데- 맞는 것도 같아요, 우리 부모님, 할머니 전부 날 괴롭히는 소리만 계속, 아주 많이 하시거든요.”

“여전히 결혼이요?”

“네!”

이번에는 선우가 먼저 제 잔을 술로 가득 채웠다.


“선우 씨, 너무 눈이 높은 거 아니에요?”

“내가? 어떻게 알았지? 바로 그거예요!”

또 작은 유리잔이 부서질 만큼 세게 부딪쳤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
.



“그래도 여성분을 두고 어떻게 제가.”

“저는 여성분이 아닙니다.”

은조는 저를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선우를 기어코 택시에 밀어 넣었다.


“왜 여성분이 아닙니까, 술에 취한 여성분이죠.”

“취하지 않았어요. 기사님 짜증나겠다. 얼른 문 닫아요. 내일 다시 전화 줘요.”

“어어…… 은조 씨.”

무거운 택시 문을 힘껏 밀자 기다렸다는 듯 자동차는 속력을 냈다.

그녀의 시야에서 바로 사라져버렸다.


“후…….”

갑자기 맥이 탁 풀렸다. 공허한 느낌이 든 은조는 어디든 앉을만한 곳이 없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일찍 문을 닫은 빵집이 보였다.


“…….”

어두컴컴한 가게 앞. 작은 계단에 쭈그리고 앉은 그녀는 무릎 위에 무거운 머리를 올렸다.

조금만, 딱 십 분만 이러고 있으면 술도 좀 깨고 부끄러움도 좀 가실 것 같았다.

창피해. 정말 최악인데,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속마음과 다르게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3년 만에 다시 만난 은인.

담뿍, 얼굴 가득 순수한 미소를 짓는 남자를 앞에 두고 문득문득 생각했다.

아마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아니, 두 번째로 돈이 많은 사람일 거라고.

어쩌면 돈을 빌려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 수도 있다고.

이런 상황을 두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 해야 하나?


“미쳤어! 돌았다고, 윤은조!”

양손 안에 뜨거운 얼굴을 묻은 은조는 와락 소리를 질렀다.


“알았으니까, 일어나.”

“……?”

그녀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부자고, 제일 꼴 보기 싫은.

완벽한 얼굴이 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
.

약 2시간 전.
 


[다시 차 돌려, 아니 따라가. 빨리!]

 
이랬다저랬다, 강 비서의 얼굴색도 저처럼 흙빛으로 만들고 나서야 재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회사 근처 고깃집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대로 그냥 집으로 들어갔다가는 윤은조가 정리해둔 드레스룸에 불을 싸지르고도 남았을 것이다.
 


[넌 그만 들어가.]


[어쩌시려고요?]


[잡아 죽이기야 하겠어.]

 
재하는 놀란 눈으로 자리에서 뭉그적거리는 ‘에드워드 강’을 직접 운전석 밖으로 잡아 끌어냈다.
 


[수고했어. 퇴근해.]

 
숨어서라도 지켜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강 비서는 발걸음을 돌리면서도 제 상관을 힐끗거렸다.

저것은. 치졸한 복수? 혹은 증오를 가장한 애정?

그것도 아니면 광기에 가까운 집착인가?

아니, 지금의 권재하에게는 전부를 다 가져다 붙여도 착 들어맞는다!

지척에서 재하를 보필하기 전까지 에드워드는 그의 후배이고 친구였다.

하지만 아무리 격이 없이 지냈다 한들 ‘윤은조’는 매우 조심스러운 화두가 아닐 수 없었다.

간지러운 상처처럼 너무너무 긁고 싶지만 잘못 건드렸다가는 피를 볼 게 뻔한, 그런.

권재하 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시답잖은 ‘사랑’.

특히 그 단어와 엮어서는 더더욱 입에 올리지 못하는 이름 ‘윤은조’.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도 권재하, 그 이름에 길길이 날뛰며 쉽게 이성의 끈을 놓아 버리는 사람 또한 그, 권재하였다.

그리고 지금.

흔하게 보기도 어려운 고급 세단을 등지고 팔짱을 낀 채, 보잘것없는 식당 안을 노려보고 있는 남자.

그 모습을 멀리서 훔쳐보던 강 비서가 중얼거렸다.
 


[언제까지 절. 대. 아니라고 우기시나 지켜보겠습니다.]

 

.
.



“내가 직접 일으켜줄까.”

근처에 아무도 없는데 재하는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어어, 이게 누구야. 채권자님 아냐. 갑자기 어디서 나타나셨어요? 설마 또 알아보는 중이에요? 죽었나, 살았나?”

“일어나, 윤은조. 너 스커트가.”

“왜? 나는, 앉아 있고 싶은데. 어지럽거든. 토할 것 같기도 하고.”

“절대 토하면 안 되지만 당장 일어서.”

“된다, 안 된다 참견 마! 내가 네 꺼야?”

“취해서 잊었나 본데, 나 너에 대한 권리, 충분히 있어.”

“겨우 6억에? 난 사람이지, 물건이 아니야! 집어치워! 꼴도 보기 싫으니까 그 잘난 낯짝 좀 치워 달라고. 웁.”

은조가 양손으로 입을 가리자 재하가 재빨리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흥, 겁먹긴. 입술을 가렸던 작은 손이 내려지자 비웃음이 드러났다.


“장난해?”

“가, 반짝거리는 구두 더럽히고 싶지 않으면 그냥 가던 길 가라고.”

“윤은조. 너, 팬티 다 보여.”

온 세상에 니 하얀 팬티 광고할래. 꽉 다문 잇새로 억눌린 숨을 밀어낸 재하가 결국 은조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

놀라기도 전에 위로 끌어올려지며 휘청거린 은조는 반사적으로 눈앞에 있는 너른 품에 툭 기댔다.


“어…… 가, 갑자기, 어떻게…… 여기에 있었어?”

“걸어. 차 저기 있어.”

“안 들려? 묻잖아, 왜 여기 있냐고!”

“어쭈.”

코웃음을 웃은 재하는 은조를 옆구리에 끼다시피 몸에 붙이고 발걸음을 옮겼다.

은조는 마구잡이로 가느다란 팔을 휘적거렸다. 6억이고 나발이고 얄미운 얼굴을 확 긁어 버리겠다고 마음먹은 거지만 턱도 없는 시도였다.

포기하고 숨을 고르자니 이미 그의 차 보조석에 내동댕이쳐진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마지막 반항이라도 하듯 한껏, 뾰족하게 치켜뜬 은조의 눈이 운전석에 몸을 싣는 재하에게 향했다.


“근처 지나가고 있었어. 어떤 여자가 팬티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냥 지나칠 수가 있어야 말이지.”

“순 거짓말.”

“누가 거짓말을 해.”

“흰색…… 아니라고.”

취한 거 아니네. 피식 웃음을 터트린 재하가 부드럽게 핸들을 돌렸다.


“더 나빴어, 사실은.”

“……?”

“보여줄 듯 말 듯 그게 더 나쁜 거 아냐.”

“…….”

입술을 앙다물며 격앙된 감정을 다스리려 애쓰던 은조는 눈을 감아버렸다.

어색한 침묵이 자동차 안으로 들어찼다.

재하 역시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어떻게 아는 사이야.

그 자식이랑 어떤 사이냐고.

미치게 궁금했지만.

한참이나 수준이 낮은 그 질문들에 무거운 돌덩이를 달아, 가슴 속 깊은 곳으로 던져버렸다.

입안에서 모래알이 구르고 목 안이 따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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