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연극
(15/100)
15. 연극
(15/100)
15. 연극
2022.07.21.
“그 새X랑 어떤 사이야.”
멍하니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반짝 들어 올린 은조는 제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했어?”
이런 병신 새X. 소리 없는 욕지거리를 씹어 삼킨 재하는 스스로를 한 대 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왜 이렇게 윤은조 앞에서만 꼭 형편없이 유치한 인간이 되고 마는 걸까.
“들었잖아, 그대로야. 무슨 사이냐고.”
저녁은 맛있게 먹었니-라고 묻는 것처럼 담담하고 여상한 목소리다. 은조는 몸서리를 쳤다.
“……그 사람이 누군 줄 알고.”
“그 새X가 누군지는 관심 없고.”
“사귀는 사이면? 그건 관심 있고? 왜, 무슨 이유로?”
부아앙- 갑자기 자동차의 속도가 올라가는 바람에 은조의 몸이 뒤로 밀렸다.
울렁거려서 심장이 세차게 뛰는 건지 심장이 요동쳐서 울렁거리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권재하가 이유 없이 화를 내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
대단한 돈 6억에 사람 하나를 제 마음대로 쥐고 흔들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케케묵은 악감정이 다스려지는 게 분명했지만…….
난 아냐. 내 감정은 너랑 차원이…… 달라. 은조는 빠르게 제 입장을 정리했다.
“그런 사이 아냐. 오래전에 나를 도와준 고마운 사람이야.”
너를 대신해 내게 어깨를 빌려주고, 눈물 흘리게 내버려 둔 고마운 사람이야.
“…….”
“의사야. 예전에…… 아팠을 때 큰 도움을 받았어.”
말도 통하는 사람 하나 없었던 뉴욕, 그 차가운 병실에서 말이야.
“됐어.”
어느새 차갑게 가라앉은 재하가 서걱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린 은조는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세게 짓씹었다.
꾹 감은 눈 안이 뜨거워졌다. 귓속에서 뒤섞인 여러 음성들이 제각기 소리를 질러댔다.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긴박했던 이국의 언어들.
잊어버렸다고 믿었던 모든 장면 장면들이 섬광처럼 머릿속에서 연속적으로 번쩍거렸다.
[My God, she‘s bleeding!]
분명 눈을 감았는데 왜 사방이 붉은 핏빛인가.
게다가 지금. 고급스러운 베이지색 가죽 시트를 적시고 있는 것 같은…… 이 기분 나쁜 축축함.
“…….”
눈을, 떠, 윤은조.
전부 가짜야!
허상이라고. 이제 사라지고 없는 의미 없는 그림들이라고!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은조는 화려한 도시의 풍경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막힌 숨이 쉽게 트이지는 않았다.
“창문 좀. 조금만, 내려줘. 머리가 너무…… 아파.”
스르륵- 검은 유리가 손가락 두 마디만큼 내려지고 그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흘러들어왔다.
입술을 연 은조는 산소라도 공급받는 것처럼 차가운 공기를 폐 속 깊숙이 들이마셨다.
“예민하게 굴지 마. 혹시 애 아빤지 궁금했을 뿐이야.”
그렇지만 더 이상은 궁금하지 않다는 그런 색깔이다. 권재하의 목소리는.
증명이라도 하듯 예의 그 첼로를 바로 깔았다.
부드럽고 안정감 있으며, 웅장하면서도 따뜻한 소리가 날카로운 차 안의 공기를 누그러뜨리려 애쓴다.
은조도 애를 썼다.
머릿속을 갉아먹으려고 덤비는 과거의 망령들을 떼어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자동차 내부의 어둠 아래, 비록 맞잡고 있는 손은 가늘게 떨렸지만.
두려움을 밀어내기 위해 오히려 평온한 목소리를 한껏 끌어올렸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늘 그래왔던 것처럼 그렇게.
“그, 거 알아? 첼로는…… 연주자의 심장에 가장 가까운 악기라고 하는 거.”
“연주자가 의자에 앉아서 첼로를 가슴에 품고 연주하니까. 알지, 당연히.”
다행인지 불행인지 재하의 목소리는 첼로처럼 부드럽고 안정감 있는 원래의 색깔로 돌아와 있었다.
“첼로는 약칭이야. 원래 정식 명칭은…….”
“비올론첼로.”
“맞아, 비올론첼로. 사람 목소리와 가장 닮은 악기……. 주로 담당하는 음역이 중저음역이긴 한데, 하이 포지션으로 가면…… 비올라나 바이올린 정도의 매우 높은 음도 낼 수도 있대.”
“갑자기?”
“아니, 원래 그렇다는 거야.”
“아니, 갑자기 웬 악기 소개냐고.”
“아…….”
“감기 들겠다.”
스르륵- 다시 창문이 올라갔다.
후……. 은조는 여전히 뜨거운 뺨에 손등을 댔다. 한결 숨쉬기가 쉬워진 것 같기도 했다.
그래 내가, 나를 모른 척하면 돼. 그러면 돼.
“편하게 숨 쉬어.”
“응? 그래. ……있잖아, 내가 생각해 봤는데.”
“그 작은 머리로 하는 쓸데없는 생각 뻔하지.”
“자꾸 어깃장 놓지 마. 그러니까,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
“뭐?”
하. 하. 하. 재하가 어이없다는 듯 가짜로 꾸며낸 웃음소리를 냈다.
“빚을 갚기 전까지는 아무튼 사이좋게…….”
“내 기준에 너랑 내가 사이좋게 지내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인데, 가능하겠어?”
“…….”
“사이 좋게라니. 네가 나한테 한 짓이 있는데. 언감생심, 꿈이 야무지다.”
“그런 거 아니잖아. 돈을 갚기 전까지, 어쨌든 얼굴을 봐야 하는 동안에는 서로 으르렁거릴 필요 없지 않겠냐는 얘기야.”
“그래.”
사이좋게. 차를 세울 만한 곳을 찾는 재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시 한 번. 한집에서, 사이좋게.
정답을 찾아보자고.
“그리고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은 정말 오래전 일이잖아. 이제 잊을 만도 한데…….”
“다 왔다.”
내려. 재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은조는 차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단 1초도 지체할 수 없을 정도로 속이 확 뒤집혔다.
자동차 안에서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을 때 무릎을 접고 앉아 헛구역질을 했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은 은조는 실소를 터뜨렸다.
“사이좋게……?”
어떻게 사이좋게? 큭, 내가 생각해도 우습긴 하다.
사실 좋고 나쁘고 자체가 없다.
그저 내가, 이 연극을 계속하게 내버려 둬 달라는 얘기다.
권재하의 눈을 보고, 아무렇지 않게 어설프게라도 웃는. 쉬운 연극.
너는 당연히 몰라야 하고. 나조차 외면하는 게 편한 어떤 순간에 대해.
솔직하지 않아도 되는. 아주 쉬운 연극.
***
“왜 매일 늦어?”
누구랑 뭐 했어. 민아가 은조를 향해 실눈을 떴다.
“뭘 늦었다고.”
“엄마.”
“우리 강아지! 안 자고 있었네!”
초록색 공룡이 그려진 실내복 차림의 다온이가 은조의 품을 파고들었다.
잠이 오는지 시들하니 손으로 눈가를 비비는 모양이 사랑스럽다.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행복한 향기가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감싸 안아 주는 것 같았다.
“이모랑 도라에몽 봤어. 진구의 남극 꽁꽁 대모험.”
“아흐, 다온이 도라에몽 도장 깨기 중이야. 그냥 틀어놓고 졸았다고 보는 게 맞지만.”
“안 졸았어!”
다온이가 통통하고 작은 주먹을 민아의 쪽으로 휘둘렀다. 물론 맞고 있을 민아가 아니다.
“응, 단팥빵 나올 땐 눈이 동그랗더라.”
메롱. 꼭 같은 나이처럼 짓궂게 다온이를 향해 혀를 내미는 동생의 허벅지를 툭 친 것은 은조였다.
“애를 재우지 뭐 하러, 그냥.”
“안 잔다고 버티는 걸 어쩌라고. 근데 언니 술 마셨어? 누구랑? 혹시 그…….”
“선우 씨가 들어왔어.”
“선우 오빠랑 마셨냐? 나는?”
겉옷을 벗는 은조가 의외라는 눈으로 민아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간혹 영상 통화를 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너 선우 씨 들어온 거 알고 있었어?”
“……응. 전부터 전공의 따는 대로 들어온다고 얘기했었어. 과일 좀 줄까? 참외 맛있는 거 사다 놨어.”
“다온이는?”
“걱정 마, 먹였어! 달아서 와구와구 잘만 먹던데. 그렇지?”
“응. 그치만 엄마랑 더 먹을 거야.”
흥- 괜히 눈을 홉뜬 민아에 반해 은조는 귀여운 뺨에 입술을 쪽쪽 눌러대느라 정신이 없다.
“그래, 얼른 씻고 올게 한 알 가지고 반씩 나눠 먹자.”
“네.”
“네? 갑자기 웬 네? 윤다온 꿈꾸냐?”
“사랑하면 존댓말 하는 거래. 오늘 선생님이 그랬어.”
“사랑하면 썬샤인. 사랑하면 존댓말. 저는 서러워서 못 살겠어요.”
민아가 다온이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자 다온이는 큰 강아지같이 민아를 향해 몸을 던졌다.
“이모 미워!”
“나도 너 미워요!”
“뛰지 마, 조용히 해. 아랫집서 전화 오겠어!”
저러다 또 애 울리지. 눈꼬리를 내린 은조의 얼굴에 미소가 생겨났다.
***
다음 날 오후.
갑작스럽게 김웅찬 변호사의 연락을 받은 은조는 서둘러 회사 1층 로비로 내려왔다.
카페에 앉아있던 그는 은조를 발견하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허리를 숙였다.
은조도 같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경찰서에서 본 이후 처음이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십니까.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 봬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제대로 감사 인사도 못 드려서 제가 오히려 죄송하죠.”
“아닙니다. 저야 제 일을 하는 거뿐인걸요. 그런데, 자리를 옮길까요? 여기가 불편하시면 근처 다른 데로.”
“아뇨, 제가 불편할 것은 없어요. 변호사님이 불편한 거 아니시면요.”
“저도 상관없습니다. 시간도 아주 잠시면 될 것 같고, 그럼 앉으시죠. 아, 차부터 한잔 드세요. 뭐가 좋을까요, 커피 괜찮으세요?”
안주머니로 손을 집어넣는 김웅찬을 향해 은조는 사양의 뜻을 전했다.
하지만 약 10분 후, 은조는 김웅찬이 가져다준 차가운 물을 들이켜고 있었다.
전문가답게 어떠한 감정도 얼굴에 담지 않는 그에 비해 은조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흰 종이처럼.
[채무이행협약서.]
채권자 권재하(이하 ‘갑’이라 칭한다.)와 채무자 윤은조(이하 ‘을’이라 칭한다.)는 상호간에 다음과 같이 채무이행 계약을 체결한다…….
“급하게 약식으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보시는 바와 같이 내용이 복잡하지도 길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특별히 이해하시기 어렵거나 납득이 안가는 부분이 있으면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러니까, 3개월 안에 돈을 전부 갚거나…….”
“또는 Resident House Manager로서 부채에 상응하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동력에 대한 가치 기준과 기한에 대한 권리는 ‘갑’에게 있습니다. 참고로 대표님께서는 윤은조 씨가 어느 쪽을 선택하시든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하실 의사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권재하의 대리인은 정확하고 깔끔하게 제 몫을 다했다.
부끄럽고 황당해서 붉어진 얼굴을 들지 못하는 ‘을’과는 다르게.
Resident House Manager.
영어로 들으니 꽤나 그럴듯하게 들리네. 은조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쉽게 말하자면, ‘24시간 입주 도우미’.
밤낮없이 부리고 괴롭히겠다는 이야기였다.